궁중모란도 중에서 괴석이 들어간 그림을 ‘석모란도’라고 한다.‘석모란도’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고 해서 독립된 형식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궁중모란도’가 민화풍의 모란도와 구분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처럼 괴석이 없는 모란도와 구분하는 정도이다. ‘석모란도’는 모란의 뿌리 부분에 괴석이 들어가 있는 그림이다. 모란이 바위틈에서 자라는 생태적 특성을 표
모란을 다른 말로 목단(牧丹)이라고도 한다. 모란은 2m 정도의 높이를 가진 꽃나무이지만 먹을 수 있는 과실을 맺는 매화, 복숭아나무, 배나무 따위보다는 한참이나 작다. 중국이 원산지인 모란은 신라 진평왕 때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전해진다. [삼국유사]에는 진평왕 때 “당 태종(太宗)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세 빛깔의 모란을 그린 그림과 씨 석 되를 보
조선시대의 글쓰기 도구는 먹과 붓, 벼루, 종이였다. 이것을 문방사우(文房四友)라고 한다. 글쓰기에 필요한 네 가지 도구를 친근한 벗으로 표현한 것이 재미있다. 이 중에 하나라도 없으면 글쓰기는 불가능했고 서로의 유기적인 관계에 의해 좋은 글씨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먹은 묵(墨)의 우리 발음인데, 소나무 진액(송진)이나 식물성 기름을 태운 그을음을 아
문자도는 그야말로 문자와 그림이 결합한 그림이다.학문의 나라인 조선에서 문자와 책은 학문의 시각적 상징이었다. 그래서 책을 소재로 한 ‘책가도’와 ‘문자도’라는 독특한 그림이 발전할 수 있었다.문자도는 서예에서 출발했다. 서예의 조형적 아름다움은 ‘필치(筆致)와 간격’에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의 사상과 정서는 글씨에서 우러나오는 느낌에 담긴다. 글씨에서 이
원시시대 동굴벽화에는 기하학적인 문양부터 사실적인 사물의 모습까지 다양한 형상이 그려져 있는데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과 삶을 표현한 것이다. 문자가 없었던 시절에는 그림이 문자의 역할을 했다. 문자는 그야말로 내용을 전달하는 매개이다. 삶을 기록하고 표현한다는 것은 존재의 가치를 긍정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적극적인 표현이다. 언어가 생존을 위해 필요했다면 문
미술은 도구의 예술이다.그림을 그릴 수 있는 도구가 없다면 미술은 존재할 수 없다.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조형의 기본원리를 익히고 미술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물론 조형의 기본원리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미술도구라도 있어야 한다. 가끔 사람들은 ‘조형원리’와 ‘표현기법’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조형원리는 시공간을 만드는 원근투시법, 닮은꼴
보통사람들은 예술가는 시대를 앞서 간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창작태도에서 비롯되었다. 예술가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유럽의 추상미술이나 모더니즘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길게 잡아야 150여 년을 전후해서 형성된 사고방식이라는 말이다. 시대를 앞서가거나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상과 철학이 바탕이 되어야 하고 또한 군사
우리그림이 발전해 나가는 방법은 변주(變奏)이다. 변주는 일반적으로 음악 용어로 사용한다. 사전적 의미로는 ‘어떤 주제를 바탕으로 선율, 리듬, 화성 따위를 여러 가지로 변형하여 연주함. 또는 그런 연주’이다. 하지만 사전적 풀이만 가지고는 변주의 정확한 뜻을 알기 어렵다. 일단 변주를 하려면 변형할 원본이 있어야 한다. 원본이 없는 변주는 변주가 아니라
장생도는 중국이나 일본에도 비슷한 형식의 그림이 있다. 그 중에서 ‘십장생도(十長生圖)’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성 형식의 그림이다.보통은 십장생도라는 말처럼 열 가지 장생하는 요소가 들어가 있는 그림이라고 생각한다.십장생도에 들어가 있는 요소를 열거하면 이렇다. ‘하늘, 해, 구름, 바다, 산, 바위, 소나무, 복숭아나무, 대나무, 불로초, 사슴, 학,
준화(樽花)는 [원행을묘정리의궤]에 그림으로 기록되어 있다. 나라의 잔치 때 준(樽)에 꽂아 춤에 쓰던 조화(造花)의 한 가지이다. 준(樽)은 술 단지, 목이 짧고 배가 부른 술통을 뜻하는 한자이다.다른 말로 화준(花罇)은 꽃병, 화병이라고도 하는데 같은 의미로 쓰인다.병(甁)이 작은 항아리라는 의미로 사용하니까 화병(花甁)은 꽃을 꽂은 작은
우리가 흔히 부르는 민화는 일본인에 의해 규정된 말이다. ‘민속회화’의 준말이지만 내용적으로는 ‘민중회화’라는 계급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수상한 개념이다. 우리의 그림을 우리말로 부르지 않고 일본인에 의해 규정된 말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무능하고 부끄러운 일이다.무엇보다 이렇게 규정된 민화라는 개념이 정확하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우리 그림의 범주
조선시대의 미술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궁중에 필요한 도안이나 그림을 그렸던 도화서, 자비대령화원의 궁중회화이다.둘째는 전문적인 미술수업을 받고 독창적인 화풍을 만들어 직업적으로 그림을 그렸던 화가들의 미술세계이다. 셋째는 그림을 전문적으로 사고파는 지전(紙廛)이나 표구사에 소속되어 대중적인 그림을 제작했던 화공과 떠돌이 환쟁이들의 미술이
궁중회화를 디지털도구로 변주한 ‘디지털 궁중회화展’에 못다 한 이야기가 있다.전시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시기획’이다. 참여 작가들은 전시기획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야 일관성이 있는 작품을 창작할 수 있고 집중력이 있는 전시가 이루어진다.이번 전시의 기획은 궁중회화를 디지털로 복원하는 것에 있지 않다. 복원은 그야말로 ‘원래의 것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
궁중회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보면 으레 서양의 미술과 비교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우리그림의 기준은 우리에게 있기에 다른 것과 비교할 문제가 아닌데도, 서양미술과 상대적으로 비교하면서 따지면 곤혹스럽다. 궁중회화를 분석하고 연구하기 위해서 다른 나라의 미술과 비교하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서양미술을 중심에 놓고 우리그림을 비교하는 것은 사대주의적인 발상
조선시대 화가들은 궁중회화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도화서나 자비대령화원 같은 궁중화원이 되는 것은 화가로서 출세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 또한 화가 자신의 실력과 화풍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화가가 궁중화원시험에 합격했다면 가문에서는 인재가 났다며 동네잔치를 열었다. 팔도에서 그림주문이 밀려들었고 화실에는 그림을 배우고자 하는 젊은이
우리그림의 특징 중에 ‘익명성(匿名性)’이란 말이 있다. 다른 말로 미술작품에 그린 사람의 이름이나 신분, 제작연도, 제목 따위의 구체적인 정보가 없다는 뜻이다. 작품에 서명과 연도를 표기하는 것은 동양이든 서양이든 오래되고 일반적인 관습이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는 이름이 없는 그림이 그려지고 버젓이 세상에 유통되어도 크게 불편함이 없었다. 그림에 서명을
흔히 서양의 그림은 액자에 담고 우리그림은 표구를 한다. 이렇게 미술작품에 액자나 표구를 하는 이유가 있다. 첫째, 작품의 안정적인 보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액자나 표구는 작품의 틀을 안정적으로 잡아주고 뒤틀리거나 찢어지지 않도록 한다. 또한 말거나 구김을 주면 물감이 부서지거나 변형이 일어난다. 그래서 평평하게 펴서 보관해야만 훼손 없이 수명이 오래간다
본그림의 소통과 우리그림의 대중화 조선시대 말기, 우리그림은 대중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전성기를 맞는다. 양반집 안에는 모란도, 화조그림, 문자도, 책가도, 연화도와 같은 화려한 병풍그림으로 장식했고 백성들의 허술한 집에도 까치호랑이 그림 같은 세화나 알록달록한 모란그림이 벽이나 방안을 차지했다. 돈 많은 한량들이 모이는 기생집에는 궁중에서나
본그림은 교육과 창작의 바탕이다 ‘본그림’의 국어 사전적 의미는 간단하다. 모사나 복제 따위의 바탕이 되는 그림이라고 정의한다. 의미는 간단하지만 그 안에는 엄청난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복제나 모방은 창조의 핵심원리이다. 또한 복제나 모방이라는 개념 안에는 ‘완성된 원본’이라는 내용이 숨어있다. ‘완성
본그림은 탁월한 미술교육방법이다. 예술의 기본 요소인 ‘미학, 조형방법, 재생산체계’에서 본그림은 재생산체계에 해당한다. ‘재생산체계’란 쉬운 말로 민화를 확대, 재생산하는 ‘미술교육’이다. 우리그림에서 모든 미술교육은 본그림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것이 궁중화원이든, 혹은 지전에 소속된 화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