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그림의 소통과 우리그림의 대중화

조선시대 말기, 우리그림은 대중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전성기를 맞는다.
양반집 안에는 모란도, 화조그림, 문자도, 책가도, 연화도와 같은 화려한 병풍그림으로 장식했고 백성들의 허술한 집에도 까치호랑이 그림 같은 세화나 알록달록한 모란그림이 벽이나 방안을 차지했다. 돈 많은 한량들이 모이는 기생집에는 궁중에서나 볼 수 있는 ‘장생도’와 ‘요지연도’, ‘곽분양 행락도’ 따위의 값 비싼 궁중회화를 비롯해 유명한 화가들의 낙관이 찍힌 수많은 그림이 방마다 빼곡하게 채워졌다.
도화서 화원 출신이나 이름난 화가들에게 그림을 사기 위해 몇 달을 기다리는 것은 일반적이었다. 더불어 지전이나 표구사들은 전문 화공들을 고용하여 인기 있는 그림들을 대량으로 제작하여 판매하였다. 전문 화공들은 실력이나 경력, 전문성에 따라 체계적이고 세분화된 창작체계를 구축하여 밀려드는 주문에 대응했다. 하지만 정초와 같이 수요가 많은 대목에는 야근과 특근을 밥 먹듯이 해야 했다.
사람들이 모이는 장터나 행사에는 민화를 판매하는 떠돌이 환쟁이들이 어김없이 나타났다. 이미 그려놓은 꽃그림과 세화 따위를 팔거나 주문이 있을 경우 즉석에서 빠르게 그려내는 재주를 선보였다. 이들은 간단한 본그림과 싸구려 미술도구를 챙겨서 전국을 떠돌면서 그림을 팔았는데 운이 좋으면 부잣집에 몇 달씩 머물면서 집안 장식에 필요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이렇게 민화가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던 배경에는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엄격한 유교질서가 서서히 붕괴되었고 청나라의 영향으로 재력을 갖춘 상공인들이 신흥세력으로 부상했으며 조공무역과 중개무역에 따른 경제발전 따위가 바탕이 되었다.
아무튼 민화가 양반이나 일반백성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렸다는 것은 조선을 대표하는 궁중회화가 계급계층에 맞는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어 확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왕과 조정이 있는 궁궐의 그림은 그야말로 국가의 이상가치를 담고 있다. 또한 공직자인 양반들의 그림은 지식인이 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렇게 궁궐이나 양반들을 중심으로 향유되던 미술작품은 일정한 수요와 공급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궁궐에 필요한 그림은 도화서나 자비대령화원들에 의해 창작되었고 양반들에게 필요한 그림은 전문 화가들에 의해 공급되고 있었다.

그런데 180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갑자기 미술작품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수요가 늘어난 것은 재력을 가진 중인이나 상공인이 대거 부상하면서 양반들의 취향을 따라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값비싼 물건이나 미술작품을 사들여 재력을 과시하거나 정신가치를 높이고자 했다.
중인이나 서얼, 상공인들은 그야말로 일반백성과 양반들 사이에 존재했다. 하급공직자인 중인은 양반에 버금가는 지식과 전문성을 가지고 있지만 진급할 수 없었다. 서얼은 양반문화 속에서 자랐지만 벼슬을 얻지 못했고 상공인은 재력만 있는 일반백성이었다.
이들은 궁중회화와 선비그림을 자신들의 취향에 맞게 변주해 수용했다. 삶의 원초적 욕망을 거부하지 않았고 화려하면서도 다양한 미술작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또한 백성들은 신분적으로 가까운 중인이나 상공인들의 문화를 따라하고 수용하면서 민화의 대중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민화의 대중적인 발전에는 재력을 가진 중인이나 상공인들의 역할이 중요했다.
하지만 이들도 대단한 가치나 의도를 가지고 미술문화를 발전시킨 것은 아니다. 그냥 학문과 정신가치를 소중히 여겼던 조선시대의 발전과 흐름에 의해 자연스럽게 나타난 현상이다.

좌-1900년대 초 외국인의 눈에 비친 중산층 정도의 가정집의 모습인데 장생도와 모란병풍, 꽃그림 따위가 집안을 장식하고 있다.
우-20세기 초 서울 상류집안의 모습인데 기린도로 보이는 그림이 걸려있다.
위의 사진에 나오는 장생도나 모란병풍, 기린도는 모두 전문 화공에 의해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 각 방마다 장식된 그림을 생각하면 중산층 정도의 집안에 대략 5~10점 정도의 크고 작은 작품이 걸렸을 거란 추측이 가능하다. 현재 우리나라 강남의 중산층 아파트에 과연 몇 점의 그림이 걸려있을까? 고작 한 두 점이 전부일 것이다.
[사진출처-민화, 대중적인 그리고 한국적인/정병모 민화이야기/윤열수[자료사진 - 심규섭]

궁중회화에서 전문 화가들의 그림인 선비그림, 돈 있는 중인이나 상공인들의 그림, 다시 일반백성들의 그림으로 연결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본그림이다.
본그림은 완성된 원본을 빠르게 모방, 복제하여 확산하는 역할을 했다.
모방, 복제가 가능한 본그림이 있었기 때문에 궁중회화의 핵심적인 미학과 조형원리가 끊어지지 않고 떠돌이 환쟁이의 그림에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우리그림의 본그림에는 ‘공동체의 가치’가 들어가 있다.
보통 전문공예의 경우에는 핵심정보를 공개하지 않는다. 오로지 도제방식으로 몇몇의 제자들이나 가족에게만 전수할 뿐이다.
그러나 본그림은 그림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되고 열려 있었다. 본그림에는 ‘지적재산권’이 없다.
도화서의 ‘사습생도’들은 본그림으로 미술교육을 받았다. 화원이나 전문 화가의 제자들도 모두 본그림을 베껴 그리면서 수업을 받았다. 이렇게 미술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이 베껴 그린 본그림을 가지고 다시 사람들을 가르쳤다.
화조그림에 뛰어난 화가가 생소한 책거리 그림을 그려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면 동료 화가에게 책거리 본그림을 사거나 얻어서 그렸다. 이렇게 독립된 화가들은 서로 교류하면서 은밀하게 본그림을 소통했다.
지전이나 표구사에 소속된 전문 화공들도 본그림으로 그림을 배웠다. 여러 사정으로 떠돌이 환쟁이가 된 화공들은 자신이 만든 본그림을 가지고 전국을 떠돌면서 그림을 그렸다. 필요한 그림이 있다면 지전이나 표구사에서 약간의 돈을 주고 본그림을 구입해 연습을 하고 창작을 했다.
본그림을 베껴 그려 또 다른 본그림을 만들면 베낀 사람의 소유가 된다. 명작을 베껴 본그림을 만들어도 마찬가지이다. 아류라고 욕하거나 독창성이 없다고 비난하지도 않는다.
베껴 그릴 수 있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이 베낄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또한 원본그림이 아무리 수준이 높아도 결국 베낄 수 있는 능력만큼만 가져가는 것이다.
복제나 모방이 쉽다고 여기는 사람은 세상살이를 잘 모르는 철부지이다. 서구에서 만들어진 민주주의라는 좋은 정치제도를 세계 수많은 나라에서 모방하고 베낀다. 하지만 모든 나라의 민주주의 제도가 잘 운영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라는 탈을 쓴 군사독재도 있고, 부패하고 타락한 국가도 많다. 자신의 능력과 처지에 맞게 모방, 복제하여 적용하는 일은 엄청난 능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 본그림을 밑에 깔고 희미하게 보이는 그림을 따라 베껴 밑그림을 만든다. 이것은 서양화법의 간접적인 방식과 다르게 직접적이어서 심리적 부담이 적으면서도 조형성과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탁월한 방법이다. 우리그림의 교육과 창작은 모두 이렇게 본그림을 베껴 그리면서 이루어진다. [자료사진 - 심규섭]

본그림은 재생산체계이고 재생산체계는 곧 미술교육이다.
본그림이 공개되어 있다는 말은 미술교육이 공개되어 있다는 말과 같다. 이것은 서구의 미술도 마찬가지이다. 서양화법의 교육방식은 모든 사람에게 공개되어 있다. 초등학교, 중학교의 미술교과서에 실려 있고 모든 학생들이 조형방법을 배운다.
사람들이 미술에 재능이 없거나 조형원리를 몰라서 그림을 못 그리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은 관심이 없기 때문이고 조형법을 반복해서 연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그림의 본그림은 서양화에 비해 보다 직접적이라는데 있다. 서양화의 미술교육방식이 간접적이고 이론적으로 존재한다면 본그림 방식의 미술교육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그림의 형태로 되어있다.
본그림에는 조형의 핵심정보가 70% 이상 녹아있다. 또한 본그림 안에 사물이 뜻하는 상징을 몰라도, 확대원근법이란 조형원리를 이해하지 못해도 그저 베껴 그리기만 해도 그럴듯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선생의 가르침 없이 본그림을 베껴 그리기만 해도 상당한 수준의 미술교육이 이루어진다.

▲ 본그림만 있다면 간단한 채색기법으로 그럴싸한 작품을 그릴 수 있다. 한지, 캔트지, 광목천 같은 화지에 동양화 물감, 수채화 물감, 아크릴, 유화 물감으로도 채색이 가능하고 심지어는 컴퓨터 그래픽프로그램을 이용해도 된다. 우리그림의 조형적 핵심은 재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징, 확대원근법, 본그림에 있다. 미술재료와 이에 따른 기법은 세상의 발전과 흐름에 따라 언제든지 변화한다. [자료사진 - 심규섭]

본그림의 자유로운 소통과 쉽고 직접적인 모방과 복제형식이 없었다면 우리그림의 대중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말 조선이 망하기까지 근 100년에 이르는 세월동안 수 십 만점 이상의 그림들이 창작되고 유통되었다. 우리그림의 교과서 역할을 한 궁중회화, 양반들이나 지식인들이 선호했던 선비회화, 백성들의 원초적 욕망을 담고 실용성을 겸비한 민화까지 계급계층의 요구와 취향에 충실한 다양한 형식의 미술문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한 나라의 미술이 이렇게 대중화 된 적도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울 만큼 독특하다.

현재 우리는 대중문화의 시대를 살고 있다.
멀게는 수 천 년, 가깝게는 조선시대라는 600여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우리그림이 외면 받고 사라진 지 100여년 만에 다시 부활의 움직임을 시작하고 있다.
우리그림은 대중들의 시선과 마음을 끄는 여러 요소를 갖추고 있다.
고급스럽고 화려한 색채, 탄탄한 선묘, 생명의 가치를 높이는 내용과 상징, 손바닥만 한 그림에서 8m에 이르는 다양한 크기, 여러 계층의 가치나 취향에 부합하는 형식 따위는 대중화를 이루는데 탁월한 조건들이다.
현 시대에 우리그림을 대중화시키려면 조선시대 말 우리그림의 전성기를 따라 배울 필요가 있다.
그 출발은 본그림의 소통이다.
본그림은 창작의 핵심 요소를 담고 있기에 화가의 독창적인 화풍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은밀하고 고급스런 본그림을 유출하고 공개하는 일은 개인주의가 만연한 이 시대의 분위기에서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그림의 원천, 완성된 원본은 모두 공동체를 기반으로 형성되었고 모든 공동체 구성원에 열려있었다. 현재의 민화작품의 원본도 사실 본그림을 통해 공짜로 얻은 것이다.
본그림은 무료나 혹은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공개해야 한다.
본그림을 움켜쥐고 장사를 하거나 골방에 가둬버리면 우리그림의 대중화는 불가능하다.
본그림을 무료로 공개한다고 해서 작가에게 손해 볼 일은 없다.
어떤 작가는 돈과 노력을 들여 힘들게 만든 본그림을 무료에 가깝게 공개하면 왠지 억울하고 손해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이것은 모방과 복제를 통해 타인의 노력과 수고를 쉽게 빼앗는다는 생각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짧은 생각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본그림을 베끼는 것도 능력이 있어야 한다. 3개월에 걸쳐 만든 장생도의 본그림을 공개했다고 모두가 장생도를 그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화가에게 본그림을 공개하는 것은 작품의 다양한 변주에 큰 도움이 된다. 창작의 핵심정보를 교류하는 일은 서로가 함께 발전하는 디딤돌이다.
본그림의 공개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우리그림을 쉽게 만나게 해야 한다. 본그림과 간단한 기법만으로도 좋은 작품을 창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우리그림을 그리고 아류가 많을수록 본그림을 만든 작가의 가치나 명성은 높아진다.
물론 상업적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이나 단체의 홍보에 사용되는 본그림은 제값을 받는 게 맞다.

우리그림이 대중화된다면 이런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기분 좋게 상상해 본다.

어떤 청년이 여자 친구의 생일선물을 하기 위해 고민 중이다. 꽃이나 케이크, 휴대폰 장신구 따위는 식상하다. 뭔가 특별한 것을 선물하고 싶다. 갑자기 학창시절 미술시간에 우리그림을 배웠던 것이 생각났다. 본그림을 베껴서 간단한 기법의 채색만으로도 제법 괜찮은 그림을 그리지 않았던가. 남녀의 사랑을 뜻하는 내용의 그림을 휴대전화로 검색하니 화조도가 뜬다. 인터넷에서 꽃과 새가 있는 본그림을 검색하니 복잡하고 어려운 그림부터 쉽고 간단한 그림까지 다양한 본그림이 나온다. 그 중에서 만만한 본그림을 무료로 내려 받는다. 복사지 정도의 아담한 크기의 화지를 준비하고 물감과 붓은 여동생의 것을 몰래 사용하기로 했다. 출력한 본그림에다 연필먹지를 대고 화지에 베껴 밑그림을 완성한다. 베끼는 과정에서 새의 눈망울은 자기를 닮게 조금 크게 그리고 꽃은 여자 친구가 좋아하는 보라색을 많이 사용해 채색하기란 계획을 세운다. 인터넷에는 화려하게 채색된 화조그림이 넘쳐나는데 그 중에 마음에 드는 작품을 휴대폰에 내려 받아 띄워놓는다. 채색된 작품을 참고하면서 밑그림 위에 수채화 물감으로 정성들여 채색을 해 완성한다.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불타는 금요일 회식자리를 밥만 먹고 빠져나와 토요일, 일요일 늦게까지 투자를 했다. 대형할인마트에서 저렴하게 구입한 액자에 넣으니 그럴듯한 모양새가 나왔다.
이 그림을 선물 받은 여자 친구의 표정이 어떠할지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