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도는 그야말로 문자와 그림이 결합한 그림이다.
학문의 나라인 조선에서 문자와 책은 학문의 시각적 상징이었다.
그래서 책을 소재로 한 ‘책가도’와 ‘문자도’라는 독특한 그림이 발전할 수 있었다.
문자도는 서예에서 출발했다.
서예의 조형적 아름다움은 ‘필치(筆致)와 간격’에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의 사상과 정서는 글씨에서 우러나오는 느낌에 담긴다.
글씨에서 이러한 느낌을 내기 위해서는 붓질의 강약과 크기, 획 간의 간격 따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검정색과 붓질 하나로 사람의 정서를 표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아주 섬세한 차이를 구분할 수 있는 훈련이 되어야 감식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글자를 읽고 쓰는 법을 배운 선비라야 서예의 제 맛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서예를 일반 백성들이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서예는 그야말로 선비, 양반들의 독점적인 예술, 문화였다.

문자도는 학문에 대한 찬양이다.
의사소통과 기록의 수단인 문자를 미술작품으로 만들어 장식과 감상의 수준으로 끌어 올린 것은 학문을 숭배하는 사회적 정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자에는 다양한 글체가 있었다. 내용이나 쓰임새에 따라 예서, 전서, 초서, 해서, 행서와 같은 글체를 사용했다. 같은 글자라도 서체에 따라 다른 느낌을 표현한다.
초창기 문자도는 다양한 서체를 한 폭에 모아 배열하고 글자에 색상을 입히는 것부터 시작했다. 다양한 서체에 색상을 입힌 문자도는 그림이라기보다는 글체의 장식에 가까웠다.
서예와 문자도는 전혀 다르다.
같은 문자를 소재로 사용하고 있지만 조형적 원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서예가 ‘필치와 간격’이라는 조형성을 가지고 있는 반면 문자도는 ‘색, 구도, 왜곡, 축소, 변형, 상징, 합성’ 따위의 복잡한 미술 조형법을 사용한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서예는 글자를 쓴 것이고 문자도는 문자를 그린 것이다.
서예의 창작자는 선비이고 문자도의 창작자는 화가이다.
서예를 하는 선비가 미술에 대한 조예가 있다면 더 나은 서예작품을 창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서예와 학문적 깊이를 가진 화가가 문자도를 창작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하지만 이건 필요조건이고 충분조건은 아니다.
글의 깊은 내용이나 사상을 모르는 화가도 얼마든지 문자도를 창작할 수 있다. 화가는 문자를 그림의 소재로 다룰 뿐이지 학문을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자도의 발전은 글자 중심에서 그림 중심으로 이동해 가는 과정과 동일하다.
처음에는 문자가 담고 있는 내용에 충실하지만 점차 표현 형식에 치중하게 되고 여러 조형적 상징과 결합하면서 풍부해진다.
다양한 서체에 색상을 입히고 배열하는 수준이 초창기 문자도였다면 이후 기존의 글체에서 벗어난 기형적으로 변형된 글체가 등장하고, 변형된 글체의 일부가 그림의 형상으로 바뀐다.
글자가 그림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글자의 숫자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
그래서 문자도의 단골 소재가 된 글자는 몇 가지로 한정된다.
가장 많이 사용된 문자는 수(壽), 복(福),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염치(廉恥), 충(忠)과 효(孝), 따위이다.
문자도에 사용되는 글자는 모두 조선시대의 사상과 학문, 혹은 사회적 요구를 대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수복(壽福)은 글자 뜻 그대로 많고 풍부한 것이 좋으니까 ‘백수백복도’처럼 같은 형상을 반복해서 많이 그리는 형태로 발전한다.
수복(壽福)은 ‘사람은 사회적 활동을 통해 공동체의 가치를 높이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뜻을 품고 있지만 백성들에게는 ‘부귀영화와 장수’라는 원초적 욕망에 부합하는 수준으로 수용된다. 그래서 각종 장신구나 패물, 노리개, 가구, 생활용품 따위에 다양하게 결합되었다.
책을 읽을 줄 모르는 무식한 백성이라도 수복(壽福)이라는 글자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수복(壽福)을 문자가 아니라 그림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염치(廉恥)를 담은 문자도는 교훈적인 성격이 강하고 충(忠)과 효(孝)는 국가나 지도층이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덕목이다. 그래서 병풍으로 만들어져 선비나 양반들의 사랑방을 장식했을 것이다. 특히 조선 말기에 문자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던 가짜 양반들 사이에 큰 인기를 얻었을 것이다.

▲ 백수백복도/박현주/4폭/디지털회화/2013.
수복(壽福)이라는 문자는 대중들에게 ‘부귀영화와 장수’로 수용된다. 문자 자체의 형태에 따라 다양하게 모양이 바뀌고 내용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림의 형상과 결합한다. 그 결과 문자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형상들이 만들어진다. 수복(壽福)이라는 문자가 방대한 내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다양한 표현이 가능했다. 세상사의 거의 모든 내용을 담은 다양한 상징이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 [자료사진 - 심규섭]

수복(壽福)이 사람들에게 직관적으로 수용되는 글자라면 충과 효, 인의예지신은 학문적으로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을 함축하고 있기에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그림에 글을 써서 설명을 하는 것은 글자가 그림에 종속되는 현상이 발생하므로 선비들의 정서적 저항에 부딪힌다. 또한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글로 설명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문자와 이야기를 담은 사실적인 형상이 결합하게 되는데 주로 중국의 고사의 내용을 압축해 그림으로 그렸다.
효(孝)라는 문자도에 나오는 각종 형상에는 효행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결합되어 있다.
잉어는 중국 진나라 사람이 못되게 구는 계모를 위해 한겨울에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 바쳤다는 내용을 담고 있고, 대나무와 죽순은 병든 노모를 위해 한 겨울에 죽순을 구해 목숨을 구했다는 일화를 담고 있으며 거문고는 순임금이 거문고를 연주해 부모를 즐겁게 해 드렸다는 설화를 담고 있다.
효(孝)라는 글자뿐만 아니라 신(信), 충(忠), 예(禮) 따위의 문자도에는 글의 내용에 관한 여러 내용들이 그림의 형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훈장, 어른, 선비들은 교훈을 담은 병풍그림을 앞에 놓고 학생, 자녀, 백성들에게 그림 속에 담긴 뜻을 이야기로 풀어냈을 것이다.
이렇게 교훈적인 내용을 담은 문자도를 사람들은 ‘윤리문자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 수복, 충효, 인의예지신 따위의 개념은 조선시대의 핵심 가치이다. 이런 교양적 내용을 담은 문자도는 점차 문자의 틀을 벗어나 독립된 형식으로 발전한다. 문자의 내용은 박제화되고 그 자리는 삶의 다양한 욕망을 담은 상징으로 채워졌다. 책의 내용과 관계없이 책만 있으면 ‘책거리 그림’이 되는 것과 동일한 방식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문자도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선비, 양반부터 일반 백성들까지 모두 좋아했던 그림이다.
문자와 그림의 결합은 상승효과를 낸다. 선비들은 어려운 학문적 내용을 그림을 통해 백성들에게 교육할 수 있었고, 글을 모르는 백성들은 그림을 통해 학문이라는 고급 가치에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교훈적인 이야기를 담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형상이 필요하다. 물고기, 대나무, 새와 꽃 따위는 모두 그림으로 그렸다. 그래서 문자는 검정으로 쓰고 그 위에 알록달록한 색상의 각종 형상들이 그림으로 그려졌는데 장식성이 강해질수록 글자의 모양보다는 그림에 치중하는 경향이 생겼다. 결국 문자는 그림에 덮어 알아볼 수 없는 지경까지 발전한다. 문자를 읽고 그림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 글자를 유추하게 되는 것이다.
수복도에서 수복이란 문자의 내용을 설명하다보니 형상이 강해지고 글자는 사라졌다.
‘백수백복도’라는 제목이 없다면 그림을 보고 수복(壽福)이라는 글자를 유추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이다.
교훈적인 내용의 강조가 오히려 문자에서 그림 중심으로 옮겨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결국 문자도는 문자를 소재와 주제로 그린 그림이지만 문자에 종속되지 않고 그림으로 독립해 완결성을 가진 형식이 되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개성적인 그림이 탄생한 것이다.

그림의 일종으로 자리 잡은 문자도는 다양한 변주를 일으킨다.
문자만 그려도, 문자의 형태만 있어도, 심지어는 검정색으로 알 수 없는 문자를 넣어도 모두 문자도가 되는 것이다.
문자가 중심인 책에 들어가는 그림을 삽화라고 한다. 삽화는 글의 내용을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문자에 그림이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자에서 독립한 문자도는 다른 그림과 동등하게 결합한다. 화조도나 초충도, 연화도, 책거리 따위와 결합하고 심지어는 수묵산수화와도 결합한다.
문자의 고유한 뜻이나 교훈적 내용과 관계없는 호랑이, 봉황, 각종 새와 꽃, 문양 따위가 뒤덮은 그림이 창작되고 극단적인 추상의 형태까지 나타난다.

문자와 학문으로 융성했던 조선이 망해가고 있었다. 그 암울한 시대에 문자는 화려한 색상의 옷을 입고 거리를 어슬렁거렸다. 그 모습은 마치 짙은 화장으로 치장한 영혼이 없는 인형과 같았다.
문자 속에 담긴 사상과 가치는 수명을 다했다. 청렴한 선비는 사라졌고 탐욕에 찌든 양반들만 활개쳤다.
백성들은 문자를 녹여 그림 속에 담았다.
문자도에 표현된 세상에는 백성들의 새로운 꿈과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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