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그림의 특징 중에 ‘익명성(匿名性)’이란 말이 있다.
다른 말로 미술작품에 그린 사람의 이름이나 신분, 제작연도, 제목 따위의 구체적인 정보가 없다는 뜻이다. 작품에 서명과 연도를 표기하는 것은 동양이든 서양이든 오래되고 일반적인 관습이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는 이름이 없는 그림이 그려지고 버젓이 세상에 유통되어도 크게 불편함이 없었다. 그림에 서명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듯이 그림에 서명을 하지 않는 것도 일반적인 관습이었던 것이다.
우리그림에는 서명이나 낙관이 없는 그림이 워낙 많다보니 후대 연구자들은 아예 특별한 성격으로 만들어 버렸다.
‘익명성’이란 말 속에는 우리그림의 정의나 구분에 따른 여러 가지 생각들이 숨어있다.

작가의 이름이 없는 대표적인 그림은 ‘궁중회화’와 전문화공이나 떠돌이 환쟁이의 ‘민화’이다.
궁중회화의 경우 국가미술기관인 도화서나 자비대령화원에 의해 조직적으로 창작된 것이라 개인의 서명을 넣을 수 없었다. 또한 전문화공의 경우에도 지전이나 표구사에 소속된 사람들이 집단으로 창작한 것이 대부분이라 서명을 넣을 수 없었다.
궁중회화나 전문 화공들의 그림들은 기획과 구상, 창작 전반에 걸쳐 협동과 분업이라는 방식을 사용했다. 궁중회화의 경우에는 작품이 너무 크고 복잡해서 한 사람의 화가가 그리기에 역부족이었고 또한 소속 화가는 국가의 월급을 받는 공무원 신분이고 개인의 요구가 아니라 국가의 필요와 쓰임새에 의하여 공식적인 창작행위를 했다.
전문 화공들은 제작의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면서도 시간이나 비용에 따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분업이라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중에는 한명이 그린 작품도 있겠지만 조직창작과 집단창작이라는 고유의 창작방식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궁중회화나 전문화공들의 그림에서 서명이 없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게 여기고 흔쾌히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도 ‘익명성’이라는 말이 거론되는 것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떠돌이 환쟁이’와 ‘화가’의 정체와 역할 때문이다.
떠돌이 환쟁이의 정체는 별거 아니다.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생계를 위해 그림을 그리고 파는 어설픈 재주를 가진 사람이다. 그림을 체계적으로 배운 사람은 아니고 그저 그림을 좀 그리는 재주꾼이다. 이런 떠돌이 환쟁이나 이들의 그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민화’라는 잘못된 용어 때문이고 또한 떠돌이 환쟁이들이 연극이나 영화와 같은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거짓 환상이 유포되었기 때문이다.
‘민화’는 ‘민중의 그림’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민중’을 그냥 ‘백성, 국민’ 정도로 해석하지 않고 ‘핍박받는 피지배계층’이라고 규정했기 때문에 ‘떠돌이 환쟁이’와 궁합이 잘 맞았다.
우리그림에서 그다지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던 ‘떠돌이 환쟁이’가 민화라는 용어 때문에 졸지에 중앙무대로 진입한 것이다.

우리그림에서 창작자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그림은 ‘화가의 그림’이다.
화가는 미술작품에 서명을 하고 낙관을 찍었다. 이름을 그림에 새겨 넣는 것은, 같은 스승 아래서 배웠더라도, 혹은 같은 주제의 그림을 그리더라도 여타의 그림과 다른 화풍과 개성, 독창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자신의 이름이 곧 작품의 수준과 값을 보증하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화가’라는 신분의 구분과 정의가 명쾌하지는 않다. 그림을 그리는 모든 사람을 ‘화가’라고 부르지도 않고 무슨 자격증 같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화가’는 그림을 직업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림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은 전문화공도 있고 떠돌이 환쟁이도 있다. 이 구분은 예나 지금이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 화가들은 화단을 이루어 고급미술정보를 교환하고 교류했다. 조선시대 화가들은 궁중회화의 주역이면서 양반미술의 중심역할을 했다. 또한 대중그림인 민화에도 커다란 영향이 준다. 궁중회화나 양반그림을 쉽고 간편하게 변주하여 전문 화공들에 의해 대량으로 제작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었다. 조선시대 미술과 미술교육의 주역이면서 화가 자신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낼 만큼 자부심도 있었다. [자료사진 - 심규섭]

조선시대의 구분방법을 사용해 보면 이렇다.
조선시대의 신분체계는 양민과 천민으로 나뉜다. 광대나 갓바치, 백정, 기생 따위의 극소수 천민이 있고 농민이나 어민, 상민, 양반은 모두 양민에 속했다. 양반은 계급이 아니라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다. 흔히 공무원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공무원들이 서로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며 밀어주고 끌어주는 관계를 형성하면서 일정한 계층을 만든 것이 양반이다.
양반사회 안에도 직급이나 가문, 경제력에 의해 차이가 많았을 것이다.
‘화가’도 마찬가지이다. 특별한 자격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문집단인 화가 세계 즉, 화단(畵壇)에서 서로 인정하는 사람이 곧 ‘화가’가 되는 것이다.
화가의 자격으로 가장 확실한 것은 도화서 화원이나 자비대령화원들처럼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또한 도화서 화원을 배출한 화가 가문 출신의 사람, 도화서 출신 화가에게 그림을 배운 제자들, 도화서 출신이 아니더라도 왕이나 권력자가 특별히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 뛰어난 실력으로 화가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난 사람 따위들이 화가로 인정받았다.
화가들이 모두 체계적이고 엄격한 미술교육을 받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것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가세계(화단)에서 인정받으려면 상당한 실력과 인맥을 가지고 있어야한다.

화가들은 자신들의 수준을 유지하는 여러 방편들이 있었다.
그림에 관련한 전문지식과 고급미술정보를 교환하고 작품의 수준을 결정하는 기준도 있었다. 어떤 화가가 어떠한 화풍으로 그림을 그리는지, 동물그림, 인물화, 화조그림 같은 어떤 종류의 그림을 잘 그리는지 꼼꼼하게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유행하는 화풍이나 외국에서 들어온 최근 미술 흐름, 왕실에서 선호하는 그림, 양반들이 좋아하는 그림, 백성들이 좋아하는 그림에 대해 공유하고 그림 주문과 판매, 유통 따위에도 암묵적인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도화서 화원이나 자비대령화원을 통해 왕실과 관계를 맺었으며, 양반들과의 관계도 돈독했다. 또한 청나라 화가들과 연계하여 새로운 화풍을 수용하고 고급 미술재료를 구입하기도 했다.

▲ 영화 ‘취화선’과 드라마 ‘바람의 화원’의 한 장면이다. 궁중회화를 변주하거나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사생과 반복적인 연습은 필수적이다. 사물을 제대로 그리기 위해서는 사물을 시대나 흐름에 맞게, 혹은 자신의 능력에 맞게 재해석해야 한다. 대부분의 화가들은 잘 그리는 전문 분야가 있다. 하지만 궁중화원이 되기 위해서는 화조, 영모, 인물, 산수, 책거리 따위의 거의 모든 부분에 일정한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또한 궁중화원은 잦은 시험을 통과해야 함으로 엄청난 양의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궁중화원을 일반화가보다 수준을 높게 매기는 데는 이유가 있다. [자료사진 - 심규섭]

화가들은 조선 미술을 대표하는 궁중회화를 잘 알고 있었다.
문화가 고급에서 저급으로 흐르듯이 최고급 미술인 궁중회화를 뿌리로 두지 않고 창작한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다.
궁중화원들에 의해 궁중회화는 화단에 전해지고 화가들은 궁중회화를 개인의 정서나 능력에 맞게 변주해 창작했다.
화가들의 작품을 주문하거나 구매하는 사람들은 주로 돈과 권력이 있는 양반들이었다. 따라서 화가들은 양반의 정서나 가치를 담은 작품도 많이 창작했다. 조선 말기에는 학문적으로 금석학이 양반들 사이에서 유행했는데, 이에 화가들은 중국 고사를 담은 그림이나 중국화풍의 그림을 발 빠르게 그려서 팔았다. 권세 있는 가문에서 어떤 화가의 그림을 구매하면 많은 사람들이 따라했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이나 이름을 높일 수 있었다. 화가는 스스로 이념이나 사상을 생산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것은 철학자나 왕실의 문제였고 화가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갔다.
이것은 일본이나 청나라의 힘에 의해 권력이 움직일 때마다 화풍이 달라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화가들은 궁중회화와 대중그림의 중간자 역할을 했다.
궁중회화는 그야말로 조선의 사상과 가치가 상징적으로 집약된 그림이다. 그래서 일반백성들에게는 어려웠고 난해했다. 크기도 너무 크고 비단이나 진채를 사용해 값이 비쌌다.
화가는 궁중회화를 대중들이 좋아하는 수준으로 변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크고 난해한 궁중회화작품의 일부를 선택하여 작게 그리고 형식을 단순화하거나 내용을 쉽게 풀어 냈다. 이런 그림은 전문 화공들에 의해 다시 변주되고 대량으로 창작되어 판매되었다. 화공들에 의해 단순하면서도 핵심만 들어있는 그림은 나전칠기, 장롱, 자수, 노리개, 가마, 도자기, 예복 따위를 장식하는 공예품과 결합하여 양반이나 백성들의 실생활에 녹아들었다.

하지만 민화에서는 화가들의 존재나 이름, 작품을 애써 외면한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민화라는 개념을 만들면서 양반그림 즉, 화가들의 그림과 대립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화(대중그림)를 대표하는 작가는 떠돌이 환쟁이고 양반그림을 대표하는 작가는 화가가 되었다.
일제는 자신들의 침략을 감추기 위해 조선이 망하게 된 원인을 양반들에게 돌렸다. 양반들의 쓸데없는 당쟁과 외척세력에 의한 섭정에 의해 정치가 문란해졌고 부정부패, 무능 때문에 백성들의 삶이 고달팠다고 선전했다. 이런 전략이 먹히면서 양반들의 정서나 가치를 그렸던 화가들도 함께 매도당했다.
화가를 민화의 적(敵)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우리그림의 뿌리였던 궁중회화를 궁궐을 장식하는 그림으로 전락시키고 궁궐 깊숙한 곳에 은폐해 버렸다.
이렇게 해서 ‘민중 속에서 태어나, 민중을 위해 사용되고, 민중작가에 의해 그려진 그림’이라는 세계에서 존재한 적도 없는 이상한 그림인 민화가 탄생된다.
민화에서 화가를 떼어내고 궁중회화를 부정하면 흔히 ‘애미 애비도 없는 호로자식’이 되어 버린다.
이후 화가들의 궁중회화나 궁중회화를 변주한 그림들은 묻히거나 사라졌다.
화가들의 이름은 수묵산수화나 백성들의 생활을 그린 풍속화에서나 찾을 수 있었다.
수묵산수화는 색채가 없는 칙칙한 그림이고 풍속화는 민화와 아주 가까운 작은 그림이다.

조선시대 화가들은 궁중회화와 대중그림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최고급인 궁중회화를 변주해 대중들이 향유할 수 있게 했으며, 반대로 대중들이 좋아하는 그림을 탁월한 실력으로 다시 창작해 궁중회화에 녹여내었다.
조선시대를 풍미했던 화가들의 이름은 미술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고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두 명 쯤은 기억을 한다.
김홍도, 신윤복, 정선, 김득신, 심사정, 장승업, 이인문, 김두량, 강세황, 최북...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