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을 다른 말로 목단(牧丹)이라고도 한다.
모란은 2m 정도의 높이를 가진 꽃나무이지만 먹을 수 있는 과실을 맺는 매화, 복숭아나무, 배나무 따위보다는 한참이나 작다.
중국이 원산지인 모란은 신라 진평왕 때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전해진다.
[삼국유사]에는 진평왕 때 “당 태종(太宗)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세 빛깔의 모란을 그린 그림과 씨 석 되를 보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신라 말엽의 최치원(崔致遠)이 각 사찰과 석대(石臺)를 돌아다니면서 모란을 심었다는 고사도 있다.
모란은 그 꽃이 크고 화려하며 호화스러운 분위기 때문에 백화왕(百花王), 화왕(花王) 또는 만화왕(萬花王)으로 불린다.

우리그림에서 가장 많이 그려지고 유행한 그림은 단연 ‘모란도’이다.
일반적으로 모란그림은 ‘부귀’의 상징으로 사용한다.
그것은 꽃이 크고 화려하며 고급스러워 보이기 때문이다.
꽃 자체에 품격이 있다기보다는 크고 화려하며 다양한 색깔을 지닌 꽃의 특성에 사람의 감성을 투영한 것이다.

모란그림은 궁중을 장식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일상생활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흔히 ‘모란병풍그림 앞에서 태어나고 모란병풍 뒤에서 죽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모란그림은 결혼이나 돌잔치 같은 좋은 날에도 사용했지만 장례식이나 위패를 모시는 사당에도 사용되었다.

중국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모란을 최고의 꽃으로 본다. 품종을 개량하여 다양한 색상과 모양의 꽃이 있다고 한다.
모란을 그린 그림도 발전해서 정교하면서 화려한 모란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화가만도 수 만 명이 넘는다. 매년 여러 지역에서 모란축제가 열리고 더불어 수천 점의 모란그림이 전시되기도 한다.

조선시대 모란그림은 궁중회화와 민화를 대표하는 그림 중에 하나다. 화려함으로만 치자면 모란그림이 으뜸이다.
모란그림은 대부분 궁중화원이나 전문 화공들에 의해 그려졌다.
도화서에 소속된 화원들은 가례와 같은 궁중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모란병풍그림을 그렸다. 서예병풍 다음으로 많이 사용된 병풍이다. 모란병풍그림을 그리는 시간이나 비용이 많이 들어 낡은 것은 보수하거나 재활용하라는 어명이 있을 정도였다.
지전이나 표구사에 소속된 전문 화공은 궁중의 모란도를 바탕(본그림)으로 하여 다양하여 변주해 대량으로 그렸다. 그림 값이 만만치 않았기에 대부분은 주문에 의해 그렸지만 수요가 많았던 조선 말기에는 대량으로 그려 청계천 그림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화가들은 모란그림을 그다지 많이 그리지 않았다. 그렸다 하더라도 수묵담채화 방식의 칙칙한 그림이 대부분이다. 또한 이런 그림을 병풍으로 만들어 장식하지도 않았다.
모란은 크고 화려한 만큼 복잡하게 생겼다. 전문적으로 미술교육을 받지 않으면 복잡하고 다양한 색채를 가진 모란을 그리기가 어렵다. 김홍도나 신윤복 같은 천재적 화가라면 탁월한 수준의 모란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전문 화가들의 모란그림 작품은 찾을 수 없다.
조선시대 화가들의 주요 수요층은 선비와 양반이었다.
선비들은 ‘엄격한 예법과 자발적 청빈’을 존재가치로 여기고 실천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부귀’라는 뜻을 가진 화려한 모란그림은 애써 멀리했다. ‘부귀와 화려함’은 선비들의 사상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선비사회에서 모란은 매화와 국화보다 격이 낮은 꽃으로 취급되었다.

▲ 왼쪽-실제 모란이다. 궁중모란도에 표현된 모란과는 사뭇 다르다. 미학적 내용과 조형적 특징에 따라 오랜 세월을 거쳐 양식화되었기 때문이다.
오른쪽-중국의 유명한 모란작가가 그린 모란작품이다. 모란이 가진 부귀라는 상징을 최대한 끌어내어 화려하면서도 세심한 필치가 돋보인다. 우리의 모란그림과는 구도나 표현 형식이 확연히 다르다. [자료사진 - 심규섭]

궁궐의 모란도가 어떠한 경로와 과정을 거쳐 양식화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삼국시대, 고려, 조선시대로 이어지는 1000여년의 역사가 압축되어 만들어 진 것은 틀림없다.
일단 완성된 모란그림은 좀처럼 변화하지 않는다. 모란그림에 괴석이나 문자가 들어가고 사실적인 묘사를 하는 것과 같이 정형화된 양식을 벗어나는 형식은 대부분 19세기 말, 20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것이다.
조선 말기에는 도화서가 폐지되어 엄격한 형식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후 화원 출신이나 궁중회화의 영향을 받는 화가들이 궁중모란도의 개인의 취향과 능력을 가미시키면서 파격이 일어난 것이다.

궁중모란도는 오랜 역사를 통해 극단적으로 정형화되고 양식화 되었다.
궁중모란도에 표현된 꽃을 보고 모란의 생태적 특성을 찾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실제 모란과 그림으로 표현된 모란과는 큰 차이가 있다.
모란나무는 거의 직선으로 세워서 그렸고 꽃은 일정한 양식이 반복된다. 꽃의 색깔도 빨강, 노랑, 자주색, 흰색을 중심으로 반복된다. 두 가지 색으로만 칠해진 이파리는 앞면, 옆면, 뒷면이 한꺼번에 표현된 형식이 반복되고 이파리의 끝에는 상상의 태점이 박혀있다.
옆으로 퍼지는 꽃나무가 일직선에 가깝게 세워진 것은 세로그림의 형식 때문일 것이다. 또한 꽃의 모양이 통통하게 표현된 것은 선묘로 입체감을 드러내는 조형적 필요 때문이다. 선묘를 사용하는 우리그림에서 입체감을 내는 방법은 모양 자체를 입체적으로 변형하거나 색상의 농담을 활용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마치 종이처럼 보이는 얇은 꽃잎을 통통한 모양으로 변형해 입체감을 주고 이렇게 변형된 모양 위에 색의 농담을 활용해 표현한 것이다.
이파리는 양식화된 하나의 모양을 반복적으로 그려 불필요한 시각적 혼란을 막아 통일감을 주었다. 꽃과 이파리의 반복은 시각적 집중력을 높이고 중독성을 가지게 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이파리 끝에 붙어있는 태점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라는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궁중모란도는 철저히 ‘생명의 만개’라는 궁중회화의 내용과 미술 자체의 조형적 형식에 맞추어진 그림이다. 

▲ 궁중모란도/이지은/디지털회화/2013.
1000여 년에 걸쳐 이런 양식이 완성되었다. 실제 모란과는 많이 차이가 있고 진채를 사용했지만 단아한 느낌을 준다. 우리그림에 모란그림은 모든 꽃의 총체로 표현되고 있다. 모란이라는 특별함에서 생명의 만개라는 보편성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우리그림에서 모란그림은 가장 화려한 그림이다.
하지만 중국에 비해 화려하거나 사실적이지 않다.
왕이나 선비들은 화려함을 추구하지 않았다.
선비들이 좋아했던 매화나 국화는 화려한 꽃이 아니다. 가끔 품종이 개량된 화려한 국화를 본 적이 있지만 대부분은 일본문화가 유입된 결과이다.
매화는 맑은 향기와 아울러 눈 속에서 꽃을 피우는 것이 특징이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제일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의 생태적 특징은 선비들의 품성과 동일시했다.
국화는 “국화는 은일이요, 모란은 부귀요, 연꽃은 군자”라 하였다. 이처럼 국화는 군자 가운데서도 지조를 지키며 은둔하는 선비의 상징이다.
선비들은 매화나 국화와 같은 꽃을 좋아하면서도 먹으로만 그림을 그렸다. 철저히 색상을 멀리한 것이다.

선비들은 모란이 중국에서 ‘부귀영화’를 상징한다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그림이 궁궐을 장식한 이유를 왕과 왕족들이 ‘자손만대 부귀를 누려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이다.
조선에서 왕은 절대 권력과 신성한 혈통을 가진 존재로 보지 않았다. 왕은 곧 선비이며 선비의 대표로 생각했다.
만약 선비의 대표인 왕이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모란그림을 장식했다면 선비나 양반들도 대부분 따라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김홍도나 신윤복 같은 화가들은 돈 많은 양반을 위해 다양하고 화려한 모란그림을 엄청나게 많이 그렸을 것이다.
하지만 화가들의 모란그림은 거의 없고 궁중모란도의 양식도 변하지 않았다.
모란이 중국에서는 ‘부귀’의 상징일지 몰라도 조선에서는 ‘생명의 만개’로 인식되었다.
모란도에 표현된 꽃과 이파리는 꽃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특성의 총체이다. 꽃의 생태적 특징은 활짝 피는 것, 즉 만개(滿開)이고 미학적 핵심은 생명의 찬양이다.

양반들을 비롯한 백성들의 실생활에서 모란병풍을 많이 사용했다고 하지만 그 생활이라는 것은 대부분 ‘관혼상제’ 따위의 행사였다. 이런 성인식, 혼례식, 장례식과 제사는 부귀영화보다는 인생의 통과의례에 가깝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성인이 되어 짝을 맺어 자녀를 낳아 기르며 삶을 마감하고 다시 자녀들에 의해 연결되는 인생사의 결정적 지점은 모두 생명이 크고 작은 꽃을 피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모란그림을 ‘부귀영화’의 상징으로 보는 것을 나무랄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림의 내면에 함축되어 있는 인문학적 가치를 아는 일도 아주 중요하다.
우리그림을 세계에 소개할 때, 그림의 내용이 ‘잘 먹고 잘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생명의 찬양, 생명의 만개’라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
조선시대 왕이 먹었던 소박한 밥상을 보고 낄낄거리던 외국인의 표정이 생각난다.
거대한 기념비 조각상이 둘러있고 금은보화로 화려하게 치장한 궁궐에서 절세미녀들과 산해진미를 배가 터지도록 먹는 왕의 모습을 상상한다면 조선의 왕은 정말 보잘것 없는 존재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학문으로 이상세계를 꿈꾸었던 조선의 왕은 선비들과 다르지 않았다. 선비들이 추구했던 ‘엄격한 예법과 자발적 청빈’을 왕의 신분이 되어서도 지켜야 했다.
왕이 먹었던 소박한 밥상을 보며, 궁궐을 장식한 단정한 궁중모란도를 보면서 ‘생명력이 넘치는 이상세계’를 구현하고자 했던 선조들의 높은 인문학적 정신세계와 공감하기를 바란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