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시대 동굴벽화에는 기하학적인 문양부터 사실적인 사물의 모습까지 다양한 형상이 그려져 있는데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과 삶을 표현한 것이다.
문자가 없었던 시절에는 그림이 문자의 역할을 했다. 문자는 그야말로 내용을 전달하는 매개이다. 삶을 기록하고 표현한다는 것은 존재의 가치를 긍정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적극적인 표현이다.
언어가 생존을 위해 필요했다면 문자의 발명은 생존을 넘어서 생활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생활의 핵심은 광범위한 의사소통이다.
같은 집단에 속한 사람들끼리의 의사소통은 문명을 만들고,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 사이의 소통은 문화를 만든다.
문자는 내용이 함축된 상징의 모양을 하고 있다.
사물의 형상을 본뜬 표의문자, 소리를 시각화시킨 표음문자든 간에 모두 내용을 담는 그릇이다.
정보를 시각적 형상으로 바꾸어 표현하는 것은 기록과 보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언어는 시간적 한계를 가진 소리이기 때문에 곧바로 소멸되어 버린다. 그렇지만 시각적 형상은 오랜 시간동안 보존될 수 있다. 또한 많은 소리를 상징기법을 사용해 압축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작은 공간에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있는 것이다.

문자와 그림은 한몸

문자는 시각으로 볼 수 있는 형상이다. 그래서 문자와 그림은 한 몸과 같다. 언어는 약속이고 오랜 세월동안 공동체의 합의를 통해 만들어진다. 이것을 다른 말로 ‘상징’이라고 한다.
문자는 소리의 상징을 형상의 상징으로 바꾼 것이다.
그림은 상징을 가진 형상의 조합이다. 각각의 상징을 결합해 복합적이고 집중적인 내용을 전달하고 소통하는 것이다.

내용이 없으면 형상도 없다.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림 속에 표현된 상징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화가가 공동체가 합의한 상징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 집단에서 수용되지 않는다.
기독교의 십자가나 이슬람교의 문양, 아프리카 원주민의 주술도구도 모두 각각의 종교 공동체에서 합의한 상징이다. 상징이 이해되지 않으면 소통이 막힌다.
대부분의 상징은 추상의 모습을 하고 있다. 추상은 여러 개념이나 사물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나 속성을 함축한 것이다.
다시 말해 구체적인 형상이 있든 없든 간에 그림을 포함한 모든 예술은 추상이다.
하지만 같은 추상이라도 서구의 추상미술은 상징과 별 관련이 없다. 내용이 함축된 상징을 배척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추상미술은 색이나 도형 따위의 조합에 따른 조형적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이런 그림에서 심오한 철학적 내용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나무 위에서 물고기를 찾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예술이 된 문자 '서예'

조선은 학문의 사회였다.
학문은 조선이라는 국가를 떠받치는 사상적 배경이었고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을 뜻하는 ‘선비’는 관료로 진출해 양반계층을 형성했다.
왕은 선비를 대표하는 사람이라 여겼고 아침마다 학문이 높은 선비에게 학문을 배웠다.
모든 권력과 재부는 학문에서 나왔다. 학문을 통해 세상에 나갈 수 있었고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 사용했던 한자는 곧 학문을 뜻했다.
문자와 학문은 떨어지지 않는다. 내용을 함축할 수 있는 문자가 있어야 학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조선은 학문의 사회이자 문자를 숭배하는 나라였다.
선비는 글을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앞 시대의 지혜와 경험을 수용한다는 말이고,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선비들은 문자를 예술의 경지까지 끌어올렸다.
예술이 된 문자를 ‘서예’라고 한다. 문자를 예술적 가치, 정신적 가치로 만든 것은 자신의 존재를 높이기 위함이다.
선대의 좋은 글귀를 선택해 유려한 필치로 글자를 썼다. 공문서를 작성하거나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는 용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철학적 사유와 행위의 상징으로 글자를 그린 것이다.
이것을 자신의 공부방에 붙여두고 되새김질하고 동료들과 공유했다.
그림으로 그려진 글자는 족자나 병풍으로 만들어 방안을 장식하는데 8~10폭의 병풍으로 만든 것을 서병(書屛)이라고 한다.
서병은 가장 보편화된 장식병풍이다. 글께나 읽는 선비의 집안에는 으레 서병이 하나 둘 쯤은 있었다. 또한 궁궐을 장식하고 행사를 하는데 필수 품목이었다. 왕이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리는 하사품에도 서병이 있었고 외국사신을 접대하는데도 서병이 필요했다.

백수백복도(白壽百福圖)/10첩 병풍 부분(제7~10첩)/비단에 채색/각 123.3*37.2/서울역사박물관 소장---문자도에는 글자와 그림의 배합이나 결합에 따른 다양한 작품이 존재한다. 민화풍의 문자도는 그림이 많이 들어가고 이야기가 첨가된다. 서체의 변형을 중심으로 만든 위 작품은 선비들이나 양반들이 선호했을 것이다. 한자는 상형문자이기 때문에 수복(壽福)이란 글자를 내용에 맞게 다양하게 변형했다. 글자 모양에는 사람의 모습이나 대나무, 산, 새의 형상이나 부적에 사용하는 문양도 보인다. 수복(壽福)은 ‘생명’을 뜻하고 백수백복은 생명의 완성, 이상세계의 구현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수복(壽福)을 ‘부귀영화와 장수’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다만 ‘생명과 이상세계 구현’의 하위개념으로 규정하거나 혹은 대중의 이해를 돕기 위한 방편이어야 한다. [자료사진-심규섭]

백수백복도(白壽百福圖)
백수백복도는 서병의 일종이다.
수(壽)는 장수의 의미이고, 복(福)은 부귀를 담은 뜻인데 이 두 글자를 여러 가지 서체와 색상을 반복적으로 사용해서 만든 글자그림, 즉 문자도(文字圖)이다. 이 그림은 장식용에 맞게 제작되었지만 글자마다 색과 모양이 다르기에 다양한 서체를 감상할 수 있는 재미가 있다. 백(百)은 100이라는 숫자를 뜻한다기보다 완성되고 충만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수와 복의 글자 수가 100보다 많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예는 초기에는 방대한 사상을 담은 내용을 중요시 여기지만 차츰 곁가지를 치고 핵심 내용을 함축한 시(詩)의 형태로 단순화된다. 이렇게 압축된 시는 다시 시각적 형상에 치중하면서 더욱 상징화되고 색과 구도라는 조형성과 결합하면서 그림과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백수백복도와 같은 문자도는 글자를 소재로 한 그림이다. 물론 그림의 내용은 글자에 녹아있다.
흔히 백수백복도는 제목처럼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장수하라는 뜻으로 풀이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문자와 학문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겼던 조선시대에 비싼 10폭짜리 병풍으로 제작한 작품에 고작 부귀영화와 장수의 뜻만 있을 거라고 여기는 것은 우리그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다.
수나 복자를 다양한 필체와 형상으로 표현한 것은 그만큼 복잡하고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말이다.
수와 복에는 조선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이 통째로 표현되어 있다.
수(壽)은 목숨을 뜻한다. 다른 말로 세상에서 활동하는 시간이니까 인생, 즉 사회적 존재를 뜻한다.
복(福)은 사회적 활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신적, 물질적 재부, 즉 사회적 가치를 말한다.
그러니까 수복(壽福)은 ‘사람은 사회적 활동을 통해 공동체의 가치를 높이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뜻이다.
수복(壽福)에 백(百)자가 붙은 것은 충만하고 완성된 이상적인 삶, 이상적인 세계의 구현을 의미한다.
궁중회화를 비롯한 우리그림의 철학적 내용인 ‘생명력이 풍부한 이상세계’와 다르지 않다.
이런 내용을 글자로 표현했으니 결국 수복(壽福)을 학문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말인데 내용과 형상을 통해 중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수복(壽福)의 내용은 ‘생명’이고 생명의 가치는 학문을 통해 구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조선시대 주자성리학은 국가운영의 사상적 바탕임과 동시에 ‘엄격한 예법과 청빈’이라는 행동지침을 가지고 있다.
‘엄격한 예법’은 사람을 존중하는 방법이자 관계에 필요한 규칙이고 ‘청빈’은 자발적 절제를 뜻하는데 개개인이 지켜야할 덕목이다.

문자나 그림은 높은 상징체계이다.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건강하게 오래 살고자 하는 욕망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보통 이런 원초적인 욕망은 복잡하고 어려운 상징체계를 사용해서 표현하지는 않는다. 이런 상징체계가 만들어지려면 공동체의 검증된 합의가 필요하다.
다른 나라를 침탈하지 않고, 재부를 키울 수 있는 상업이 발전하지 않은 좁고 척박한 나라에서 사회공동체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엄격한 사회적 규칙과 이것을 구현할 수 있는 개개인의 높은 정신세계가 필요하다.
수복(壽福)은 이런 선비들의 철학을 그림으로 구현한 작품이다.
그림 속에 나오는 수많은 모양의 수(壽)와 복(福)은 저마다의 능력과 삶으로 이상세계를 구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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