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미술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궁중에 필요한 도안이나 그림을 그렸던 도화서, 자비대령화원의 궁중회화이다.
둘째는 전문적인 미술수업을 받고 독창적인 화풍을 만들어 직업적으로 그림을 그렸던 화가들의 미술세계이다.
셋째는 그림을 전문적으로 사고파는 지전(紙廛)이나 표구사에 소속되어 대중적인 그림을 제작했던 화공과 떠돌이 환쟁이들의 미술이다. 흔히 ‘민화’라고 부른다.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모두 같은 미술처럼 보이고 단지 화가의 명성, 작품의 수준이나 가격의 차이만으로 구분하겠으나 미술계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생각보다 그 차이가 엄격하다.

궁중회화는 곧 국가 주도의 미술을 말한다.
도화서는 조선초기부터 존재했고 예조 소속으로 궁궐 밖에 있었다. 자비대령화원 제도는 영조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왕의 비서실 격인 규장각 소속으로 정조 때 전성기를 맞았다.

궁중회화라고 해서 그야말로 궁궐 속에서만 창작되고 유통된 폐쇄적인 미술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다. 조선은 왕과 선비들이 통치하는 중앙군현제 사회였다. 왕과 흔히 관료들인 선비는 권력을 사이에 놓고 팽팽한 견제를 했고 궁궐의 안과 밖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조선 팔도에서 나는 진귀한 음식이나 물건들이 궁궐에 진상되었듯이 조선의 모든 미술은 궁궐로 통합되었다. 화단에서 최고의 화가를 선출해 국가미술기관에 배치했다. 또한 이름난 화가들의 그림을 사들여 궁궐을 장식하거나 보관했다.
외국과의 사신왕래를 통해 유입되는 최신 미술작품이나 경향은 모두 궁중에 모였다.

궁중회화의 미학은 ‘생명력이 충만한 이상세계’이다. 여기에는 어떤 종교적 내용이나 정파를 구분하는 이데올로기가 없다. 노론과 소론, 동인과 서인도 없고 왕과 선비, 양반과 백성, 남자와 여자를 가르지도 않는다.
궁중회화는 왕과 양반과 백성 모두를 아우르는 그야말로 조선시대 미술의 총합이자 대표였다.

▲ 십장생도/안보영/디지털회화/2013.
 궁중회화는 ‘생명력이 충만한 이상세계’라는 미학을 담고 있다. 확대원근법을 사용하여 생명공간과 시간을 무한히 확장했다. 또한 해와 바다와 구름과 같은 여러 자연물과 생명력이 크고 길고 높은 여러 동물을 결합하여 생명력이 충만한 이상세계를 화려한 색상과 거대한 화면으로 표현하고 있다. [자료사진 - 심규섭]

궁중화원의 경우는 대부분 어려운 시험을 거쳐야 한다.
궁중화원 모두가 훌륭한 화가는 아니었다. 그 중에는 지도나 삽화, 기록화, 도안 따위의 회화와 별로 관련 없는 일을 하다가 퇴직한 사람도 있었고, 뛰어난 화면구성과 채색능력을 바탕으로 장생도, 책가도, 모란도 따위를 도맡아 그렸던 화원도 있었다. 또한 독창적이고 뛰어난 화풍으로 화단의 명성을 얻은 화원 중에는 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장생도나 일월오봉도를 꼼꼼히 살펴보면 도상이나 채색 따위에서 수준의 차이가 보인다.
이것은 궁중화원이라도 모두 똑같은 실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윗대에 그려진 그림을 그대로 답습하는 화원이 있는가하면 새로운 화풍을 도입하고 최첨단 미술재료를 이용하여 작품의 수준을 최대한 높인 화원도 있었다.
이것을 축구에 빗댄다면 국가대표 선수는 모두 당대 최고의 선수와 감독이긴 하지만 그 중에서도 뛰어난 골잡이 한 명에 의해서, 혹은 유능한 감독 한 명에 의해서 전체의 수준이 높아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김홍도나 신윤복 같은 천재적인 화가가 도화서에서 몇 명의 화원과 사습생도를 이끌고 장생도를 그릴 때는 보통과는 확연히 다른 작품이 창작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 수 백 명이 넘는 궁중화원 중에서 명성을 얻은 화원들은 10여 명 남짓이었다.

화단(畵壇)은 전문화가들의 보이지 않는 조직이고 울타리이다.
이들은 인맥을 형성하여 서로 교류하면서 그림에 관련한 모든 정보를 교환, 공유했다.
아무나 화단에 진입할 수도 없었고 들락날락 할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실력이 있거나 궁중화원과 인맥이 있다고 해서 모두 화단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화단에 속한 사람이라도 화단의 규율을 어기면 따돌림을 당해 결국은 퇴출된다. 화단의 평판과 규율이라는 장벽은 보이지 않지만 생각보다 높고 단단하다.

화가라는 특별한 자격증은 없었지만 국가에서 검증한 궁중화원을 중심으로 대외적인 권위를 얻었다. 물론 궁중화원은 모두 화단에서 배출되었다.
궁중화원이 된 화가는 국가미술기관이나 궁궐에 보관된 미술작품을 감상하고 연구하는 특혜를 누렸다. 도화서에 축적된 창작기법을 익히고 사신 행렬에 동행해 세계적인 미술 흐름을 체득하였다. 특히 일반 화실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값비싼 미술재료를 사용해 2~6m에 이르는 대작을 창작하는 따위의 다양한 경험을 축적했다. 이러한 경험은 곧바로 화단에 전해져 화가들과 공유했다.
화원과 화가가 한 몸이듯이 궁중회화와 화단은 떨어지지 않았다.

화단에 소속된 화가 중에는 김홍도나 강세황, 김득신, 신윤복 따위의 이름 난 화가도 있었고, 그럭저럭 살다간 화가도 있었다.
그림에는 산수화, 동물그림, 인물화, 꽃과 새그림, 불화(佛畵)와 같이 여러 종류가 있다.
가끔 모든 분야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천재화가도 있으나 대부분은 전문분야가 있었다.
사찰에 필요한 후불탱화나 단청을 그려 승려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고 재물을 모았지만 선비들의 기록에는 빠진 화가도 있었다. 또한 필력이나 유려한 채색이 필요한 회화보다는 복잡한 도상을 단순한 도안으로 바꾸는 재주(디자인 능력)를 가진 화가도 있었는데 이들은 지전이나 표구사와 교류하면서 화공들이 대량으로 제작할 수 있는 바탕그림을 만들어 주었다.
국가에 납품하는 도자기에 들어가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도 있고, 값비싼 장신구나 노리개 혹은 자개장농이나 자수에 들어가는 도안을 그려주고 그림 값을 받기도 했다.
후대에 이름과 뛰어난 작품을 남기지 못했지만 천재화가들과 시대를 함께 호흡하면서 살다간 화가들이 있었기에 화단이 유지, 발전될 수 있었다.

▲ 겸재 정선의 금강산도와 민화의 대표작인 까치호랑이 그림-겸재 정선의 금강산 그림은 수묵기법과 담채기법을 결합시키고 선비들이 추구하는 이상세계를 치밀하면서도 담백하게 표현했다. 세화인 까치호랑이그림은 친근하고 재미있다. 시선을 사로잡는 간결한 도안과 화려한 채색, 그리고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벽사, 구복의 내용을 담고 있다. 역할이나 유통방식에 따라 구분되어 있지만 궁중회화, 화가의 수묵화, 민화는 모두 우리민족의 소중한 유산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민화는 그야말로 대중그림이다.
민화의 출발은 세화인데 일종의 연하장 역할을 하면서도 벽사의 내용이 들어가 있다. 정초에 잠깐 사용하다 시기가 지나면 버리는 소모성 그림이다.
이러한 세화가 조선 말기에 접어들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전성기를 맞이한다.
물론 엄격한 선비들의 유교사회가 무너지고 실용주의 철학이 유입되면서 상업으로 재물을 모은 신흥세력이 부상하고 서구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정치, 경제적 격동이 바탕이 되었다.
돈이 있는 사람은 양반의 족보를 사들여 신분을 높이고 화려한 미술작품으로 집안을 장식해 권위를 높이고자 했다.
정치적 혼란 속에서 국가가 자신들의 삶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백성들은 저마다의 세상을 찾기 위해 발버둥 쳤다. 공동체가 무너지면서 민란이 일어났고 보신주의와 가족주의가 판을 쳤다.

수묵이나 담채그림은 청렴한 선비문화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선비문화가 중심을 잃으면서 화려한 진채그림을 거부하지 않게 된다. 양반과 상업으로 돈을 번 부자들을 중심으로 채색화는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또한 자비대령화원이나 도화서가 해체되고 졸지에 일자리를 화원, 화가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구매력이 높은 채색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필력과 여백이 있는 어려운 그림보다는 화려한 진채와 생명의 욕망이 꿈틀거리는 그림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액막이와 부적의 역할을 했던 세화는 화려한 색상의 옷을 입고 백성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충만한 생명력과 이상세계의 미학을 담고 있는 궁중회화는 세상의 불안함을 달래고 미래의 행복을 추구하는 장수와 다산, 출세, 부귀영화, 벽사 따위의 내용과 충돌하지 않았다.
그림은 꿈이었고 허기진 정신세계를 채워주는 양분이었다.

궁중회화는 백성들의 입맛에 맞게 변주되어 화공들의 손을 거쳐 대량으로 보급되었다. 여기에 일본과 중국에서 저렴한 종이와 형형색색의 물감이 수입되어 채색화의 제작 단가가 낮아진 것도 한몫을 했다.
민화는 조선이 망해가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핀 꽃이었다.
궁중회화와 화가들은 마지막 힘을 짜내 백성들의 욕망에 부응하고 스러져갔다.

궁중회화와 화단의 화가, 그리고 민화는 다른 그림이 아니다.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고 충돌하지도 않았다. 다만 시대상황에 따라 저마다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다.
현재라는 대중의 시대에 민화가 각광받는 것도 당연하다. 또한 화가들이 고매한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작품을 창작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우리민족은 험난했던 역사, 질곡의 시대를 거치면서 다시 세계의 중심에 서 있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라는 열강은 핵무기를 놓고 북한과 충돌하고 있으며 태평양이라는 해양문화와 중국과 러시아라는 대륙문명이 대립하고 있다. 한반도는 3차 세계대전의 중심이 될 수도 있고 민족통일과 세계비핵화라는 평화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우리 고대사에서는 ‘음악이 바뀌면 세상이 달라진다’고 했다. 정조는 문체를 바꿔 세상을 바꾸고자 했다. 예술은 문화이자 곧 정신세계의 표현이다. 물질이 바뀌면 정신도 바뀌고, 반대로 정신이 바뀌어도 물질은 반응한다.
이런 시기, ‘생명력이 충만한 이상세계’를 표현한 궁중회화의 등장은 의미심장하다.
‘생명력이 충만한 이상세계’는 인종과 민족과 종교와 사상을 모두 포함하는 보편적 개념이고 자연과 인간과 신 모두가 추구하는 세상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생명의 존엄성을 얻고 전쟁이나 약탈, 자연수탈이 없는 이상세계로 나아가는 거대한 흐름에 우리의 그림이 한몫을 하기를 바란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