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화가들은 궁중회화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도화서나 자비대령화원 같은 궁중화원이 되는 것은 화가로서 출세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 또한 화가 자신의 실력과 화풍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화가가 궁중화원시험에 합격했다면 가문에서는 인재가 났다며 동네잔치를 열었다. 팔도에서 그림주문이 밀려들었고 화실에는 그림을 배우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줄을 섰다.
관복을 입고 도화서나 궁궐에 들어가는 궁중화원의 기세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궁중에는 화원들의 그림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이름난 화가들의 작품이나 청나라, 일본화, 심지어는 네덜란드 동판화 따위를 여러 경로로 구입해 보관했다. 물론 궁중화원들은 이런 다양한 미술작품 감상하고 분석하며 연구할 수 있는 특혜를 누렸다.
궁중화원들은 조선 전체의 그림을 대표하면서 동시에 외국의 미술을 수용하는 주체였다.

▲ 오일영, 이용우/봉황도/비단에 채색/197*579/1920년.
30대 초반의 오일영과 10대 후반의 이용우가 합작해 그렸다. 이들은 천재적인 화가이지만 태어나기도 전에 도화서는 폐지되었다. 이 봉황도의 기본구도는 해학반도도에서 차용했다. 비단과 진채를 사용한 전형적인 궁중채색화이지만 여백이나 선묘, 원근 따위의 화가 개인의 독창적인 화풍이 결합되어 있다. 이 그림을 통해 화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궁중회화를 변주했는지를 대략적으로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자료사진 - 심규섭]

궁중회화는 대부분 채색화이다.
밝고 화사한 진채물감과 비단이나 한지를 여러 겹 붙인 고급스런 배접지를 사용했다. 화가들은 화원시험을 준비할 때부터 진채물감이나 비단을 다루는 기술을 익혔다. 화원이 된 후에는 궁궐에 축적되어 있는 본그림이나 사생과 채색에 따른 고급기법이나 재료사용법 따위를 익혀 한 단계 높은 실력을 쌓았고 그 경험과 지식은 다시 화단의 자양분이 되었다. 또한 이러한 궁중회화의 창작방식은 화가 개인의 창작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하지만 궁중회화는 너무 크고 창작시간이 오래 걸리며 제작비가 비쌌기 때문에 그대로 가져올 수는 없었다. 화가의 현실적인 조건에 맞게 작은 크기로 줄이거나 일부분을 차용하거나 핵심요소만 모아서 재구성하는 따위의 여러 가지 변주방식을 사용했다.
이렇게 창작된 작품은 고관대작이나 지방의 부호, 돈 많은 가문의 집안을 장식하는데 팔려나갔다.

궁중회화는 조선의 이상적 가치를 담고 있다.
국가 차원의 방대한 내용을 좁은 화폭에 넣으려면 상징기법을 사용해 집약시켜야 한다. 그래서 궁중회화는 실제의 모습과 다른 상상의 세계를 표현한다. 상징화된 형상은 마치 단단한 차돌과 같다. 단순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좀처럼 변형되거나 깨지지 않는다.
엄격하게 정형화되고 체계화된 궁중회화는 대부분 조직적으로 창작되었다. 거기에 개인의 화풍이나 자유로운 표현은 용납되지 않았다.
궁중회화를 화가의 정서나 화풍에 맞게 변주하기 위해서는 풀어내는 방법밖에는 없다.
상징화된 형상을 해석하고 풀어내는 과정에서 독창성이 나오고 작가의 고유한 화풍이 만들어진다.
목적이나 쓰임새 따라 풀어서 변주하는 형식이 달라진다.
내용이냐, 조형형식이냐, 아니면 상업적 용도냐에 따라 전혀 다른 그림으로 변주된다.
조형형식은 화가들이 좋아하고, 내용은 양반들이 좋아하며, 상업적 용도는 화상, 화공들이 반길 것이다.
수준이나 처지에 따라 지전이나 표구사에 공급하는 그림을 주로 그리는 화가도 있고, 양반들의 허영심을 채워주는 화려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도 있었다. 또한 소박하고 깔끔한 수묵담채화를 그리는 화가는 청렴한 선비들에게 인기를 얻었을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형식의 그림으로 변주하려면 궁중회화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변주는 손재주가 있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백성들이 좋아했던 그림이나 실용그림은 모두 궁중회화나 중국에서 수입된 그림이 변주된 것이다. 이 변주된 그림을 지전의 화공들이 대량복제 방식으로 창작해 대중화시켰다.
떠돌이 환쟁이들은 그저 대량 복제된 화공들의 그림을 어설프게 흉내 내는 사람일 뿐이다.
궁중회화를 다양하게 변주한 화가들이 없었다면 조선말기 대중미술의 전성기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 좌-서조도/비단에 채색/94*140/국립진주박물관, 우-작자미상/松林鶴鹿 /국립박물관소장.
작품을 보면 장생도를 기반으로 작게 변주한 그림이다. 이 정도의 화면구성과 표현기량이라면 궁중화원이거나 체계적으로 미술공부를 한 화가일 가능성이 높다. 좌측 그림은 장생도의 학과 봉황, 해를 넣은 후 모란, 제비, 원앙과 같은 여러 종류의 새와 꽃을 추가했다. 우측의 작품은 진채화인 장생도를 수묵담채화 방식으로 단백하게 변주했다. 이 그림에서 사슴이 빠지고 해를 넣으면 송학도가 된다. [자료사진 - 심규섭]

조선이 일제에 의해 망해가는 과정에서 자비대령화원이 먼저 폐지되었고 왕의 어진을 그려야 한다며 버티던 도화서도 1884년 갑오경장 때 폐지되었다. 이로써 50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던 궁중회화의 맥이 끊어졌다. 궁중화원들은 실업자가 되었고 도화서에 축적되어 있던 수많은 본그림과 작품은 헐값에 팔려나가거나 힘센 사람들에 의해 강탈당했다. 궁중회화는 사라졌지만 화가들은 여전히 살아남았다. 이들에 의해 궁중회화의 전통은 희미하게 이어졌다. 1920년 창덕궁 재건벽화사업에 참여한 오일영, 김은호, 이상범, 노수현은 궁중화원이 아니었지만 화가들이 사이에 남아있던 궁중회화의 전통과 개인화풍을 결합하여 ‘백학도, 봉황도, 조일선관도, 삼선관파도’ 따위의 명작을 창작한다.

하지만 조선왕실이 망한 현실에서 화가들이 조선을 대표하는 궁중회화를 고집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본을 통해 서양화와 일본화가 밀려 들여왔고 화가들은 살아남기 위해 변신을 해야 했다. 일제는 교묘한 방법으로 궁중회화의 흔적을 없애고 전통을 말살했다. 전통 채색화는 배격 당했고 대신에 일본풍의 채색화와 중국의 영향을 받은 수묵산수화, 수묵담채화, 선비의 정신을 수련하는 문인화, 손바닥만 한 풍속화가 중심이 되었다.
일제 총독부는 조선미술전람회라는 국가공모전을 만들어 화가들을 관리했다. 조선시대에는 궁중화원이 되는 일이 출세하는 지름길이었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상하는 것이 출세하고 자신의 이름과 작품을 알리는 유일한 길이었다.
일본인 화가와 일본에 협력하는 조선화가들이 심사위원이 되어 화가의 목줄을 움켜쥐었다.
화가들은 살기 위해 눈치를 보면서 흐름을 따랐고 민족의 처지를 자각한 화가들은 붓을 꺾는 대신 총을 들어야했다.

해방이 되었지만 일제 잔재는 청산되지 못했다.
궁중회화를 본 적이 없는 화가들은 스승의 화풍을 따라 여전히 칙칙하고 색깔이 없는 수묵산수화와 문인화에 매달렸다. 여기에 서양화 작가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기면서 전통회화는 더욱 쪼그라들었다. 우리의 전통그림에 이름도 제대로 붙이지 못해 일본이 만들어 놓은 ‘동양화’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일본에는 ‘일본화’가 있고, 중국에는 ‘중국화’, 북한에는 ‘조선화’라는 명칭이 있지만 정작 우리는 동양 전체를 대표하는 그림도 아닌데 ‘동양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만큼 일제의 영향력은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동양화’는 1990년대가 되어서야 ‘한국화’라는 이름으로 바뀐다.
그리고 ‘한국화’의 핵심은 ‘수묵담채화’가 되었다.

1990년대부터 채색화인 민화가 주목을 받으면서 한국화는 더욱 수묵담채화에 매달린다. 한국화 작가들은 정체된 창작의 돌파구를 서양미술에 찾고자 했다. 추상적인 표현방식을 도입하고 수묵과 한지라는 재료적 특성에 주목해 창작을 했다. 서양화도 시대적 흐름에 따라 ‘서양’이라는 용어에 부담을 느껴 ‘회화’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 결과 서양화와 한국화의 구분이 애매해졌고 그냥 ‘회화’로 통합되었다.
일본인 문예이론가가 만들어 놓은 민화와 화가의 대립구도가 여전히 작동했다. 민화작가와 한국화 작가들은 서로 만나지 않았고 애써 외면했다. 대학에서 체계적으로 그림을 배운 한국화 작가들은 떠돌이 환쟁이들의 저급한 그림이라며 민화를 천시했고 민화작가들은 열등감에 시달려 무리하게 민화의 현대화를 추진한다.
민화의 뿌리를 찾고, 조형이론이나 창작방법 따위를 정립하기도 전에 대중적 인기에 편승해 못 그린 그림을 대량으로 창작하거나 사람들을 교육했다. 어떤 민화작가들은 서양화 재료나 구도와 기법을 사용해 궁중회화를 해체시키고 상징을 바꾸었다.
그 결과 궁중회화나 민화는 여전히 박물관에 존재하고 있고 우리 그림을 배우겠다는 젊은이들은 눈을 씻고 찾아도 없는 실정이다.

▲ 한국화를 지망하는 학생들은 여전히 미술학원에서 수묵담채화를 그린다. 화면구도는 서양화법과 혼재되어 있고 전통적인 사물의 상징을 사용하지도 않는다. 이들이 궁중회화를 통해 김홍도, 신윤복 같은 훌륭한 화가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자료사진 - 심규섭]

현재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미술대학이 있고 그 안에 ‘한국화 학과’가 개설되어 있다. 서울대, 홍익대 따위에 입학하는 한국화 지망생들은 탁월한 재능과 세계적인 지식을 겸비한 우수한 인재들이다.
하지만 대학입시학원에서는 여전히 수묵담채화로 그려 시험을 본다. 한국화를 전공하는 학생들은 궁중회화를 잘 모르고, 채색화도 그리지 않는다.
떠돌이 환쟁이의 그림수준으로는 똑똑한 청년들이 눈도 꿈쩍하지 않는다.
최소한 김홍도, 신윤복 정도가 되어야 관심을 가진다.
궁중화원은 국가 소속이었기에 궁중에서 창작한 작품에 개인의 서명을 넣을 수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화가의 이름을 떳떳이 밝힐 수 있다.
젊은 화가들은 궁중회화를 통해 자신의 뿌리를 찾고, 궁중회화를 해석하고 변주해 자신의 작품세계를 만들어 세상에 이름을 알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조선시대 신윤복, 김홍도, 정선과 같은 궁중화가들의 후예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말이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