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그림이 발전해 나가는 방법은 변주(變奏)이다.
변주는 일반적으로 음악 용어로 사용한다.
사전적 의미로는 ‘어떤 주제를 바탕으로 선율, 리듬, 화성 따위를 여러 가지로 변형하여 연주함. 또는 그런 연주’이다.
하지만 사전적 풀이만 가지고는 변주의 정확한 뜻을 알기 어렵다.
일단 변주를 하려면 변형할 원본이 있어야 한다.
원본이 없는 변주는 변주가 아니라 그냥 창작이다.
또한 변주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인정한 명작이어야 한다.
요즘 대중가요에서 옛날에 탁월한 음악으로 인정받았거나 대중적으로 유행한 노래를 현대적으로 바꾸어 다시 부르는 경우가 있다. 아무도 모르는 노래를 다시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당연히 현대적 흐름이나 필요에 의해 변주를 했어도 반드시 원곡을 알 수 있어야 한다.
변형을 너무 심하게 해서 원곡의 맛이 사라지는 것은 마치 양념을 강하게 해서 식재료의 맛을 없애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변주를 하기 위해서는 원작을 완벽하게 이해해야 한다. 원작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변형을 하면 오히려 원작의 가치를 훼손시킨다. 이것은 유명세에 빌붙어 사욕을 채우고자하는 사기질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한다.
그러니까 변주는 완성된 원본을 충분하게 습득하고 이해한 상태에서 현대적 흐름이나 정서에 맞게 바꾸는 작품이나 과정을 말한다.
미술적으로 풀이하면,
완성되어 사회적으로 인정된 작품을 충분히 배우고 체득한 다음에 시대의 흐름이나 정서를 반영하고 발전된 기법이나 재료 따위를 사용해 변형한 작품이나 창작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역사를 통해 증명된 전통을 바탕으로 새롭게 창작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일반적인 용어로 말하면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청출어람(靑出於藍)과 비슷하다.
변주는 음악용어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 전반에 걸쳐 사용하고 우리그림뿐만 아니라 서구미술을 포함한 대부분의 미술은 모두 변주라는 방식을 통해 발전한다.
원래 변주는 시간을 두고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마치 부모에서 자식세대로 연결되는 과정에서의 차이나 속도와 비슷하다.
화려한 채색화를 자랑했던 고려불화는 조선 초기 숭유억불정책에 의해 급격하게 쇠퇴하고 대신 선비들의 사상을 담은 수묵화가 전면에 등장한다. 또한 임진왜란과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성립하는 과정에서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의 등장이라는 변화가 일어난다.
조선 말기 대중그림인 민화가 등장하는 바탕에는 정치와 경제와 같은 사회적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묵화가 자리를 잡고, 진경산수화가 뿌리를 내리는 시간은 대략 100~200년의 세월이 걸린다.
서구의 추상미술과 같은 급격한 변주는 약 60년에 걸쳐 일어나는데 정치적 격변기나 경제적 상황이라는 시대의 흐름이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그림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는 ‘해반도도’를 변주한 것이다. 전체 구도나 형상의 차이는 없으나 컴퓨터라는 최첨단 미술도구를 사용해 디지털로 변주했다. 좀 더 자세하게는 손에 잡히는 석채물감으로 그린 그림을 디지털이라는 무형의 빛으로 바꿨다. [자료사진 - 심규섭]
해반도도는 1901년 화재로 소실된 경운궁의 선원전을 크게 고쳐 짓고 그 내부를 장식하기 위해 그려졌다는 기록이 있는 작품이다.
해반도도는 4첩 2좌 병풍그림이다. 각 좌는 4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좌는 쌍을 이루지만 함께 붙여 놓았는지 아니면 따로 떼어 장식했는지는 알 수 없다.
작품의 내용은 궁중회화의 미학과 동일한 ‘생명력이 풍부한 이상세계’이다.
반도(蟠桃)는 신령스런 복숭아나무를 뜻한다. 그 열매인 복숭아를 먹으면 3,000년을 산다는 신화가 전해진다. 좌우측의 해(日)와 바다, 산과 바위, 영지는 이상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1900년 초반이면 대한제국 시기이다. 1905년에 을사조약으로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1910년에 한일합방으로 대한제국은 망한다.
해반도도는 정치, 사회적으로 엄청난 혼란기에 그려진 그림이다.
이미 자비대령화원과 도화서는 폐지된 상태였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이미 폐지된 도화서 화원 출신의 개인 화가가 그려 납품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작품에 화가의 서명이 없는 것은 도화서의 전통을 따랐기 때문이다.
해반도도는 해학반도도와 일월오봉도에서 조형적 요소를 차용하여 그렸다.
산과 바위, 바다, 영지, 반도(신령스런 복숭아나무)는 해학반도도의 요소이고, 좌우 대칭구도나 일월의 표현은 일월오봉도의 전형적인 요소이다.
변주된 부분을 보면, 일단 오봉도의 소나무 대신 복숭아나무가 들어갔다. 또한 오봉도의 소나무가 좌우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향하지만 이 그림은 중심부분에서 바깥쪽으로 향하고 있다.
해학반도도에 나오는 신령스런 동물을 모두 배제하여 정갈하고 짜임새 있는 화면을 만들었다.
이 정도의 변주면 전통을 잘 살리면서 새로움을 더 한 작품으로 인정받을 만하다.
그럼에도 이 그림에는 궁중회화의 전통과 차별되는 핵심적인 요소가 있다.
만약 도화서가 건재한 상황에서 이런 작품이 나왔다면 급격한 변주 즉, 엄청난 파격이었을 것이다. 이런 파격적인 그림을 도화서가 수용했을지도 의문이다.
이 그림은 궁중회화의 채색화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산과 바위는 청록산수 기법으로 그려졌고 바다와 파도의 표현은 해학반도도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기법이다. 또한 진채기법을 사용한 복숭아나무와 해를 복사하여 좌우측에 배치한 것도 궁중회화의 전통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급격한 변주 즉, 파격적인 그림이 된 것은 위 부분의 여백 때문이다.
채색화에서는 빈 공간을 남겨두지 않는다. 채색화에서 빈 공간은 아무 것도 그리지 않는 곳이 되고 그대로 미완성 그림으로 전락한다.
여백은 수묵화나 수묵담채화의 기법이지 채색화의 기법은 아니다.검은 색의 먹으로 그린 수묵화는 농담의 차이만으로 사물을 표현한다. 색상이 없기 때문에 검정 아니면 바탕색인 흰색으로 모든 사물을 표현해야 한다. 결국 흰색의 표현은 먹을 사용하지 않고 남기는 방법밖에는 없다.
먹을 많이 사용할수록 화면은 검게 변한다. 먹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면 그림은 그야말로 시커멓게 되어버린다.
수묵화의 멋은 담백하고 깔끔하다는 데 있다.
이것은 선비들이 추구했던 ‘엄격한 예법과 청렴’이라는 사상과 잘 맞는다.
검정의 먹으로 그리면서도 담백하고 밝은 느낌의 화면을 만들기 위해서는 빈 공간, 즉 여백을 활용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구름이나 안개처럼 위장하여 여백을 남기고 가까운 풍경보다는 먼 거리 풍경을 그려 하늘같은 빈 공간을 확보한다. 김홍도의 풍속화처럼 아예 배경 자체를 버려 여백을 만드는 경우도 있고 여백을 공간으로 활용해 화면을 구성하는 수준까지 발전한다. 여백이 없는 수묵화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수묵화의 핵심기법이다.
경운궁을 대대적으로 보수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그림을 주문받은 전직 도화서 화원 출신의 화가는 깊은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대한제국의 국호는 ‘한’이었다. 그러니까 ‘조선’에서 ‘한’으로 나라가 바뀐 것이다. 나라가 바뀌었으니 그에 걸맞은 새로운 형식의 그림이 필요했다.
도화서가 있었을 때는 궁궐에 필요한 그림은 도화서 수장과 동료 화원들의 기획에 의해 화면 구성이나 기법 따위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도화서가 폐지된 상황에서 작품에 대한 모든 책임은 국가기관이 아닌 화가 개인이 져야 한다.
궁중회화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뭔가 새로운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압박감에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화가는 궁중회화의 전통인 진채기법을 사용하면서도 수묵화의 기법인 여백을 결합시키는 변주방식을 선택한다.
화면의 5할 중 3할까지 바다를 끌어 올려 전통적인 진채기법을 구사한다. 나머지 2할을 마치 구름이나 안개처럼 여백으로 두고 작은 산을 그려 넣었다. 사실 이 작품에서 산은 별 필요가 없는 요소이다. 그럼에도 산을 그려 넣은 것은 여백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해반도도는 궁중회화의 진채기법과 수묵화의 여백이 결합하여 변주된 작품이다.
그래서 보는 사람에 따라 독특한 세련미가 느껴지기도 하고, 뭔가 허술한 느낌을 받기도 하는 알쏭달쏭한 그림이다.
어쩌면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화가의 발버둥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궁중회화와 수묵화를 결합시키고자 했던 화가의 깊은 고민은 인정되어야 마땅하다.
이러한 화가의 고민은 20년 후 창덕궁을 재건하면서 그려졌던 ‘백학도’, ‘봉황도’, ‘조일선관도’ 따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