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그림은 교육과 창작의 바탕이다

‘본그림’의 국어 사전적 의미는 간단하다. 모사나 복제 따위의 바탕이 되는 그림이라고 정의한다.
의미는 간단하지만 그 안에는 엄청난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복제나 모방은 창조의 핵심원리이다.
또한 복제나 모방이라는 개념 안에는 ‘완성된 원본’이라는 내용이 숨어있다.
‘완성된 원본’이 있어야 복제하고 모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그림이라는 형식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완성된 원본’이 있다는 말과 같다.
우리그림에서 완성된 원본은 궁중회화이다.
어떤 사람들은 궁중회화가 종류가 적고 다양성과 개성이 부족하고 단순화가 심해 회화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한다. 분명 그런 면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궁중회화를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궁중회화에는 특별한 조형적 실험도 없고 파격도, 개성도 없으며 다양성도 없다. 구체적인 기법이나 조형방법, 개인의 독창성 따위는 담겨있지 않다.
하지만 수많은 창작품과 흐름 속에서 검증되고 확립된 그림만 엄격한 형식과 상징적인 형태로 녹아있다.
그래서 궁중회화는 한마디로 우리 그림의 미술 교과서와 같다.
원래 교과서에는 검증되고 완성된 내용과 형식만 담는다. 표준화된 내용과 형식은 상징적이고 추상적이며 단조로운 형태를 띤다.
그렇기 때문에 궁중회화를 ‘완성된 원본’이라고 하는 것이다.

서양화법에서도 조형적 기본기는 아주 단순하다.
‘형태, 명암, 원근법’이 전부이다. 여기에 관련된 조형이론이나 실기이론도 너무 간단하여 변변한 교재도 없다.
입시미술학원에서는 ‘비례법을 이용한 형태’와 ‘상대성을 기반으로 하는 명암법’, ‘일인칭 시점인 원근법’이라는 기본기를 몇 년에 걸려 반복적으로 교육한다. 교육자도 대부분 전문화가가 아니라 미술대학 학생강사들을 시간제로 채용하고 있다.
흥미를 유발하거나 우회하는 몇 가지 교육기술을 제외하면 1~2년 정도면 모든 사물을 실제와 가깝게 묘사 할 수 있는 기술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교과서적이고 단순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수많은 미술작품이 창작되는 것이다.

궁중회화는 단순하지만 그 안에는 엄청난 미술관련 정보가 압축되어 있다. 눈에 보이는 궁중회화는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본그림은 궁중회화에 녹아있는 미학과 조형원리를 끄집어내는 매개역할을 한다. 궁중회화는 본그림을 통해 풍부하고 다양하게 재해석되고 재창작되는 것이다.

우리그림에서 본그림의 활용은 교육용과 창작용으로 구분된다.

본그림을 이용한 미술교육은 아주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이다.
‘완성된 원본’을 베껴 그리는 방법으로 작품에 집약된 미학과 조형원리를 빠르고 쉽게 배울 수 있다. 잘 베낄수록 우수한 학생이라는 칭찬을 받는다.

▲ 미술교육에 사용하는 교육용 본그림이다. 학생은 각각의 사물을 베껴 그리면서 소묘, 사생능력을 키우고 조형방법을 배운다. 동시에 선생은 그림의 뜻과 의미와 상징을 가르친다. 물고기에 날개가 달리는 이유, 석류를 그릴 때 알갱이가 보이게 하는 이유, 두루미가 왜 연꽃과 같이 있는지에 대한 이론과 실기를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본그림 방식을 통한 교육에도 두 가지 방식을 사용한다.
첫째는 본을 그대로 베끼는 방식이 있다.
처음부터 교육을 목적으로 만든 본그림을 그대로 베끼게 하여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조형적 요소를 교육시키는 것이다.
교육용으로 만든 본그림은 대부분 채색은 없고 선묘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먹과 붓을 사용하여 사물의 형태와 구조를 익히게 하는 것인데 요즘 말로 하면 소묘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소묘나 사생능력을 키우는 데는 아무래도 색이나 물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효율적이다. 서양화법에서 소묘, 사생능력을 키우기 위해 목탄이나 연필 같은 흑백의 재료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미술교육에는 산과 나무, 꽃이나 사물, 물고기, 사슴, 학 같은 동물과 인물 따위를 그린 다양한 본이 동원된다. 교육을 받는 생도가 어느 부분에 능력을 발휘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꽃과 새 그림이나 인물화 따위에 능력을 보인다고 해도 기초과정에서는 모든 부분을 섭렵하는 것이 일반적인 교육방법이다.
또한 등급이나 교육수준에 따라 단순하고 작은 본부터 점차 복잡하고 세밀한 본을 사용한다.
정통미술교육을 받는다고 가정하면 수 십 종에 달하는 다양한 본을 수 백 번에서 수 천 번 이상 반복적으로 베껴 그리게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물에 대한 이해력을 높이고 보지 않고도 그릴 수 있는 소묘능력을 키운다. 무엇보다 수많은 사물을 미술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조형틀을 구축할 수 있다.

둘째는 완성된 작품에서 본그림을 추출하는 방식이다.
기본 사물을 소묘하는 능력을 익힌 후에는 화면 전체를 구성하는 구도법이나 화가에 따라 다르게 변주된 다양한 형식들을 공부하게 된다.
아주 고급스런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은 새로운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이미 지나간 과거를 배우는 것이다. 수 백 년의 경험과 지혜가 함축된 역사를 배워야 그 바탕 위에서 새로운 창작이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기에 빠른 시간에 과거를 배우는 학생이 공부를 잘하고 우수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완성된 작품을 보고 본그림을 추출하는 과정은 굉장히 어렵다.
일단 작품에 직접 화지를 대고 베낄 수 없다. 자칫 완성된 작품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구하기도 어렵다. 몇 번 보고 작품의 구도나 분위기, 묘사 정도를 파악해야 하는데 상당한 수준의 소묘능력과 눈썰미가 있어야 한다.
완성된 작품에서 본그림을 추출하는 작업은 곧 완성된 작품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과정이다.
좋은 작품을 해석하고 분석하는 훈련을 통해 학생들은 독창적인 자신의 작품세계를 만들어 낸다.
참고로 창조하는 능력은 복제와 모방으로부터 나오지만, 화가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드는 독창성은 해석과 융합에서 나온다.
완성된 원본을 해석하는 과정에는 변화된 시대의 요구와 개인의 정서가 자연스럽게 반영된다.
여기에 발전된 미술재료나 도구가 결합하고 유행과 필요, 새롭게 유입된 문화가 융합되면서 과거를 뛰어넘는 독창적인 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물론 독창성은 원본에 대한 해석이 원본을 더욱 풍성하게 하면서 그 사회에 유용해야 인정을 받는다. 급작스런 변화, 즉 파격적인 해석이 당대에 수용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시대의 발전흐름에 맞으면 나중에라도 인정을 받는다.

아무튼 완성된 작품에서 추출해 낸 본그림은 추출해 낸 작가의 소유가 된다. 또한 이렇게 추출한 본은 여러 과정을 통해 자기 작품을 창작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본그림은 화가의 작품창작에 직접적으로 활용된다.
알다시피 동양미술에서는 대부분의 창작에 본그림을 사용한다. 동양의 전통그림은 수성물감을 사용하는데 식물성 재료로 만든 화지 위에 직접 밑그림을 그리거나 수정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만약 채색과정에서 틀리거나 잘못 그렸다면 다른 화지에 처음부터 다시 그려야 한다. 유화나 아크릴화처럼 채색 중간에 수정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화지에 밑그림과 채색을 하기 전에 예비그림을 통해 조형적 오류나 문제를 충분히 검토하고 난 후에 실제 창작에 들어가는 방법을 사용한다.
이런 제작방법은 서양화법에서도 ‘밑그림, 에스키스, 초벌그림’ 따위의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항상 완성된 작품만 보아온 일반 사람들은 이러한 ‘예비그림’의 존재를 잘 모른다. 또한 작가들 사이에서도 ‘예비그림’은 공개하지 않는다.
어쨌든 수성물감이라는 재료적 한계를 극복하고 창작과정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나온 것이 본그림이다. 가끔 본그림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화지에 그리는 경우도 있는데 대부분 문인화 계열이거나 사생 정도이다. 또한 화제(畵題)를 가지고 즉흥적으로 그리는 것도 수많은 창작 경험을 통해, 본그림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조형틀)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방법이다.
이건 관광지의 즉석 초상화 그리기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이렇게 체계적인 준비가 없이 즉흥적으로 빠른 시간 안에 그리는 그림의 가치는 별로 없다.
대부분의 화가들은 하나의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많은 준비와 과정을 거친다.

▲ 좌측 3점의 그림은 본그림을 그리기 위한 예비 본그림이다. 종이에 숯으로 거칠게 사생을 하고 그 위에 먹으로 그리면서 구상을 했다. 우측-윤두서의 자화상은 최종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미리 그려본 연습용이다. 숯으로 사생한 흔적이 보이고 그 위에 세필로 본을 그리고 채색을 살짝 해 본 것이다. 대부분의 작품은 이렇게 치밀한 본그림을 과정을 통해 창작된다. [자료사진 - 심규섭]

창작용 본그림의 제작과정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정교하다. 창작할 작품의 주제와 소재가 결정되고 대략적인 구상이 끝났다면 일단 작품제작에 필요한 밑그림이나 각각의 사물을 예비 화지에 사생한다. 본그림 이전에 예비 본그림이 있는 것이다. 틀리면 고치거나 다시 그리고, 잘된 것은 제대로 된 본그림을 그리는데 활용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예비 본그림에 여러 방식으로 채색을 해 보기도 한다. 예비 본그림을 통해 화면의 크기나 비율, 각 사물의 사생과 묘사 정도, 채색의 느낌과 분위기 따위를 사전에 예측한다. 다른 말로 하면 일종의 미리보기 그림, 조감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그림의 뼈대가 완성된다.

▲ 이지은/운룡도 본/2013.
경복궁에 있는 운룡도를 원본으로 새롭게 창작하기 위해 만든 본그림이다. 원래 그림은 형태가 불분명하고 색상이 바라는 따위의 훼손이 심하다. 본그림을 추출하는 과정은 작가의 능력에 따라 작품의 수준이 결정된다. 또한 시대의 흐름이나 재료, 작가의 개성에 맞는 변주가 일어난다. [자료사진 - 심규섭]

본그림이 완성되면 그 위에 채색까지 넣어 완성할 새로운 화지(비단)를 얻고 희미하게 비치는 본그림을 따라 선묘로 밑그림을 그려서 완성한다. 이런 과정은 여러 번 반복이 가능하다. 혹 채색을 망칠 수 있기 때문에 여러 벌의 밑그림을 미리 만들어 놓을 수도 있다.
작품제작과정에서 본그림은 채색보다 중요하다.
채색은 사물의 질감을 드러내고 화면의 장식성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물감이나 붓과 같은 재료에 따라 변화가 심하고 즉흥적인 요소가 강해 일관성이 떨어진다.
본그림 과정은 구상과 계획, 주제와 소재의 결정, 화면구성, 사물의 소묘, 상징화 따위를 결정한다. 대부분의 조형요소가 본그림에 들어가고 결정된다. 그래서 본그림의 상태만 보고도 작품의 완성도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교육용 본그림이 여러 학생들에게 공개되어 있다면 창작용 본그림은 철저히 작가 개인의 비밀스러운 영역이다.
교육이 끝나거나 작품이 완성되어도 본그림은 폐기하지 않는다.
교육용 본그림은 재활용되거나 다시 그려서 사용하고 창작용 본그림은 또 다른 작품을 창작하는데 자료로 사용한다. 같은 그림을 주문받을 경우 기존의 본그림을 바탕으로 약간의 변주를 더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한다.
창작용 본그림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많은 작품을 창작했다는 증거이고 다양하고 수준 높은 작품을 창작하는데 밑거름이 된다. 한마디로 작가의 소중한 재산인 것이다.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대부분의 궁중회화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의 작품이다. 그렇지만 조선 초기나 중기의 궁중회화의 모습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그것은 도화서나 자비대령화원에 의해 궁중회화의 본그림이 철저히 관리, 보존되었기 때문이다.
일월오봉도가 훼손되면 도화서에 보관된 본그림을 사용해 다시 그렸다. 화원의 수준이나 시대흐름, 재료의 발전에 따라 변주가 있었지만 본그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궁중회화는 이런 방식으로 전통을 지키고 계승하면서 수 백 년을 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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