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은 도구의 예술이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도구가 없다면 미술은 존재할 수 없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조형의 기본원리를 익히고 미술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물론 조형의 기본원리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미술도구라도 있어야 한다.
가끔 사람들은 ‘조형원리’와 ‘표현기법’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조형원리는 시공간을 만드는 원근투시법, 닮은꼴을 이용한 형태 잡는 법, 명암법, 구도, 창작과정과 순서 따위이고 표현기법은 미술도구를 사용하는 능력을 말한다.
색채가 없는 미술도구를 사용하면서 채색기법을 익힌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유화를 배운다는 것은 유화물감의 특성에 따른 활용법과 캔버스에 적용하는 법, 이에 따른 붓질 따위의 기법을 익힌다는 말이다. 그러나 유화물감을 잘 알고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미술의 조형원리를 모르면 쓸데없다.
이것은 5세 정도의 어린이가 비싼 물감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당연히 연필소묘를 잘한다고 해서 유화그림을 잘 그리는 것은 아니다. 농구를 해서 이름을 날리던 운동선수가 야구까지 잘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운동이라도 종목이 다르면 처음부터 새로 배워야 한다. 물론 기초체력, 운동신경 따위는 기본에 속하는 것이기에 유리한 측면이 있긴 하다.
일반적으로 유화, 아크릴, 수채물감 따위의 미술도구를 전문가 수준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최소 5년에서 많게는 10년 정도의 세월의 공부가 필요하다.

조형원리를 익히기 위해 사용하는 연필(콩테), 목탄(숯), 먹 따위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미술도구이다.
이런 단순한 흑백의 도구로 그림공부를 하는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흑백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관념의 색이다. 완벽한 흑백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고 있는 흑백은 모두 색과 빛의 종합이다. 그래서 미술계에서 흑과 백을 색으로 볼 것인지 아닌지는 늘 논란거리이다.
어쨌든 흑백을 사용하면 관념적인 세계를 이해하고 표현하는데 유리하다.
또한 사물의 바탕이 되는 명암이나 형태는 대부분 색깔 속에 숨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 색깔을 제거하여 사물의 조형성이나 입체감을 표현하는 훈련을 하는데 용의하다.
우리그림에서 색깔을 사용하지 않는 수묵화는 관념의 세계를 표현하는데 적합하다. 반면 화려한 색상은 현실의 세계를 드러내는데 적합하다. 수묵으로 표현하는 흑백의 세계는 선비들의 엄격한 예법과 청렴이라는 이상적 가치를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선택되었다.

둘째, 창작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공간이 필요한데 보통 아무것도 없는 공간은 검거나 하얗게 표현한다. 검정도구를 사용한다면 당연히 화폭은 하얀색이 된다. 나무를 재료로 하여 만든 한지의 색이 누런색이라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하얀색, 빈 공간으로 인식된다.
또한 흰색 화폭에 검정색의 붓은 선명한 형태를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셋째, 연필, 목탄, 먹 따위는 글씨를 쓰는 도구이기도 하다. 그래서 익숙하고 편리하다. 많이 보급되어 있어 구하기 쉽고 가격이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림을 그리는 도구의 발전은 곧 표현력의 발전과 연결된다. 사용하기 복잡하고 어려운 미술도구는 퇴출되고 간단하면서도 편리하고 표현력이 높은 도구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미술도구의 표현력과 편리성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표현력이 높은 반면 편리성이 약한 미술도구가 있고 편리성은 높은데 표현력이 낮은 도구도 있다.
연필이나 목탄, 먹은 편리하지만 표현력에 한계가 많은 도구이고 유화나 석채물감 따위는 표현력이 좋긴 하지만 사용하기가 불편하다. 표현력이 부족하더라도 사용하기 편리한 미술도구는 초급자나 일반사람들이 선호한다.
편리성은 없지만 표현력이 높은 미술도구는 전문가들이 선호한다. 전문 화가들은 오랜 학습과 경험을 통해 도구의 불편함을 극복할 수 있으며 대중의 접근을 막아 배타적인 영역을 구축하는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 김은숙/궁중연화도/47*80 6폭 병풍/종이에 수채/2013.
배경에 여백을 두고 수채물감 특유의 ‘소금녹이기 기법’을 사용해 변화를 주었다. 연꽃과 물의 표현은 담채기법을 사용하고 연잎과 청둥오리는 진채기법을 사용했다. [자료사진 - 심규섭]

하지만 세상은 표현력이 아니라 편리성을 중심으로 발전한다.
만약 조선시대 화가들이 궁중회화인 진채화만 고집했다면 수묵화는 발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묵화가 발전할 수 있는 바탕에는 수많은 선비들이 간단하고 편리한 먹과 벼루, 붓만으로도 그럴싸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말기 민화라는 대중그림이 성행할 수 있는 바탕에는 편리하고 값싼 미술도구의 보급이 있었다. 진채물감과 비단을 사용하는 궁중회화는 전문화공도 접근하기 어려웠다. 궁중화원에 버금가는 오랜 숙련과 경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물며 떠돌이 환쟁이가 진채물감을 사용해 민화를 그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민화라는 대중그림이 성행하려면 수요가 있어야 한다. 수요는 정치, 경제 따위의 사회적 현상에 의해 촉발된다. 대중들의 욕구가 공급을 창출한다. 궁중화원 수준의 작품은 이미 수요와 공급체계가 완성되어 있었다. 새로운 구매자들은 상업으로 돈을 번 신흥계층들과 일반백성들이었다. 우리가 민화라고 부르는 그림은 대부분 신흥계층과 일반백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들은 출세, 건강과 장수, 다산, 액막이, 가정의 화목, 부귀영화 따위의 세속적이고 원초적인 욕망에 충실했다.
궁중회화의 ‘생명력이 넘치는 이상세계’라는 미학은 대중의 수준에 맞게 하향 평준화되고, 장생도와 책가도 따위의 그림은 필요에 따라 분해되고 단순하게 변주되었다.
대중들은 가격이 저렴하면서 단번에 시선을 끄는 자극적인 색상, 내용을 상징적으로 압축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형상의 그림을 선호했다.
이런 대중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값싸고 편리한 미술도구가 수용되었고 대량으로 그림을 제작할 수 있는 공방체계가 만들어졌다.

▲ 수채물감을 사용하여 창작한 민화는 미려한 느낌을 준다.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다. 담채물감 특유의 투명하고 단백한 느낌은 우리정서에도 잘 맞는다. 적절한 여백의 표현은 시각적 여유를 갖게 할뿐만 아니라 서물에 대한 집중력도 높여준다. 색을 진하게 칠하지 않아도 주목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요즘 민화가 유행하고 있다. 수많은 동호인들이 생기고 관련 조직들이 만들어졌다. 많게는 수 십 만 명의 사람들이 민화를 창작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민화가 유행한 조선 말기나 현대의 대중들이 요구하는 정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이 있다면 민화를 수용하는 태도가 능동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민화를 구입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직접 창작에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대중들이 민화창작에 손쉽게 뛰어들 수 있는 바탕에는 발전된 미술도구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수채물감이다.
튜브에 담겨 규격화된 수채물감은 광범위하게 보급되어 있다.
유아기, 초등학생 때부터 이미 수채물감으로 그림을 그린다.
현대에서 수채물감은 모든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미술도구가 된 것이다.
수채물감의 브랜드도 국내외에 걸쳐 다양하다. 전문가용 수채물감이 있고 여러 종류의 붓과 종이가 생산, 판매된다.

어떤 민화작가는 전통기법과 미술도구만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현대적인 수채물감이나 유화, 아크릴, 디지털 물감을 사용하는 것은 민화의 영역에 포함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진채물감과 비단이 아니면 혹은 석채물감과 한지를 사용하지 않으면 민화나 궁중회화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민화는 궁중회화의 진채물감을 값싸고 편리한 수채물감으로 대체하여 대중화에 성공했다.
현대의 민화작가들은 이런 대중적 수채물감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았다. 만약 궁중회화의 진채물감만 존속했다면 민화라는 말조차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수채물감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거꾸로 일반사람들의 진입을 막고 배타적 영역을 만들려는 것은 자신들만의 권위와 영업이익을 챙기려는 의도로 오해받을 수 있다.

미술용 접착제인 아교를 사용하는 석채물감과 다르게 현대 수채물감의 단점은 물을 섞으면 묽어진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수채물감은 근본적으로 담채화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담채물감을 가지고 진채의 느낌을 표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사실 담채물감으로 진채기법을 사용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진채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차라리 유화물감, 아크릴물감 같은 불투명물감을 사용하는 것이 훨씬 빠르고 편하다.
미술의 핵심은 미학과 조형방법이다.
미술도구에 따른 표현기법은 시대의 흐름에 맞춰 달라진다. 궁중회화, 민화의 미학과 조형원리만 정확히 알고 있다면 미술도구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유화, 아크릴물감으로 궁중회화를 그려도 좋은 것이다. 디지털 물감으로 궁중회화를 그린다고 잘못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민화를 다양한 미술도구로 창작하는 일을 권장해야 한다.

수채물감은 대중성이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담채물감이란 단점도 있다. 대중성이란 편리함이고 담채물감이라는 것은 표현의 어려움이다.
전문가들은 석채와 유화, 아크릴물감 따위로 표현력을 극대화시켜야 한다.
그렇다고 대중적이면서 편리한 수채물감을 내쳐서도 곤란하다.
편리한 수채물감은 더 많은 대중들을 민화의 세계에 들어올 수 있게 하는 주요한 매개이다.
어릴 때부터 수채물감에 익숙한 대중들에게 수채물감으로 표현하는 궁중회화, 민화는 엄청난 매력으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수채물감, 담채물감의 특징은 투명하고 담백한 느낌의 표현에 강하다는 점이다. 이런 느낌은 석채물감이나 유화, 아크릴물감에서는 표현할 수 없다.
현대의 수채물감은 수묵화의 담백한 느낌과 석채의 진하고 선명한 느낌을 동시에 표현하는 기법이 가능하다. 적절한 여백을 가진 배경에는 담백한 느낌을 주고 새, 나무,바위 같은 사물은 진하게 칠하는 것이다. 또한 화사한 꽃이나 신선한 과일, 바다의 표현은 투명기법이 훨씬 효과적이다. 이것은 물감과 물의 배합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하다. 여기에 반드시 흰색으로 표현해야 할 부분에서는 석채물감을 함께 사용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우리그림에서 수묵화나 채색화는 모두 아름답고 소중한 전통이다. 둘 중에 하나만 골라낼 필요는 없다.
조선시대 화가들은 수묵화와 채색화를 충돌시키지 않았다. 필요에 따라 적절히 사용했을 뿐이다.
수묵화와 채색화를 결합시키고자 하는 시도는 오랫동안 있었다.
1901년 경운궁에 들였던 ‘해반도도’, 1920년대 창덕궁 재건벽화인 ‘백학도’, ‘봉황도’, ‘조일선관도’, ‘삼선관파도’와 같은 작품들은 수묵화의 여백과 표현기법을 궁중회화의 채색화와 결합하고자 했다.

현대에는 조선 말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술도구가 발전했다.
발전된 미술도구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 물론 현대인들의 미감이나 정서도 옛날과는 달리 섬세하고 다양하게 발전했다.
과거의 전통을 현대에 맞게 변주하는 일은 폭넓고 다양한 미술도구를 수용하는 일에서 시작되고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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