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 KAL858기 사건과 한.일공조

1. 진짜 하치야 신이치와 일본 언론, 그 미스터리


1-1. 바레인에서 두 남녀가 음독한 직후, 채 1시간이 지나지 않은 시간에 아사히신문 기자가 진짜 하치야 신이치를 접촉하기 시작했고, 진짜 하치야 신이치는 그로부터 2~3시간 사이에 일본TV방송의 스크린에 나타나 의기양양한 태도로 미야모토 아키라와의 관계를 증언함. (아사히신문1987.12.2자, 교도통신1987.12.1자, ‘파괴공작’43쪽)

▲ 수수께끼의 인물 진짜 하치야 신이치. ‘두 하치야’의 음독 직후 자신의 여권을 들고 언론.방송과 접촉함. [자료사진 - 서현우]
▲ 진짜 ‘하치야 신이치’의 여권 [자료사진 - 서현우]

▷ 바레인에서 두 남녀의 음독이 있은 시간은 1987.12.1, 09:15~09:30(일본시간 15:15~15:30)경이었는데, 아사히신문 기자가 하치야 신이치를 찾아간 시간은 같은 날 16:00경이었음. (바레인보고서41항, ‘파괴공작’43쪽)

▲ 진짜 하치야 신이치의 증언 내용 -‘파괴공작’ [자료사진 - 서현우]
▲ 아사히신문이 진짜 하치야 신이치를 찾은 시간은 오후 4시 경으로 이 시점엔 바레인에서 두 김이 음독한 지 채 1시간이 지나지 않은 때임 -국정원종합보고서 [자료사진 - 서현우]

▷ 주목되는 점은 이 시점엔 바레인에서의 두 남녀의 음독사실이 아직 보도를 타기 전이었고 김승일 소지 여권의 위조여부가 확인되기 전이었는데, 어떻게 언론이 김승일 소지 여권의 위조 사실은 물론이고 여권상의 실제 주인공의 신원을 파악하고 찾아갈 수 있었느냐는 데 대해 의문임. (‘파괴공작’44~45쪽)

▲ 아사히신문이 진짜 하치야 신이치를 찾았을 때는 두 김의 음독사실이 알려지기 전이었음 -‘파괴공작’ [자료사진 - 서현우]

▷ 경시청 공안부에서 진짜 하치야 신이치를 찾은 때는 진짜 하치야 신이치가 매스컴의 대대적인 주목을 받은 이후인 당일 밤 22:00 무렵임. 그는 경찰에 의해 일류호텔에서 사흘간이나 융숭한 대접을 받음. (‘파괴공작’46~47쪽)

▷ 공식적으론 일본 언론이 김승일 소지 여권의 위조사실을 일본정부보다 먼저 파악하고 있었음.

▲ 일본경찰이 진짜 하치야 신이치를 찾은 때는 밤 10시 경이며, 진짜 하치야 신이치는 3일 동안 일본경찰에 의해 융숭한 대접을 받음 -‘파괴공작’ [자료사진 - 서현우]

▷ 진짜 하치야 신이치는 아사히신문 기자가 찾아갔을 때 (우연을 강조했지만) ‘미야모토 아키라’의 사진을 준비한 채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행동을 보였고, 공교롭게도 그날은 직장(운전기사로 근무)의 근무일임에도 전날과 당일은 허리가 아프다며 집에서 쉬고 있었음. (‘파괴공작’43쪽)

▲ [자료사진 - 서현우]
▲ 우연과 의문이 뒤섞인 진짜 하치야 신이치의 증언(위와 아래) -‘파괴공작’ [자료사진 - 서현우]

2. 테러사건임을 확신한 일본 언론

2-1. 당시 일본은 KAL858기 사건 하루 전에 발생한 남아프리카공화국 점보기의 인도양 추락사건으로 인해 무려 47명이라는 일본인 탑승객이 희생되었음에도, 어찌된 일인지 同사건보다 KAL858기 사건에 더 비중을 두고 있었음.

▷ 일본 언론은 이미 KAL858기 실종의 원인이 항공기테러임을 확신함.

3. 군사독재 시대 한.일 밀월관계의 상징, KAL858기 사건

3-1. 1987.12.5 당시 최광수 외무장관은 ‘하치야 마유미(김현희)의 신병은 한국으로의 인도가 기본방침’이라 언급함으로서, 이 시점에 한국당국은 이미 사건이 북한의 테러에 의한 것이자, 바레인에서 음독을 기도한 두 남녀가 사건의 범인이라 규정하고 있었음. (MBC뉴스데스크 같은 날)

▲ 음독 다음날의 신병인도 추진 기사 [자료사진 - 서현우]

▷ 한국당국은 두 남녀의 음독 다음날인 1987.12.2에 이미 ‘하치야 마유미’의 신병인도교섭 방침과 재판관할권을 천명하였는데, 교섭의 근거는 도쿄협약으로 이는 ‘하치야 마유미’가 항공기 테러범이란 전제하에 주장할 수 있는 권리임. (동아일보1987.12.2자, 조선일보1987.12.3자 2면)

▷ 한국당국이 신병인도 교섭 방침을 천명한 1987.12.2은 ‘무지개 공작’ 개시 첫 날임.

3-2. 1987.12.6 바레인 당국은 (한국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하치야 마유미의 신병을 (여권상의 국적인) 일본에 인도할 것이라고 한국에 통보’함. (MBC뉴스데스크 같은 날)

〈바레인, 마유미 일본에 인도 검토
● 앵커: 이어서 대한항공 관련 소식입니다.
바레인 당국은 군병원에서 형무소로 옮겨진 하찌야 마유미를 금년 간 그녀가 소지했던 위조여권의 국적국가로 인도할 것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바레인에서 엄기영 특파원입니다.
● 기자: 바레인 당국의 수사를 받고 있는 마유미가 의식회복 사흘째가 되도록 입을 열지 않고 있자, 바레인 정부는 마유미를 가까운 시일 안에 그녀가 소지했던 여권의 국적 국가로 인도할 것을 적극검토하고 있습니다. MBC뉴스데스크〉


▷ 여권 상의 관할국인 일본으로의 신병인도는 국제법상 정당한 조치였으며, 당시 KAL858기 실종에 대한 하치야 마유미의 관련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음. 심지어 실종의 원인, 즉 단순 기체이상에 의한 추락인지, 테러에 의한 공중폭파인지, 아니면 항공기납치인지 전혀 확인되지 않음.

▲ 바레인주재 대리대사 김정기 서기관의 자필진술서 [자료사진 - 서현우]

3-3. 다음날인 1987.12.7 한국당국은 박수길 외무부 제1차관보를 특사로 바레인에 파견함. (MBC뉴스데스크 같은 날)

3-4. 같은 날 일본의 오부치 관방장관은 “신병인수 생각 않고 있다. 바레인 측 의사를 존중하겠다”라고 발언하여, 하치야 마유미가 한국 측에 인도되기를 바라는 뉘앙스를 흘림. (MBC뉴스데스크 같은 날)

▷ 하치야 마유미에 대한 신병인수의 1차적 권리는 여권상의 관할국인 일본에 있었는데, 오부치 장관의 위 발언은 전후(戰後) 한일관계사에서 최고의 밀월시대를 상징함.

3-5. 하루 뒤인 1987.12.8 일본의 하야시타 법무장관과 오까무라 법무성 형사국장은 “신병인도 문제는 바레인 당국에 달려 있다”라는 발언으로 신병인도 교섭에 나서지 않겠다는 태도를 굳힘. (MBC뉴스데스크 같은 날)

▷ 바레인에서 김현희의 출국을 저지한 일본대사관 서기관 스나가와 쇼준은 1987.12.9 바레인 당국에 구금 중인 하치야 마유미를 면회할 시 “일본 사람이 아니다”라는 얘기를 듣고 인수를 포기했다고 밝힘. (KBS스페셜)

▷ 이처럼 일본당국은 처음부터 외교주권을 양보하는 자세를 취했는데, 이는 對한국 정책에 있어 매우 이례적인 일임. 당시 1980년대의 한일관계는 미국을 축으로 한 한미일 삼각군사동맹 하의 밀월시대였음.

3-6. 1987.12.13 바레인 당국이 “폭파입증의 증거가 부족하다”며 한국으로의 신명인도 교섭에 난색을 표함으로서, 한국당국의 신병인도교섭이 난항에 봉착함. (MBC뉴스데스크 같은 날)

〈마유미 신병 인수 교섭
● 손석희 앵커: 다음 소식입니다.
마유미의 신병인수를 외한 외교교섭이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외무부장관 특사로 바레인에 파견된 박수길 외무부제일차관보는 오늘도 바레인 측과 교섭을 벌였으나, 바레인 당국이 마유미와 자살한 신이찌의 KAL기 폭파사고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더 확보하기 위해서 수사를 계속하고 있어서 신병인도 여부를 아직까지 통보 받지 못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발견된 KAL기 부유물의 대한 분석결과, 공중 폭발한 것으로 드러나면 바레인 측은 이들의 신병을 즉시 한국 측에 인도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바레인보고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바, 바레인 당국은 KAL858기 사건의 실체에 대한 한국 측의 주장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음.

▲ 바레인보고서 [자료사진 - 서현우]

▷ 당시 외무부 전문에 의하면 바레인 KHALIFA 외무장관, “결정적 증거 없어 한국으로의 인도 어렵다”고 밝힘. (국정원자료No.40, 34쪽)

▷ 당시 안기부 파견관 전문에 의하면 CID(바레인 범죄수사국) 헨더슨 국장은 “KAL858기 잔해조차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마유미를 폭파혐의로 외국에 인도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의견 표명함. (국정원자료No.126)

3-7. 다음날인 1987.12.14 이규호 주일 대사가 일본 오노 외무장관과 만나 하치야 마유미 신병인도 문제에 대한 협력을 약속받음. (MBC뉴스데스크 같은 날)

▷ 한국 당국에 의한 하치야 마유미, 즉 김현희 신병인수는 다음날인 1987.12.15 03:00경(바레인시간 전일 21:00경)에 바레인 무하라크 국제공항에서 이루어짐.

▷ 한국 언론들로부터 ‘외교적 개가’란 평가를 받은 김현희 신병인수는 일본의 이례적인 외교적 양보에다, 보이지 않은 미국의 역할에 힘입었을 것으로 추정됨.

3-8. 김현희가 안기부 수사과정에서 자신의 사진이라고 주장한 일본 사진잡지 ‘그라프 곤니찌와’에 게재된 사진(1988.3.5자)에 대해 실제 사진의 주인공, 북한 거주 정희선의 인터뷰가 일본방송에 소개되면서 논란이 일고, 또 안기부가 수사발표 시 김현희의 사진이라고 내세운 화동사진에까지 의혹을 일으키자, 1988.3.28 일본과학경찰연구소는 ‘그라프 곤니찌와’ 게재 사진에 대해 별다른 근거설명 없이 ‘형태학적으로 김현희가 확실하다’며 북의 주장을 일축함. (MBC뉴스데스크 1988.3.28자)

▲ ‘그라프 곤니치와’ 게재 화동사진 [자료사진 - 서현우]

▷ 김현희는 1년 후인 1989.3.7에 시작된 법정진술에서도 계속 자신의 사진이라고 주장했고, 재판부는 이에 이의를 달지 않았음.

▲ ‘그라프 곤니치와’ 게재 위 사진의 화살표 표시 인물이 김현희는 자신이라고 주장함 [자료사진 - 서현우]

▷ 결과적으로 수사발표 시의 안기부 제시 사진 및 ‘그라프 곤니찌와’ 게재 사진은 모두 사실이 아니었으며, 국정원은 이를 모두 인정함.

3-9. 앞서 오부치 일본 관방장관은 일본경찰당국의 발표를 근거로 당시 신원이 드러나지 않은 하치야 신이치(김승일)가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대사관 서기관 강재연이 확실하다’고 언급함. (조선일보1987.12.11자 11면, 니혼TV1987.12.12자)

▲ 일본 관방장관은 음독자살한 ‘하치야 신이치’(김승일)가 북한외교관이 확실하다고 발언함 [자료사진 - 서현우]
▲ 일본치안당국은 음독자살한 ‘하치야 신이치’가 북한외교관 강재연이라 주장함 [자료사진 - 서현우]

▷ 이후 강재연이 아님이 밝혀져 국정원도 이를 인정함.

▷ 당시 분위기상으로 이러한 보도는 한일 양국간을 오가며 더욱 부풀어져 국민대중들로 하여금 KAL858기 사건이 북한 소행이라는 이미지를 확실하게 굳히게 했음.

▲ 김승일과 강재연이 상이한 인물이라고 밝힌 국정원종합보고서 [자료사진 - 서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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