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KAL858기 사건 폭파범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사면된 김현희 씨가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1987년 115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태운 채 공중에서 사라진 KAL858기 사건에 대한 숱한 의혹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으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상조사가 진행중에 있다.

KAL858기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 '배후'의 작가이자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 조사팀장인 서현우 씨는 처음으로 국정원 발전위의 종합보고서(2007.10.24)와 소송을 통해 확보한 4천여 쪽의 재판기록(2007.9.4 공개 결정) 등을 토대로 이 사건의 의혹들을 종합 분석했다.

A4 용지 3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석 보고서를 작성한 서현우 작가는 <통일뉴스>에 연재를 의뢰했으며, <통일뉴스>는 KAL858기 사건의 진상규명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해 이 분석 보고서를 매주 5회(월-금) 연재한다. /편집자주


7. 북한에서 사용하는 조직 명칭에 대한 혼란

7-1. 김현희는 ‘사로청’ 명칭에 대해 처음엔 ‘조선중앙사회주의청년동맹’이라 했다가, ‘로동’을 첨가하여 ‘조선중앙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이라 하더니, 다시 ‘조선중앙사회주의청년동맹’이라 하다, 이후에야 정식명칭인 ‘조선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이라 하는 등 혼란을 나타냄. (수사기록612쪽-1회자필진술서, 수사기록947쪽-2회 신문조서)

▲ 초기 진술에서의 ‘조선중앙사회주의청년동맹’ -안기부 신문조서 [자료사진 - 서현우]
▲ 1차 수정 시 ‘로동’이 첨가되었으나, ‘중앙’은 그대로 잔존함 -김현희 자필진술서 [자료사진 - 서현우]

▷ ‘사로청’은 김현희가 중신중학교 3학년 때 직접 가입한 조직임.

▷ ‘조선중앙년감’에 따르면 사로청은 고등중학교 5학년 무렵인 만14세에 가입하여 만30세까지 활동하는 조직이라 하는데, 김현희는 중학교 3학년(만12~13세) 때 가입하였다고 함.

▷ (참고) 1996.1. ‘조선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은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으로 개칭됨.

7-2. 김현희는 ‘금성정치군사대학’에 대해서도, ‘금성정치군사학교’라 하는가 하면, ‘금성군사정치학교’라 하기도 하고, 또 ‘금성군사정치대학’이라 하는 등 혼란을 보임. (수사기록653쪽-1회자필진술서, 수사기록938쪽-2회신문조서, 수사기록1181쪽-3회신문조서, 수사기록990, 998쪽-2회신문조서, 수사기록1187쪽-3회신문조서)

▷ ‘금성정치군사대학’은 김현희가 공작원 훈련과정에서 1년간 몸담았던 공작원 양성 전문기관임.

▲ 초기 진술에서의 ‘금성정치군사학교’ -김현희 자필진술서 [자료사진 - 서현우]
▲ ‘금성군사정치학교’에서 ‘금성정치군사대학’으로 수정함 -안기부 신문조서 [자료사진 - 서현우]
▲ ‘금성군사정치대학’에서 ‘금성정치군사대학’으로 수정함 -안기부 신문조서 [자료사진 - 서현우]

8. 조선노동당 당증에 대한 문제

8-1. 김현희는 1982.4.15에 정식으로 조선노동당에 입당했으나, 당증을 3개월여 보관하다가 지도원에게 맡겼기 때문에 정작 당증번호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함. (수사기록612~613쪽-1회자필진술서, 수사기록725쪽-2회자필진술서, 수사기록947쪽-2회신문조서, 수사기록1537쪽-4회신문조서)

▲ 김현희 자필진술서 [자료사진 - 서현우]
▲ 김현희 검찰신문조서 [자료사진 - 서현우]

▷ 정치적 생명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북한에서, ‘조선노동당원’이, 그것도 정예공작원으로서 훈련과정에서 수없이 되뇌어보았을 당증번호를 모른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움.

8-2. 김현희는 입당과정에 관한 모든 진술에서 입당일이 1982.4.15이며, 입당보증인은 오세영 조사부2과 과장과 리명길 담당지도원으로, 당증에 그대로 기재되어 있다고 진술함. (수사기록1480~1481쪽-6회자필

▲ 진술서, 수사기록1538쪽-4회신문조서 [자료사진 - 서현우]
▲ 입당보증인과 입당년월일 -안기부 신문조서 [자료사진 - 서현우]

▷ 그런데 김현희가 직접 그린 당증엔 입당일인 1982.4.15이 ‘1984.4.15’로, 또 입당보증인 오세영이 ‘오세민’으로 되어 있음. (수사기록1576쪽 첨부그림)
김현희가 직접 그린 당원증 표지와 내용. 당증번호를 모르는 ‘조선노동당원 김현희’는 입당보증인은
물론, 입당년도의 기억도 엇갈리고 있음. (오른쪽 확대부분)

▷ 앞서 지적했지만 조선노동당 정예공작원이 이런 기억상의 혼돈을 낳고 있음은 납득하기 어려움.

▷ 김현희는 검찰신문과정에서 오세영이 ‘오세민’으로 바뀐데 대해 지적을 받았는데 김현희는 ‘오세민’이라 하기도 한다며 얼버무렸지만, 입당일이 ‘1984.4.15’로 바뀐데 대한 검찰의 지적은 없었음. (수사기록3781쪽-2회검찰신문조서)

▲ 김현희 검찰신문조서 [자료사진 - 서현우]

9. 자신이 수여받은 훈.포장에 대한 혼란

9-1. 김현희는 2차 해외 실습기간이던 1986.1에 중국 광저우(廣州)에서 무선 수신된 전문을 통해 자신이 한 해 전 1985.8.15자 ‘조국해방40돌 기념 공로메달’의 수상자에 선정된 사실을 알았으며, 이듬해 1987.1.20 귀국과 동시에 메달을 수여받았다고 진술함. (수사기록824쪽-3회자필진술서, 수사기록3969쪽-3회검찰신문조서)

▲ 조국해방40돌 기념메달 수여에 대한 김현희 1회자필진술서 [자료사진 - 서현우]

▷ 그런데 김현희는 ‘조국해방40돌 기념 공로메달’을 다른 진술에선 수차례에 걸쳐 ‘공화국 창건 40돌 기념 공로메달’이라 하여 검찰신문과정에서 문제로 거론되기도 함. (수사기록718쪽-2회자필진술서, 수사기록931쪽-2회신문조서)

▲ ‘조국해방40돌’ 기념메달이 ‘공화국창건40돌’ 기념메달로 -김현희 자필진술서 [자료사진 - 서현우]
▲ 검찰의 추궁에 대한 김현희의 답변 -김현희 검찰신문조서 [자료사진 - 서현우]

▷ 김현희가 메달 수상자에 선정된 1985년은 북한정권 수립 37주년이며, 정권 수립일은 9월9일이라 ‘공화국 창건 40돌 기념 공로메달’은 성립될 수 없음.

▷ 더하여 김현희는 ‘조국해방40돌 기념 공로메달’의 수상자에 선정된 시기가 중국 광저우에 체류 중이던 1985.8.15이었고, 실제 수령한 때는 김현희가 2차 해외실습에서 귀국한 1987.1.20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각 진술서마다 ‘작년에 수여받은 조국해방40돌 기념 공로메달’ 또는 ‘작년에 수여받은 공화국창건 40돌 기념 공로메달‘이라 진술함. (수사기록824쪽-3회자필진술서, 수사기록2662쪽-10회자필진술서)

▲ 1985년에 수상자에 선정되고 1987년에 수여받았는데, ‘작년’이라 함 -안기부 신문조서 [자료사진 - 서현우]
▲ ‘작년’에서 ‘재’를 첨가하여 ‘재작년’으로 수정 - 김현희 검찰신문조서 [자료사진 - 서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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