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건 직후 언론보도에 나타난 사건의 진상

5-1. 무지개공작이 시작된 1987.12.2부터 출처불명의 사건 내용이 언론에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이 보도내용들은 당시엔 알 수 없었던 구체적이며 핵심적인 것들로서 놀랍게도 다음달인 1988.1.15 안기부 수사발표 내용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었음.

▷ 대다수의 언론에 이미 사건발생 다음날부터 이구동성으로 폭발물 ‘콘포지션4(C4)’가 등장함. (중앙일보11.30자 9면, 경향신문11.30자 3면, 서울신문12.1자 5면, 조선일보1987.12.2자 3면)

▲ KAL858기 실종 다음날부터 ‘콘포지션4’와 ‘공중폭발’ 등장 [자료사진 - 서현우]

▷ 또 이 시점에 전혀 알 수 없는, “(폭발물은) 9시간 이후 폭발되도록 조작”이란 보도가 등장함. (중앙일보1987.12.2자. 경향신문1987.12.2자)
- 당시 중앙일보의 기사작성자인 엄○○ 기자는 국정원과거사위와의 면담에서 “추측성 기사였다”고 밝혔으나, 어떻게 이런 추측이 가능했는지 의문임. (국정원종합보고서255쪽)

▲ ‘9시간 후 폭발물 작동 조작’이란 보도를 확인함 -국정원종합보고서 [자료사진 - 서현우]
▲ 단지 추측으로 작성한 것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이런 추측이 가능한 것인지 의문 -국정원종합보고서 [자료사진 - 서현우]

▷ 역시 이 시점에 전혀 알 수 없는, “폭발물은 베오그라드에서 동양인으로부터 건네받은 것이며, 바로 콘포지션4이다”라는 보도도 있음. (경향신문1987.12.2자 3면, 서울신문1987.12.2자)

▲ ‘베오그라드에서 동양인 3명으로부터 콘포지션4’란 언론보도 -국정원종합보고서 [자료사진 - 서현우]
▲ 이런 보도들이 그저 추측성 기사이자, 우연일 것이라고 판단함 -국정원종합보고서 [자료사진 - 서현우]

▷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 “빈(비엔나)서 KAL858기 예약”이란 보도와, “빈 5박, 유고슬라비아 5박 후 바그다드로”란 보도가 이어짐. 빈 체류 일수는 김현희의 자백 전까지 결코 알 수 없는 것이었음. (동아일보1987.12.2자, 조선일보1987.12.2자)
- 1988.1.25자 비엔나인터폴의 회신문에서조차 “오스트리아 입국 상황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음”이라 되어 있음. (수사기록3301쪽)

▷ 이와 같이 사건발생 직후 3일 사이에 폭발물의 종류, 폭발물 수령 장소, 시한장치 작동시간, 경유지 체류일수에 이르기까지 한 달 보름여 후의 수사발표 내용과 완벽히 일치하는 내용의 보도들이 쏟아짐.
- 이 기간엔 KAL858기의 실종원인이나, 바레인에서 음독을 기도한 두 남녀의 신원에 대해서 전혀 알려지지 않았음.

▲ 비엔나(빈) 5박을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자료사진 - 서현우]

▷ 이런 보도들이 어떻게 가능했는가에 대한 당시 취재 기자의 증언은 다음과 같음.
- “무슨 호텔에 들었다. 또 몇 시에 탑승했다. 그 소스(source)는 대부분 아마도 제 기억에는 정부당국에서 릴리스(release)한 것 같습니다.” (당시 한국일보 최해운 기자-MBC'PD수첩)

▷ 또 당시 경향신문의 기사를 작성했던 송○○ 기자의 증언도 있음.
- “경찰, 대한항공, 외무부 등에 의존하다 보니 그런 기사가 나왔을 것이다.” (국정원종합보고서252쪽)

▲ 정부당국에 의존하여 작성했다는 진술 -국정원종합보고서 [자료사진 - 서현우]

▷ 위에서 두 기자가 언급한 정부당국이나, 경찰, 외무부 등은 어떻게 그 시점에 위 기사의 내용들과 같은 정보를 입수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상존함.

6. 출처불명의 허위보도

6-1. 당시 국내 언론들은 이구동성으로 하치야 마유미 명의 여권이 위조임을 파악하게 된 경위를 문제의 여권이 남성 고유의 여권번호를 차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도함. (조선일보1987.12.3자 3면)

▷ 그런데 일본여권은 여권번호만으로 남녀를 구별할 수 없음. 이는 2004.3 국정원이 KAL858 가족회에 보내는 답변서에서도 인정한 것임. (‘국정원의 가족회에 보낸 답변서’28쪽)

▲ 남성전용의 부호가 새겨져 있다는 여권에 관한 당시 언론보도 [자료사진 - 서현우]
▲ 남성전용 여권에 대해 부인한 국정원의 답변 -‘국정원의 가족회에 보낸 답변서’ [자료사진 - 서현우]
▲ 남성전용 여권에 대한 당시 허위 보도를 재확인함 -국정원종합보고서[자료사진 - 서현우]

6-2. 당시 한 언론은 바레인 병원소식통들에 의한 것이라며, “의사들이 음독여성의 위를 세척했으며, 그녀의 치아에서 청산가리 찌꺼기가 검출되었다고 밝히고, 이 여성이 젊기 때문에 소생할 것이라 전했다”라고 보도함. (동아일보1987.12.2자)

▷ 이 보도는 2일 뒤 바레인 국립 살마니아 병원의 응급부장 야코비안 박사의 기자회견에서 부인됨. (동아일보1987.12.4자, 조선일보1987.12.5자 3면)

6-3. 한국 측으로의 신병인도 직전 상황을 전하는 한 언론보도엔 “잔뜩 겁을 먹은 표정의 하치야 마유미(김현희)는 ‘내가 왜 한국에 가야 하느냐?’며 우리말로 울부짖었다“고 보도함. (조선일보1987.12.17자 9면)
▷ 이는 현재 진위여부를 알 수 없음. 안기부 발표에 의해 공식적으로 김현희가 우리말을 시작한 시점은 한국으로 이송된 8일 후인 1987.12.23 20:00경임.

▷ ‘바레인보고서’에 의하면 김현희가 “한국 측에 이송되어 한국인 호위원들(남자2, 여자2)에 의해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에도 그녀는 겁먹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며, 바레인 공항에 도착하기 전 그녀는 호송하러 온 영국인 고위간부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 감사합니다.(God Bless, Thank you!)’라고 말했다“고 함. (바레인보고서111, 112항)

▲ 바레인에서 우리말로 울부짖었다는 당시 언론 보도 [자료사진 - 서현우]
▲ 겁먹은 기색 없이 작별인사를 함 -바레인보고서 [자료사진 - 서현우]

▷ 바레인보고서의 내용은 앞서 언론보도의 내용과 다른 것으로, 언론보도의 내용은 필경 당시 안기부의 ‘무지개 공작’과 관련 있을 것으로 보아짐.

7. 언론보도의 원천이 안기부라는 정황증거

7-1. 김현희, 김승일의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에서의 투숙호텔이 실제 ‘메트로폴’ 호텔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다수의 언론이 ‘메트로폴리탄’ 호텔이라 보도한 적이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후 김현희의 진술서와 안기부 수사발표문에도 공히 ‘메트로폴리탄’ 호텔이라 함. (수사기록568, 569, 570쪽-1회신문조서, 수사기록3281쪽-반성문, 수사기록3742쪽-1회검찰신문조서, 안기부수사발표문13쪽)

▷ 이는 김현희의 진술과 언론보도의 내용이 동일한 원천에서 비롯되었음을 의미함. 즉 김현희의 진술은 자신의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전에 주어진 어떤 원안에 의한 것이라는 의미임.

▷ ‘메트로폴’ 호텔이라 보도한 신문, 방송이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안기부 수사발표에는 ‘메트로폴리탄’ 호텔임.

▲ ‘메트로폴’에서 ‘리탄’이 첨가된 흔적 -안기부 신문조서 [자료사진 - 서현우]

8. ‘미야모토 아키라’를 통해 본 무지개 공작과 언론

8-1. 사건 발생 3일 만에 시작된 무지개 공작 문건이 언제 작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공작의 시작과 동시에 KAL858기 사건을 북한과 연결짓는 결정적인 근거로서 전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기사가 바로 재일 북한공작원이라는 미야모토 아키라(한국명 이경우)와 관련된 내용임.

▲ 음독 불과 1시간여 만에 언론과 접촉하여 ‘미야모토 아키라’에 대해 증언한 수수께끼의 인물 진짜 ‘하치야 신이치’ [자료사진 - 서현우]

▷ 미야모토 아키라의 등장은 하루 전 바레인에서의 두 남녀의 음독과 연동되어 나온 것이지만, 공교롭게도 무지개 공작의 개시 첫날인 1987.12.2에 언론에 전면적으로 등장함. (위 조선일보1987.12.2자 1면)

▷ 그의 등장은 국민들로 하여금 KAL858기 실종의 원인으로 북한이 각인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됨.

8-2. 미야모토 아키라에 관한 첫 언론보도는 바레인에서 두 남녀의 음독이 있은 불과 1시간 후부터 언론접촉을 시작한 김승일 소지 위조여권상의 실제 주인공인 도쿄 거주 진짜 하치야 신이치의 증언에 의해서 이루어짐.

▷ 그의 증언에 의하면, 미야모토 아키라는 자신(진짜 하치야 신이치)의 여권발행을 대행해주고, 또 84년 태국방문에 필요한 비자를 받기 위해 여권을 한 달 가량 빌려간 인물이었다는 것임.

▷ 그런데 일본 경찰은 “미야모토 아키라가 김승일에게 위조여권을 제공한 배경 내지 증거는 판명되지 않았다”고 수사보고 함. (수사기록3209쪽-미공개 부문)

8-3. 진짜 하치야 신이치의 증언으로 미야모토 아키라, 즉 이경우는 연일 한국 언론보도의 중심인물이 되었는데 보도의 주요 초점은 이경우와 북한과의 관계였음.

▷ 이경우에 대한 언론보도의 핵심내용은, “이경우는 제주도 한림읍 금릉면 출신으로 ‘남로당 청년동맹위원장’을 지내면서 4․3폭동의 주동자로 활동하다 도일한 인물”이라는 것임. (조선일보1987.12.4자 1면)

▷ 또 다른 실례로, “제주방송에 의하면 이경우는 해방 후 좌익 활동하다 도일하여 조선대학교에서 서기로 근무했다”고 보도함.(MBC뉴스데스크1987.12.4자)

▲ 심지어 ‘宮本(미야모토) 아웅산테러에도 개입 혐의’라고 한 당시 언론보도 [자료사진 - 서현우]

▷ 이러한 내용에 더하여, “이경우의 형 이지우는 1970년경 간첩단 관련으로 체포된 인물”이라는 내용이 잇달음. (조선일보1987.12.4자 1면)

▲ 이경우가 ‘남로당 청년동맹위원장'이었고 '제주폭동 주동자'였다는 당시 언론보도 [자료사진 - 서현우]

▷ 이와 같이 당시 이경우는 언론보도에 의해 “KAL858기 사건과 북한을 연결짓는 핵심적 고리”로 등장했는데, 만일 이경우가 없었다면 제대로 된 물증에 근거하지 않은 김현희의 진술 및 KAL858기 사건 수사결과는 상당히 한계에 직면했을 것임.

형 이지우도 북한 간첩이었다는 당시 언론보도 [자료사진 - 서현우]

▷ 어쨌든 당시 이경우는 바레인에서 죽은 두 남녀의 배후인물로 즉각 부각되고 북의 거물공작원으로 등장함.

▷ 그러나 당시 이경우의 소재는 확인되지 않은 상태로 북으로 건너갔다는 설에서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설, 또 그 얼마 전까지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으며 이웃이 목격했다는 설까지 다양했음. 여하튼 현재까지 수수께끼의 인물로 남아 있음.

8-4. 이경우에 관한 이러한 일련의 보도내용들은 실상 가공과 허위로 드러남.

▷ 이경우는 “일제하에 일본으로 건너간 뒤 해방정국엔 국내에 없었고, 4.3사건 및 좌익 활동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음”이 드러남. (KBS스페셜 취재내용. KBS‘열린채널’)

▲ 당시 안기부의 내사자료와 달리 일본 측 자료엔 이경우가 1938년 도일했음을 알리고 있음 -국정원종합보고서 [자료사진 - 서현우]

▷ 또 이경우의 형 이지우 역시 “과거 간첩사건에 연루된 적이 없었고, KAL858 사건 당시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음”이 확인됨. 이지우가 세상을 떠난 후 이지우의 처가 남편의 유골을 안고 영구 귀국하여 현재 고향인 제주도에 살고 있음. (KBS‘열린채널’)

▲ 당시 안기부 내사자료와도 다른 이경우 도일 연도 -안기부 수사발표문 [자료사진 - 서현우]
▲ ‘형 이지우, 검거된 간첩’이란 당시 보도에 대해 단순히 오보라고만 추정함 -국정원종합보고서 [자료사진 - 서현우]

▷ 일본경찰은 한국 언론이 1970년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보도한 이경우의 형 이지우에 대한 정보를 (한국당국에 의해) 잘못 판단하여 수사대상에 올린데 대해 직접 이지우를 방문하여 사과와 함께 선물을 전함. (KBS‘열린채널’)

▷ 이와 같이 당시 출처 불명의 왜곡된 정보가 신문․방송을 오가면서 부풀리고 마치 사실인양 굳어짐.

8-5. 이경우가 북한공작원이라는 결정적 근거를 담은 보도는 그가 1985.3 북한공작원이 개입된 ‘니시아라이(西新井)’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경찰에 수배 중인 인물이라는 것이었음. (조선일보1987.12.3자)

▲‘미야모토 아키라’(이경우)에 대한 당시 언론보도  [자료사진 - 서현우]

▷ 니시아라이 사건은 실상 전모가 모호한 사건인데, 그렇듯 어떻듯 실제 이경우가 일본경찰에 수배 중이라는 보도는 모두 사실이 아니었음. (‘파괴공작’)

▷ 위 내용은 국정원종합보고서에 의해서도 뒷받침되는 것으로, 국정원종합보고서가 확인한 당시 일본경찰이 주일 한국대사관에 보낸 전문에 의하면 “니시아라이 사건으로 미야모토 아키라를 수배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었음. (국정원자료 No.10-국정원종합보고서336쪽)

▲ 일본경찰이 ‘미야모토 아키라’(이경우)를 수배한 사실이 없었음을 확인함 -국정원종합보고서 [자료사진 - 서현우]
▲ 니시아라이 사건 무렵, 병원에 입원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는 미야모토 아키라의 자필 입원신청서 [자료사진 - 서현우]

8-6. 당시 안기부의 수사발표엔 이경우의 정체와 관련, “1981.7 북한스파이 고덕환에게 여권과 외국인등록증을 위조해 제공하는 등 일본에 침투한 북한스파이의 재정지원 책임자로 활약”하였다고 함.

▷ 위 발표내용의 근거는 안기부 내부의 회신문(해외담당○국장→수사국장)으로, 회신문의 내용은 일본 언론의 보도내용을 인용한 것이었으나, 일본경찰의 수사결과보고서에 ‘고덕환’ 관련내용은 없음. (국정원자료609쪽-국정원종합보고서345쪽)

▲ 당시 안기부의 허위발표를 확인한 국정원종합보고서 [자료사진 - 서현우]

▷ 이경우에 대한 언론보도의 내용이 근거가 없거나, 허위사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안기부수사발표에 고스란히 등장함으로서 당시 언론보도의 원천이 안기부였음을 재차 증명해 줌. (안기부수사결과자료37쪽)

▷ 결론적으로 당시 안기부는 온갖 허위정보를 통해 한 인물을 가공․날조하고, 언론은 한바탕 그 장단에 놀아남으로서 KAL858기 사건 수사의 든든한 토대로 삼았음.

9. 이해할 수 없는 안기부와 미야모토 아키라의 관계

9-1. 국정원종합보고서가 확인한 당시 안기부의 자료에 의하면 미야모토 아키라는 ‘진짜 하치야 신이치’의 증언에 의해 갑자기 등장한 인물이 아니라, 이전부터 안기부와 관계되어 있었음.

▲ 안기부 공작원이 이경우 형제와 관계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보고서가 존재함 -국정원종합보고서 [자료사진 - 서현우]
▲ 안기부 공작원의 동생이 평양의 이경우 장례식에까지 참석했다는 이해할 수 없는 안기부보고서의 내용 -국정원종합보고서 [자료사진 - 서현우]

▷ 국정원은 위 안기부 보고서 내용의 배경과 그 실체, 더하여 이경우와의 관계에 대해 밝혀야 할 것임.

10. 여론 공작의 산물

10-1. “마유미, 북괴공작원 가능성. 유창한 한국어로 신문에 응함. 어깨와 등에 칼자국에다, 남자처럼 근육질”이라는 보도들이 쏟아짐. (MBC뉴스데스크1988.1.13자)

〈도쿄 김승한 특파원이 보도합니다.
● 기자: 하찌야 마유미는 현재 한국 수사관들의 질문에 유창한 한국어로 답하고 있고 어깨에 칼자국 상처가 나있는 점으로 볼 때 특수 훈련을 받은 공작원일 가능성이 높다고 오늘 교토 통신이 전했습니다. …
… 이 소식통은 한 여성수사관이 마유미와 함께 목욕을 했는데 어깨 등 세 곳에 칼자국으로 보이는 상처가 나있었으며 팔 근육이 남자처럼 발달해 있었다고 밝히고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북한에서 특수 훈련을 받은 프로 공작원일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습니다. …
도쿄에서 MBC 뉴스 김승한입니다.〉

▷ 이와 같이 미확인보도들이 난무하며 한국과 일본 사이를 오가면서 증폭됨.

▷ 지금까지 살펴본 바, 어쩌면 ‘무지개 공작’이 국정원종합보고서의 시각대로 단지 “기 발생한 KAL858기 사건을 사후에 정치적으로 활용한 정도에 그친 것이 아니라, 정황으로 볼 때 KAL858기 사건, 그 자체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상존함.

11. 출처불명의 미확인 보도

11-1. 두 김의 음독 직후 언론보도엔 “일본경시청 소식통에 의하면 하치야 마유미와 함께 투숙한 사람은 40대의 건장한 남자이며, 바레인 현지 소식통은 이 남자의 나이가 35세 가량이다”라는 내용이 있음. (조선일보1987.12.2자 1면, 한국일보1987.12.3자 11면)

▲ 음독 다음날의 이해할 수 없는 언론보도내용 [자료사진 - 서현우]

▷ 위 보도의 원천에 대해서 현재까지 알려진 바가 없음. 단지 ‘파괴공작’에 의하면 두 김의 오스트리아 비엔나 체류 시, 40대 가량의 제3의 인물이 두 김과 함께 목격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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