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5)시들은 건설「붐」 자금 없이 손도 못 대혁명전엔 한 해 만여 호 지었건만건축의 망치 멈춘 지 오래 〇... 「외국 사람 보는 눈에 야만한 나라로 비칠 것이니...」 이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간선도로의 눈에 비치는 곳만은 「문명된 나라로 부끄럽지 않은 현대식 「빌딩」을 지어야 한다」고 곧잘 서둘러 댔다. 이(이승만)씨의 이러한 담화 한마디로 서울시내만도 수많은 곳에 이른바 「문명된 건물」들이 세워졌다. 사변으로 쑥밭이 된 서울거리와 그밖에도 여러 도시의 폐허는 이렇게 하여 요란한 망치소리가 울렸다.〇... 털어 놓고 이야기가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1. 동북공정과 동북아역사재단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은 중국 정부의 핵심 싱크탱크인 중국사회과학원에 설치한 중국변강사지연구센터(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가 동북지역의 3개 성(省)과 연합하여 시작한 정치성을 띤 대규모의 프로젝트로서,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의 줄임말이다.2000년 12월 중국공산당 중앙이 승인하고, 2002년 2월 28일부터 시작되었는데, 전통적인 한국의 역사와 현재 및 미래의 한반도와 관련된 부분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논단 민족 자주적 평화통일의 기본방향 (하)=남북협상을 통해 통일의 길로 나아가자= 이재춘 3, 통일운동의 방향통일운동의 방향은 민족자주적이라야 한다. 민족자주역량의 육성이 아니라 민족자주적 통일운동을 전개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이제는 외세의존을 배격하고 민족자주적 평화통일의 길만이 남아 있다. 하나밖에 없는 유일하고 보편타당한 이 길을 실천하자면 보다 과학적인 확고한 방향이 설정되고 그 방향에 의거하여 민족 전체가 매진해야 한다.① 민족자주적 역량을 분산시키지 말고 굳게 단결된 유일한 단일조직체로 재정비해야 한다. 지금 중앙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기독교에, 특히 천주교에는 ‘고해성사(告解聖事, Confession)’라는 의식이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개신교파에는 ‘고해성사’가 없다. 그리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비판하거나, 혹은 비판하도록 강요받는 19세기말에 만들어진 ‘자아비판(自我批判, Self-criticism)’이란 자기 검열 행위도 있다. 이번 글은 필자가 기독교인으로 우리 민족 앞에 드리는 ‘고해성사’이자 ‘자아비판’이다.1. 치졸한 사대주의사대주의(事大主義, Sadaejuui, flunkyism, toadyism)
사설일본의 정치경제대표들의 통일의 빈번한 내왕과 우리의 의혹=미국중심의 정치⋅군사⋅경제「블럭」화 공작의 일환이다.= 국민일반의 회의적인 눈초리도 아랑곳없이 한⋅일간 협상기운은 급각도로 진전을 보이고 있으며, 관계대표자들의 내왕⋅접촉 또한 빈번하여지고 있다. 지난 6일 내한한 일본국회의원들로 구성된 방한사절단에 이어 이번에는 일본경제계 중진들로 망라된 일본경제사절단 약 20명 일행이 금월 중으로 내한하리라고 한다. 이들 일본사절단들이 단순한 시찰이나 관광을 목적 삼아 입국한 것 아님은 동 사절단들의 내한에 이르기까지의 경위라든가 한⋅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등용문(登龍門)이란 고사(古事) 단어가 있다. 『후한서(後漢書)』 「이응전(李膺傳)」에 “士有被其容接者 名爲登龍門”이라는 글이 있다. 즉, “선비로서 그의 용접을 받는 사람을 이름하여 등룡문이라 하였다”라고 적혀 있는 것이다.여기에 나오는 등룡문은, 「이응전」의 주해(註解)에 따르면 ‘황하(黃河) 상류에 룡문이라는 계곡이 있는데, 그 근처에 흐름이 매우 빠른 폭포가 있어 그 밑으로 큰 고기들이 수없이 모여들었으나 오르지 못하였으며, 만일 오르기만 하면 용이 된다’라고 하였다. 그 후
제1차남북협상을 회상하며 - 저 산 너머 통일은 있을 것인가 (완) 송남헌 단정으로 민족분열=양김선생 평양에 엄숙한 책망 회신=수난역정 무엇으로 보상? 4월 25일 연석회의는 일단 끝마치고 4월 26일 남한에서 간 우리들은 연석회의 결정서만으로 만족을 못하고, 다시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4김 회의를 개최하여 좀 더 앞으로의 구체적 방안을 모색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 결과 4월 26일밤 김두봉 저에서 4김회담이 개최되었었으나, 앞으로의 남북정세의 월이를 본 다음 대책을 수립하기로 하고 이날 밤의 회담을 다만 의례적인 회담으
침략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짱돌로 저격한 사나이1905년 11월 22일 오후 6시 30분이 조금 넘은 시각, 열차가 안양역을 출발하여 서울로 향한 지 불과 5분 쯤 지났을까 하는시간이었다. 열차가 막 서리재에 들어섰을 때 갑자기 날아든 돌멩이가 창문을 강타하면서 유리창은 박살났고, 유리 파편 5개는 열차에 타고 있던 한 사람의 왼쪽 볼 3곳, 왼쪽 눈 위 1곳, 왼쪽 귀 아래쪽 1곳 등 얼굴 다섯 군데에 상처를 입혔다. 열차에 타고 있던 일행은 혼비백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짱돌 공격을 받은 열차에는 이날 을사늑약의 원흉인 일본의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육군사관학교 교정에서 홍범도와 이회영, 김좌진 등의 동상이 기어코 철거된 모양이다. 결국 한국의 군부가 육사의 뿌리가 광복군도 독립군도 아니며, 대한제국의 무관학교나 조선의 사관양성소와 훈련원, 훈련도감도 아니라는 주장을 한 것이니, 결국 한국의 군사학교는 신라의 화랑(花郞)이나 고구려의 경당(扃堂)에서 원류를 찾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1. 오늘의 화랑대, 육사 생도는 부끄러움을 알라많은 사람이 화랑이 삼국을 통일한 힘이라고 말한다. 화랑의 존재가 삼국을 통일한 힘이 아니라, 백제
거울부패의 피해자와 가해자정실인사 그늘엔 굶주린 실업자들 〇... 혁명의 혜택을 입은 자와 피해를 입은 자가 있다.... 아니 자유와 「빵」을 잃은 자와 독점한 자가 있다는 것이 옳다. 더 많은 굶주림의 자유와 더 많은 박해, 억압의 피해자들이 혁명을 한낱 꿈으로 만 돌리지 않으면 안 될 서글픔을 반추해야만 했다.〇... 사월의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으며 숨져간 젊은 넋들은 부패와 부정에 항쟁했던 것이다. 잘 먹고 잘 입고 멋대로 독점하며 누리던 권세와 영화를 만민에게 평등케 하려고 꽃 같은 청춘을 아낌없이 던졌던 그날로부터 일년..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1. 1923년 9월 관동대지진꼭 백 년 전,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59분 일본 가나가와현(神奈川縣) 중부에서 사가미만(相模灣) 동부, 스호(房總) 반도에 걸친 일대를 진원지로 한 대지진이 일본 간토(關東) 지방을 엄습하였다. 지진의 진도는 7.9였다.마침 그때가 점심시간이었기에 지진이 일어나면서 대화재가 발생하였고, 피해는 남간토 일대를 중심으로 서쪽으로 시즈오카(靜岡)와 야마나시(山梨) 두 현의 동부에까지 미쳤다. 첫 지진 이후 5일 오전 6시까지 여진(餘震)은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두 점의 [도산서원도(陶山書院圖)]가 있다. 한 점은 영조와 정조시대에 예림의 총수라 일컬음을 받는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실경산수이고, 다른 한 점은 작가 미상의 실경산수(實景山水)이다.표암 강세황은 화조(花鳥)와 금충(禽蟲)을 비롯해 산수(山水)와 인물에 이르기까지 그림의 여러 분야에 능하였고, 글씨도 잘 썼다. 또한 그는 당대의 비평가이기도 하여 여러 작품 위에 화평(畵評)을 남겼고, 특히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1815년 이후)를 일찍이 발탁
세상 (4)/ 사회의 축도, 유질물이 대부분 전당포(典當鋪)사회(社會)의 축도(縮圖), 유질물(流質物)이 대부분(大部分)“돈 없다고 잡지도 않고, 자유당(自由黨)때보다 더해졌습니다.” 〇... 「근간 시중 상가 경기가 불양하온 관계로 매월 유질물(流質物) 경매에 막대한 손해를 당하옵기...」 - 시립전당포 창구에 붉게 써 붙인 공고문의 첫 머리는 이렇다.물건을 맡기고 기한이 되어도 찾아 못가는 세상살이의 그늘을 이 글귀는 웅변한다.대출최고액 一만환을 四개월 기한으로 三부 五리라는 싼 이자로 쓰지만, 세월이 흘러가도 갚을 길이 없는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조선중기의 창석(蒼石) 이준(李埈, 1560~1635)은 선서하였다. 선서(善書)란 ‘글씨를 잘 썼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현전하는 그의 작품은 간찰(簡札)마저도 매우 희소하다.창석 이준과 그의 형 이전(李㙉)은 조선중기에 형제간의 우애로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인물이니 만치, 이전과 이준 형제의 유묵은 조선시대에도 수집가들 사이에서 선호되었지만, 좀처럼 볼 수가 없다. 특히 이전의 유묵은 아직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것이 없어 그 수준을 평하기가 불가능한 것 같다.1. 창석 이준의
논단민족 자주적 평화통일의 기본방향 (상)=남북협상을 통해 통일의 길로 나아가자= 이재춘우리 민족의 유일한 과제인 통일의 기본방향은 민족자주적인 평화통일임을 그 누구도 부인할 사람은 없으리라고 본다. 그것은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침해 당함을 불원하며 피지배를 원하는 민족이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나라에는 50평생에 아직 한 번도 조국의 통일독립국에 생을 영위해 본 적이 없는 비참하고 애절한 역사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번만은 생전에 조국의 통일을 보고 죽어야겠다는 민족의 염원을 한결같이 절규한다. 이 당연한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기존의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의 관점에서는 삼성사와 문화류씨(文化柳氏)와의 관련성을 놓치고 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제 삼성사에 관한 나의 관점을 논하고자 한다.1. 구월산이냐? 평양이냐? 백두산이냐?환웅이 하늘로부터 하강했다고 하는 삼위(三危)태백이 어디인가? 묘향산인가? 구월산인가? 백두산인가?일연(一然, 1206~1289)의 《삼국유사》에는 “웅(雄)이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정상”이라 하며, 그 주에 “즉 태백(太伯)은 지금의 묘향산(妙香山).”이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시민모임 독립’과 ‘지역사’(지도에 역사를 새기는 사람들)가 선정한 10월의 근현대사적지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입니다. 은 최근 국방부가 육사 교정에 있는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 이전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하면서 이를 우려하는 시민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 필자주‘장군의 귀환’과 ‘장군의 위기’2021년 8월, 홍범도 장군(1868-1943)의 유해는 카자흐스탄에서 국내로 봉환되어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사설통일의 전진을 위하여=남북학생회담을 남북정치회담으로 생각하는 집권당의 위대한 무식= 이른바 「스티븐슨」결의안이 통일에 관한 좌표를 적어도 6⋅25사변 이전의 선까지 회복시킨 것이라면 민통련 학생들의 남북접촉호소와 그에 대한 북한측의 즉각적인 반응은 기왕의 남북협상을 연상시키는 상태까지 문제를 추궁한 것으로써 요즘 우리 주변의 통일문제를 에워싼 동태는 실로 괄목할만한 것이다. 이제 바야흐로 통일문제는 모색의 단계에서 구체적 실천의 단계로 옮아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그러나 아무리 통일문제가 현실적 실천의 단계에 옮아졌다하더라도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1476년 병신년에 [안동권씨세보] 3권3책이 목판본으로 간행되었고, 1565년 을축년에는 [문화류씨세보] 10권10책이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흔히 [안동권씨 성화보]와 [문화류씨 가정보]라고 통칭하는 족보이다.이에 대한 일면을 고찰하고자 한다. 이번 고찰에서 필자는 이 두 족보의 내용을 검토하여 다른 문중에서도 임진왜란 이전에 세보를 편찬한 사실이 있음을 논하고자 한다.1.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임진왜란 이전 고족보현존하는 우리나라의 최고본 족보는 조선 성종(재위 1469~1494
제1차남북협상을 회상하며 - 저 산너머 통일은 있을 것인가 (2) 송남헌 협상참가 인사박해남북의 양극세력들은 회심의 미소 미⋅소양대세력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인하여 국토의 양단, 민족의 분열, 또다시 재통일을 위한 국제회담, 즉 모스크바 삼상회의결정, 이러한 과정을 밟아 1946년 제1차 미⋅소공위가 서울에서 개최되었으나 실패에 돌아갔다. 나는 미⋅소공위의 실무에 당무하였던 한 사람으로서 그 당시를 회고하여 제1차 공위 실패의 책임은 소련측에 돌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당시 남한에는 아직 좌익세력이 완전 조직화되지 못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