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육군사관학교 교정에서 홍범도와 이회영, 김좌진 등의 동상이 기어코 철거된 모양이다. 결국 한국의 군부가 육사의 뿌리가 광복군도 독립군도 아니며, 대한제국의 무관학교나 조선의 사관양성소와 훈련원, 훈련도감도 아니라는 주장을 한 것이니, 결국 한국의 군사학교는 신라의 화랑(花郞)이나 고구려의 경당(扃堂)에서 원류를 찾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1. 오늘의 화랑대, 육사 생도는 부끄러움을 알라

많은 사람이 화랑이 삼국을 통일한 힘이라고 말한다. 화랑의 존재가 삼국을 통일한 힘이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를 망하게 하여 우리 민족을 한반도에 몰아넣은 망족(望族)의 힘이 아닌가?

1970년대 중후반에 제세산업의 이장우(李彰雨)라는 사람이 쓴 『옛날 옛날 한옛날』(두레, 1981)이란 책이 있다. 그는 그 책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은 삼국을 통일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을 망하게 한 것이라는 논지를 언급한 적이 있다. 당시 그의 지적은 내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이장우의 그러한 주장에 앞선 20세기 초의 민족주의에 기반한 민족사학자들도 신라의 삼국 통일은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비판한 바 있다. 경상도 출신의 제2기 민족사학자 안호상(安浩相, 1902~1999) 박사도 그런 생각을 했는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수십 년간 만주를 지배”한 것으로 1970년대 중반에 말씀하시기에, 나는 “그 말씀은 궤변”이라고 말한 바 있다.

분명한 역사적 사실은 신라는 백제의 영토를 가졌을 뿐, 당이 차지한 대동강 이북지역에서는 고구려의 유민에 의하여 고구려 회복 운동이 가열차게 일어나고 있었고, 결국 그들은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 후에 발해를 건국하였다. 철없는 신라의 모리배들이 신라의 군대와 화랑을 당나라 군대에 복속시켜 백제와 고구려는 멸망시켰으니, 육사가 있는 지역을 지칭하여 ‘화랑대’라고 하는 것은 이제 홍범도와 이회영 등등의 동상을 철거하는 것을 보면, 정말 사실적인 표현인 것 같다. 오늘의 화랑, 육사 생도와 그 졸업생들은 작금의 현실에서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2. 훈련원

1392년(태조1) 7월에 조선이 건국되어 관제를 반포할 때 훈련관(訓鍊觀)이 설치되었다. 당시의 규정에 따르면 훈련관은 무예를 훈련하고, 병서와 전진(戰陣)을 교습시키는 일을 맡았다. 1394년에 중군군후소(中軍軍候所)를 흡수했고, 1405년(태종5)에는 병조의 속아문(屬衙門)이 되고, 계속 정비되어 1466년(세조 12)에는 훈련원(訓鍊院)으로 개칭하였다.

훈련원의 임무는 크게 시취(試取)와 연무(鍊武) 두 가지였다. 시취의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무과(武科)를 주관하는 일로, 초시(初試)는 한성에서 원시(院試)를 관장해 70인을, 각 도에서 병마절도사 책임 아래 120인을 뽑았다. 이들 190인을 병조와 훈련원에서 함께 주관해 복시(覆試)를 통해 28인을 선발하고, 이들은 최종적으로 전시(殿試)를 보아 등수가 정해졌다. 매년 봄·가을에 실시되는 도시(都試)의 경우, 중앙에서는 병조와 훈련원의 당상관이 시취의 일을 담당하였고, 내금위(內禁衛) 별시위(別侍衛) 친군위(親軍衛) 등의 시취도 훈련원이 주관하였다.

한편, 연무는 병서들을 습독하는 걸 포함해 훈련원이 군사력을 유지하고 발전하기 위해 주력하는 일이었는데, 중앙에서 매달 두 번씩 실시되는 습진(習陣)에 훈련원이 간여했으며, 특히 봄과 가을에 실시되는 겸사복(兼司僕)⸱내금위⸱충의위⸱족친위⸱장용위(壯勇衛)의 병기 검열은 훈련원에서 주관하였다. 그 밖에 구체적인 전술의 연구와 교습도 이루어졌다.

훈련원은 조선 후기인 1795년(정조19)에 약간의 조직이 변모하였고, 1884년(고종21)에는 중국 우창칭(吳長慶)의 공적을 추모하는 오장무공사(吳壯武公祠)가 훈련원에 세워진 바 있다. 1907년에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의 체결에 따라 폐지되고 군대 해산이 이루어짐으로써 없어지게 되자, 훈련원 소속의 많은 군사는 일본에 항거하는 의병과 독립군으로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한다.

3. 사관양성소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진압과 청일전쟁 이후, 갑오경장시에 조선의 군대를 근대화해야 할 필요가 대두한 가운데, 1894년 12월 22일에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고종을 알현할 때 군대를 소집하여 새로운 편제를 제정하기 전에 기존의 병정 중에서 장정을 뽑아 훈련대를 조직하여 당분간 근위병에 충당할 것과 군무아문 고문관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瀬幸彦〕를 불러서 군사상의 자문을 받을 것, 훈련대 연습에도 친히 참관할 것 등을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신식군대의 필요성을 절감한 고종은 이듬해인 1895년 1월 18일 훈련원의 병정 가운데에서 일부를 선발하여 1895년 4월 훈련원과는 별도로 신식 군대인 훈련대를 편성하였다. 그해 5월에 이들을 훈련하고 지휘할 초급 무관을 양성하기 위한 훈련대 ‘사관양성소’(士官養成所)를 일본 군대의 협조를 받아 설치하였다.

당시 이노우에 가오루의 후임으로 일본공사로 부임한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서울에 거류하는 일본인 낭인배⸱경관⸱상인을 끌어들이고 조선정부에 초빙되어 있던 일본인 고문관⸱신문사 사장⸱기자⸱통신원까지 가담시켰다.

미우라 고로는 훈련대의 간부들과도 함께 왕후 시해 계획을 세웠는데, 우범선(禹範善, 1857~1903)은 훈련대 군인 동원의 책임자였고, 여기에 ‘사관양성소’의 훈련생 상당수가 가세하여 10월 8일 새벽에 왕후를 시해하였다. 우범선은 왕후의 소각된 시신을 마지막으로 처리하는 과정에도 가담했다.

조선국이나 고종으로서는 외세와 결탁한 조선 군부의 기가 막힌 반역이었다. 이에 고종은 ‘사관양성소’를 즉각 폐지하였다. ‘사관양성소’는 왕후가 시해되기 직전인 8월 28일 제1회 졸업생만 배출하였다.

『박주영의 사관양성소 졸업증』, 1895년, 1매. 37×38.5cm. 필자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박주영의 사관양성소 졸업증』, 1895년, 1매. 37×38.5cm. 필자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수년 전에 나는 개국 504년(1895년) 8월 28일, 박주영(朴周英)이 수여받은 ‘사관양성소’의 졸업증 제7호와 장교 임명장을 경매에서 일괄 매입하였다. 현재 이 졸업증은 확인된 ‘사관양성소’ 졸업증으로는 유일한 것으로 확인된다. ‘사관양성소’는 훈련대 밑에 있었기에 ‘훈련대 사관양성소’라고도 한다.

졸업증 수여자 박주영은 대한제국 시기의 군인이다. 계급은 참위였는데, 1907년 7월 군대 해산 후에도 『승정원일기』에 그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보면, 그는 군대 해산에 반발하여 저항한 인물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처음이고 마지막인 근대의 첫 ‘사관양성소’는 이런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의 근대 군대에서 민족정신과 독립정신을 잃은 결과가 어떠했는지 잘 설명하여 준다.

4. 육군무관학교

이후에도 사관 양성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사관양성소’가 해산된 이듬해, 1896년 1월에 무관학교 관제를 공포하고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를 설립하였다. ‘육군무관학교’는 1896년 5월에 설립되었는데,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지속된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인해 5명의 졸업생만 배출하고 문을 닫았다.

1897년 2월 고종이 덕수궁으로 환궁한 뒤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나서 1898년 7월 1일 무관학교를 군부 소속으로 설립하였다. 당시 ‘육군무관학교’는 서울 종로구 신문로 1가 238 신문로빌딩 부근에 있었다.

학교 직원은 참령(參領)인 교장 1인(군사 과장 겸임), 부관⸱의관⸱교두(敎頭) 각 1인, 교관 3인, 조교 8인, 이밖에 번역관⸱번역보⸱주사⸱전어생(傳語生) 등으로 구성하였다. 군부 대신이 정한 학도의 입학 요건은 연령 20∼30세의 신체 건장하고 총명한 자 중에 군부의 장⸱영⸱위관이나 책임관의 추천해야 하였다.

3과로 나누어 제1⸱2과는 속성과로 군부 대신이 정하는 기간 동안 수업, 훈련하게 하고, 제3과는 졸업과로 5년의 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관비로 충당되는 학비 외 학도들에게 일정한 수당금을 지급하였다. 교수 과목은 무술학⸱군제학⸱병기학⸱축성학(築城學)⸱지형학⸱외국어학⸱군인 위생학 및 마학(馬學) 등이고, 훈육 과목으로 교련⸱마술⸱체조⸱검술⸱군용문장 및 제근무의 훈회(訓誨) 등이었다.

1899년에 ‘육군무관학교’는 원수부(元帥府) 검사국 소관으로 옮겨지고 학도 추천의 범위도 넓어졌다. 입학 연령은 23세 이하로 축소됐지만, 50인 이내의 사비 학생의 입학이 허가되었다. 당시 관비 학생 수는 대개 200인이었는데, 1900년 1월 장연창(張然昌)을 비롯한 128인의 첫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그해 9월 개정된 관제에 따라 학술에 관한 교육은 교관단이 맡고, 훈련교육은 학도대가 맡으면서 이원화되었다.

『이종석의 육군무관학교 졸업증서』, 1903년, 1매. 41.5×52cm. 필자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종석의 육군무관학교 졸업증서』, 1903년, 1매. 41.5×52cm. 필자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신팔균의 육군무관학교 졸업증서』, 1903년, 1매. 독립기념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신팔균의 육군무관학교 졸업증서』, 1903년, 1매. 독립기념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내가 1980년대 중반에 우리 광주이씨 문중의 교지를 일괄 입수하면서 이종석(李鍾奭, 1878~?)의 ‘육군무관학교’ 졸업장을 입수할 수 있었다. 광무7년(1903) 9월 20일 자 ‘육군무관학교’의 졸업증서이다. 같은 해에 독립운동가 신팔균(申八均, 1882~1924)이 받은 동일한 졸업증서는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종석의 ‘대한제국 관원이력서’를 보면 그는 1900년 10월 1일, 육군무관학교 제2회 입학생이었고 1903년 9월 20일 졸업증을 받은 것을 보면 입학후 3년만에 졸업증서에서 밝히는 대로 속성과를 제2회로 졸업한 것이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원수부를 폐지하고 무관학교를 9월에 신설된 교육부에 이관, 소속시켜 일본식으로 개편하였다. 이듬해 2월 교육부가 폐지되면서 다시 군부의 지휘, 감독을 받게 된다. 당시 무관 학도는 유년학교 졸업생으로 수학 연한 3년을 원칙으로 하였다.

1904년 9월에 ‘육군무관학교’를 장교 양성 기관으로 만들어 종래의 천거 제도는 폐지하고 3년간의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 졸업생을 입학시킴으로써 졸업 기한은 총 6년으로 연장되었다.

‘육군유년학교’는 1904년 9월 무관생도(武官生徒)가 되는 데 필요한 보통학과 및 군인의 예비교육을 하여 육군의 각 병과의 무관학도가 될 인원을 양성한다는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취학연령은 15세부터 19세로 하고 수업연한은 3년으로, 이를 졸업하면 무관, 즉 장교양성기관인 ‘육군무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으나, ‘육군유년학교’를 졸업하여 무관에 임명된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육군무관학교’는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 해산되면서 무관학교의 모집 정원이 15인으로 축소되었다. 그 후 1909년 9월 ‘육군무관학교’가 폐교되면서 사관양성은 일본국 정부에 위탁한다는 조칙이 발표되었다. 근대적인 군사 제도의 개편과 함께 설치된 ‘육군무관학교’가 그 기능을 그나마 발휘하였던 것은 1898년에서 1904년까지 6년뿐이었다.

중요 졸업생으로는 군대해산시 자결한 박승환, 청산리 대첩의 지휘관 김좌진, 임시정부 국무총리 신규식, 대한통의부 의용군 사령관 신팔균, 임시정부 군무부 부장 오영선, 대한독립군단 참모총장 이장녕,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 독립운동가 조성환과 이갑, 재학 중 폐교되자 일본 육사로 유학을 간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등등이 있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의 졸업생 수는 282명이며, 이 가운데 14명이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당시 조선총독부 관리로 근무하고 있었다. 반면 1905년에 입학한 김좌진과 지청천 같이 이 학교에서 습득한 군사 경험을 토대로 무장 항일운동을 이끈 인물도 있었다.

5. 신흥무관학교

1910년대 국외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는 러시아와 만주의 국경지역인 흥개호 부근 봉밀산, 동간도 왕청현의 라자구 등 여러 곳에 세워졌다. 당시 독립운동 단체로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립된 ‘권업회’, 동간도의 ‘간민회’ 등이 있었다.

1911년 서간도로 이주한 민족운동가들은 그해 5월(음력 4월) 삼원포 대고산에서 군중대회를 열어 ‘경학사(耕學社)’ 조직을 결의했다. ‘경학사’는 서간도 이주민을 위해 농업 등 실업과 교육을 장려하고 장차 군사훈련을 시키기 위해 만든 결사(結社) 조직이었다.

같은 해 6월 10일(양력), 이상룡을 주축으로 윤기섭, 이시영, 이회영 형제와 김형선, 이장녕, 이장직, 이동녕 등 군인 출신이 중심이 되어 중국 지린성 류허현 삼원포에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였다. 일제의 눈을 피하고 중국 당국의 양해를 얻기 위해 ‘신흥강습소’란 이름을 내걸었으나 초기부터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군사학교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신흥(新興)이란 이름은 신민회의 ‘신(新)’자와, 부흥을 의미하는 ‘흥(興)’자를 합쳐 만든 것이다.

‘신흥강습소’는 길림성 통화현(通化縣) 제6구 합니하(哈泥河)에는 중학교 과정과 군사과를 두어 군인을 양성했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합니하 학교를 ‘신흥중학교’ 또는 ‘신흥무관학교’로 부르거나 인식하기도 했다. 공식 명칭은 어디까지나 ‘신흥강습소’였다.

‘신흥강습소’는 1919년 삼일운동이후 조선의 젊은이들이 몰려와 수용 한계를 넘자 유하현 대두자(大肚子)로 학교를 옮기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대두자가 본교, 기존의 합니하는 분교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대두자 학교터에서는 2~3,000여 명(추산)의 학생이 교육을 받았다.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와 ‘신흥무관학교’를 관통하는 인물로는 김좌진, 이장녕, 지청천 등등이 있다.

6. 이동휘의 대전무관학교

이동휘(李東輝, 1872~1935)는 이용익(李容翊, 1854~1907)의 추천으로 1895년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한 뒤 육군 참령으로 진급하였다. 1899년에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02년 개혁당을 조직하여 개화 운동을 했다. 1902년부터는 강화도 진위대장(鎭衛隊長)으로 활동하다가, 1907년에 강화도의 강화 진위대 참령으로 근무하면서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전등사에서 의병을 일으키려다 실패했다.

그해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하다가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해 투옥되었다. 그는 1912년 가을 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유배지를 탈출하여 북간도로 망명하여 국자가(局子街) 소영자(小營子)에서 김립(金立)⸱계봉우 등과 더불어 광성학교(光成學校)를 설립하여 지속해서 민족주의 교육활동을 전개하면서, 구례선(具禮先) 목사의 도움으로 북간도 전역에 기독교 선교사업을 진흥시키기도 하였다.

1913년 러시아제국 연해주로 망명하여 거점을 옮긴 후,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新韓村)을 중심으로 조직된 권업회(勸業會)에 가담하여 이상설, 이갑, 신채호, 정재관 등과 함께 ‘독립전쟁론’에 입각한 민족해방투쟁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일제와 동맹한 러시아 제국이 재러시아 한국인들의 민족운동을 탄압하자, 이종호(李鍾浩) 등과 더불어 중국 왕청현(汪淸縣) 라자우거의 한인촌으로 거점을 옮겨 ‘대전무관학교’(大甸武官學校)를 설립하고 독립군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나, 이듬해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관헌의 탄압으로 무관학교는 해체되고, 그 또한 일제 관헌에게 쫓기는 몸이 되어 왕청현 하마탕의 한인촌에 숨어 요양하였다. 이후 1919년에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첫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7. 박용만의 한인 소년병학교와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박용만(朴容萬, 1881~1928)은 1904년 ‘보안회’가 주도한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제에 의하여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이승만, 이동녕, 이상재, 이시영, 정순만 등과 만나 동지가 되었다. 1904년 12월 미국으로 출발하여 1905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그는 1905년 네브래스카주에 있는 링컨 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학년을 마치고 중퇴하였으며, 1906년 여름 숙부 박희병과 함께 미국의 콜로라도주 덴버로 가서 노동이민자를 위한 한인직업소개소를 운영하다가 헤이스팅스 칼리지 정치학과에 입학한다. 1907년 헤이그에서 개최하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하는 밀사를 돕고자 윤병구와 송헌주를 헤이그로 파견한다.

1908년 3월에는 스티븐슨을 저격한 장인환, 전명운의 변호 비용을 모금하고, 7월에는 콜로라도 덴버시 그레이스 감리교회에서 <해외애국동지대표자회의>를 개최하여 ‘한인군사학교 설립안’을 제출하여 통과시킨다. 1908년 9월 네브래스카 대학교 링컨에 편입해 정치학을 전공하면서 군사학을 부전공으로 택하여 ROTC 과정도 이수하였다.

1908년 12월 박용만은 네브래스카주 정부에 정한경은 커니지방정청에 교섭하여 마침내 헌법상에 없는 ‘한인군사학교’에 관한 묵허(默許)를 받아낸다. 1909년 6월에는 네브래스카주 커니에 있는 한인 농장내에 ‘한인소년병학교(The Young Korean Military School)’를 열어 한인청년생도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였고, 1912년 제1회 졸업생 13명을 배출하였다. 1910년에는 헤이스팅스 칼리지와 협의하여 ‘한인소년병학교’를 헤이스팅스 칼리지 구내로 이전을 한다.

같은 해 박용만은 김장호에게 소년병학교의 전권을 맡기고 병학교 유지를 위해 각 지역에 연조(捐助)를 받아 보탠다. 그리고, 1910년 10월 캘리포니아를 돌아보고 돌아가는 길에 신한민보의 주필을 맡기로 결정하여 1911년 2월 신한민보 제217호부터 252호까지 제4대 주필로 활약하며 무형의 정부 즉 가정부의 필요성을 설파한다.

미국 체류 중 네브래스카에서 한때의 옥중 동지 이승만을 재회하였다. 뒤에 그는 1913년 2월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했다. 191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신한민보’의 주필, 1913년 호놀룰루에서 ‘국민보’ 주필로 근무하였다.

미국 네브래스카에서 이승만은 옥중 동지인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로 건너갔다. 1912년 12월 박용만은 하와이에 먼저 도착하였고 1913년 2월 이승만이 도착하였다. 이승만과 박용만은 한성감옥에서 만나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둘 다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있었다. 이승만은 박용만의 소개로 하와이에 정착한 뒤 호놀룰루에 거주하며 교회 설립과 교육 운동에 주력했다. 그 뒤 이승만이 105인 사건을 폭로하는 『한국교회 핍박』을 출간하는데 서문을 써 주었고, 이승만의 옥중 저서 『독립 정신』을 번역, 출간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913년 12월 Nauuanu YMCA에서 한인지도자급 인사들과의 회합하여 ‘대조선국민군단’과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설립에 대해 합의한다. 그 후, 1914년 4월 박종수는 모든 도지권을 군단조직에 정식으로 인계하고, 임응전, 한태경, 한치운 3인은 자농하는 파인애플 농장을 넘겨주는 등 하와이 한인들의 절대적인 지원으로 1914년 6월 하와이 가훌루 ‘아후이마누’ 지역에 ‘대조선 국민군단’이 창설되고, 8월 29일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낙성식이 거행된다.

이렇듯 박용만은 강경 독립투쟁을 추진한 열혈 독립운동가이다. 그러나 텐진에 잠입하여 군사 단체 수립을 위한 모금활동을 하던 박용만은 1928년 10월 17일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던 이해명(李海鳴, 1896~1950)이 쏜 총탄에 맞고 사망하였다. (필자는 박용만과 미주 지역에서의 독립운동가 자료를 우리 리준재단이 기획 중인 만국평화재단 소장품으로 유상 입수하고 싶다.)

8. 노백린의 대한인비행가양성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비행기를 구매해 선전용으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실현하지를 못하였다. 1920년 2월 20일 군무총장 노백린(盧伯麟, 1874~1925)이 김종림(金種林)의 후원을 받아 독립운동에 필요한 한인 비행가 양성을 목적으로 독립 군단(獨立軍團)과 대한인비행가양성소(大韓人飛行家養成所)를 캘리포니아 윌로우스(Willows)에 설립하였다. 퀸트(Quint)학교 건물을 빌리고, 김종림(金種林)이 운동장과 비행기를 구입하였다.

1920년 3월, 이 비행기학교의 학생은 김전 김태선 박대일 박유대 박희성 손리도 신영철 신형곤 이도선 이영기 임상희 정리용 정몽룡 정흥성 조기초 조종익 조진환 최능익 최명길 홍종만 등 24명이었고, 그해 6월에는 30명으로 증가하였다. 공식 개교일은 1920년 7월 5일, 교장은 노백린, 총재는 김종림, 교관은 레드우드 비행학교의 교관이었던 브라이언트(Frank K. Bryant), 한국인 교관은 오림하(吳臨夏, 吳臨河)와 우병옥(禹炳玉) 이용선(李用善) 이초(李超) 등이었다.

김종림의 2만 불 기부와 40에이커의 운동장으로 시작된 이 학교의 운영비는 김종림이 매월 기부한 3,000불로 충당하였다. 학생들은 10불의 월사금을 내고 캘리포니아 교육국에서 임대한 퀸스 디스트릭트 학교 건물에서 교련, 전술, 비행술, 비행기 수리와 관리, 무선전신학(無線電信學), 영어 등을 배웠다. 1920년 6월 22일 김종림이 구매한 첫 번째 비행기가 도착하여 비행술 실습이 시작되었고, 이후 최소 2대의 비행기를 더 구매하였다.

1920년 7월 7일 오림하 우병옥 이용선 이초 등 4명이 제1회로 졸업하여 모두 이 비행기학교의 교관이 되었다. 1920년 말부터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하였고, 1921년 4월에 폐소하였다. 그러나 비행 학생들의 다른 비행학교로의 유학은 계속되었다. 1922년 학생수 41명을 기록하였고, 1923년 11명의 졸업생을 포함하여 1923년까지 7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대한인비행가양성소’는 독립운동에 필요한 한인 비행가 양성을 목표로 하였던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학교였다.

9. 맺는말

위에서 살펴본 대로 1392년부터 1930년 이전까지 조선국의 ‘훈련원’과 훈련대 ‘사관양성소’,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간도에서의 ‘신흥무관학교’와 ‘대전무관학교’, 미국에서의 ‘한인소년병학교’와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그리고 ‘대한인비행가양성소’까지 국립과 사립의 여러 군사학교가 있었다.

그리고 1920~30년대의 김산(장지락), 김원봉, 이용, 최용건 등등의 많은 독립운동가가 중국의 황포군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태능 육군사관학교에서 홍범도와 이회영, 김좌진 등 5인의 동상을 치우는 것은 무슨 속셈일까? 육사를 군부 내에 반민족 반민주주의를 키우는 요람으로 쓰려는 것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육사의 행동은 순국열사와 독립운동가 전체를 모독하는 일로서 매우 슬프고 참담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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