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시민모임 독립’과 ‘지역사’(지도에 역사를 새기는 사람들)가 선정한 10월의 근현대사적지는 <대전현충원 홍범도 장군 묘역>(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입니다. <대전현충원 홍범도 장군 묘역>은 최근 국방부가 육사 교정에 있는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 이전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하면서 이를 우려하는 시민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 필자주

‘장군의 귀환’과 ‘장군의 위기’

2021년 8월 18일 홍범도 장군 안장식.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 [사진-통일뉴스 자료사진]
2021년 8월 18일 홍범도 장군 안장식.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 [사진-통일뉴스 자료사진]

2021년 8월, 홍범도 장군(1868-1943)의 유해는 카자흐스탄에서 국내로 봉환되어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과거 노태우·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계속된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 노력이 끝내 결실을 맺은 것이다.

당시 언론은 독립전쟁의 영웅 홍범도 장군이 서거한 지 78년 만에 이루어진 ‘장군의 귀환’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우리 국민의 가슴은 뜨거워졌다.

사실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북한은 홍범도 장군이 평남 양덕 출신이라는 점을 내세워 유해 봉환의 우선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홍범도 장군이 카자흐스탄 내 고려인 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관계로 고려인 사회의 반대도 완강했다.

그런데 이런 어려움을 뚫고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면서 이루어진 ‘장군의 귀환’은 불과 2년 만에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다. 육사 교정에 있는 장군의 흉상을 철거하겠다는 입장이 발표되면서부터이다.

육군에 따르면 홍범도·김좌진·안중근 장군 등 7명의 독립전쟁 영웅을 기린 육사 안 충무관의 ‘독립전쟁 영웅실’은 지난 10월 16일부터 철거를 시작했다. 지난 8월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계획이 알려지면서 압도적 국민의 반대 여론에 부딪쳤던 육군이 이를 외면한 채 ‘독립군 역사 지우기’ 작업을 벌써 실천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조만간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시도가 있을 것이라는 우려는 조만간 현실로 다가올 듯하다. 하필 홍범도 장군 서거 80주기를 맞는 10월 25일을 전후한 시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도 고약한 모양새다.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육사에 설치하여 기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지난 9월 17일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반대 차량시위 장면 [사진-김학규 소장 제공]
지난 9월 17일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반대 차량시위 장면 [사진-김학규 소장 제공]
지난 9월 20일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를 반대하는 국방부 앞 1인시위 장면 [사진-김학규 소장 제공]
지난 9월 20일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를 반대하는 국방부 앞 1인시위 장면 [사진-김학규 소장 제공]

물론 국방부는 '철거가 아니라, 가장 적합한 장소인 독립기념관으로 이전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심지어 이전 대상지로 발표된 독립기념관의 한시준 관장조차 “직접 연락받은 바 없다”면서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독립기념관 수장고로 이전한다는 방침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힌 상황이다.  

국방부가 내세우고 있는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리는 더 기가 막히다. 홍범도 장군의 소련공산당 입당 이력과 1921년에 있었던 자유시 참변 개입 의혹을 문제 삼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국방부는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에 개입했다는 객관적인 근거 제시도 없었다. 소련의 지원을 받아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던 점, 말년에 부하들의 안정적 정착을 지원하고자 했던 맥락을 무시한 채 1927년 그의 나이 육십에 이루어진 소련공산당 가입을 비난하는 것은 국방부의 빈약한 역사인식을 드러낸 것에 다름 아니었다.

더군다나 소련공산당이 1943년 홍범도 장군이 서거한 지 7년이 지나 벌어진 6·25 한국전쟁에서 북한을 지원한 사실을 근거로 들 때는 그 몰역사적인 관점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육사가 독립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으므로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육사에 설치하여 기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논리 역시 설득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육사가 미군정이 운영한 군사영어학교에서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육사는 대한민국 육군의 장교를 양성하는 기관이다. 따라서 3·1운동의 결과로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의 육군이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군과 광복군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지난 2018년 육사 충무관 앞에 독립군총사령관 홍범도 장군을 비롯하여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 장군, 한국광복군총사령관 지청청 장군과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 장군,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선생 등 다섯 분의 흉상을 세운 것도 육사 생도에게 대한민국과 육사의 뿌리를 잊지 않도록 하고자 함이었다.

그럼에도 신원식 신임 국방부장관 역시 후보자 청문회 당시부터 “홍범도 장군 흉상을 ‘이전’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신 국방부장관은 육군사관학교가 홍범도 장군에게 명예 졸업장을 추서한 것에 대해서도 “육사와 홍범도 장군을 연계하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는 말로 그의 ‘단호한 의지’를 드러냈다.

이쯤 되면 국방부의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방침이 단순히 윤석열 정부의 이념 우선을 강조하는 행보의 하나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한·일관계 개선’이라는 미명 하에 최근 보여주고 있는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핵오염수 방류에 대한 ‘지지 입장’을 천명하고,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2018년 대법원 배상 판결을 사실상 부정하는 등 일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알아서 기는 듯한 대일 굴종 외교와 맥이 닿아 있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홍범도 장군, 그는 누구인가?

1922년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했을 당시의 홍범도 장군 [사진-김학규 소장 제공]
1922년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했을 당시의 홍범도 장군 [사진-김학규 소장 제공]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은 안중근, 유관순 등과 더불어 한국인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독립운동가의 한 분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번 육사의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이 담당한 긍적적인 측면은 국민들이 홍범도 장군의 활동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홍범도 하면 포수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의 포수 경력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탓에 15살의 어린 나이 때부터 3년여 간 평안 감영에서의 군생활(나팔수)과 황해도 한 제지소에서 한 3년간 노동자 생활, 금강산 신계사에서의 상좌승 생활을 거친 이후였다.

홍범도는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평민 출신의 의병대장으로 시작하여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군의 영웅이었고,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할 당시 레닌과 면담하여 권총을 선물 받는 등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로 거듭난 인물이 홍범도였다.  

홍범도 장군의 부인 이씨와 아들 양순

홍범도는 백발백중의 총 솜씨로도 유명하지만, 특유의 정직과 겸손으로 부대원들 사이에서 신망이 높았다. 홍범도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를 일지형식으로 남겼는데, 그 중 이씨 부인과 큰아들 홍양순에 대한 기록도 있다. 홍범도와 결혼한 이씨 부인은 신계사 상좌승 시절 만난 비구니 출신이었다.

1908년 일제는 삼수·갑산 일대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홍범도 부대를 와해시키기 위해 홍범도의 가족을 동원하여 그를 유인하고자 했다. 

일제는 “일본 천황에게 귀순하면, 당신에게 공작 작위를 하사한다고 합니다. 우리 가족에게 경사스러운 일입니다. 나는 물론이고 우리 자식들도 귀한 대접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는 문안까지 주면서 이씨 부인에게 편지를 쓰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이씨 부인은 “계집이나 사나이나, 영웅호걸이라도 실 끝 같은 목숨이 없어지면 그뿐이다. 내가 설혹 글을 쓰더라도 영웅호걸인 그는 듣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나더러 시킬 것이 아니라 너희 맘대로 해라. 나는 아니 쓴다.”라면서 의연하게 버텼다고 한다. 이씨 부인에게는 혹독한 고문이 뒤따랐지만 그의 결심을 바꾸지는 못했다. 이씨 부인은 끝내 혀를 깨물면서 까지 저항했고, 결국 그 후유증으로 얼마 못가 끝내 목숨까지 내놓아야 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물러설 일제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17살의 아들 양순을 홍범도가 있는 산속으로 보낸 것이다. 

홍범도는 단호했다. “이놈아! 네가 전 달에는 내 자식이었지마는, 네가 일본 감옥에 서너 달 갇혀 있더니, 그놈들 말을 듣고 나에게 해를 끼치려는 놈이 됐구나. 너부터 쏘아 죽여야겠다!” 하지만 홍범도가 쏜 총알이 양순의 왼쪽 귓방울을 자르고 지나갔고,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이후 양순은 홍범도 부대에서 훌륭한 의병으로 활약하다 정평 바맥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홍범도의 부인 단양 이씨와 아들 홍양순은 2021년 3·1절에 즈음하여 뒤늦게나마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평민 출신의 홍범도 장군과 양반 출신의 의병장 이범윤

평민 출신의 홍범도는 의병운동 시절 양반출신 의병장 이범윤(1856-1940)과의 악연에 대한 이야기도 남겼다. 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어 있기도 한 이범윤은 고종황제로부터 간도 관리사로 임명되었던 인물이다. 

1908년 삼수·갑산의 홍범도 부대는 탄약의 부족으로 위기를 겪게 되는데, 홍범도는 탄약 구입비 2만원과 함께 부하를 러시아령 연추에 있는 이범윤에게 보냈다. 그런데 두 차례나 보낸 부하는 일제의 정탐꾼으로 몰려 갇혀버렸고, 그 부하를 구하려고 보낸 부하조차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홍범도 부대는 힘을 잃게 되었고,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탈출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다. 홍범도가 우여곡절 끝에 연추에 도착해 보니 부하 둘은 여전히 갇혀 있고, 마지막에 보낸 한 명은 이범윤 부대원이 되어 있었다.

홍범도는 이범윤에게 자신의 부하를 일제의 정탐꾼으로 몬 근거를 따져 물었지만, 이범윤은 책임을 회피할 뿐 명쾌한 답변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양반출신 의병장과 평민출신 의병장 사이에는 이렇듯 골이 깊었던 것이다.

연해주에 정착한 이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한 홍범도 장군

홍범도는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표대회’에 참가했을 당시 러시아어로 “레닌으로부터 홍범도에게”라고 씌어진 권총을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레닌에게서 직접 선물 받기도 했으며, 이후 연해주에 정착하였다.

홍범도의 무덤이 머나먼 땅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 중앙공원에 있는 이유는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 때문이었다. 1937년 홍범도는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했고, 연금생활을 하면서 현지 고려극장 수위로 말년을 보내다 조국의 해방도 보지 못한 채 1943년 머나먼 이국땅에서 서거하였다.

홍범도는 지금도 중앙아시아 고려인 사회에서 “전설적인 빨치산이며 열렬한 독립투사”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그가 사망하기 전인 1942년부터 고려극장 극작가 태장춘 등의 노력으로 홍범도의 항일투쟁을 기리는 연극 <홍범도>의 공연이 시작되었고, 고려인 작가 김세일의 소설 『홍범도』가 1965년부터 4년간 124회에 걸쳐 <레닌기치>에 연재되었다.

중앙공원묘지에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있고, 크질오르다 시 소비에트의 결정으로 홍범도가 거주하던 인근의 한 거리가 ‘홍범도 거리’로 이름 붙여지기도 했다.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의 비밀, 분단 극복의 상징으로 거듭나기를

최근 참배객이 부쩍 늘어난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의 홍범도 장군 묘 [사진-임재근 제공]
최근 참배객이 부쩍 늘어난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의 홍범도 장군 묘 [사진-임재근 제공]

사실 홍범도의 유해 봉환은 2020년 3·1절 기념식에서 이미 천명된 바 있었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기념사를 통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승리를 이끈 평민 출신 위대한 독립군 대장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드디어 국내로 모셔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발표했다. 마침 2020년은 봉오동 전투 100주년이 되는 해였고, 1년 전에는 영화 <봉오통 전투>가 개봉되어 흥행을 구가하기도 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약 1년 6개월이 경과한 2021년 8월에야 이루어진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홍범도의 유해 봉환은 결코 순탄한 일이 아니었다. 정부는 늦어지는 이유를 코로나19 사태 때문으로 설명했지만, 실제로는 만만치 않은 현지 고려인 사회와 북의 반발이 자리하고 있었다.

평양에서 멀지 않은 평남 양덕 출신인 홍범도는 살아생전에 “내가 죽거든 고향 땅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현실에서 북이 홍범도 유해 봉환에 대한 우선권을 주장하면서 카자흐스탄 정부에 “남과 북이 통일된 이후에 유해를 넘겨주겠다.”고 한 애초의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했을 때 카자흐스탄 정부로서는 감당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현지 고려인 사회로서도 자신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는 홍범도의 상징성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현지에서는 홍범도의 유언에 따라 북한으로 유해를 봉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발상의 전환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보다 의미 있게 기여하는 방식으로 홍범도의 유해 봉환을 일구어내지 못한 점에 대한 아쉬움이 짙게 배어나올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가령, 남과 북이 공히 인정하는 독립유공자를 모시는 ‘현충 공간’을 판문점 근처 휴전선의 한복판에 만들고, 그 첫 안장자로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남과 북이 공동으로 봉안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었지만, 우리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봉안됨에 따라 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의 홍범도 장군 위패가 모셔져 있던 자리는 이제 이곳이 홍범도 장군의 위패가 모셔져 있던 자리임을 알리는 표식만 남게 되었다.

대전현충원 홍범도 장군 묘(독립유공자 제3묘역 917)의 묘비에는 평생을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고민하고 실천한 신영복 선생의 글씨체인 '어깨동무체'로 ‘애국지사 홍범도 장군의 묘’라고 새겨져 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분단 극복과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상징하는 새로운 차원의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가슴 벅찬 그날을 상상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시민모임 독립’과 ‘지역사’(지도에 역사를 새기는 사람들)가 10월의 근현대사적지로 선정한 <대전현충원 홍범도 장군 묘역>은 구글(https://maps.app.goo.gl/dDsr71Zrk3pgbzXGA)과 카카오(https://kko.to/TCLbYwzvTB), 네이버 지도(https://naver.me/GG84Zan5)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클릭하여 들어가 홍범도 장군에 대한 각자의 기억을 글과 사진, 영상으로 남겨 주십시오. 전자지도에 근현대사를 새기는 작업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완성될 것입니다./ 필자주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서울 동작구에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을 맡아 지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서울현충원 역사탐방을 비롯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중심으로 한 근현대 역사탐방을 이끌고 있다.

저서로 『현충원 역사산책』(2022),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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