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기존의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의 관점에서는 삼성사와 문화류씨(文化柳氏)와의 관련성을 놓치고 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제 삼성사에 관한 나의 관점을 논하고자 한다.

1. 구월산이냐? 평양이냐? 백두산이냐?

환웅이 하늘로부터 하강했다고 하는 삼위(三危)태백이 어디인가? 묘향산인가? 구월산인가? 백두산인가?

일연(一然, 1206~1289)의 《삼국유사》에는 “웅(雄)이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정상”이라 하며, 그 주에 “즉 태백(太伯)은 지금의 묘향산(妙香山).”이라고 하였고, 이승휴(李承休, 1224~1300)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 “황해도 문화현의 구월산(九月山)을 가리킨다”라고 하여 일연은 태백산과 신시를 묘향산으로 보았고, 이승휴는 구월산으로 보았다.

즉 조선후기까지는 고려로부터 환웅이 내려온 태백산을 대체로 일연의 묘향산 설과 이승휴의 구월산 설로 정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신채호나 박은식 등등의 민족사학자들은 태백산을 백두산으로 보았다. (사실 태백산은 백두산의 별칭 가운데 하나이다.) 이후 우리나라의 국민은 환웅이 내려온 태백산을 백두산으로 본다.

이어 《삼국유사》에는 웅이 “신단수(神壇樹, 神檀樹) 밑에 내려와 신시(神市)라 하고 이에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하였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신시는 백두산 지역일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는 <위서(魏書)>를 인용하여,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이 있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였다”라고 하고 있다.

단군조선의 첫 도읍지 아사달은 어디일까? 여기에는 세 가지 설이 있었다. 구월산과 평양, 그리고 백두산이다. 북한의 사학계에서는 아사달을 평양으로 보는 것 같다. 그리고 평양을 세계적인 고조선 문명의 발생지라고까지 한다. 평양시에서 동쪽에 있는 강동 대박산에서 단군릉까지 발굴하고 개건한 바 있다.

그런데 이승휴는 《제왕운기(帝王韻紀)》 〈전조선기(前朝鮮紀)〉에 “아사달(阿斯達)에 입산하여 산신이 되었으니”라는 기록과 그 주(註)에 “지금의 구월산. 다른 이름은 궁홀(弓忽) 또는 삼위(三危). 사당이 지금도 있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왜? 고려에서는 환웅의 삼위태백과 단군조선의 건국지를 일연은 묘향산으로 이승휴는 구월산으로 고집하였을까?

그 의문은 백두산이 우리 민족이 세운 역대 국가의 어느 나라가 소유하고 있었는가가 풀어 준다. 백두산은 고조선의 강역이었고, 이를 이은 부여와 고구려 발해의 영토였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천명하였지만, 백두산을 영토로 가지지를 못했다. 발해가 망하자 그 땅은 료(遼) 금(金) 원(元)의 땅이 되었다.

고려 이후 백두산은 근세조선에 이르러 우리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고려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대륙으로의 진출을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단군조선에 관한 모든 근거를 한반도 안에서의 역사로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근대의 민족사학자들은 단군조선에 관한 많은 근거를 동북삼성과 한반도로 범위를 넓혔다.

2. 구월산

《문화지도》, 1872년, 1871年(高宗 8) 列邑地圖謄上令에 따라 1872年(高宗 9)에 黃海道 各府·郡·縣 및 鎭에서 만들어 올린 채색지도 가운데 하나인 문화지도(文化地圖). 서울대 규장각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문화지도》, 1872년, 1871年(高宗 8) 列邑地圖謄上令에 따라 1872年(高宗 9)에 黃海道 各府·郡·縣 및 鎭에서 만들어 올린 채색지도 가운데 하나인 문화지도(文化地圖). 서울대 규장각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황해남도 은률군 등에 걸쳐 있는 구월산. [자료 사진 - 통일뉴스]
황해남도 은률군 등에 걸쳐 있는 구월산. [자료 사진 - 통일뉴스]

구월산(해발 954m)은 현재 이북의 황해남도 은률군, 삼천군, 안악군, 은천군 일대에 위치한 산이다. 이전에는 궁홀산, 아사달산, 방홀산, 금미달 등으로도 불리웠으며,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칠보산, 지리산 등과 함께 ‘조선의 6대 명산’으로 꼽히는 아름다운 산이다.

구월산은 정상인 사황봉(四皇峰)을 비롯하여 주가봉, 단군봉, 인황봉 등 99개의 수많은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수려한 산세와 계곡, 폭포가 잘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또한, 구월산에서 바라보는 서해와 드넓은 연백평야의 황금 들판도 아름답다.

또한 구월산은 600여 종의 식물들과 노루, 살쾡이, 꿩, 꾀꼬리, 부엉이 등 진귀한 동물들도 많이 살기에, 북에서는 1976년 구월산을 자연보호구로 지정한 바 있고, 2004년에는 세계적으로도 가치를 인정받아 북에서는 백두산에 이어 두 번째, 한반도 전체로는 남한의 설악산과 제주도를 포함해 네 번째로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다.

구월산 삼성사 전경. 2003년 개천절민족공동행사 참가단이 방문했을 당시 모습. [자료 사진 - 통일뉴스]
구월산 삼성사 전경. 2003년 개천절민족공동행사 참가단이 방문했을 당시 모습. [자료 사진 - 통일뉴스]

구월산은 역사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산의 옛 이름에서도 볼 수 있듯이, 구월산은 단군 및 고조선과 관련된 일화가 많다. 가장 유명한 것은 『삼국유사』에서 단군이 고조선의 수도였던 평양을 떠나 아사달로 와서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비록 북 학계에서 단군릉을 발굴하여 아사달-태백산-백악산을 단군릉이 위치한 평양의 대박산임을 논증하면서 빛이 바래긴 하였지만, 예로부터 구월산에는 우리 민족의 3대 시조인 환인-환웅-단군을 모신 사당인 삼성사(三聖祠)가 존재하고, 단군이 타고 앉았다던 ‘단군대’라는 벼랑이, 그 아래에는 단군이 무술훈련을 했다는 쿵쿵바위가 남아있어서 오래전부터 전해져 오는 단군과 구월산과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구월산 월정사. 2003년 개천절민족공동행사 참가자들이 방문했을 당시 모습. [자료 사진 - 통일뉴스]
구월산 월정사. 2003년 개천절민족공동행사 참가자들이 방문했을 당시 모습. [자료 사진 - 통일뉴스]

고구려가 남방 진출을 활발히 하던 4세기 중엽부터 5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구월산성’은 국가지정문화재 보존급 제245호로 지정해 보전하고 있다. 험준한 산세의 능선을 연결하고 여러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이 서쪽 수구문 밖으로 흘러나가 폭포가 되는 천연의 요새이다. 현재는 많이 허물어진 상태이나 별장청(別將廳) 등의 건물터가 남아있다고 한다.

구월산은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중심지로 부각됐다. 31본산 중의 하나이며 황해도 내의 25개 사찰을 관장하는 절인 신라 애장왕 때 건립된 패엽사(貝葉寺)와 유서 깊은 월정사(月精寺)가 남아있다.

3. 문화현 삼성당과 문화류씨

《문화지도》 부분도, 1872년, 서울대 규장각 소장. 삼성사가 나와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문화지도》 부분도, 1872년, 서울대 규장각 소장. 삼성사가 나와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황해도 구월산에 깃든 민족정신의 중심부는 문화현(文化縣)이 있는 삼성사이다. 문화현은 지금의 신천군 문화면이다. 신천군 문화면의 삼성사(三聖祠)는 본래 삼성당(三聖堂)으로 불려오다가 1472년(성종3)에 삼성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당(堂)으로 불린 이유로 무속인 일부에서는 여기를 무당(巫堂)의 영역으로 본다. 그러나 삼성당에서의 당(堂)이란 무속에서의 당집이라기보다는 제사를 지내는 사당(祠堂)을 의미한다. 즉 삼성사는 고려, 조선시대 국가와 민간에서 환인 환웅 환검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다. 굿거리 마당이라고 할 수가 없다.

이승휴(李承休, 1224~1300)의 《제왕운기(帝王韻紀)》 <전조선기(前朝鮮紀)>에 “아사달(阿斯達)에 입산하여 산신이 되었으니”라는 구절의 주(註)에는 “지금의 구월산. 딴 이름은 궁홀(弓忽) 또는 삼위(三危). 사당이 지금도 있음.”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1287년에 완성된 저술임을 보아, 삼성당은 이미 13세기 이전에 건립되었다.

필자는 삼성당이 늦어도 918년 고려 건국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문화현은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공신 유차달(柳車達)을 시조로 하는 문화류씨(文化柳氏)의 발상지이자 성역지이기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고려 태조 때 군량수송에 공을 세워 대승(大丞)에 제수되고 삼한공신(三韓功臣)의 호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파평윤씨(坡平尹氏)와 문화유씨(文化柳氏)의 족보에 의하면 류차달은 고려 태조 때의 개국2등공신 12인 중의 한 사람으로 고려 태조로부터 사명(賜名)을 받아 문화유씨(文化柳氏)의 시조가 되었다.

문화현을 관향으로 한 조선시대에 문화류씨들은 이 지역의 전통 지키기에 최선을 다하였다. 즉 조선 태종 때 삼성당(三聖堂)을 폐하여 평양의 단군묘(檀君廟)에 함께 모셨는데, 1428년(세종10)에 우의정을 지낸 유관(柳觀, 1346~1433)은 이를 두고 세종 때 상소한 일이 있음을 《세종실록》 권40, 세종10년 6월 14일 조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右議政仍令致仕柳寬上書曰 : 黃海道 文化縣, 是臣本鄕, 自爲幼學, 下去多年, 聞諸父老之言, 乃知事迹久矣。 九月山是縣之主山, 在檀君 朝鮮時 名阿斯達山, 至新羅改稱闕山, 其時文化始名闕口縣, 至前朝陞爲儒州監務, 至高宗代, 又陞爲文化縣令, 山名闕字, 緩聲呼爲九月山。 山之東嶺, 高大而長, 至一息安岳郡而止。 嶺之腰有神堂焉, 不知創於何代, 北壁檀雄天王, 東壁檀因天王, 西壁檀君天王, 文化之人常稱三聖堂, 其山下居人, 亦稱曰聖堂里。 堂之內外, 鳥雀不棲, 麋鹿不入。 當旱暵之時祈雨, 稍有得焉。 或云檀君入, 阿斯達山, 化爲神, 則檀君之都, 意在此山之下。 三聖堂至今猶存, 其迹可見。 以今地望考之, 文化之東, 有地名藏壯者, 父老傳以爲檀君之都, 今只有東、西卯山, 爲可驗耳。 或者以爲檀君, 都于王儉城, 今合在箕子廟。 臣按檀君與堯竝立, 至于箕子千有餘年, 豈宜下合於箕子之廟? 又或以爲檀君, 降於樹邊而生, 今之三聖, 固不可信, 然臣又按遂古之初, 混沌旣開, 先有天而後有地。 旣有天地, 則氣化而人生焉。 自後人之生也, 皆以形相禪, 豈得數十萬年之後至堯時, 復有氣化, 而生之理? 其樹邊之生, 固爲荒怪。 伏惟聖鑑裁擇, 命攸司講求所都, 以祛其疑。”

“우의정으로 그대로 치사(致仕)한 유관(柳寬)이 상서(上書)하기를, “황해도 문화현(文化縣)은 신의 본향(本鄕)입니다. 스스로 벼슬을 그만두고 본향에 내려온 지가 여러 해 되었는데 여러 부노(父老)들의 말을 듣고 비로소 〈이 고을이〉 사적(事迹)이 오래인 것을 알았습니다. 구월산(九月山)은 이 현의 주산(主山)입니다. 단군조선 때에 있어서는 이름을 아사달산(阿斯達山)이라고 하였고, 신라 때에 이르러 궐산(闕山)이라고 고쳐 불렀습니다. 그때 문화현을 처음으로 궐구현(闕口縣)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전조(前朝)에 이르러서는 유주 감무(儒州監務)로 승격시켰으며, 고종 때에 이르러 또 문화 현령(文化縣令)으로 승격하였고, 산의 이름의 「궐」자를 느린 소리로 발음하여 구월산(九月山)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 산의 동쪽 재[嶺]는 높고 크고 길어서 일식 정도 가야 안악군(安岳郡)에 이르러 끝납니다. 재의 중허리에 신당(神堂)이 있는데 어느 시대에 처음 세웠는지 알지 못합니다. 북쪽 벽에는 단웅 천왕(檀雄天王), 동쪽 벽에는 단인 천왕(檀因天王), 서쪽 벽에는 단군 천왕(檀君天王)을 문화현 사람들은 삼성당(三聖堂)이라고 항상 부르며, 그 산 아래에 있는 동리를 또한 성당리(聖堂里)라고 일컫습니다. 신당(神堂)의 안팎에는 까마귀와 참새들이 깃들이지 아니하며, 고라니와 사슴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날씨가 가물 때를 당하여 비를 빌면 다소 응보를 얻는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군은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으니, 아마도 단군의 도읍이 이 산 아래에 있었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삼성당은 지금도 아직 있어서 그 자취를 볼 수가 있으나, 지금은 땅 모양을 살펴보건대, 문화현의 동쪽에 이름을 장장(藏壯)이라고 하는 땅이 있는데, 부로들이 전하는 말에 단군의 도읍 터라고 합니다. 지금은 증험(證驗)이 될 만한 것은 다만 동서 난산(東西卵山)이 있을 뿐입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군이 왕검성(王儉城)에 도읍하였으니, 지금 기자묘(箕子廟)가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라고 합니다. 신이 살펴본 바로는, 단군은 요(堯)임금과 같은 때에 임금이 되었으니, 그때부터 기자에 이르기까지는 천여 년이 넘습니다. 어찌 아래로 내려와 기자묘와 합치하여야 한단 말입니까.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군은 단목(檀木) 곁에 내려와서 태어났다 하니, 지금의 삼성(三聖) 설은 진실로 믿을 수 없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이 또 살펴보건대, 태고(太古)의 맨 처음에 혼돈(混沌)이 개벽(開闢)하게 되어, 먼저 하늘이 생기고 뒤에 땅이 생겼으며, 이미 천지(天地)가 있게 된 뒤에는 기(氣)가 화(化)하여 사람이 생기었습니다. 그 뒤로 사람이 생겨나서 모두 형상을 서로 잇게 되었으니, 어찌 〈사람이 생긴 지〉 수십만 년 뒤의 요임금 때에 다시 기가 화하여 사람이 생겨나는 이치가 있었겠습니까. 그 나무 곁에서 생겼다는 설은 진실로 황당무계한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감(聖鑑)으로 헤아려 결정하시고, 유사(攸司)에 명하여 도읍한 곳을 찾아내어 그 의혹을 없애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황해도 문화현을 관향으로 하는 문화류씨의 숭조보본(崇祖報本)의 전통적 사상이 민족의 시조라 여겨지는 단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작용하고 있다. 문화현에는 삼성사가 있기 때문이며, 삼성사의 제사에 문화류씨가 상당히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향이 필자가 통일뉴스에 연재한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국혼의 재발견’(29) - 단군과 단군조선을 언급한 고서 및 고문헌>(2022년 8월 23일자)에서 소개한 『문화유씨감찰공파가승보(文化柳氏監察公派家乘譜)』에까지 나타난다.

이 가승보는 전남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 201번지의 류인구(柳寅龜, 1895~?)가 편집하여 1936년 3월 30일자로 발행한 석판본(石版本) 가승보 2권1책이다. 권두(卷頭)의 권1 앞에 「원파록(源派錄)」이 있는데, 중국과 우리나라의 연대(年代)에 단군을 부수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계보류 도서에 이런 식으로라도 단군이 등장하는 문중의 족보는 간행 시기가 1936년이기는 했지만, 이 책이 처음인 것 같다.

1979년 6월 30일 《문화류씨세보》 (속칭 가정보)가 영인된 이후 1980년경에 필자는 문화류씨 문중의 지인에게 1423년 《문화류씨세보》 (속칭 영락보)의 존재를 물은 적이 있다. 당시 문화류씨 문중의 공식적인 답변은 “삼성사에 모시고 있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라는 것이었다. 왜정 때 삼성사가 헐린 이후 1423년 《문화류씨세보》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4. 황해도 문화현과 삼성사의 복원

[자료 사진 - 통일뉴스]
삼성사 내부, 단군 천진. 2003년 개천절민족공동행사 참가단이 방문했을 당시 모습. [자료 사진 - 통일뉴스]

황해도 문화현(文化縣). 문화현은 본래 고구려의 궐구현(闕口縣)이었다. 궐구(闕口)는 황해도 문화(文化)의 고구려 때 이름이다. 그런데 구월(九月)을 합해서 말하면 발음은 ‘궐’이 된다. 구월산(九月山)의 고구려 때 본 이름은 궁홀산(弓忽山)이었으나, 후에 궐산(闕山)이라 하다가 다시 현재의 이름 구월산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단군이 도읍을 옮긴 후 은퇴한 아사달산(阿斯達山)이 바로 이 산이라는 설이 있다.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을 모시는 삼성사(三聖祠)와 단군대 어천석(御天石) 사왕봉(思王峰) 등 단군의 사적(史蹟)이 남아있다.

고려시대에는 문화현이 불교의 중심지를 이루어 많은 절과 암자를 세웠다고 한다. 고려초에 유주(儒州)로 고쳤다. 1018년(고려 현종9) 풍주(豊州, 또는 豊川)에 속하였으나, 1259년(고려 고종46)에 문화현으로 바꾸고 감무를 설치하였다. 조선시대에 현령을 두었고, 1895년(조선 고종32)에는 문화군(文化郡)으로 승격하였으나,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신천군에 편입되어 문화면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이 지역은 구월산(九月山) 남쪽 지역으로 서쪽은 광대산(廣大山), 남쪽은 운계산(雲溪山) 등의 산줄기가 막고 있었으며, 동쪽은 월당강(月唐江: 지금의 載寧江)의 지류인 운계천(雲溪川) 유역의 넓은 장평평야(莊坪平野)가 있었다. 문화현은 당시 황해도 북서부지방의 교통중심지로 신천(信川)ㆍ안악(安岳)ㆍ송화(松禾)ㆍ은율(殷栗) 등지와 연결되는 도로망이 발달하였다.

대종교를 중광한 제1대 도사교(都司敎)인 홍암대종사(弘巖大宗師) 나철(羅喆, 1863~1916) 선생이 1916년 음력 8월 15일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제천의식을 올리고, 스스로 숨을 거두어 일제의 탄압에 최후의 항거를 하였다. 그러자 일본 관헌은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하여 삼성사를 헐어버렸다.

이후 사당이 헐린 자리 부근에 무덤이 하나둘씩 생겨났고, 1926년 대종교선교회는 삼성사 재건에 나섰는데, 일제가 1928년에 무덤이 늘어난 삼성사 터를 가족 공동묘지로 불하할 계획을 수립했음이 밝혀져 《동아일보》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1994년 3월 12일부터 14일까지 남측의 대종교 총전교 안호상 박사는 “중국의 베이징(北京)에서 북의 조선천도교 중앙지도위원장 류미영과 접촉하여 10월 3일로 예정된 평양의 단군릉 준공 행사 초청과 더불어 북측의 백두산 천지와 평양의 단군릉, 구월산 삼성사, 평양 숭령전 그리고 남측의 강화도 마니산 제천단 등 모두 다섯 곳을 성지로 지정 복구하기로 합의하였다”라고 밝혔다. 이후 2000년 10월 27일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삼성사가 개건(改建)되었다고 보도하였다.

5. 조선조 세종 때 류영이 지은 경기체가

《구월산별곡》, 류영 작, 1565년 《문화류씨세보》에 수록되어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구월산별곡》, 류영 작, 1565년 《문화류씨세보》에 수록되어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류영(柳穎, ?~1430)은 문화유씨(文化柳氏)의 족보를 처음으로 완성한 뒤, 이를 기념하는 한편 후손들에게 조상에 대한 숭배와 부모에 대한 효도, 형제간의 화목과 군자의 도리 등을 가르치고자 <구월산별곡(九月山別曲)>을 지었다. 1565년 《문화류씨세보(文化柳氏世譜)》에 수록되어있다.

전체가 4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연은 문화류씨의 발원지인 구월산과 삼지강(三支江)을 배경으로 한 유주(儒州)에서 시조 류차달(柳車達)로부터 고려조에 이어 여러 명현이 배출된 것은, 그 조상들이 모두 선행을 쌓은 결과이니 꽃다운 이름을 길이 전하되 조상들의 뜻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후손으로서 욕됨이 없도록 당부하였다. 제2연에서는 부모님께서 낳아 길러주신 은덕은 효성을 다하여도 갚을 길이 없음을 한탄하였다. 제3연에서는 형제 사이에 우애로써 구족(九族)이 화목하게 되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제4연에서는 군자로서 안빈낙도의 생활을 하며 은인자중하여 인격을 완성하고, 때를 기다려 움직여야 하며, 오직 임금께 일편단심으로 충성을 다 바칠 것을 강조하였다.

〈구월산별곡〉은 1565년 《문화류씨세보》에 실려 있는데, 이 작품은 문화류씨 문중에서 1423년에 최초로 족보를 편찬 간행한 뒤에 지었다는 점과 유교 사상의 일부인 조상에 대한 숭모, 부모에 대한 효도, 형제간의 화목, 임금에 대한 충성 등 인륜의 도리를 본보기로 삼아 후손들을 가르치고 이끌기 위한 작품이라는 데 그 의의가 있다.

6. 맺음말

문화류씨 문중에서 1423년 《문화류씨세보》를 간행한 것은 문화류씨의 시조 류차달이 고려의 개국공신이므로 일찍이 벌족(閥族)을 형성한데 있다. 또한 1476년 《안동권씨세보》가 편찬된 것도 안동권씨의 시조 권행(權幸) 역시 고려의 개국공신이다. 이 두 문중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특히 조선초 안동권씨 가문의 삼대에 걸친 역사서 저술에 관해서는 역시 통일뉴스에 연재한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국혼의 재발견’(5) - 단군부터 이성계까지, 권람의 『어제응제시주』〉 (2022년 3월 8일자)를 참조해 보기를 바란다. 고려와 조선의 벌족으로서 이 두 문중은 일찍이 역사와 세보를 편찬하여 비장(秘藏)한 것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간행하였다.

그러나 문화류씨 문중이 삼성사와 밀접했다는 사실은 감추어져 있다. 이에 필자는 이 점을 여기에서 밝히는 것이다. 삼성사는 무속 신앙이 지켜온 당집이 아니다. 고려와 조선의 국가 차원에서, 그리고 민간에서 지켜온 우리 민족 정신의 성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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