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략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짱돌로 저격한 사나이

서리재 철길 옆 원태우 의사 의거지에 표석과 함께 새워진 조형물 [사진-김학규 소장 제공]
서리재 철길 옆 원태우 의사 의거지에 표석과 함께 새워진 조형물 [사진-김학규 소장 제공]

1905년 11월 22일 오후 6시 30분이 조금 넘은 시각, 열차가 안양역을 출발하여 서울로 향한 지 불과 5분 쯤 지났을까 하는시간이었다. 열차가 막 서리재에 들어섰을 때 갑자기 날아든 돌멩이가 창문을 강타하면서 유리창은 박살났고, 유리 파편 5개는 열차에 타고 있던 한 사람의 왼쪽 볼 3곳, 왼쪽 눈 위 1곳, 왼쪽 귀 아래쪽 1곳 등 얼굴 다섯 군데에 상처를 입혔다. 열차에 타고 있던 일행은 혼비백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짱돌 공격을 받은 열차에는 이날 을사늑약의 원흉인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대사와 하야시 곤스케(林権助) 공사 일행이 타고 있었고, 비록 돌에 맞는 것은 피했지만 얼굴 다섯 군데에 유리가 박히는 상처를 입은 사람은 바로 이토 히로부미였다. 

사건 이틀 후인 11월 24일자 <대한매일신보>는 ‘석자하래(石子何來)’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 사건을 보도했다.

엊그제 상오 9시에 이토 대사가 수원등지를 관람하기 위하여 전차에 탑승하고 내려가는 도중에 안양역 근처에 잠시 정차하였더니 홀연 수 개의 돌멩이(石子)가 외부로부터 날아와 창문이 파손되었고 (돌은) 이토 대사 몸을 지나 부상을 면하고 동일 하오 7시에 한성으로 돌아왔다더라.(필자가 현대어로 수정)

하지만 <대한매일신보>의 보도는 일제의 은폐와 통제로 정확힌 취재가 이루어지기 힘든 상황이다 보니 사실과 다른 내용도 많이 담겨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 일행이 탄 특별열차가 ‘짱돌 공격’을 받은 것은 <대한매일신보>의 보도와 달리 을사늑약 체결 과정에서 생긴 피로도 풀 겸 특별열차로 수원 근처에서 사냥을 한 후 한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발생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부상을 면했다는 내용도 사실과 달랐다. 실제로 이토 히로부미는 다섯 개의 유리 파편이 얼굴에 박히면서 부상을 당했다. 다음 역에서 내린 헌병들에 의해 그날 돌팔매질을 한 사람이 이미 체포되었음에도 이틀 후에 발간된 <대한매일신보>는 ‘석자하래’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누가 왜 돌팔매질을 했는지 궁금증만 자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열차에 타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짱돌로 저격하여 부상을 입힌 인물은 과천(현 안양시) 사람인 23세의 청년 원태우(1882-1951)였다.

사실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듣고 격분한 원태우 의사가 세운 계획은 단순히 이토 히로부미가 타고 있는 열차를 향해 돌팔매질을 하는 데 있지 않았다. 이만여, 김장성, 남통봉 등 세 명의 동료와 함께 철길에 돌을 올려놓아 이토 히로부미 일행이 탄 기차를 전복시킨다는 계획이었다. 거사 장소인 서리재는 오늘날 관악 전철역에서 서울 방면으로 약 400미터 지점에 있는 안양 육교 자리다. 하지만 거사는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상되는 사건의 파장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한 이만여가 갑자기 선로 위에 올려놓았던 돌을 치우고 달아나 버린 탓이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서도 원태우 의사는 침략 원흉을 처단할 천재일우의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원태우 의사는 점점 가까이 달려오는 기차를 보면서 순간 주변에 널려 있던 주먹만 한 화강석 짱돌을 무기로 이토 히로부미 일행이 탄 기차를 향해 돌팔매질을 하기로 결심했다. 

다행히 원태우가 던진 짱돌 중 하나가 이토 히로부미가 탄 좌석이 있는 참문을 향해 정확히 날아갔고, 박살난 유리창 파편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에 부상을 입히는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원태우 의사의 의거는 대한제국의 일반 민중들도 을사늑약 체결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불법적인 조약에 불과함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나아가 원태우 의사의 의거는 일제의 침략에 전 민족이 함께 들고 일어서 맞설 것을 행동으로 촉구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사건을 축소·은폐·왜곡하기에 급급했던 일제

원태우 의사의 의거 장면을 상상하여 새롭게 그린 만화의 한 장면(윤승운 화백 작) [사진-김학규 소장 제공]
원태우 의사의 의거 장면을 상상하여 새롭게 그린 만화의 한 장면(윤승운 화백 작) [사진-김학규 소장 제공]

을사늑약이 체결된 게 11월 17일이었으니 일제로서는 불과 5일 만에 늑약 체결의 주도자 이토 히로부미가 직접 공격을 받았다는 점에서 충격이 컸을 것이다. 비록 이토 히로부미가 죽거나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것은 아닐지라도 이 사건은 그로부터 4년 후인 1909년 10월 26일에 있을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예견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깜짝 놀란 이토 히로부미는 수행원의 응급처치를 받은 후 오후 7시 30분 경 남대문역에 도착할 수 있었고, 원태우 의사와 세 명의 동료는 사건 발생 3시간 정도 지난 그날 저녁 9시 30분 경에 체포되었다. 다음 역에서 내린 일제의 호위 헌병 조장과 2명의 헌병대원이 안양역에서 일하던 철도 노무자의 제보를 기반으로 원태우 일행을 추적한 결과였다. 

이토 히로부미의 수행원들은 곧바로 본국에 이토의 조난 사실을 알리는 전보를 쳤다. 하야시 곤스케 일본 공사도 그날 오후 8시 30분 경 “범인은 한인으로 생각되며 아마도 보호조약에 대하여 다소 분격한 자들이 있을지도 알 수 없어 헌병은 즉시 수색에 나섰음”을 밝히면서도  “아무런 중대한 일도 아니고 또 부상당하지 않았으므로 안심하시기 바람”이라는 사실과 다른 내용을 담은 전보를 일본의 외무대신에 발신했다. 

다음날 오후 하야시 공사는 전보 하나를 더 보냈다. “돌을 던진 범인 4명은 헌병이 조사한 결과 자백에 따라 술에 취한 나머지 기차통행을 보고 장난삼아 돌을 던졌는데 우연히도 이토 후작의 객차에 맞게 된 것으로 시국에 격앙되어 이러한 소행을 한 것은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음. 안심하시기 바람”이라는 내용이 담긴 전보였다. 사건의 의미나 파장을 축소하려는 의도가 역력히 읽히는 전보 내용이다. 

그럼에도 ‘이토 피습사건’이 전보를 통해 일본에 알려졌고, 다음날인 11월 23일자 <오사카매일신문>에도 보도되면서 일본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일본 증시가 한때 폭락했을 정도였다. 충격을 받은 것은 대한제국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소식을 접한 고종은 예식원경 이근택을 오전 2시에 정양 중인 하세가와(長谷川) 대장의 저택으로 보내 전날의 이토 대사 조난에 대해 사죄했다. 오전 9시에는 궁내부대신 이재극도 칙명을 받들어 사죄와 위문을 겸해 방문했다. 사건의 책임을 물어 시흥군수 김종국을 파직하고, 경기도 관찰사 정주영을 견책하는 처분도 단행하였다. 이 사건은 미국공사 모건이 이토 히로부미의 조난을 위문하기 위해 일본대사관을 방문하였는가 하면 2백여 통의 위문 전보가 쏟아질 정도로 외교가에도 큰 파문을 일으켰다.

하지만 사건의 파장을 축소하기 위한 일제의 노력은 계속 이어졌다. 원태우를 비롯한 네 명에 대한 처분에서도 일제의 의도와 노력은 그대로 읽힌다. 이만여, 김장성, 남통봉은 무혐의로 곧바로 풀려났고, 원태우 의사는 한국주차군의 군율을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감금 2개월에 곤장 100대에 처해졌다.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 전복을 계획하고 자신의 목숨을 노렸던 원태우 의사의 의거를 가혹한 처벌로 대응할 경우 한국인들을 자극하여 더 큰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하여 처벌 수위를 낮추도록 지시한 탓이었다.

당시는 언론이 논설을 통해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고 나선 상황이었고, 원로대신과 유생들의 상소운동이 줄을 잇고 있는 상황이었다. 학생들의 동맹 휴업과 상인들의 철시 투쟁과 같은 을사늑약에 대한 한국인의 다양한 저항이 강렬할 때였다.

일제로서는 1년 전인 1904년 9월 21일 일제 침략의 상징 경의선 철로를 파괴한 의병 3의사(김성삼·이춘근·안순서)를 ‘철도 파괴범’이라는 죄목으로 처형한 후 외교가의 비난을 받았던 일도 원태우 의사에게 낮은 형량을 부여한 요인의 하나로 작용했을 것이다. 

선고서에 원태우 의사의 짱돌 공격으로 부상당한 인물이 이토 히로부미였다고 특정하지 않고 “열차 안에 있는 승객 한사람”으로 언급한 사실도 주목해볼 만하다.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민의 직접적인 저격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이 공식화되는 것에 대해 얼마나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는지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일로전쟁화보 제39권에 '비웃음을 사는 조선인의 폭행'이라는 제목의 삽화 [사진-김학규 소장 제공]
일로전쟁화보 제39권에 '비웃음을 사는 조선인의 폭행'이라는 제목의 삽화 [사진-김학규 소장 제공]

일제는 그해 12월 8일에 발간한 『일로전쟁 화보』 제39권에 ‘비웃음을 사는 조선인의 폭행’이라는 제목의 삽화도 실었다. 갓을 쓰고 휜 도포를 입고 칼을 찬 중년의 남자가 오른손을 번쩍 들어 열차를 향해 돌을 던지는 모습이다. 삽화 왼편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도 덧붙여져 있었다.  

11월 22일, 이토(伊藤) 대사가 하야시(林) 공사와 함께 한국 수원으로 사냥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탑승한 열차가 오후 7시경 영등포 정거장 부근에 접어들자, 한국의 폭도 한 명이 대사가 탄 열차를 향해 돌을 던졌는데 돌은 겨우 유리창을 깼을 뿐으로 대사 일행은 무사했다. 폭도를 체포하고 보니 이는 우매한 농민으로서 대사가 탄 열차인 줄도 모르고 술에 취해 아무 생각 없이 돌을 던졌다고 한다.

원태우 의사의 의거가 갖는 의미를 축소·왜곡하려는 일제의 의도가 이 화보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고 일제가 원태우 의사에 대해 대충 넘어간 것은 결코 아니었다. 2개월의 감금 기간 동안 인두를 이용한 성고문을 비롯하여 가혹한 고문을 이어갔고, 원태우 의사는 온몸에 상처를 입고 성불구가 된 채 이듬해 1월 24일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원태우 의사는 이후 평생을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 받으면서 살아야 했다. 의사는 평생 온몸에 새겨진 흉터를 타인에 보이지 않기 위해 여름에도 긴 옷을 입어야 했고, 결혼은 했지만 평생 자식을 가지지 못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원태우의 뜻은 마침내 안중근 의사의 의거로 이어졌으니

을사늑약의 원흉을 처단하고 늑약을 무효로 돌려야 한다는 원태우 의사의 생각은 비단 원태우 의사만의 뜻이 아니었다. 일제가 원태우 의사의 의거를 축소·은폐·왜곡한다고 누를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었다. 원태우 의사의 의거 후 전 국민의 저항은 점점 강도를 더해갔고,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을 처단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점차 구체화되었다. 

원태우 의사의 의거가 있은 지 4년이 지난 1909년 10월 26일, 침략 원흉 이토 히로부미는 결국 안중근 의사에 의해 하얼빈 역에서 저격당하여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죽기 직전에도 4년 전 원태우 의사를 대했던 그대로 안중근 의사에게 “이 어리석은…”이라는 말을 뇌까렸다. 이쯤 되면 그의 스승 요시다 쇼인(1830-1859)의 정한론(征韓論)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의 한국 지배 이데올로기는 그의 뼛속 깊숙이 내면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일제의 식민지배를 결코 용인할 수 없어 자신의 목숨마저 기꺼이 내던지고자 했던 또 하나의 원태우, 안중근이라는 위대한 한국인에 의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원태우 의사에 대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들

안양시립만안도서관 마당에 세워져 있는 원태우 지사 의거 조형물 [사진-김학규 소장 제공]
안양시립만안도서관 마당에 세워져 있는 원태우 지사 의거 조형물 [사진-김학규 소장 제공]

2023년 8월 30일, 안양시에서는 안양시 승격 50주년을 기념하고 《안양 독립운동사》(2023) 발간을 기리는 학술회의와 전시회가 광복회 안양시지회 주최로 열렸다. 

이날 학술회의에서 김명섭(단국대 교수)이 발표한 논문 <1905년 원태우의 이토 히로부미 응징 투쟁에 대한 재고찰>은 인상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었다. 그는 침략 원흉 이토 히로부미 처단 투쟁의 시초를 열었던 원태우 의사에 대한 잘못된 정보와 기록을 정정하고 그에 기초한 조형물 정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우선, 대한민국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공훈전자사료관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에서부터 오류가 발견된다. 

‘독립유공자 공적정보’에는 원태우 의사의 본명이 ‘원태근(元泰根)’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고, 본명인 원태우는 이명(異名)의 하나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원태우 의사에게 애족장을 추서할 1990년 당시 <이토 대사 탑승 열차 위해범 원태근(元泰根) 조치 건>(1905. 11. 28) 등 일제가 생산한 문서의 오류를 바로잡지 못한 채 그대로 수용한 탓이다. 하지만 유족의 증언이나 족보 등을 통해 원태우가 본명임을 알 수 있으므로 이는 수정되어야 한다. 

아울러 사망연월일로 기록되어 있는 1950년 6월 25일도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1951년 7월 22일에 서거했다는 게 유족의 증언이다. 원태우 의사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정보부터 잘못 기록되어 있는 셈이다.   

안양역 1번출구 계단벽에 새겨져 있는 원태우 의사 부조  [사진-김학규 소장 제공]
안양역 1번출구 계단벽에 새겨져 있는 원태우 의사 부조  [사진-김학규 소장 제공]
평촌자유공원에 세워진 원태우 의사 기념 조형물(오른족 갓쓴 이. 왼쪽 흉상의 주인공은 안양 출신의 또 다른 독립유공자 한항길 지사) [사진-김학규 소장 제공]
평촌자유공원에 세워진 원태우 의사 기념 조형물(오른족 갓쓴 이. 왼쪽 흉상의 주인공은 안양 출신의 또 다른 독립유공자 한항길 지사) [사진-김학규 소장 제공]

전철 1호선 안양역 1번 출구의 벽면에 새겨져 있는 원태우 의사의 부조, 평촌자유공원에 있는 원태우 의사의 동상도 수정이 불가피하다. 두 조형물에서 원태우 의사는 갓을 쓴 노인 또는 중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원태우 의사가 의거를 단행할 당시 의사의 나이는 23세의 청년이었다. 

이러한 잘못은 일제가 원태우 의사의 의거를 폄훼하고 왜곡하기 위해 만든 『일로전쟁 화보』 제39권의 삽화를 그대로 수용한 탓이다. 심지어 ‘원태우 의사 의거지’에 세운 표지석에는 위 화보의 왜곡된 삽화를 그대로 부조로 새겨놓고 있어 찾는 이들로 하여금 원태우 의사의 나이나 의거 당시의 상황을 오해하도록 만들 우려도 있다.

원태우 의사의 직업 또는 신분에 대한 추가적인 검토도 필요하다. 일제는 원태우 의사의 직업에 대해 날품팔이라고도 했고 농민라고도 했다. 하지만 유족은 원태우 의사의 아버지가 “만안교 축조 당시 이를 감독하는 관리였다”는 증언과 함께 원태우 의사가 “의거 당시 향교에 다니셨다”고 증언하여 농민이나 노동자가 아니라 벼슬하지 못한 유학(幼學)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원태우 의사가 태어난 곳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도 여전히 정리되지 않고 있다. 그동안 원태우 의사가 태어난 곳은 지금의 안양1동 642번지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유족의 증언에 따르면 서이면사무소 자리가 원태우 의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며, 안양1동 642번지는 외가댁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서이면면사무소가 들어서면서 살던 집에서 쫓겨났고, 이후 외가댁이 있던 안양1동 642번지로 옮겨와 살았다는 것이다. 

원태우 의사 집터 표지판(안양1동 642번지) [사진-김학규 소장 제공]
원태우 의사 집터 표지판(안양1동 642번지) [사진-김학규 소장 제공]
옛 서이면사무소. 원태우 의사가 나고 자란 곳일 가능성이 높다. [사진-김학규 소장 제공]
옛 서이면사무소. 원태우 의사가 나고 자란 곳일 가능성이 높다. [사진-김학규 소장 제공]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과정에서 기존의 과천군 상서면과 하서면이 시흥군 서이면으로 통합됨에 따라 서이면사무소가 처음 생긴 것은 1914년이었다. 면사무소가 1917년에 지금의 안양1동 자리로 옮겨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원태우 의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1917년에 서이면사무소가 이전한 곳(안양동 674-271)일 가능성이 높다.

원태우 의사가 의거를 단행한 지 118년, 서거한 지 72년이 되는 2023년에도 원태우 의사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조차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부끄러워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시민모임 독립지역사’(지도에 역사를 새기는 사람들)가 선정한 11월의 근현대사적지는 <원태우 지사 의거지>(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로 525)입니다. 구글(https://g.co/kgs/3woAoc)과 카카오(https://kko.to/2MbNokSOFE), 네이버( https://naver.me/583qDCg4)를 클릭하여 원태우 지사의 의거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글과 사진, 영상으로 남겨 주십시오. 전자지도에 근현대사를 새기는 작업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완성될 것입니다./ 필자주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서울 동작구에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을 맡아 지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서울현충원 역사탐방을 비롯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중심으로 한 근현대 역사탐방을 이끌고 있다.

저서로 『현충원 역사산책』(2022),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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