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등용문(登龍門)이란 고사(古事) 단어가 있다. 『후한서(後漢書)』 「이응전(李膺傳)」에 “士有被其容接者 名爲登龍門”이라는 글이 있다. 즉, “선비로서 그의 용접을 받는 사람을 이름하여 등룡문이라 하였다”라고 적혀 있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등룡문은, 「이응전」의 주해(註解)에 따르면 ‘황하(黃河) 상류에 룡문이라는 계곡이 있는데, 그 근처에 흐름이 매우 빠른 폭포가 있어 그 밑으로 큰 고기들이 수없이 모여들었으나 오르지 못하였으며, 만일 오르기만 하면 용이 된다’라고 하였다. 그 후 이 말은 과거에 급제한 것을 가리키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여 출세의 문턱을 넘어서는 일을 말하게 되었다.

1. 민화 ‘약리도’와 ‘어변성룡도’와 등용문

우리의 전통 회화나 민화에는 ‘약리도(躍鯉圖)’가 있다. 약리도는 등룡문의 고사 단어에 등장하는 민물고기를 잉어로 보고, 잉어가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모습을 그린 등룡문 도상의 민화를 말한다. 입신출세를 기원하며 잉어가 뛰어오르는 그림을 공부방에 걸어둔 것이다. 잉어 모습으로 만든 연적이라든가 잉어를 새긴 벼루도 같은 의미가 있다.

잉어가 물살을 가로질러 하늘로 승천하여 용이 되는 약리도는 고려시기부터 공예와 회화의 도상으로 활용되었다. 고려청자뿐 아니라 조선 말기의 백자에서도 등룡문 도상이 나타난다. 회화에서는 조선 전기에는 수묵화 계열의 문인화로 제작되다가 점차 조선 말기에는 채색 민화로 두루 제작되었다.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한양가(漢陽歌)』 가사(歌詞)에는 광통교 아래 그림 시장에서 ‘어약룡문(魚躍龍門)’이 팔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어, 어변성룡을 그린 ‘어변성룡도(魚變成龍圖)’가 조선말기에 널리 유통되고 있음을 알려 준다.

민화 어변성룡도에 자주 보이는 도상 특징은 붉은 태양이 함께 그려져 있는 것이다. 붉은 태양이 중천에 떠 있고, 그 기운을 받은 잉어가 물 위로 튀어 오르는 장면이 그려진 것인데, 이때 잉어의 지느러미와 꼬리의 끝은 태양을 받아 붉게 그려진 경우가 많다. 특히 잉어의 머리는 용의 모습으로 그리고 몸체는 잉어로 그려 용으로 변하고 있는 순간을 표현한 작품이다. 때로는 그림에 ‘어변성룡’이라는 화제(畵題)를 부기한 경우도 있다.

2. 석제 해시계

해시계는 일구(日晷)라고 불리며, 영어로는 sundial이라고 한다. 해시계는 천구 상 태양의 위치를 이용하여 시간을 알 수 있도록 만든 시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해시계가 언제부터 사용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사학계 일각에서는 “삼한시대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을 소도라 하고, 거기에 솟대를 세웠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솟대가 원시적인 해시계 구실도 하였을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해시계 잔편.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크기 ; 반지름 33.4cm, 현재 자시부터 묘시까지 1/4만이 남아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해시계 잔편.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크기 ; 반지름 33.4cm, 현재 자시부터 묘시까지 1/4만이 남아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그런데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해시계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7세기경의 후기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해시계 잔편(화강암, 1/4만이 남아있다)이다. 이 잔편은 원반 모양의 시반을 24등분하여 자시⸱묘시 등의 24시를 새기고, 그 중심에는 시표(視標)인 막대기를 세웠던 초보적인 해시계로 여겨진다. 그 크기는 반지름이 33.4cm이며, 현재 자시부터 묘시까지만 남아 있다.

석제 해시계, 연대 미상(고려 추정), 경주 골동상에서 매입. 크기 ; 약 35×26×5.6cm. [사진 제공 – 이양재]
석제 해시계, 연대 미상(고려 추정), 경주 골동상에서 매입. 크기 ; 약 35×26×5.6cm. [사진 제공 – 이양재]

1987년경이다. 당시 나는 경주역 앞에 있는 어느 골동점을 들렸다. 나는 그 골동점 매대에서 십이지(十二支) 한자(漢字)가 돌아가며 새겨져 있고 가운데 시표를 꽃일 수 있도록 파여있는 자연스러운 평평한 편석(片石)을 발견하였다. 조선시대의 『앙부일구』 처럼 반구형으로 우묵히 파여 들어간 것이 아니라 편석에 새겨진 것이다. 십이지의 글자는 예서체(隸書體)였고, 각(刻)이 마모된 것을 보면 근대에 만든 인위적인 것이 아니다. 이러한 해시계는 비스듬하게 기울여서 세웠을 것이다.

잉어형 석제 해시계, 조선시대, 서울 골동상에서 매입. 크기 : 약 14×12×4.5cm. [사진 제공 – 이양재]
잉어형 석제 해시계, 조선시대, 서울 골동상에서 매입. 크기 : 약 14×12×4.5cm. [사진 제공 – 이양재]

이후 나는 또 한 점의 석제 해시계를 매입하였다. 그 해시계는 잉어가 도약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고, 잉어의 중앙부가 제법 우묵하게 파여 있고, 파인 부분을 돌아가며 십이지 한자와 선을 새겨 놓았다. 파인 부분의 중심에는 시표를 꽃일 수 있도록 파여있었다. 이 ‘잉어형 석제(石製) 해시계’는 분명히 등용문 고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잉어형 석제 해시계’에서 일촌광음(一寸光陰)도 아껴 쓰던 옛 선비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크기가 작은 ‘잉어형 석제 해시계’는 휴대 및 이동이 손 쉬었다.

3. 해시계 앙부일구

우리나라 해시계의 정수(精髓)는 세종시기에 제직된 「앙부일구(仰釜日晷)」일 것이다. 그러나 세종시기에 만들어진 「앙부일구」는 현존하지 않고 18세기 이후의 것만이 남아 있다.

2020년 미국 보스톤시의 스키너 경매에 출품된 『앙부일구』, 2022년 2월 22일 보물 지정, 현재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2020년 미국 보스톤시의 스키너 경매에 출품된 『앙부일구』, 2022년 2월 22일 보물 지정, 현재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얼마 전까지 미국 동부지역의 보스턴시에 스키너(Skinner)라는 경매사가 있었다. 지금은 ‘본햄스’에 인수되어 자회사로서 ‘본햄스 스키너’라 한다. 2020년경에 스키너의 동양 고미술품 경매에 조선후기의 『앙부일구』가 니왔다.

Description :
Silver-inlaid Bronze Sundial, Angbu-ilgu, Korea, after 1713, semi-globular bowl form with flanged rim, inscribed with Korea's traditional divisions and subdivisions of the year and the north celestial pole reading "samsipchil-do, samsipgu-bun, sibo-cho," all inlaid in silver around the rim, a gnomon inside the bowl, mounted on a separately cast four-legged support, each leg decorated with a dragon and cloud design in relief, joined to a separately cast cross base decorated with turtle head finials, ht. 4 5/8, wd. 9 1/2 in, wt. 9.9 lb.
Provenance: Purchased from an estate sale in St. Louis by the present owner.
Estimate $15,000-20,000
minor discoloration on bronze and inlaid silver, minor loosening to a joinery, otherwise in good condition.

여러 면에서 검토하여 보니 진품이 맞았다. 국제전화로 응찰에 들어갔으나 호가가 예상외로 치솟자, 나는 따라 올라가지 못하고 기권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이 문화재는 국립고궁박물관으로 들어왔고, 2022년 2월 22일자로 국기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후 유사한 또 한 점의 『앙부일구』가 스키너 경매에 올랐으나 그 문화재는 그 제작된 수준이 먼저 경매된 것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이러한 구리로 만들어진 조선시대의 『앙부일구』는 5~6점 정도 남아 있는 것 같다. 물론 석재나 상아, 나무로 만든 휴대용 앙부일구도 여러 점 현전하고 있다.

4. 자명종

1631년(인조9) 7월 정두원(鄭斗源)이 명나라에 진주사(陳奏使)로 갔다가 서양사람 육약한(陸若漢)에게서 자명종(自鳴鐘)을 선물로 받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시계는 당시에 조선의 시제(時制)가 맞지 않아서 사용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당시에 쓰고 있던 시제는 1일이 100각이었지만, 서양법에 따른 이 시계에 적용되는 시제는 96각이었다. 잠곡 김육(金堉)은 『잠곡필담』에서 1636년에 “명나라에 가서 자명종을 보았으나 그 기계의 원리와 운용의 묘를 몰랐다”라고 한 것을 보아 그 사용 방법이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또한 『잠곡필담』에 의하면 “효종 때에 밀양사람 유여발(劉與發)이 일본상인이 가지고 온 자명종에 관하여 연구한 끝에 그 구조를 터득하였는데 기계가 돌아가면 매시 종을 친다. 자오시에는 9회, 축미시에는 8회, 인신시에는 7회, 묘유시에는 6회, 진술시에는 5회, 사해시에는 4회 치고, 매시의 중간에는 1회씩 친다.”라고 하고 있어, 유여발은 우리나라에서 자명종의 원리를 처음으로 체득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에서 자명종을 제작한 가장 확실한 기록은 1669년(현종10) 10월에 천문학교수 송이영(宋以頴)이 자명종을 만들었다는 『현종실록』의 기록이다. 또한 1715년(숙종41) 4월 관상감 관원 허원(許遠)이 청나라에서 가져온 자명종을 본떠서 새로운 자명종을 만들었는데, 이것으로 보아서 조선중기에 이미 기계 시계를 만들 수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대량으로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참고 : 全相運, 『韓國科學技術史』, 正音社, 1979.)

5. 맺음말 ; 총선의 날

현대의 등룡문은 고시가 있고, 선거가 있으며, 특채도 있다. 이 중에 선거는 지방자치제 선거와 국회의원 총선이 있다. 가장 가까운 국회의원 총선은 2024년 4월 10일(수)이다. 그 등용과 몰락의 날이 시시각각 다가와 오늘로부터 3개월 좀 더 남이 있다. 그 수요일에 룡문을 뛰어넘은 자도 있고, 그저 도약의 시도로 끝난 자도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각 지역을 다니다 보면 특정 인물의 현수막이 걸린 것이 많이 보인다. 지난 금요일(24일), 일이 있어 렌터카를 빌려 통풍이 발병하여 걷기 힘든 불편한 몸을 끌고 포천시를 갔다.

전 포천시장 박윤국 씨의 인사를 알리는 현수막이 여러 곳에 걸려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그는 지난 5월 말에 어느 당의 포천시-가평군의 지구당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나는 포천시와 가평군이 하나의 총선 지역구로 묶여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포천시는 내 선조가 12대 이상 대대로 산 나의 고향이고, 가평군은 내 증조부와 조부가 독립운동을 하셨던 무대였다. 증조부님이 태어난 곳은 포천이나 어려서 집안에 변고가 생겨 가평으로 야반도주하셨고, 가평에서 조부께서 태어나셨다. 조부는 1930년대 초반에 포천으로 귀환하셨고, 증조부는 작고 후 귀향하셨다.

부친과 나는 포천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나는 어려서 부모에 이끌려 출향하게 된다. 그러니 나는 이 지역의 정당정치에는 무관심하였다. 이제는 조상 대대로의 뼈가 묻힌 포천시를 관심을 두고 이곳의 지방 정치를 지켜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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