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1476년 병신년에 [안동권씨세보] 3권3책이 목판본으로 간행되었고, 1565년 을축년에는 [문화류씨세보] 10권10책이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흔히 [안동권씨 성화보]와 [문화류씨 가정보]라고 통칭하는 족보이다.

이에 대한 일면을 고찰하고자 한다. 이번 고찰에서 필자는 이 두 족보의 내용을 검토하여 다른 문중에서도 임진왜란 이전에 세보를 편찬한 사실이 있음을 논하고자 한다.

1.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임진왜란 이전 고족보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최고본 족보는 조선 성종(재위 1469~1494) 7년, 병신년(1476년)에 목판본으로 발행한 [안동권씨세보] 3권3책이다. 이 고보(古譜)는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데, 통상적으로는 [안동권씨 성화보]로 통칭한다.

또한 문화류씨 가문에서 조선 명종(재위 1545~1567) 20년, 을축년(1565년)에 목판본으로 발행한 [문화류씨세보] 10권10책이 현존하고 있다. 이 고보는 안동 수졸당(守拙堂)에서 소장한 바 있는데, 통상적으로는 『문화류씨 가정보』로 통칭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몇 문중에서는 자신들 문중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족보를 편찬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한다면 편찬(編纂)과 발행(發行)은 그 의미하는 바가 좀 다르다. 편찬은 “여러 가지 자료를 모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책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발행은 “출판물이나 인쇄물을 찍어서 세상에 펴내는” 것을 의미한다.

세보를 편찬하였어도 여러 사정이 있어 발행을 못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조선초기와 중기에는 족보나 계보를 편찬은 하였으나 발행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발행을 하는 데는 많은 경비가 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편찬한 원본을 베껴서 복수(複數)의 사본을 만드는 것으로 발행을 가늠한 예도 있고, 편찬한 원본만을 그대로 보존한 예도 때때로 있다.

문화류씨 문중에서는 1423년(세종5)에 편찬한 [문화류씨세보] 영락보를 류영(柳潁)이 편찬하였다고 주장하지만, 그 실물이 전하지 않는다. 다만 영락보 서문을 제시할 뿐이다. 영락보가 편찬되었다는 사실은 1476년 [안동권씨세보]와 1565년 [문화류씨세보]의 내용을 검토함으로써 입증할 수 있다. 아울러 그 두 세보를 검토하면, 다른 문중의 세보편찬 사실도 교차하여 입증된다.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되었거나 편찬한 고족보로서 현재 실물(實物)이 전하는 고족보는 아래와 같다.

(1) [안동권씨세보(安東權氏世譜)], 1476년(성화보), 3권3책, 목판본,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2) [청송심씨족보(靑松沈氏族譜)], 1545년(을사보), 1책(37장), 목판본, 필자 소장.
(3) [대종보(大宗譜, 迎日鄭氏)], 1545년경, 1책(36장), 초고본, 필자 소장.
(4) [의성김씨세보(義城金氏世譜)], 1553년, 1책(99장), 초고본,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소장.
(5) [문화류씨세보(文化柳氏世譜)], 1565년(가정보), 10권10책, 목판본, 개인 소장, 안동 수졸당(守拙堂) 구장본.
(6) [강릉김씨족보(江陵金氏族譜)], 1565년(을축보), 1책(99장), 목판본, 전주 풍월당(風月堂), 동해시 송정동 강릉김씨 후손가 소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조.)
(7) [능성구씨성보(綾城具氏姓譜)]. 1576년, 1책(66장), 목판본(淸州 菩薩寺),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복본 소장).
(8) [고령신씨세보(高靈申氏世譜)]. 1578년(어성보), 3권2책, 목판본, 필자 소장.

이상의 현존하는 8종의 임란 전 고족보는 시기적으로는 1476년의 [안동권씨세보]와 1565년의 [문화류씨세보]가 내용 면에서 단연 톱을 달리며, 그 뒤를 1578년 [고령신씨세보]가 잇고 있다. 다른 족보들도 중요하지만 대체로 그 분량이 최소 36장부터 최고 99장 정도의 수준이다.

이에 여기에서는 1476년의 [안동권씨세보]와 1565년의 [문화류씨세보]를 기준으로 하여 일부 문중이 조선초기에 현전하지 않는 족보를 편찬한 사실을 논하고자 한다. 이에 우선 이들 두 족보를 소개하고자 한다.

2. [안동권씨세보], 서거정 편, 1476년(성화보), 3권3책, 목판본

[안동권씨세보] 서문 첫 장, 1476년, 목판본, 3권3책. [사진 제공 - 이양재]
[안동권씨세보] 서문 첫 장, 1476년, 목판본, 3권3책. [사진 제공 - 이양재]
[안동권씨세보] 권중 장53 뒷면과 장54 앞면의 광주이씨 부분, 1476년, 목판본, 3권3책. [사진 제공 - 이양재]
[안동권씨세보] 권중 장53 뒷면과 장54 앞면의 광주이씨 부분, 1476년, 목판본, 3권3책. [사진 제공 - 이양재]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1476년 판 [안동권씨세보(安東權氏世譜)]는 조선 초기에 의정부 좌찬성과 예조판서를 지낸 바 있는 권제(權踶, 1387~1445)가 중국 소동파(蘇東坡)의 [소씨보(蘇氏譜)]를 모방하여 편찬한 것을 그의 아들 권람(權擥, 1416~1465)이 자료를 수집하여 보완하였으나 일을 마치지 못하고 사망하자, 권제의 생질인 대제학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상주판관 박원창(朴元昌)과 대구부사 최호원(崔灝元, 1431~?)의 도움을 받아 다시 편집, 교열한 뒤 1476년에 경상감사 윤호(尹壕, 1424~1496)를 시켜 안동부(安東府)에서 간행하도록 하였다. 편찬부터 간행까지 무려 30년이 넘게 걸린 것이다.

이 책은 목판본 3권3책이며. 사주단변(四周單邊)이고, 반엽광곽(半葉匡郭)은 31×23.5cm이다. 서문은 11행20자이며, 계보는 6단으로 하였고, 판심은 상하내향흑어미(上下內向黑魚尾)이다. 책 크기는 42.5×29cm이다.

이 책에는 모두 약 9,000명의 인물이 등재되어 있는데, 본손(本孫)뿐만 아니라 외손까지도 가계를 자세히 기록하고 인적 사항을 명기하고 있다. 또 이 책은 자(子)와 녀(女)를 기재하는 데 있어 출생 순에 따라 기재하고 있다. 딸을 기재할 때는 여부(女夫)라 쓴 다음에 사위의 성명을 썼다. 또한 딸이 재혼하였을 경우 후부(後夫)라 하여 재혼한 남편의 성명도 기재하고 있다. 또한 외손도 본손과 같이 편찬 당시까지 대를 이어서 전부 기재되어 있다. 자녀가 없는 사람은 이름란 밑에 ‘무후(無後)’라고 기재하였고, 양자한 사실은 한 건도 찾아볼 수 없다.

1476년 판 [안동권씨세보]는 안동권씨의 본손과 인척 관계의 결연으로 이루어진 외손을 상세히 기재하고 있는데, 태조(재위 1392~1398)로부터 1481년(성종 12)까지 90년간에 치른 과거 74회에 걸쳐 급제한 사람의 수가 1,794명이었는데, 이 중 『안동권씨세보』(성화보)에 등재된 인물이 901명으로 전체의 51%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중 고위 관리로 등용된 사람이 거의 70%에 이른다. 즉 이 책은 조선 초기 사회의 인맥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3. [문화류씨세보], 1565년(가정보), 10권10책, 목판본.

[문화류씨세보] 권지1 天장, 1565년, 목판본. 10권10책. [사진 제공 - 이양재]
[문화류씨세보] 권지1 天장, 1565년, 목판본. 10권10책. [사진 제공 - 이양재]

안동 수졸당(守拙堂)에서 소장하였던 1565년 [문화류씨세보](가정보)의 전존 사실은 1476년 [안동권씨세보](성화보) 보다 앞서 알려졌다. 문화류씨종친회에서 1979년 6월 30일자로 축소 영인하였기 때문이다.

본 고족보는 안동 수졸당에 전해져 내려오던 것으로, 수졸당은 퇴계의 증손 이기(李岐)를 말하는데, 그의 부친이 현풍현감을 역임한 바 있는 동암(東巖) 이영도(李詠道, 1559~1637)로서 그는 1600년판 [진성이씨족보] 초간보 편찬을 주관한 바 있다.

1565년판 [문화류씨세보] 10권10책은 임란 전에 출판된 족보 가운데 가장 방대한 최우선(最優先) 선본(善本)이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1565년판 [문화류씨세보]의 권1 장20의 앞뒷면과 장21의 앞면에 세종 때 류영(柳穎)이 경기체가(景幾體歌)로 지은 ‘구월산별곡(九月山別曲)’이 국한문으로 실려 있다.

이 ‘구월산별곡’은 유영이 [문화류씨세보] 초간보(1423년 계묘년, 영락보)를 편찬한 후에 지었다고 한다. 1423년이면 한글이 반포(1446년)되기 23년 전이다. 따라서 ‘구월산별곡’은 처음부터 국한문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한문으로 지어진 것을 1565년판 재간보를 내면서 번역 수록한 것이다.

1565년판 [문화류씨세보] 제1권은, 서문 1장과 범례 1장, 제1권부터 10권까지의 목록 장차 5장, 문화류씨행장 31장이 있다. 그 뒤에 계보 부분의 장차(張次)를 천자문으로 정하여. 천(天)에서부터 상(霜)까지 44장을 부쳤다.

제1권은 모두 82장이다.
제2권은 천자문 옥(玉)에서부터 신(身)까지 103장,
제3권은 발(髮)에서부터 여(與)까지 100장.
제4권은 경(敬)에서부터 백(伯)까지가 장차이니 100장이고,
제5권은 숙(叔)에서부터 대(對)까지 100장,
제6권은 영(楹)에서부터 공(公)까지 99장,
제7권은 광(匡)에서부터 수(峀)까지 100장,
제8권은 묘(杳)에서부터 누(累)까지 101장,
제9권은 견(遣)에서부터 상(床)까지 101장,
제10권은 현(絃)에서부터 휘(暉)까지 102장과 발문 3장, 편찬에 간여한 분의 명단 2장 등 107장이 있다.

따라서 1565년판 [문화류씨세보]는 모두 993장이다. 16세기 중반으로는 민간에서 추진한 가장 거질의 출판 작업이니 1562년에 책의 편찬을 완료하고 출간하는 데 3년씩이나 걸렸다.

제1권 본문에서 제10권 본문까지는 문화류씨의 시조 차달(車達)에서부터 19대까지 자손 사위 외손 등을 합해서 모두 4만2천여 명 인명(人名)의 계보를 수록하고 있다. 한 면을 6단으로 나눈 횡보(橫譜)로서 다섯 개 단(段)은 계보를, 맨 아래 한 개 단은 그 아랫대가 나오는 장차(張次)를 적고 있다. 이는 1476년 판 [안동권씨세보]와 같은 편찬 구성이다.

이 1565년 [문화류씨세보] 권10의 편찬 참여자 명단을 보면 이 책을 편찬하는데 240명이 간여하였다. 대체로 삼남 지방에 거주하거나 벼슬살이를 하고 이는 사람들인데, 거기에는 1562년 10월부터 1565년 9월까지 제주목사를 지낸 김우서(金禹瑞)도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이 1980년 당시의 소장자 안동 이재녕(李在寧)씨 집안에 계속 소장되어 있는지, 아니면 어느 곳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4. 1565년 [문화류씨세보]로 검증되는 1562년 [광릉세보] 간행 사실

(위에서 언급한 1545년 [청송심씨족보]와 [대종보(영일정씨)], 1553년 [의성김씨세보], 1565년 [강름김씨족보], 1576년 [능성구씨성보], 1578년 [고령신씨세보] 등 6종은 2023년 [광주이씨종친회보]에 연재한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고족보이야기’ 제2회분과 제3회분을 보시기 바라며 여기서는 생략한다.)

필자는 광주이씨 21세손이다. 그런데 우리 광주이씨 가문의 충희공(李仁孫) 3대가 1476년 [안동권씨세보] 권중 장53 뒷면과 장54 앞면에 수록되어 있고, 사인공(李長孫) 선조의 3대는 권하 54장 앞⸱뒷면에 수록되어 있으며, 목사공(李之柔) 선조 4대는 권하 장41 앞뒷면에 수록되어있다.

[신편광주이씨동성지보], 1610년 편찬, 1613년 간행, 목판본, 1책. 필자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신편광주이씨동성지보], 1610년 편찬, 1613년 간행, 목판본, 1책. 필자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이것은 동고 이준경(李浚慶, 1499~1572) 선조께서 광주이씨 문중의 초간보 [광릉세보(廣陵世譜)]를 편찬하기 90년 이전에, 세조(世祖, 재위 1455~1468) 때 이미 광주이씨 집안에서 세보(世譜)나 가승보(家乘譜)의 초본(草本)을 집성하여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1476년에 발행된 성화보에 목사공(李之柔) 선조의 4대와 사인공(諱 長孫) 충희공(李仁孫) 형제의 3대가 수록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1476년 판 [안동권씨세보]를 분석하여 보면, 1423년 판 [문화류씨세보](영락보)가 실제로 편찬되었음을 인지할 수 있다. 1565년 [문화류씨세보]에서 1422년 이후에 태어난 분을 제외하면, 1423년 [문화류씨세보]의 얼개가 대체로 드러날 것이다.

1613년에 간행된 1610년에 편찬된 [신편광주이씨동성지보(新編廣州李氏同姓之譜)]에 수록된 1613년 한음 이덕형의 서문에 의하면, 광주이씨 문중의 족보는 동고 이준경(李浚慶, 1499~1572)에 의하여 활자본으로 나왔다고 언급하고 있다. 동고 이준경이 편찬한 [광릉세보]는 현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1565년 [문화류씨세보]에는 광주이씨 가문의 기록이 있는데, 권6 장29부터 장31까지, 그리고 권10 장72부터 장77까지가 광주이씨 계보를 수록하고 있다. 가정보에 광주이씨가 수록된 이유는 문화류씨의 외손인 교하노씨 노신(盧信)의 사위가 광주이씨 충희공 이인손(李仁孫, 1395~1463)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충희공 선조부터 7세까지 가정보에 수록되어 있으며, 동고(東皐) 선조는 가정보의 권10, 장74에 세 아들과 사위 이옥(李沃)과 함께 나온다. 가정보에 의하면 동고 선조의 직위가 좌의정으로 나와 있다. 이를 보면 [광릉세보]가 동고 이준경 선조의 좌의정 시절인 1562년경에 발행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즉 1565년 [문화류씨세보]를 참조하면 1562년경의 [광릉세보]를 복원할 수 있다.

5. 1565년 [문화류씨세보]로 검증되는 1529년 [양천허씨족보] 간행 사실

[양천허씨족보(陽川許氏族譜)] 초간보는 중종 24년 기축년(己丑年, 1529년)에 발행되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기축보는 양천허씨의 외손인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이 여러 대의 내외손, 세차, 벼슬, 관청기록물, 가승보 등을 기초로 편찬을 시작하였으나 잠시 죄로 인해 고향에서 근신하는 처지에 이르게 되자 당시 이조참판이었던 20세 허흡(洽)과 허항(沆) 형제에게 계속 작업해 달라고 부탁했다. 모재 선생의 자료와 이 두 형제의 노력이 힘을 합쳐 마침내 기축보가 탄생했으며, 모재 선생은 기축보 서문을 썼다. (모재 선생의 어머니와 허흡 허항 형제는 사촌지간이다.)

1529년 [양천허씨족보] 초간보는 현전하지 않지만, 우리는 이보다 36년 후에 간행한 1565년 [문화류씨세보]에서 그 내용의 일부를 볼 수가 있다. 1565년 [문화류씨세보]의 끝에 있는 2장 4면에 걸친 간행에 협조한 분들의 명단에 “영천군수 허시(許時, 1513~?)”와 “태현현감 허현(許鉉)”, “경주부윤 허엽(許曄, 1517~1580)”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1565년 [문화류씨세보] 권7에 나오는데, 이 세보에 기록된 이들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권1의 장5 후면에서 허금(許錦, 1340~1388)이 원송수(元松壽, 1324~1366)의 사위로 기록된 데 이른다. 허금은 1529년 기축보를 편찬한 김안국의 5대 외조부이고, 1565년 문화류씨세보를 편찬하는데 협조한 허시와 허엽의 6대조이며, 허현의 7대조이다. 또한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許浚, 1539~1615)의 6대조이다.

(참고로 [양천허씨족보] 초간보의 편찬을 시작한 김안국의 외사촌이 허준의 부친 허론(許碖)이다. 허론은 1565년 [문화류씨세보]에 모두 네 군데 나온다. ①권7 시(始)장 앞면에는 허곤(許琨)의 아들로 나오고, ②기(起)장 앞면에는 허옥(許沃)의 아버지로 나오며, ③권9의 척(慼)면 앞에는 윤희경(尹希璟)의 사위로, ④권9 면(眠)장 뒷면에는 손희조(孫熙祖)의 사위로 나온다.)

양천허씨(陽川許氏)는 허선문(許宣文)을 시조로 하고 있으며, 그의 9대손 허공(許珙, 1233~1291)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중시조 허공의 4대손이 허금(許錦)으로서 1529년 기축보와 1565년 [문화류씨세보]의 편찬에 허금의 자손들이 간여하고 있다.

이를 보면 1565년 [문화류씨세보]에 수록하고 있는 양천허씨는 당시 양천허씨 가문에 일부이기는 하지만, 1565년 이전에 양천허씨 문중에서 족보를 편찬한 것이 사실임을 입증하여 준다. 더 나아가 1529년 기축보 일부가 1565년 [문화류씨세보]에 보충하여 수록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런데 1565년 [문화류씨세보]의 권1 천(天)장 앞면을 보면, 양천허씨의 중시조 허공이 문화류씨 시조 류차달(柳車達)의 10대로 나오며, 지(地)장 앞면에는 허공의 5대손까지 나온다. 그런데 허공의 셋째 아들 허관(許冠)까지는 [양천허씨족보]와는 동일하나 이후 손자 허백(許伯), 증손자 허강(許綱), 고손자 허금(許錦)까지의 계대가 1565년 [문화류씨세보]에는 손자 허희(許僖), 증손자 허진(許璡) 고손자 허항(許恒)으로 전혀 다르게 내려온다.

이것은 허관의 장남이 허백이고 차남이 허희이기 때문이다. 허관의 장남 허백의 계보를 기록하지 않고, 허관의 기록 아래에 차남 허희의 계보를 넣은 것은 1565년판 [문화류씨세보]에서 보이는 이례적(異例的)인 예(例)이다.

6. 언양김씨 가문은 초간보 정해보(1767년) 간행보다 200년 이상을 앞서 세보를 편찬했다

언양김씨대종회에서는 언양김씨가 1767년 정해년에 발행한 정해보가 초간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1565년 [문화류씨세보] 권1 천장 앞면에 양천허씨 허공(許珙)의 사위로 언양김씨 10세 김변(金賆, 1248~1301)이 수록되어 있고, 지장 뒷면에는 김변으로부터 10세 김건(金鍵, 1549~1610)까지 수록되어 있다. 물론 김변의 외손들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언양김씨가 조선전기에 편찬한 세보는 간행하지 못하였을 수가 있다. 그러나 1565년 [문화류씨세보]를 보면 언양김씨가 문화류씨의 가정보보다 앞서서 세보를 편찬한 것은 확실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1565년 [문화류씨세보]에 협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김변의 9세 김희손(金喜孫)은 1501년에 진사시에 입격한 인물로, 그가 진사라는 것이 1565년 [문화류씨세보]에 기록하고 있는데, 언양김씨 가문에서 임진왜란 이전 어느 시기에 족보를 편찬하였느냐 하는 것은 여기에 수록된 김변의 본손들과 외손들을 연구하면 규명할 수 있다. 그러한 구체적인 후속 연구는 언양김씨 문중에 맡긴다.

7. 맺음말

위에서 1476년 [안동권씨세보]와 1565년 [문화류씨세보]를 통하여, 임란 전에 발행하였으나 실전한 1562년경 [광릉세보]와 1529년의 [양천허씨족보] 기축보의 편찬 및 간행 사실을 검증하였고, 1565년 [문화류씨세보]에 두 가문이 실전한 족보 내용 일부가 수록되어 있음을 논하였다. 아울러 언양김씨 문중의 초간보 정해보(1767년)보다 앞서서 언양김씨족보가 편찬되었음을 위에서 논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다른 몇 성씨의 계보를 추가로 탐색하면 더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족보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인물사를 연구하거나 사회사 및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기본학을 연구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재래식 전통 보학은 문중 보학이라고도 하는데, 소속 당파나 지역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대체로 문중 보학은 과괄(科括)과 현달(顯達)을 위주로 다룬다. 즉 우리나라에서 사회문화학이나 문화인류학으로서의 현대적 보학은 아직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이제 현대적 보학을 정립하여야 할 시점이다. 그러한 연구에 이 안동권씨와 문화류씨 가문의 두 족보는 인물사 연구와 사회사 연구에 사료 가치가 매우 높다.

(인적 관계가 확정되는 계보를 활용하여 사회 공헌이 많거나 지적 능력이나 신체 능력이 뛰어난 일부 중요한 가계의 유전체 지도의 작성도 시도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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