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남북협상을 회상하며 - 저 산너머 통일은 있을 것인가 (2)

 

송남헌

 

협상참가 인사박해

남북의 양극세력들은 회심의 미소

 

미⋅소양대세력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인하여 국토의 양단, 민족의 분열, 또다시 재통일을 위한 국제회담, 즉 모스크바 삼상회의결정, 이러한 과정을 밟아 1946년 제1차 미⋅소공위가 서울에서 개최되었으나 실패에 돌아갔다. 나는 미⋅소공위의 실무에 당무하였던 한 사람으로서 그 당시를 회고하여 제1차 공위 실패의 책임은 소련측에 돌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당시 남한에는 아직 좌익세력이 완전 조직화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좌익세력이 완전 조직화되지 못한 채 정권수립을 하면 소련지지세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1947년 제2차 미⋅소공위의 실패의 책임은 미국측에 있다고 본다. 그 이유는 1차 미⋅소공위 시의 반대되는 상황이 남한에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즉 좌익세력의 급격한 진출로 만일 이대로 정권을 수립한다면 제이의 「체코」의 전철을 밟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고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극우진영에 있어 배후작용이 컸다고 보는 것이다.

이때부터 미⋅소 양대세력은 각기 자기들 「푸로그램」에 의하여 한반도의 분단작업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국내적으로는 이승만을 선두에 내세우고 한국민주당이 중심이 된 한국단정수립 「코스」가 집요하게 전개되었고 삼팔이북에는 역시 공산주의의 기초적 공사가 착착 진행되며 사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백의민족의 비극의 행진은 어느 누구의 연출에 의하여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줄달음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1947년 11월 유엔총회는 유엔감시단을 한국에 파견하여 인구비례에 의한 남북총선거를 시행하여 통일정권을 수립할 것을 결정하였으나, 북한측의 감시단 입북거부로 실패에 돌아가고 1948년 2월 유엔임시총회로 하여금 감시 가능한 지역만의 감시로 선거실시를 결정하게 됨으로써 국제적으로 다시 한 번 국토양단의 결정을 내린 것이다.

남북의 양극세력들과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은 내심 그들의 계획대로 진행되는 객관적 여건형성에 대하여 회심의 미소를 띠웠던 것이다.

그러나 김규식 박사를 중심한 민족자주연맹계와 백범 김구 선생을 중심한 한독당계 그리고 뜻있는 우국국민들은 이 사태에 대하여 앙천통곡할 심정으로 그 방지를 위하여 최후의 시도를 계획하였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남북협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부터 이 계획이 꼭 성공하리라고도 안 믿었다. 성공 불성공은 불원하고 우리는 민족운명의 중대한 기로에 서서 마땅히 우리가 실행해야 할 민족적 의무를 실행해 보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 12년 동안 우리들 협상에 참가하였던 사람들은 무슨 민족의 역적행위나 한 것처럼 박해받던 일을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우리 민족의 거성 백범 김구 선생의 살해의 원인도 결국 여기에 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후세에 우리들은 명분을 하나 남겨놓은 행위였다고 생각한다.

평양 목단봉 극장 - 이곳이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회의장이었다. 남북한에서 대표로 모여든 사람 무려 천여명, 단체수로 130여개단체였다. 회의는 4월 19일부터 25일까지 일주일간 각단체로부터 1명내지 2명의 대표가 설정된 토의안건에 대하여 자기의견을 기록한 것을 각 십분 간씩 낭독함으로써 그 의견진술된 의견을 종합하여 최종일인 25일에 결정서가 채택되었던 것이다.
 
그 결정서는 즉

1. 남북한에 주둔하고 있는 양군은 즉시 철퇴할 것.

2. 유엔감시총회가 결정한 남한만의 선거(5⋅10)는 국토의 양단과 민족분열을 조장하는 결과가 되므로 이를 반대한다.

이 두 가지 결정을 내리고 회의는 끝났다.

이 결정서는 즉시 인쇄제본되어 참가한 단체대표들에 의하여 서명날인되고 남북에 각기 주둔되고 있는 군사령관에게 전달되었다.

남한에는 현 참의원 여운홍씨가 대표로서 서울에 있는 「존⋅알⋅하지」장군에게 전달하였던 것이다.

제1차남북협상을 회상하며 - 저 산너머 통일은 있을 것인가 (2)

제1차남북협상을 회상하며 - 저 산너머 통일은 있을 것인가 (2) [민족일보 이미지]
제1차남북협상을 회상하며 - 저 산너머 통일은 있을 것인가 (2) [민족일보 이미지]

第1次南北協商을 回想하며 - 저 山너머 統一은 있을 것인가 (2)

 

宋南憲

 

協商參加人士迫害

南北의 兩極勢力들은 會心의 微笑

 

美⋅蘇兩大勢力에 依하여 人爲的으로 因하여 國土의 兩斷, 民族의 分裂, 또다시 再統一을 爲한 國際會談, 卽 모스크바 三相會議決定, 이러한 科程을 밟아 一九四六년 第一次美⋅蘇共委가 서울에서 開催되었으나 失敗에 돌아갔다. 나는 美⋅蘇共委의 實務에 當務하였던 한 사람으로서 그 當時를 回顧하여 第一次 共委 失敗의 責任은 蘇聯側에 돌리는 것이 옳다고 生覺한다. 

그 理由는 當時 南韓에는 아직 左翼勢力이 完全 組織化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左翼勢力이 完全 組織化되지 못한 채 政權樹立을 하면 蘇聯支持勢力이 弱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一九四七年 第二次 美⋅蘇共委의 失敗의 責任은 美國側에 있다고 본다. 그 理由는 一次美⋅蘇共委時의 反對되는 狀況이 南韓에 展開되었기 때문이다. 卽 左翼勢力의 急激한 진출로 萬一 이대로 政權을 樹立한다면 第二의 「체코」의 前轍을 밟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고 親日派 民族反逆者들의 極右陣營에 있어 背後作用이 컸다고 보는 것이다.

이때부터 美⋅蘇兩大勢力은 各其 自己들 「푸로그램」에 依하여 韓半島의 分斷作業을 始作하였던 것이다.

國內的으로는 李承晩을 先頭에 내세우고 韓國民主黨이 中心이 된 韓國單政樹立 「코스」가 執拗하게 展開되었고 三八以北에는 亦是 共産主義의 基礎的 工事가 着着진행되며 四千年의 悠久한 歷史를 가진 白衣民族의 悲劇의 행진은 어느 누구의 演出에 依하여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줄달음치고 있었던 것이 事實이다.

一九四七년 十一월 유엔總會는 유엔監視團을 韓國에 派遣하여 人口比例에 依한 南北總選擧를 施行하여 統一政權을 樹立할 것을 決定하였으나 北韓側의 監視團 入北拒否로 失敗에 돌아가고 一九四八年 二月 유엔臨時總會로 하여금 監視可能한 地域만의 監視로 選擧實施를 決定하게 됨으로써 國際的으로 다시 한 번 國土兩斷의 決定을 내린 것이다.

南北의 兩極勢力들과 親日派 民族反逆者들은 內心 그들의 計畫대로 진행되는 客觀的 與件形成에 對하여 會心의 微笑를 띠웠던 것이다.

그러나 金奎植博士를 中心한 民族自主聯盟系와 白凡 金九先生을 中心한 韓獨黨系 그리고 뜻있는 憂國國民들은 이 事態에 對하여 仰天痛哭할 心情으로 그 防止를 爲하여 最後의 試圖를 計하였다. 그 結果로 나타난 것이 南北協商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부터 이 計이 꼭 成功하리라고도 안 믿었다. 成功 不成功은 不願하고 우리는 民族運命의 重大한 岐路에 서서 마땅히 우리가 實行해야 할 民族的 義務를 實行해 보는데 그 目的이 있었던 것이다.

李承晩 十二년 동안 우리들 協商에 參加하였던 사람들은 무슨 民族의 逆賊行爲나 한것처럼 迫害받던 일을 生覺하면 氣가 막힌다. 우리 民族의 巨星 白凡 金九先生의 殺害의 原因도 結局 여기에 그 原因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後世에 우리들은 名分을 하나 남겨놓은 行爲였다고 生覺한다.

平壤 牧丹奉 劇場 - 이곳이 全朝鮮 政黨社會團體 連席會議 會議場이었다. 南北韓에서 代表로 모여든 사람 무려 千餘名, 團體數로 百三十餘個團體였다. 會議는 四月十九日부터 二十五日까지 一週日間 各團體로부터 一名乃至 二名의 代表가 設定된 討議案件에 對하여 自己意見을 記錄한 것을 各十分間씩 朗讀함으로써 그 意見陳述된 意見을 綜合하여 最終日인 二十五日에 決定書가 採擇되었던 것이다.

그 決定書는 卽

一, 南北韓에 駐屯하고 있는 兩軍은 卽時 撤退할 것.

二, 유엔監視總會가 決定한 南韓만의 選擧(五⋅一○)는 國土의 兩斷과 民族分裂을 助長하는 결과가 되므로 이를 反對한다.

이 두가지 決定을 내리고 會議는 끝났다.

이 決定書는 卽時 印刷製本되어 參加한 團體代表들에 依하여 署名捺印되고 南北에 各其 駐屯되고 있는 軍司令官에게 傳達되었다.

南韓에는 現參議院 呂運弘氏가 代表로서 서울에 있는 「존⋅알⋅하지」將軍에게 傳達하였던 것이다.

[민족일보] 1961년 5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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