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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개 같은 가을이 - 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서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7.12.06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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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쉽게 씌어진 시(詩) - 윤동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려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7.11.29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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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점 - 네루다 아픔보다 넓은 공간은 없다 피를 흘리는 아픔에 견줄만한 우주도 없다. 한 아이가 왕따를 당하고 있다고 한다. 담임선생님이 다른 아이들에게 이유를 물으니 다들 ‘걔한테서 냄새가 난다’고 하더란다. 혐오감이 냄새로 나타나는가 보다. 아이들에게 왕따가 된 그 아이는 선생님들과 지내려한단다. 쉬는 시간에는 선생님들을 찾아가 교과 내용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7.11.22 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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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섬 -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술만 취하면 늦은 밤에 전화하는 초등학교 동창이 있다. 그는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나는 평소에 그에게 전화를 하지 않고 올 때만 받는다. 일이 있어 무음으로 해놓았을 때는 받지 못한다. 하지만 그에게 전화를 하지는 않는다. 술에 취하면 ‘나’가 사라진다. ‘나’가 사라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7.11.15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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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솔직히 말해서 나는 - 김남주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지 몰라 단 한방에 떨어지고 마는 모기인지도 몰라 파리인지도 몰라 뱅글뱅글 돌다 스러지고 마는 그 목숨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 나는 가련한 놈 그 신세인지도 몰라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 꽃잎인지도 몰라라 꽃잎인지도 피기가 무섭게 싹둑 잘리고 바람에 맞아 갈라지고 터지고 피투성이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7.11.08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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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생장 - 다니카와 슌타로 3살 / 나에게 과거는 없었다 5살 / 나의 과거는 어제까지 7살 / 나의 과거는 상투 끝까지 11살 / 나의 과거는 공룡 같지 14살 / 나의 과거는 교과서대로 16살 / 나의 과거는 무한을 힐긋힐긋 쳐다보는 18살 / 나의 시간이 무언가를 모르고 있다 요즘 ‘과거’가 귀환하는 영화들이 등장했다. ‘김광석’ ‘노무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7.11.01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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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어느 청소부의 가훈 - 김대규 인간쓰레기는 되지 말자 어느 날 석가모니 부처님이 살아오시면 어떻게 될까? 불쑥 어느 날 깊은 산의 암자에서 예불을 드리는 스님 앞에 나타나신다면? 그 스님은 ‘부처님 조각상’을 섬기듯이 ‘생불(生佛)’을 지극정성으로 섬길 수 있을까? 도스토옙스키는 에서 어느 날 지상에 나타나신 예수님에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7.10.2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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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틀림없는 교훈 - 에리히 캐스트너 해보는 수밖에 길은 없습니다 추석 때 5촌 조카에게 들은 얘기다. 자신의 친구를 짝사랑하던 한 유부남이 그 친구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을 했다고 한다. 자녀와 아내가 있는 대기업의 간부가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모든 개인의 문제는 사실 사회의 문제다. 그 남자는 살아오면서 ‘사랑’을 제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7.10.18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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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자선병원 하얀 병실에서 - 브레히트 자선병원 하얀 병실에서 아침 일찍 깨어 지빠귀의 노랫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깨닫게 되었다. 벌써 오래 전부터 나에게서 죽음의 공포는 사라졌다. 나 자신이 없어지리라는 것만 빼놓으면, 다른 것은 하나도 달라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죽은 다음에도 들려 올 지빠귀의 온갖 노랫소리를 이제야 비로소 즐길 수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7.10.11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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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이십억 광년의 고독 - 다나카와 슌타로 인류는 작은 공 위에서 자고 일어나고 그리고 일하며 때로는 화성에 친구를 갖고 싶어 하기도 한다 화성인은 작은 공 위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혹은 네리리 하고 키르르 하고 하라라 하고 있는지) 그러나 때때로 지구에 친구를 갖고 싶어 하기도 한다 그것은 확실한 것이다 만유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7.10.04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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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교신- 이면우동짓날 저녁 십오층 북쪽 베란다 캄캄한 데서 담뱃불 반짝같은 동 삼층 북창 드르륵 열리고 조금 있다가 또 반짝군청색 하늘 속 별들 한꺼번에 반짝반짝 교실 유리창을 주먹으로 깨고 양호실에서 붕대를 감고 나오는 학생. 지나가던 교사가 장난스레 그 학생의 어깨를 탁! 치자. 그 학생 씩 웃으며 “어깨가 아프니까, 주먹이 안 아프네요.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7.09.27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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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콩나물 가족 - 박성우 아빠는 회사에서 물먹었고요 엄마는 홈쇼핑에서 물먹었데요 누나는 시험에서 물먹었다나요 하나같이 기분이 엉망이라면서요 말시키지 말고 숙제나 하래요 근데요 저는요 맨날맨날 물먹어도요 씩씩하고 용감하게 쑥쑥 잘 커요 나는 2년 동안 철도 공무원(지금은 철도청이 코레일로 바뀌었다), 9년 동안 교육공무원을 했다. 둘 다 안정된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7.09.20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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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나룻배와 行人 - 한용운 나는 나룻배 당신은 行人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느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7.09.13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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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너에게 - 최승자 마음은 바람보다 쉽게 흐른다.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지다가 어느새 나는 네 심장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죽지 않는 태풍의 눈이 되고 싶다. 한 초등학교 30대 여교사가 6학년 남자아이와 수차례 ‘성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다들 분노한다. 우리 사회의 ‘민낯’을 보여주는 것 같아 참담하고 무섭다. 우리의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7.09.06 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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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대작 - 이백 둘이서 잔 드는 사이 소리 없이 산꽃이 피어 한 잔 한 잔 들자거니 다시 한잔 먹자거니 난 취한 채 자고파 그댄 돌아가도 좋으리 낼아침 오고프면 부디 거문고 안고 오시라.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인간의 삶을 ‘쾌락의 원리와 현실의 원리’로 설명했다. 인간은 원초적으로 무한히 쾌락을 누리며 살고 싶어 하는데, 현실이 쾌락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7.08.30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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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고추 먹고 맴맴 농약 먹고 맴맴 - 박상률 고추밭에 농약을 치면 고추가 맵냐 농약이 맵냐 등에 진 약통 분무기 어깨가 제법 가볍게 느껴질 쯤 고추 먹고 맴맴 농약 먹고 맴맴 조선 시대의 한 단면을 가상적으로 보여주는 드라마 ‘군주’를 보았다. ‘편수회’라는 비밀권력집단이 왕, 대비, 조정의 대신들에게 진꽃환을 먹여 독에 중독시킨다. 그들은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7.08.23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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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유리창(琉璃窓)1 - 정지용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7.08.16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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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여덟 살의 꿈 - 부산 부전초 1학년 박채연 나는 ○○ 초등학교를 나와서 국제중학교를 나와서 민사고를 나와서 하버드대를 갈 거다. 그래 그래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정말하고 싶은 미용사가 될 거다.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화’에 대해 교육계의 논쟁이 뜨겁다. 한 교사에게 들은 얘기다. “아이들을 참 잘 가르치는 선생님들을 보면 거의 다 기간제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7.08.09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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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할아버지- 정지용할아버지가담배ㅅ대를 물고들에 나가시니,궂은 날도곱게 개이고,할아버지가도롱이를 입고들에 나가시니,가믄 날도비가 오시네. 공원에서 아이와 함께 운동 기구에 앉아 있는 젊은 아빠를 보았다.아이는 멀뚱거리고 아빠는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그러다 아이가 울고 아빠는 서둘러 집으로 가는 듯했다.흔히 아빠들은 아이들과 놀아준다고 한다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7.08.02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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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 박철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수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국 쑥국 쑥국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번 자전거를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7.07.26 0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