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추상적인 인간을 사랑할 수는 있지만, 구체적인 인간을 사랑할 수는 없다(도스토옙스키)


 어느 청소부의 가훈 
 - 김대규 

 인간쓰레기는 되지 말자 


 어느 날 석가모니 부처님이 살아오시면 어떻게 될까?

 불쑥 어느 날  깊은 산의 암자에서 예불을 드리는 스님 앞에 나타나신다면?

 그 스님은 ‘부처님 조각상’을 섬기듯이 ‘생불(生佛)’을 지극정성으로 섬길 수 있을까?     

 도스토옙스키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어느 날 지상에 나타나신 예수님에 대해 말한다. 

 교회의 대사제인 대심문관은 예수를 체포하고 ‘주(主)님’을 심문한다. 

 우리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얘기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눈앞에 보이는 인간을 사랑하진 못한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한없이 그리워하고 사랑할 순 있어도 침상에 누워계시는 병자인 부모님을 사랑하긴 힘들다.

 특히 이 시대는 ‘인간에 대해 혐오’가 크게 일어나는 시대 같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라 나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사랑할 겨를이 없다.   

 어제 즐거운 술자리를 가지며 ‘한 인간’이 싫어 술 마시기가 힘들었다. 

 나의 ‘인간 사랑’은 너무나 추상적이다. 

 구체적 인간에 대한 사랑은 단 몇 명일 뿐이다.

 그 몇 명을 사랑하려 애쓸 뿐이다.

 나머지 인간은 그냥 ‘인간’일 뿐이다. 

 적당히 대하며 살아간다.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은 형벌 같다.

 도움을 주어야 할 사람들을 만나면 외면하며 지나간다. 

 그래서 늘 지쳐있다.

 나는 내가 무겁다(김현). 

 인간은 사회적 동물, 유(類)적 존재라 ‘나만 위하여 사는 삶’은 제대로 된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자는 ‘사람을 버리지 말라 無棄人’고 했다.

 나는 이 구절을 ‘모든 사람은 나’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어떤 사람을 버리는 건 나를 버리는 것이다.

 모든 세상 사람은 ‘내 마음의 투사’이기 때문이다. 

 혐오스러운 사람은 내 마음의 혐오스러운 부분이 그에게 비췄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아는데, 몸은 그롤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오늘도 무사히...... .’ 견디며 산다.

 ‘어느 청소부의 가훈’을 지키려 애쓰며 산다. 

 ‘인간쓰레기는 되지 말자’

 그래, 인간쓰레기만은 되지 말자.  

 생각해보면 이렇게 사는 삶이 얼마나 서글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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