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움이 인류를 구원하리라(토스토예프스키)

 

교신
- 이면우

동짓날 저녁 십오층 북쪽 베란다 캄캄한 데서 담뱃불 반짝

같은 동 삼층 북창 드르륵 열리고 조금 있다가 또 반짝

군청색 하늘 속 별들 한꺼번에 반짝반짝


 교실 유리창을 주먹으로 깨고 양호실에서 붕대를 감고 나오는 학생.

 지나가던 교사가 장난스레 그 학생의 어깨를 탁! 치자.

 그 학생 씩 웃으며 “어깨가 아프니까, 주먹이 안 아프네요.”

 이런 교사가 좋은 선생님일까? 그 학생에게 일장 훈계를 하는 교사가 좋은 선생님일까?

 그 교사는 학생들이 귀엽다고 한다.

 일탈 행위를 하더라도 학생들이 귀여워 보이는 선생님. 

 토요일 인문학 공부모임에 오시는 선생님이다.

 ‘동짓날 저녁 십오층 북쪽 베란다 캄캄한 데서 담뱃불 반짝//같은 동 삼층 북창 드르륵 열리고 조금 있다가 또 반짝//군청색 하늘 속 별들 한꺼번에 반짝반짝’

 아파트 베란다에서 담뱃불들이 반짝거리는 것을 보고.

 별들과 함께 반짝반짝 서로 ‘교신’한다고 보는 시인.

 이런 시인이 좋은 사람일까? 아파트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다니? 분노하고 한탄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일까?

 학교 유리창을 주먹으로 깬 학생에게서 귀여움을 느끼는 선생님.

 아파트 베란다의 담뱃불들에서 사람들의 서로 교신하고 싶은 마음을 읽는 시인.

 미술로 말하면 후기 인상파 화가 세잔 같은 사람들이다.

 세잔에게는 모든 사물들이 그냥 좋다.

 사물들이 이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도 각자 눈부시게 빛난다.

 그의 사과 그림을 보고 있으면 사과들이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그 이전에는 화가들이 사물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예를 들면 이브 옆에 사과를 그려 넣는 식이다.

 세잔은 현대미술의 아버지다.

 세잔 이후 우리는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미술 작품을 만난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말한다.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이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만 진실로 찾는 것은 살아 있음의 경험이다.”

 현대 미술작품을 보러 가면 의미를 따져서는 안 된다.

 ‘살아 있음의 경험’을 하면 된다.

 우리는 매 순간, 

 ‘삶의 의미’가 아니라 ‘살아 있음의 경험’을 해야 한다.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은 무언가 음험한 꿍꿍이가 있는 사람들이다.
 
 인도에서는 노예에게 전생의 업이 많아 노예로 태어났으니 현생에 ‘열심히 살아야(노예로)’ 다음 생에는 귀한 신분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했다.

 중세 로마에서는 농노에게 농노로 성실하게 살아야 죽어서 천국에 간다고 했다.

 거룩한 종교의 이름으로 그렇게 했다.

 박정희 시대에는 우리에게 ‘민족중흥의 역사적 의무를 타고 태어났다’고 했다.
 
 국민교육헌장의 이름으로 그렇게 했다. 

 부모가 자녀에게 의미를 부여하며 만날 때 ‘부자유친(父子有親)’은 되지 않는다.

 꽃의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은 꽃을 만날 수 없다.

 사람의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은 사람을 만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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