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밖을 향해 공부하지 말라(임제)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 박철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수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국 쑥국 쑥국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 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속 깊은 곳에서 쑥국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 밖에 섰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일주일의 노역에서 벗어나는 토요일.

 TV를 켜고 그 앞에 베개 높이 베고 일심(一心)으로 마음을 모으고 놓친 드라마를 보려 채널을 돌리는데 아, 재방을 하지 않는단다.

 그녀는 불같이 화가 났단다.

 너까지 나를 무시해?

 그녀는 ‘고전 공부 모임’에 나간다.

 그런데 왜 공부가 도움이 되지 않나요?

 고전 공부가 참 좋아요. 다들 좋아해요. 

 ‘공부가 좋다는 것’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공자는 배우는 게 좋아서 나이 드는 걸 몰랐단다.

 여기 저기 공부 모임이 많다.

 다들 모이면 깔깔거리며 즐거워한다.  

 하지만 이 배움을 좋아하는 것, 그대로 받아들여도 될까?

 가정불화나 세상살이가 너무 힘들어 공부 모임에 오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공부 모임에서 ‘힐링’을 한다.

 그리곤 다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 힘겹게 산다.

 일주일을 견디고 다시 교회나 사찰에 가듯 공부 모임에 온다.

 사막에 오아시스가 있듯, 우리에겐 공부 모임이 있어 살만해요.

 이렇게 하는 것은 진정한 공부는 아니다.

 공부는 내 삶을 가꿔가는 것이다.

 그래서 삶을 가꾸지 않고 ‘고전 공부’에 그리도 즐겁게 매진한 그녀는 드라마 불방 앞에서 한순간에 자신을 다 잃어버렸던 것이다.

 공자는 평생 자신의 삶을 가꿔가는 공부에 나이 드는 것도 잊어버렸기에 성인(聖人)이 될 수 있었다.    

 공부는 무엇을 배우는 게 아니라 자신 안의 잠재력을 깨워 더 나은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현대자본주의는 인간을 잠시라도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한다. 끊임없이 일하고 소비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틈이 생기면 견디지 못한다.

 인문학, 고전 공부도 이 틈을 메우는 ‘소비 행위’가 되어 되어버렸다.  

 인문학 열풍은 결국 ‘우아한 명품 소비’로 귀결되었다.

 파스칼은 말했다.

 ‘인간이 불행한 건 혼자 고요히 방에 있을 수 없어서’라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더없이 행복할 수 있는 건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다.
 
 이 ‘원초적 본능’을 잃어버리고서 무슨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이 ‘원초적 본능’을 잃어버리게 하는 지금의 인문학 공부는 얼마나 비극적인가!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가 시인에겐 왜 이리도 힘이 드는가?  

 ‘다시 한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 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거대한 컨베이어로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에서 그는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지나치지 못한다. 

 시인은 ‘원초적 본능’을 지닌 인간, ‘원시인’이다.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이런 시인을 바라보는 아내와 아이의 눈빛, 이게 인문학 공부일 것이다.  

 우리에겐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숲속 깊은 곳에서 쑥국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 밖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얼마나 누추한가!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하지만 이게 우리의 진정한 삶의 모습이다.

 그대로 인정하고 바라볼 때 우리에겐 생(生)의 길이 보일 것이다.

 향기 나는 인문학 공부로는 그런 길이 보이지 않는다.

 향수 같은 인문학 공부가 어찌 삶의 악취를 덮을 수 있으랴?

 진흙에서 연꽃을 피우는 게 ‘공부’다. 

 아예 진흙 속에 들어가지 않는 인문학 공부.

 개그 프로만도 못한 ‘인문학 강의’. 

 향수 냄새가 강의실을 철철 넘쳐 흘러 이 도시를 다 삼켜버릴 것 같다.

 우리는 각자 배 한 척을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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