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전체요 전체는 하나다 一卽多 多卽一 (화엄경)


 점 
 - 네루다
 
 아픔보다 넓은 공간은 없다
 피를 흘리는 아픔에 견줄만한 우주도 없다.


 한 아이가 왕따를 당하고 있다고 한다.

 담임선생님이 다른 아이들에게 이유를 물으니 

 다들 ‘걔한테서 냄새가 난다’고 하더란다.

 혐오감이 냄새로 나타나는가 보다. 

 아이들에게 왕따가 된 그 아이는 선생님들과 지내려한단다.

 쉬는 시간에는 선생님들을 찾아가 교과 내용에 대해 질문을 한단다.

 담임선생님은 한숨을 쉬며 말한다.

 “그 아이하고만 너무 많은 얘기를 할 수는 없잖아요. 어떻게 해야 하죠?”

 나는 성경에 나오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 대해 얘기하며 예수처럼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다른 양들은 불만이 많았을 것이다. 

 “왜 우리가 길 잃은 양 한 마리 때문에 피해를 당해야 해? 목자는 전체를 생각해야 하지 않아?”

 하지만 예수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

 우리는 아플 때 안다.

 아픈 부위가 나의 전부임을.

 손가락 하나가 아프다고 손가락 하나가 아픈 게 아니다. 

 다른 부위들이 아픈 손가락을 위해 함께 아파하고 그 손가락의 치유를 위해 온 힘을 다한다.  
 
 우리는 이러한 ‘본성(本性)’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왕따 한 아이를 계속 왕따 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과 다른 동물의 결정적 차이는 ‘공감(共感)’의 유무다. 

 인간은 다른 인간, 존재와 감정을 함께 나누도록 진화하였다.

 ‘아픔보다 넓은 공간은 없다/피를 흘리는 아픔에 견줄만한 우주도 없다.’

 한 인간에게 아픔은 전부다.

 그 아픔에 모두 함께 하는 것이 타고난 인간의 마음이다. 

 아픔으로 우리는 모두 ‘점’ 하나가 된다.

 점 하나가 빅뱅을 일으켜 지금의 우주가 되었단다.

 언젠가는 우주는 다시 점 하나로 돌아간다고 한다.

 우리는 아픔을 통해 점 하나가 된다. 

 우주의 비의(秘義)에 도달한다. 
  
 그런데 어쩌다 우리는 이런 마음을 잃어버렸을까?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이 시대의 의식은 서구의 자본주의가 만든 의식이다. 
 
 자본주의의 중심세력인 부르주아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게 한다.  

 이런 사고 구조에서는 ‘나’는 사라져버린다.

 세상은 나와는 별개로 어떤 힘, 법칙에 의해 돌아간다.

 근대 자본주의 이후 우리는 이런 ‘사고의 틀’로 살아간다.

 그래서 왕따의 아픔을 함께 느끼지 못한다. 

 ‘왕따’를 객관적으로 분석한다.

 스마트 폰을 검색하듯이 나와 남의 아픔을 본다.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물질적 이익을 위해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자본주의 이전의 인간은 이런 사고 구조를 갖고 살지 않았다.

 원시인들은 자신들이 체험한 것을 갖고 삼라만상을 만나며 자신의 마음을 점점 확장해 갔다.   

 이런 마음의 구조를 ‘야생의 사고’라고 한다.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인간의 마음이다.

 이런 마음은 자신의 체험, 아픔을 중심으로 널리 널리 퍼져가기에 다른 사람들, 다른 동식물, 다른 무생물들과 아픔을 함께 한다.

 원시인들에게 세상은 점 하나다.

 자본주의가 만든 ‘문명의 사고’는 세상과 우리 마음을 황폐화시켰다.

 ‘포항의 지진’은 우리 모두에게 묻는다.

 다들 함께 아프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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