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나는 내가 하루살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하루만 산다. 내가 논문의 한 부분을 끝낸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내 하루를 다 살았다. 그리고 잠을 자며 세상과 작별한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새로운 24시간. 다시, 한 가지를 한다. 오직 한 가지로 충분하다.’ 이런 식의 사고는 내게 위안을 주었다.”(96쪽)

전후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하루 하루를 한 생처럼 살다 간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1890 ~ 1981)의 구도자적 삶을 떠올릴 지 모르지만, 박사‘논문’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숙제를 ‘하루살이’로 감당해야 만 했던 연구자가 있다.

그의 석사에 이은 박사 논문 주제는 단 하나, 1987년 11월 29일 대통령선거를 코앞에 두고 115명의 숭객과 승무원을 태운 채 사라진 대한항공(KAL) 858기 사건. 대한민국에서 KAL858기 사건과 운명적으로 얽혀 살아내야 하는 한 연구자의 삶은 위태롭고, 결국 구도자의 삶과 다름없는 내부로의 침잠으로 이어져야만 했다.

대학 재학 당시 통일부 논문 공모전에서 전체 주제와 관련해 KAL858기 사건을 짧게 다뤄 2등상에 선정됐지만 ‘재조사 필요성’을 수정해달라는 주최측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시작된 가시밭길은 외국 대학에서의 박사과정과 교수 생활까지 이어지고, 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추구하고 있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박강성주, 『하루살이의 고백: 김현희-KAL858기 사건과 이야기』, 한울. [자료사진 - 통일뉴스]

핀란드 뚜르꾸대학에서 연구를 이어가고 있는 박강성주의 자전적 이야기하기(스토리텔링) 『하루살이의 고백: 김현희-KAL858기 사건과 이야기』(한울)은 한 연구자의 내밀한 속살을 용감하게 ‘고백’한 보기드문 책이다.

통일 논문 공모전 사건부터 석사 과정, 유럽에서의 박사 과정과 교수 생활, 국내에서의 연구와 활동 등, KAL858기 사건 연구자로 살아온 과정을 스토리텔링 형식을 빌어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저자는 이미 석사, 박사 논문을 단행본 『KAL858, 진실에 대한 예의: 김현희 사건과 ‘분단권력’』(2007), 『슬픈 쌍둥이의 눈물: 김현희-KAL858기 사건과 국제관계학』(2015)으로 출간한 바 있다. 

그러나 KAL858기 사건의 무게와 그림자가 그러하듯 그의 내면은 끊임없는 의문과 상처, 긴장과 아픔의 파도로 일렁인다. 저자는 그저 자신의 내면의 이야기를 충실히 들려줬겠지만 밑바탕에 깔린 예민한 감수성과 강인한 의지력이 없었더라면 그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조차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자책감이 들었다. 동료들 대부분이 다른 이들과 연구실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나만 혼자 편해지는 것이 결코 편치 않았다. 그래서 나는 연구실에 이름을 표시하지 않았다.”(53쪽)

“모임, 기자회견, 집회가 있고 난 뒤 우리는 점심이나 저녁을 같이 먹었다. 나는 밥값을 따로 내려 했지만 가족들은 늘 말렸다 …… 하지만 나는 원칙이 있었고, 이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럴 때마다 밥값 대신 가족회에 후원금을 냈다.”(179쪽)

국가정보원(국정원)을 비롯한 정보기관의 감시를 늘 신경써 왔듯, 결백증에 가까울 정도의 자기 검열로, 안팎의 칼날 위에 스스로를 세운 팽팽한 일상을 견뎌온 기록들이다. 요즘은 아이들도 가지고 있는 핸드폰조차 소유하지 않고, 선물을 준 사람 앞에서 열어보는 것은 우리식의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확고한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중심성 탓이리라.

대학 수업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에 저자가 들인 정성이나, ‘마음의 빚’을 덜기 위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유족들의 1인시위에 매일 첫 주자로 나서는 실천. 1인시위 도중 만난 눈이 마침내 ‘뼛가루’로 보이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동학(東學)의 세 덕목인 정성과 공경, 그리고 믿음(誠敬信)이 저절로 떠올려질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의 이같은 다소 과도해 보일 수도 있는 긴장감의 끈은 이 책의 장면이 바뀔 때마다 등장하는 KAL858기 사건의 상징 김현희가 끊임없이 일깨워주고 있다. 저자의 꿈에서까지 나타나는 김현희가...

“나는 방송의 첫 부분부터 말문이 막혔다. 그 멜로디, 음악 ……. 수사 결과에 따르면 김현희는 테러범이다. 수많은 이들이 이 폭파범 때문에 죽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인기 연예인이 된 듯하다.”(88쪽)

“국정원 쪽에서 ‘김현희(대한항공 858기 폭파범)를 봐라. 자기 죄를 반성하면 사람을 죽여도 나라에서 살게끔 해준다. 이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우리가 보호해 준다’라는 말을 듣고 (오빠의 간첩 혐의를 허위 증언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꿔 먹었다”(이유진 2013).“

KAL858기 사건은 현재진행형이고, 더구나 2020년 1월 대구MBC가 미얀마 안다만 해역 해저에서 KAL858기로 추정되는 비행기 동체를 수중촬영해 보도함으로써 현지수색을 앞두고 있다. 이 과정과 맞물려 이 사건의 재조사를 요구해온 시민대책위와 가족회도 내부 분란을 겪었고, 저자도 이 소용돌이에서 자유로울 수만은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교수 자리는 나중에 지원하면 또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건 30주기는 그럴 수 없다. 마치 실종자들의 영혼이 나를 부르는 듯했다. 내 운명을 다시 찾은 느낌이었다.”(60쪽)

어쨌든 저자는 자신의 운명적 과제에서 물러서지 않았고, 국내는 물론 외국 정부의 비밀문서를 정보공개 청구해 처음으로 분석하는 등 실천적 학자로서 남다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더구나 이 사건의 진실 규명을 위해 1기와 2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에 지원했다가 거듭된 탈락을 겪으면서도 마지막까지 도전에 나선다. 책을 덮을 때쯤이면 저자의 도전이 ‘합격’으로 빛나길 응원하는 마음이 저도 모르게 드는 건 그의 진실성에 감염된 탓일까.

“그래서 만약 누군가, 왜 이 사건에 관심을 갖느냐고 내게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겠다.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게 접니다. 그게 성주지요.””(175쪽)

특별한 주제 만을 다루고 있는 특별한 학자의 자기 이야기에 빠져들다 보면, 복잡한 현대 도심이라는 속세에 내동댕이쳐진 옛 구도자나 동학인이 오늘을 하루살이로 버텨내며 자신을 지키고 키워온 길을 함께 걸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미국 Rowman & Littlefield 출판사에서 나온 Tears of Theory: International Relations as Storytelling을 저자가 직접 번역했고 연구자와 활동가, KAL858기 사건에 관심있는 이들은 물론 인간의 내면 세계에 천착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도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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