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하게 지적할 점은, 국가가 김현희의 처녀성과 미모를 강조하면서 젠더 정치학에 깊이 관여했다는 것이다. 김현희 결혼과 관련해서도 국가의 개입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결국 국가는 젠더 정치의 민감함에 대해 모르지 않았다.”

박강성주 네덜란드 레이던대학교 교수의 박사논문을 단행본으로 펴낸 『슬픈 쌍둥이의 눈물; 김현희 - KAL858기 사건과 국제 관계학』이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 박강성주, 『슬픈 쌍둥이의 눈물; 김현희 - KAL858기 사건과 국제 관계학』, 한울, 2015.8. [자료사진 - 통일뉴스]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기에 발생한 KAL858기 사건은 지금껏 주로 정치와 테러, 공작과 의혹 등 거대담론과 정치공작 차원에서 다뤄져왔다. 물론 세간에서 김현희의 미모나 결혼을 두고 쑥덕거림도 있었고 여성지의 관심사 정도로 취급되기도 했지만.

박강성주 교수는 ‘소설 쓰기 국제관계학과 여성주의 국제관계학’이라는 다소 낯선 접근법으로 이 사건을 직시한다. 특히 “대한항공 858기 사건에서 젠더, 고통, 진실이 어떻게 작동하고 얽혀 있는지, 그리고 이것이 교차성의 측면에서 여성주의 국제관계학에 어떻게 공헌할 수 있는 지 알아본다”는 것.

그렇지만 실제 박 교수가 이 사건을 만나고 연구한 과정은 그렇게 이질감을 느낄만한 것까지는 아니다. KAL858기 ‘실종’으로 한순간에 가족을 잃은 실종자 가족들을 면접했고, 한국은 물론 미국, 영국, 호주, 스웨덴 등 관련국 정부를 상대로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자료를 확보하기도 했다.

더구나 그가 이 사건에 관심을 갖고 뛰어들게 된 계기도 학문적 호기심이 아닌 ‘실제 상황’에 기인했다. KAL858사건을 소재로 통일부가 주관한 대학생 논문 공모전에서 입상했지만 ‘수정’ 요구를 거절함으로써 수상은 취소됐고, 이후 그는 이 사건을 소재로 석.박사 논문을 쓴 전문 연구가의 길을 걷게 된 것.

다만, 이 사건에 천착하고 실종자 가족들을 만나는 과정 등을 통해 아마도 그는 정치적 의혹제기를 넘어서는 인간적 고통과 진실 문제, 여성과 정치 문제 등에 주목했고, 이를 더 잘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새로운 접근법을 모색했으리라.

“참 어이가 없는 거죠, 유가족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는 거지. 미모의 테러리스트라는 거는 사실 어떻게 보면...”, “그 많은 여자들을 혼자 살게 해놓고, 지가 결혼한다는 건 말이나 되는 거예요? 안되지. 그거는 [진짜] 범인이 아니니까 할 수 있는 일이지”.

저자의 관심이 젠더 문제에 놓여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 더 절절하게 다가오는 것은 가족들의 ‘고통’이다.

“내 자식을, 난 아직도 죽었단 소리 허면 덤벼요”, “그전에는 집은 이사도 안 허고 전화다 안 받고. 내가 이런 말을 했잖아. 어 저녁이면은, 깜짝깜짝 놀래. 저녁에 전화를 누가 오면은 혹시 애가 살았다고 전화 올 것만 같고”, “걔 때문에 병이 난 거여. 병이 나서 아부지까지 그렇게 돌아가시고 나고. 그냥, 지금도 걔 생각을 하면 뼈가 녹고”.

따라서 긴 길을 우회해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진실’일 터. “근데 우리 가족은 억울하다는 이야기죠. 정확한 사실을 안 알려주니까. 우리는 가족으로서는 증거품도 하나도 없고, 어디서 이렇게 당했다는 거를 하나도 모르니까.”

실종자 가족회 차옥정 회장의 “아무 일도 밝혀진 게 없고 다만 밝혀졌다 그러면은 돌아오지 않은 115명이고... 하나도 물증이 없으니까 뭐 인정하고 싶어도 인정할 수가 없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까지 싸우는 거고요”라는 말이 이 사건을 둘러싼 진실공방의 현주소다.

저자는 외국 정부를 상대로 정보공개 청구를 신청해 일부 관련 문서를 받아낸 독보적 성과를 꾸준히 축적해 오고 있다. 미국 국무부 비밀문서는 한국 여당 대통령후보에게 당연히 유리한 이 행동을 북한이 왜 했는지 한국 정부가 “당황하고”있었고, 미국 국무부 역시 “그럴 만한 동기를 찾기 힘들다... 그 시기가 너무 빨랐다”고 분석했음을 드러내준다.

한편, 이 책의 또다른 축을 구성하는 “기존 생각과 정보로 채워지지 않는 공간을 창의적으로 메꾸는” 시도로서의 ‘소설 쓰기’ 방식은 이 책의 제목이 된 ‘그레이스 한’이라는 KAL858기 승무원 쌍둥이 동생을 등장시키는가 하면, 저자의 이미지와 겹치는 올라이트를 내세워 내밀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미 오래 전에 잊은 것”으로 치부되는 KAL858기 사건을 젠더, 고통, 진실이라는 주제로 일깨워낸 그의 저서는 비록 핵심 당사자인 김현희와의 인터뷰를 담아내지 못 했다거나 일반인에게 편하게 읽히기 어려운 점 등을 짚을 수 있다 하더라도 지금, 여기, 함께 살아가는 이로서의 최선의 진지한 시도라는 점에서 박수를 보내고 싶다.

저자는 “나의 책은 이론적으로 유효할 수 있지만, 동시에 슬픈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며 “관련된 존재들의 고통이 이론의 정당화 이전에 고려되어야만 한다”고 조심스런 심경의 일단을 밝히고 있다.

(수정,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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