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

 

편안한 자세로 선다. 두 손을 머리에 댄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시간이 되돌려지고, 얼마 지나지 않은 과거가 나온다. 기억을 더듬으려 애쓴다. 집중하느라 얼굴이 일그러진다. 기억을 놓치지 않으려 집중, 또 집중한다. 이윽고 떠오른 단서. 이제, 눈을 뜬다…

핀란드 드라마 <소르요넨>이다. 이 범죄수사물에는 주인공이 기억을 더듬어 단서를 찾는 대목이 자주 나온다. 단서는 어떤 새로운 것이 아닌,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숨어 있다. 결국 얼마나 집중해서, 새로운 관점으로 보느냐의 문제일 수 있다.

2019년과 2020년에 이어 올해도 외교부가 KAL858기 사건 문서를 공개했다. 30년이 지난 문서를 공개하기로 한 원칙에 따른 것이다. 분량은 370여 쪽으로 이전에 비하면 적은 편이다. 아울러 지난 경우와 마찬가지로, 문서는 개인적으로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2016년 열람했던 자료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면 이들이 담고 있는 기억을, 위 형사처럼은 못 하더라도, 나름대로 집중해서 살펴보려 한다(띄어쓰기와 맞춤법은 원문을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목격자 있었지만 없다고 한 정부

정부에 따르면, KAL858기 추락 당시 안다만 해역에 목격자는 없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정부에 따르면, KAL858기 추락 당시 안다만 해역에 목격자는 없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KAL858기가 사라진 뒤 정부는 “외무부 2차관보를 단장으로 하는 정부 합동조사단(7명)과 조중훈회장을 단장으로 한 KAL 자체조사반(28명)을 구성하여 … 현지에 급파 태국 및 버마정부와 합동으로 수색구조 활동을 실시”했다(2016070044, 17쪽).

그러나 그때 수색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교통부가 외무부에 보낸 1989년 3월 14일 문서에서도 확인된다. 실종자 가족들은 “정부, 대한항공과 합동으로 수색재개를 계속 요구”하고 있었다(5쪽).

이에 대한 정부 답변 가운데 주목되는 부분이 있다. “[초기 수색] 성과가 없어 … 교신지점 중간인 버마 안다만해역일 것으로 추정하고 다시 해상에 대한 광범위한 수색을 펼쳤으나 당시 해상의 구름으로 인해 목격자가 없었으며, 안다만 해역의 수심이 최고 2,000m까지 이르는등 너무 깊어서 …”(18쪽).

먼저, 그때 목격자는 있었다. 버마가 국제민간항공기구에 보낸 자료에 따르면 “어선에 타고 있던 두 명의 선원이 … 연기를 내면서 바다로 떨어지는(falling into the sea) 밝은 불빛을 봤다고 신고했다”(버마 조사보고서, 5쪽). 이 보고서는 1988년 2월에 쓰였고, 한국 정부도 사본을 건네 받았다.

그런데도 정부는 목격자가 없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궁금하다. 물론 정부 관계자가 단순히 착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목격자 진술은 쉽게 무시하기 힘들다. 그래서 정부도 인정했듯, 수색 초기 귀중한 시간을 허비했다.

바로 (거짓 정보로 드러난) “태국 버마 국경지대에 살고있는 현지 주민들의 제보”로 육지에서 “수색을 3일이상 집중적으로 벌였던 것”이다(18쪽). 그랬던 정부가 버마 보고서에 명시되어 있는 목격자는 언급하지 않았다. 혹시 이 목격자를 가짜라고 판단해서였을까?

“정부의 수색을 재개키는 어려운 상황”

버마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안다만 해역에 목격자가 2명 있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버마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안다만 해역에 목격자가 2명 있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아울러 안다만 해역은 수심이 2천미터 되는 곳도 있지만, 위의 신고를 바탕으로 추정된 지점(북위14도33분, 동경97도23분)처럼 깊이가 수십 또는 수백미터 되는 곳도 많다(‘구글 어스’ 등 관련 자료 비교).

결론적으로 정부는 “사고발생국인 버마, 태국이 수색구조의 주체가 되고, 광활한 안다만해역의 수심이나 조류의 이동등을 감안할때 실질적인 정부의 수색을 재개키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2016070044, 18쪽). 정부가 버마와 태국에 “계속해서 잔해수색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긴 했지만, 의지를 가지고 재수색에 적극 나서지 않았던 점이 아쉽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고, 1989년 9월 29일 암호로 수신된 “긴급” 정보가 일본에서 전달된다. “NHK[일본방송협회] 정오 뉴스는 방콕 특파원발로 태국 당국이 2년전 행방불명된 KAL기 잔해로 보이는 비행기 파편을 발견, 현재 조사중이라고 금일 아침 발표하였다고 보도”했다는 것이다(29쪽).

구체적으로 확인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9.22. 버마 남부의 타보이 앞바다 안다만해 해저에서 태국어선 1척이 많은 수의 금속파편을 끌어 올렸음. 그중 2개 … 표면에 많은 리벳(비행기이음새에 쓰는 못의 일종)이 박혀 있었음. 이에 지방 당국은 동파편이 비행기의 일부임에 틀림 없다고 판단하고 … 조사중임.”

하지만 정주년 태국 주재 한국 대사(사건 당시 안기부 국제1국장)에 따르면, 이 판단에는 문제가 있었다. “대한항공지점장은 정비공 2명과 함께 점검결과 동파편이 비행기의 파편인지 여부를 알수없고 KAL파편인지 여부는 더군다나 식별할수없다고 언급하고 전문가의 과학적 조사를 요한다고 태측에 말하였다함”(35쪽).

버마의 잔해 인수를 철회시킨 한국

버마는 태국으로부터 잔해를 인수하려 했지만, 한국이 (충분한 협의 없이) 이를 철회시켰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버마는 태국으로부터 잔해를 인수하려 했지만, 한국이 (충분한 협의 없이) 이를 철회시켰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1990년 3월에도 잔해 발견 소식이 들려왔다. 외무부 아주국장 대리는 태국 주재 한국대사관에 다음과 같이 연락한다. “국내 신문 보도에 의하면 … 기체 파편과 승객 휴대품이 지난 5일 미얀마 해역 타보이반도 앞바다에서 태국 어부에 의해 인양됐다고 하는바, 동 사실 확인 바람”(38쪽).

답변에 따르면, 태국 “내무부는 3.14. 오후 RANONG[라농]주 부지사로부터 현지 경찰서에 기체 알루미늄 파편 74점과 여행가방 1개를 확보시켜두었다는” 보고를 받았다(42쪽). 그리고 태국 항공국 부국장이 버마로부터 “잔해 인도 요청을 취소 하겠다는 전문을 접수”했다고 한다(49쪽). 곧, 버마가 잔해를 가져가려 했지만 계획을 바꿨다는 이야기다.

그리하여 태국은 “잔해에 대한 조사권이 없으며, 사고발생국인 미얀마측으로부터도 잔해인도 요청을 철회하였기 때문에 한국정부측이 요청할 경우 인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52쪽). 어떻게 된 일인가?

답은 1990년 3월 20일에 쓰인 외무부 문건에 있다. “3.16. 주 미얀마 대사에게 미얀마측이 태국에 요청한 잔해물 인도 요청 철회 요청 지시 3.16. 주 미얀마 대사, 미얀마 정부에서 상기대로 조치하였음을 보고”(59쪽).

국제민간항공협약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버마(미얀마)가 사고 발생국(State of Occurrence)으로 잔해를 조사해야 했고, 이를 실행하려 했던 듯하다. 그런데 한국이 개입하여 버마의 잔해 조사가 취소된 것이다.

물론 한국은 사고기 등록국(State of Registry)으로서 버마 대신 조사를 직접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사고 발생국의 동의(consent)가 있을 때 가능하다(국제민간항공협약 부속서 13). 문서에 따르면 이런 동의는 없었다고 하겠다. 만약 있었다면, 버마는 처음부터 잔해 인수를 추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1990년 3월 30일 태국의 한국대사관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주재국 외무부는 KAL 잔해의 대 아국 인도에 문제없으나 다만 태국과 미얀마의 정치적 미묘한 관계때문에 외교채널을 통하여 미얀마측이 잔해인수를 요청하지 않겠다는 확인이 형식상 필요”해 이를 기다리고 있었다(91쪽).

그리고 4월 5일 버마의 한국대사관에 따르면, 버마는 “KAL기 사고 조사당사자였고 금번의 KAL 잔해를 태국인이 주재국측 영해내에서 수거한것이 문제점이나 한-미얀마간의 긴밀관계로 보아 선처토록 노력하겠다고” 했다(92쪽). 곧, 4월 5일 기준 버마-태국 사이 협의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3월 16일 이미 철회 요청이 “조치”되었다고 보고된 뒤였다. 한국의 바람처럼 일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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