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

 

“우리는 그저... 불을 계속 지니고 다녀야 해.” 좀 뜬금없다. “무슨 불이요?” 못마땅한 표정으로 묻는다. “네 안에 있는, 불...” 대답이 진지하다. “우리는 계속 좋은 사람들인 거죠?” 못마땅한 얼굴로 다시 묻는다. “그래, 우리는 계속 좋은 사람들이야. 물론이지!” “그리고... 앞으로도 늘 그러는 거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앞으로도 늘 그럴 거야...”

미국 영화 <더 로드>에 나오는 대목이다. 재앙에 뒤덮인 지구와 여기서 살아남으려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 영화에는 생존하려고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이들이 나오는데, 인용한 장면은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그린다. 불은 따뜻한 마음, 또는 이를 지탱해주는 힘이 아닐까 싶다.

나는 ‘김현희-KAL858기 사건’ 연구자인데, 올해로 사건을 고민해온지 15년이 된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어떻게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물론 사건과 관련된 문제들이 얼마나 풀어졌나라는 질문에는 고개를 들기 쉽지 않다. 그래도 어찌됐든 나는 사건을 계속 고민하고 있다.

연구자로서의 나를 지탱하기 위해 영화에서처럼 ‘불’이 필요한데, 이와 관련해 하는 일이 몇 가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생각날 때마다 인터넷 검색을 하는 것이다. 그러다 뜻하지 않은 결과를 얻기도 하는데, 최근에도 그랬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비밀문서를 보게 된 것이다.

새로 발견한 비밀문서들

▲ 박강성주 박사가 새로 발견한 KAL858기 사건 관련 미국 중앙정보국 자료. CIA 누리집(https://www.cia.gov/library/readingroom)에 올려져 있다. [캡쳐사진 - 박강성주]

이번에 발견한 문서는 11건으로, 중앙정보국이 2012년과 2013년에 걸쳐 순차적으로 공개한 기록들이다. 이 공개가 자체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아니면 특정인이 신청을 해 이루어졌는지는 알기 어렵다.

KAL858기 사건과 관련된 중앙정보국 비밀문서가 처음 알려진 때는 2008년이다. 당시에도 나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우연히‘ 자료들을 발견했고, <통일뉴스>에 이를 공개했다. 그 뒤 나는 정보공개를 청구해서 비밀문서들을 더 얻을 수 있었다.

이에 대한 글을 2010년에 썼는데, 나는 문서번호를 근거로 중앙정보국의 사건 관련 자료가 최소 18건일 수 있고, 공개된 문서가 12건이니 아직 6건 이상 더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런데 11건이 추가로 발견된 것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이 문서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중앙정보국 누리집(https://www.cia.gov/library/readingroom)에 올라와 있는 자료에는 내가 이미 공개했던 비밀문서도 1건 있다. 그리고 2건은 반테러와 무기수출법에 관한 청문회 자료로, 거의 똑같은 내용이지만 사건과 관계없는 부분이 다른 경우다. 그래서 이 문서들은 1건으로 계산했다.

가장 주목되는 문서는 1988년 1월 11일에 작성된 일일 보고서다. 1급 비밀문서로, 중동아시아, 동아시아, 남아시아에 관한 핵심 정보가 짧게 나와 있다. KAL858기 사건은 동아시아 부분에 나온다.

한국이 북의 책임에 대해 확신하고 있다는 것인데, 중앙정보국은 “발표가 올림픽 경기 참가신청 마감날인 다음 주 일요일 전에는 이뤄지지 않을 것이 거의 확실(almost certainly)하다”고 했다. 여기에서 일요일은 1988년 1월 17일을 가리킨다. 중앙정보국이 그렇게 확신한 이유도 적었는지는 알 수 없다. 보고서의 다음 쪽이 모두 지워졌기 때문이다.

올림픽 참가 마감 직전 수사발표

그런데 당시 안기부(현 국정원)가 수사발표를 한 날은 1월 15일로, 마감날 이틀 전이다. 비밀문서에서 거의 확실하다고 했던 예상을 빗나갔다. 중앙정보국의 분석이 늘 맞아야 한다는 얘기가 결코 아니라, 안기부가 왜 하필 그날을 선택했는지 궁금해진다.

흥미로운 것은 폭파범으로 알려진 김현희가 받았다는 공작지령이다. 수사발표에 따르면, 정확한 문구는 “88서울올림픽 참가신청 방해를 위해 대한항공 여객기를 폭파하라”였다. 참고로 올림픽 참가신청 기간은 국제올림픽위원회가 167개 회원국에 초청장을 보낸 1987년 9월 17일부터 4개월 동안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11월 29일 전까지 약 80개국이 신청을 했고, 1월 15일 수사발표 전까지는 156개국, 그리고 1월 17일까지 모두 161개국이 신청을 하였다(<문화방송(MBC)> 보도 정리).

1988년 3월 4일치 2급 비밀문서는 중앙정보국 소속의 해외방송정보원(Foreign Broadcast Information Service)이 작성했다. 이 문서에 따르면 당시 김일성 주석과 그의 후계자인 김정일 위원에 대한 개인 숭배는 두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어떤 비판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일러줬다. 따라서 “설사 김정일이 KAL기 폭파에 책임이 있더라도(EVEN IF KJI WAS RESPONSIBLE) 후계 과정과 국가 근본이념에 대한 전복 없이는” 누구도 그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1988년 9월에는 중앙정보국 부국장과 국장에게 국무부의 2급 비밀문서가 전달됐다. 미국의 반테러 정책에 대한 내용으로, 1988년 8월 30일 기준 대통령 후보들을 위해 마련된 보고서다. 여기에는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된 국가들 정보가 요약돼 있다.

자료에 따르면, “북의 KAL858기 폭파에 대한 직접적 개입(Direct DPRK involvement)은” 한반도-조선반도 밖에서 일어난 북 테러 활동의 최근 사례였다. 그 목적은 한국을 불안정하게 하고 올림픽을 방해하는 것이었고, 미국은 중국과 소련을 통해 올림픽 기간에 북이 테러를 하지 못하도록 압박하고 있었다.

참고로 원래 이 문서는 콜린 파월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을 위해 작성되었는데, 그는 조지 부시 대통령 시절 국무부 장관이 된다. 그리고 당시 중앙정보국 부국장은 로버트 게이츠로 아버지 부시 대통령 시절 중앙정보국장, 조지 부시 대통령 때는 국방부 장관을 지낸다.

“너무 빨리 일어났다”

또 하나 주목되는 자료는 1급 비밀문서로 1988년 1월 7일치 일일 보고서다. 중앙정보국은 한국이 김현희의 자백을 북을 비난하는 데 이용할 수 있다고 봤는데, 한국 입장에서는 공개적 비난이 북의 또 다른 폭력에 대한 최선의 억지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의 위협을 극적으로 과장하려는 시도는 올림픽 안전 개최와 관련된 한국의 능력에 의문을 불러올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중앙정보국은 북쪽의 동기가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이 테러행위가 올림픽 방해 시도라면 다른 사건들이 뒤따를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단일 사건으로서 KAL858기 사건은 올림픽에 “의미있는 영향을 주기엔 너무 빨리(too early) 일어났다.”

참고로 중앙정보국은 이미 공개된 1988년 2월 2일치, 4월 1일치 비밀문서에서도 시기가 너무 빨랐다고 말했다. 또한 이러한 의문은 역시 이미 공개된 1987년 12월 7일치 미국 국무부 문서에서도 확인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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