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

 

▲ 외교부가 30년 지난 외교문서들을 3월 31일자로 일괄 공개했다. 공개된 문서 중에는 KAL858기 사건 관련 문서 1만여 건도 포함됐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넌 이길 수 있을 때만 싸우나?” 영화 <안시성>에 나오는 말이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중요하다는, 이기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 아닐까. 꽤 오랫동안 김현희-KAL858기 사건을 고민해왔는데, 요즘 이 말을 곱씹게 된다.

2019년 3월 31일, 외교부가 “국민의 알 권리 신장과 외교행정의 투명성 제고를 위하여” 30년이 넘은 문서들을 공개했다. 1987년 KAL858기 사건 관련 문서도 포함돼 있다. 그리고 대다수 언론은 당시 전두환 정부가 대통령 선거에 앞서 김현희를 압송하려 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 기사를 냈다.

언론이 ‘과거사’로 일컬어지는 이 사건을 다뤄주는 것만으로 연구자인 내게는 고마운 일이다. 특히 이번처럼 정부의 공식 수사결과에 가려 가볍게 취급됐던 부분이 다뤄질 때 더욱 그러하다.

고맙지만 안타까운 보도

문제는, 누군가 이미 다뤘던 부분을 언론이 마치 세상에 처음으로 알리는 것처럼 보도할 때다. 이번에 외교부가 공개한 문서들은 내가 2016년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국가기록원에서 열람한 자료다.

나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KAL858기 사건 재조사 기록을 살펴봤고, 주요 내용을 2016년 11월부터 두 달 동안 <통일뉴스>에 연재했다. 그때 나는 사건 당시 외무부문서도 적지 않게 다뤘었다. 대표적인 것이 김현희 대선 전 압송 부분이다. [관련기사 보기]

그런데 거의 모든 언론은 2년도 훨씬 전에 다뤄진 내용을 처음인 것처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때는 전혀 주목하지 않다가 이번에 외교부가 문서를 공개했다고 하니 순식간에 기사를 쏟아냈다.

고맙지만 안타까운 일이다(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외교부처럼 내가 기자들에게 관련 자료를 나눠주거나 보도자료를 돌렸다면 상황이 달랐을 수도 있다. 기자들도 바쁠 것이다. 몇몇 성실한 언론을 빼고, 직접 챙겨주지 않으면 누가 관심을 갖겠는가. 그렇게 믿고 싶다).

더 솔직히 말하면, 정말 씁쓸하다. 2012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당시 미국 국무부가 사건 관련 문서들을 공개했는데,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기사를 내기에 바빴다.

하지만 그 문서들은 당시 KAL858기 사건 대책위원회에서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이미 얻어낸 자료였다. 그리고 이를 건네받은 내가 핵심 내용을 정리해 2009년 12월, 몇 차례에 걸쳐 <통일뉴스>에 실었다. [관련기사 보기]

그때도 다른 모든 언론은 조용했다. 그런데 미국이 문서를 공개했다고 하니 언론이 갑자기 부지런해졌다. 비밀문서가 세상에 처음 나온 것처럼 떠들썩했다. 평소에도 그렇게 부지런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잊혀질 만한 사건, 시원하게 해명되지 않은 사건을 다뤄주는 언론에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한다. 뒷북이라도 쳐줘서 감사하다. 그럼에도 2012년의 언론과 2019년의 언론, 과연 얼마나 달라졌는지 묻고 싶다.

평소에도 부지런한 언론을 기대한다. KAL858기 사건뿐만 아니라, 잊혀져 가지만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여러 고통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한다(물론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 언론도 있다).

뒤늦게 부지런해지는 언론을 보며

이번 일을 계기로 나 자신도 돌아보게 된다. 뒤늦게 부지런해지는 언론이 씁쓸하지만, 그럴수록 <안시성>을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넌 누가 알아줄 때만 쓰나?”… KAL858기 사건관련해 어떤 결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묵묵히, 끝까지 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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