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뉴스가 창간 25주년을 맞아 오는 12월 11일(목) 오후 5시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기념행사를 갖는다.
25주년 기념행사에 맞춰 발간되는『통일뉴스 백서(2000-2025) - 민족통일 정론의 한길 25년』에 포함된 ‘함께한 통일뉴스 25년의 발자취 - 내가 만난 통일뉴스’를 순서대로 싣는다.
1. 곽태환 : 통일뉴스와 동행한 20년, 한반도 평화를 향한 헌신의 여정
2. 김동환 : 통일과 국학의 만남
3. 김지영 : 든든한 버팀목 후원회원들, “모두가 덕분입니다”
4. 이승환 : 남북관계의 현장에는 언제나 통일뉴스가 있었다
5. 한충목 : 남북을 잇는 오작교이자 기록자
6. 이연희 : 통일을 향한 긴 여정의 동반자 통일뉴스
7. 정연진 : 통일운동의 역사이자 평화를 향한 공동의 일기장
8. 임영태 : 글을 써 통일뉴스에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자
9. 이진석 :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 준 통일뉴스
10. 이양재 : 통일뉴스의 25주년은 새로운 한 세대의 시작점이다
11. 고성진 : 통일을 기록하는 ‘페이스 메이커’
12. 조정훈 : 혹독한 데스크와 ‘친절한 통일씨’
13. 김양희 : 나의 성장과 함께한 통일뉴스
14. 이창훈 : 18년간 ‘민족일 다시읽기’ 294편으로 마무리
15. 임재근 : 통일뉴스 객원기자 명함 한 장의 무게감
16. 배안 : 해외동포들의 교류 마당 통일뉴스
17. 정일용 : 남북 적대관계 해소에 앞장서길
18. 원희복 : <통일뉴스>와 <민족일보> 그리고 조용수 언론상
19. 정해랑 : 21세기에 ‘민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20. 전용정 : 미완의 백두대간 완주를 꿈꾸며
김양희 전 통일뉴스 객원기자 / 기획재정부 사무관
첫 만남은 2001년 7월 말, 강원도 고성에서였다.
그해 나는 대학원 졸업 후 취업하기 직전 뭔가 활력소가 필요해, 그즈음 대학생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던 박카스 국토대행진에 지원했었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서였을까 시원하게 떨어졌고, 의기소침해 있을 때 한 선배가 문익환목사기념사업회 ‘통일맞이’에서 주최하는 ‘휴전선평화통일대행진’에 지원해보라고 추천해줬다.
‘휴전선평화통일대행진’은 정전협정기념일인 7월 27일부터 광복절인 8월 15일까지 강원도 고성에서부터 강화도까지 휴전선을 따라 걷는 일정이고 연령 제한도 없었다. 딱 내게 맞춘 국토대행진이었다. 또다시 떨어지면 내 인생에서 국토대행진은 없다는 마음으로 온 정성을 다해 지원서를 작성했고, 그 결과 높은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합격했다. 그리고 대행진 우리 조에 통일뉴스 기자가 대원으로 참여하여 처음으로 통일뉴스를 만났다.
나는 이미 대행진 출발 직전 취업 면접을 봤고 식품전문지에 합격했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깡이었는지, “예비모임도 다녀온 터라 대행진에 다녀오고 출근할 수 있으면 하고, 아니면 이미 약속이 되었으니 떨어트려도 할 수 없다”고 사장에게 말했다. 사장의 “동기들이 하루하루 성장해서 늦게 출근할수록 넌 뒤처질 것이다”는 말에 “그 정도는 감수하겠다. 내가 열심히 하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며 대행진에 온 터라 나도 대행진이 끝나면 기자가 될 예정이었다. 그래서 통일뉴스 기자에 더 관심이 있었을지 모른다.
2000년은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나 6.15공동선언을 발표한 해로 그 어느 때보다 통일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뜨거웠다. 그땐 “우리의 소원은 통일~” 하는 노래가 그리 촌스럽지 않았고, ‘심장에 남는 사람’ 같은 북한 노래를 듣거나, 여기저기 ‘북한영화관람’ 모임 같은 것도 많아서 북한 문화를 접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접할 수 있던 때였다.
이런 분위기에 더해 우리는 한여름, 보름 동안 고생을 각오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100여 명의 행진단이 쏟아지는 장마에 물집 잡힌 발바닥이 찢어지고, 작열하는 태양에 탈
진하면서도 끊임없이 통일 노래를 듣고 통일에 대해 이야기하며 통일에 대한 각오를 다지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 우리는 피가 끓는 것을 느꼈고, 집단최면에라도 걸린 듯, 혼자라면 절대 해내지 못할 일들도 함께라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통일도 우리의 기세로 곧 닥칠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지와 관계없이 힘든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 온몸에 쉰 냄새가 가득하고 흙먼지가 가득한 길바닥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누워 있을 정도로 힘들다 보니 가는 곳마다 비슷한 민통선 안의 GP(감시초소)들과 전망대에서 군인들의 설명을 들을 때면 미안할 정도로 졸곤 했다.
그런데, 그렇게 매번 졸다가 단 하나의 강연에서 “이미 통일시대는 왔다. 통일의 역사를 만들어가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강사의 말이 가슴에 박혔다. 나는 무엇을 하면서 통일을 맞이할까. 그게 시작이었다. 그렇게 통일뉴스 객원기자가 되었고, 민족음식이야기 칼럼을 연재하게 되었다. 그때 그 강연을 들은 이후 내가 통일을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할 일이 무엇인지 고민했고, 기자인 내가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글쓰기라는 결론을 내렸다.
글쓰기를 선택하긴 했지만, 대행진이 끝나고 기자가 된 터라 통일뉴스 객원기자를 시작할 때는 처음부터 숙련된 기자가 아니었다. 식품전문기자로 처음 걸음마를 했을 때부터 통일뉴스에 통신원으로, 객원기자로 일하면서 함께 성장해나갔다.
그땐 기사를 쓰는 게 정말 너무 재밌었다. 식품쪽 기사를 쓰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통일뉴스 관련 기사는 또 새로운 영역이어서 주말이나 퇴근 후에 글을 쓰는 것이 전혀 힘들지 않았다. 그렇게 주말이나 퇴근 후에도, 일주일 내내 쉬지 않고 글을 쓰다 보니 입사 전 사장이 말한 ‘동기들보다 늦은 성장’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누구보다 빨리 기자로 잘 적응할 수 있었다.
통일뉴스가 만들어진 2000년은 인터넷 매체들이 생기던 초창기라 종이 신문, 잡지를 만드는 식품지와 달리 통일뉴스는 기사를 쓰면 독자들에게 바로 피드백이 오는 것도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나의 글에 댓글이 달리는 것도 재미가 있지만 누군가 나의 글을 보고 재미있었다는 이야기 등을 전해 들으면 그게 또 그렇게 좋았다.
한번은 금강산에 취재를 가서 남측 관광객들의 안전과 금강산을 지키는 북측 산림원인 남송이와 구급대원 철남이와 관련한 기사를 쓴 적이 있었다. 남송이는 마지막으로 내려오는 나를 끝까지 지켜주며 ‘그쪽보다 네 살이 어리다. 꽃 피는 봄에 다시 오면 갈비를 대접하겠다’고 해 처녀 가슴을 콩닥거리게 했었고, 남동생 같던 철남이도 묵묵하게 사람들을 챙겨주곤 해 든든했었다. 당시 그들과 만나서 나눈 이야기들을 기사로 썼었는데, 독자들이 많이 좋아했었다.
그리고 나는 남송이와 만나기로 했던 꽃 피는 봄 대신 그 다음 해 겨울에 취재차 금강산에 갈 때 그 기사들을 출력해 가지고 갔었다. 금강산에 근무하는 북측 근로자들이 격일제 근무를 하던 터라 남송이는 못 만났지만 당시 철남이를 만났고, 기사를 전달했더니 그는 “이미 본 기사”라고 했다. 기사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금강산 관광을 간 남측 관광객 중 하나가 기사를 보여주면서 “너는 남한에서 유명인”이라고 말해줬다며 쑥스러워했었다.
또한 통일뉴스는 남북 간 분위기가 좋을 당시 언론교류의 일환으로 조선륙일오편집사와 업무계약을 맺으며 상호 기사를 제휴하고 초청 취재와 협력사업을 진행해 왔다. 당시 재일본 조선신보와도 교류가 있었는데, 조선신보와 만남을 가졌던 인사가 “리상영 기자가 김 기자의 기사를 재미있게 읽었단다. 김 기자를 궁금해했다”고 전해준 적이 있다.
그때 너무 좋아 ‘일본으로 시집을 가야 하나, 조선신보는 평양지국이 있는데, 국적이 조선적인 남자랑 결혼하면 평양지국으로 가서 살 수 있을까, 뭔가 어렵긴 하겠지만 평양지국이라면 정말 특종기사가 끝도 없겠구나, 평양지국에 그렇게라도 내가 제일 먼저 가면 좋겠다’ 생각했었다. 물론 리상영 기자가 조선적이라고 밝힌 적도 없고, 또 그때는 물론이고 그 이후로도 나와 리상영 기자는 한 번도 만난 적도 없으며, 단 한 번도 서로 메일조차 주고받은 적이 없을 정도로 아무 것도 아닌데도 잠깐이나마 그런 상상까지 했을 정도로 기사를 잘 썼다고 하는 인사를 들으면 그렇게 재미있고 신이 났었다.
‘민족음식이야기’ 연재는 통일시대를 맞이하는 나의 역할 등을 고민하면서 내가 사명감을 갖고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다. 식품을 전공하고 식품전문기자를 하면서 음식이라는 친근한 소재로 독자들에게 북한과 통일문제에 대한 관심이 생기도록 하고 싶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노력하다 보면 한 사람당 통일을 1초씩이라도 당기진 않을까, 그럼 나도 통일을 1분쯤은 앞당기는 데 기여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처음 연재를 시작할 무렵에는 10여 회 정도의 기회가 있었다. 칼럼을 써보고 반응이 괜찮으면 좀 더 하자고 했는데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 많았는지, ‘민족음식이야기’는 2번의 시리즈에 총 500여회(1시즌 254회, 2006.4.27~2011.4.28 / 2시즌 145회, 2012.4.27.~2015.2.19.) 총 10여 년에 걸쳐 기고가 이어졌다.
‘민족음식이야기’는 일주일에 한 번씩 실렸는데, 그 한 주 동안 무슨 글을 쓸지 정하고, 자료를 수집한 뒤 그걸 글로 쓰는 것이 생각보다 오래 걸려 일주일이 금세 돌아오곤 했다. 처음 글을 쓸 때 만해도 그저 자료를 찾아서 썼지만 글을 쓸수록 욕심이 나서 직접 먹어보고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방북취재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려고 노력했고, 공부도 계속하다 보니 결국 북한학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민족음식이야기’ 연재글은 이후 『평양랭면 멀리서 왔다고 하면 안되갔구나』(폭스코너, 2019)라는 책으로 이어졌고 문재인 대통령께서 “책을 재밌게 잘 읽으셨다”며 선물을 보내주시기도 했다. 또 그 책은 지난해 일본에서도 『北朝鮮の 食卓』(金知子 번역, 原書房, 2024)으로 번역 출간되어 나를 글로벌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이렇게 나는 통일뉴스와 함께 성장해갔다. ‘통일을 만들고 싶다’는 다짐으로 정부에서 일하게 되면서 지금은 기자가 아닌 독자로 위치를 바꿔 통일뉴스를 만나고 있다. 일을 하면서 북한이 발표한 내용들의 숨은 뜻을 알아보기 위해 통일뉴스 자료를 찾아보곤 한다.
그러나 새정부 출범 후 여러 유화조치에도 불구하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 관계’라고 발표한 이후 남북관계 개선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상황이다. 그리고 얼마 전 국민의 51%가 통일이 필요 없다고 한 설문 조사 결과가 나왔다. 통일연구원이 2014년 이후 지속적으로 조사를 했는데 통일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과반수가 넘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분명 2000년 강연에서 왔다던 ‘통일시대’가 다시 돌아갔나 싶은 지경이다.
남북관계에 부침이 있을 수 있어도, 통일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사라지는 것은 대북정책을 담당하는 사람의 하나로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나 자신도 처음 통일뉴스를 만나고 한참 취재를 다닐 때보다 지금은 열정과 관심이 많이 사라진 것이 아닌가 반성해본다. 방북 취재를 다니면서 그곳 사람들이 걱정되고 궁금해, 방북 이후 수년 동안 날씨가 추워지면 ‘창광유치원에서 본 아이들이 참 춥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곤 했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지도 정말 오래되었다.
이럴수록 통일뉴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 통일뉴스가 느리더라도 사람들을 통일에 관심을 갖도록 할 수 있는 소중한 공감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시 한 번 통일뉴스에 향후 북한과 협력하고, 통일하고 싶고, 북한 사람들이 궁금하고, 또 보고 싶어지는 가슴 뛰는 기사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동안의 통일뉴스 25년에 이어 앞으로의 통일뉴스가 나아갈 길이 기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