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 양 재 (식민역사문화청산회의 이사)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라는 자료가 있다. 원본은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으로 되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이 자료를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 구미위원부 Ⅱ > Ⅱ. 선전문건류 > 3. 워싱턴군축회의 개최기 한국대표단의 선전 문건 > 1) 군축회의에의 한국청원서(영문 번역, 1922)”로 분류하고 있다. 

이 문건을 대상으로 하여 2011년에 포항공대 인문사회학부 교수 고정휴(高珽休)에 의하여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1921)의 진위 논란과 서명인 분석”이란 제목으로 『한국근현대사연구』 2011년 가을호 제58집에 발표된 바 있다.1)

그러나 이 논문은 개척적인 논문이기는 하지만, 몇 가지 한계성을 도출하고 있다. 

1. 진정성의 문제 

문제는 이 문건에는 “상당한 부분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다”라는 점이다. 이 문건은 ‘한국인들이 군비제한과 극동 회의에 제출한 청원서’로서 국한문 문건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제출한 것으로 되어 있다. 대한제국이나 일제강점기에 해외로 보낸 많은 문건이 시도와는 달리 실제로는 전달되지 않은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 문건은 임시정부가 다른 국제회의에 보낸 문건과는 달리 실제로 제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워싱턴군축회의 개최기 한국대표단의 선전 문건’에는 ‘한국의 모든 단체와 모든 지역 대표자들의 서명과 날인을 첨부하여 동봉함’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의 모든 단체와 모든 지역 대표자들의 서명과 날인을 첨부하여 동봉함’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문건을 분석하여 보면, 이 문건은 임시정부 측에서 작성 제출한 문건이기는 하지만, 그 서명자 상당수는 직접 서명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규명된다. 

2. 태평양회의, 대한독립의 사활을 걸다 

1921년 11월 12일부터 1922년 2월 6일까지 미국 주도하에 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중국 등 9개국 대표단이 참가하여, 워싱턴에서 해군 군비 축소와 동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현안들을 논의하기 위한 ‘워싱턴 해군회의(Washington Naval Conference), 해군 감축에 관한 국제회의(International Conference on Naval Limitation)’, 일명 ‘태평양회의’가 개최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주요 의제로 다루어지리라 전망하고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임시정부는 이 회의를 ‘절실하고 중대한 생사의 문제’로 받아들였다.

임시정부는 이 회의에서 한국문제가 주요 의제로 다루어질 것이라는 전망을 갖고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유럽 열강은 미증유의 전쟁 참화로 쇠락의 길로 접어든 반면 미국과 일본이 새롭게 부상했다. 특히 일본이 ‘5대 강국’의 반열에 끼면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세력균형을 전면 재조정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하였다. 이에 미국 대통령 하딩(Warren G. Harding)이 군축문제와 동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제반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룰 국제회의를 관련국들에 제의하여 태평양회의가 개최된 것이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일본을 기존의 열강들이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도 초미의 관심사였다. 

서간도 독립운동세력들 또한 미국 워싱턴에서 태평양회의가 개최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연래의 희망 달성은 바로 이 기회에 있다고 여겼다. 각지의 독립운동가들과 마찬가지로 성과를 높이기 위해서 장정 모집·자금 모집·무기 수집에 힘쓰는 등 급히 활동을 개시했다. 그중에는 국내 진입을 주장하면서 중국 관병 같은 복장에 정예한 총기를 휴대하고 대열을 지어 한만 국경지역에 출몰함으로써 일제를 긴장시켰다. 임강현(臨江縣) 오지 화개산(花開山)에서는 태평양회의 당일 그곳 거류 한인들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콴뎬(宽甸)지방의 독립운동가들은 반일 인쇄물을 반포하여 배일(排日) 기세를 높였다. 

북간도 방면에서도 태평양회의 개최 보도가 전해지자 1921년 9월경 돈화현(敦化縣)에 있던 이홍래(李鴻來)와 연해주 방면에 있던 최경천(崔慶天) 일파가 활발하게 부하들을 간도지방에 잠입시켰다. 그리고 그곳에서 태평양회의에서 한국독립을 요구해야 한다는 여론을 고조시켰다. 그곳의 한인들도 이를 믿고 자금거출에 응했고, 대표자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내왕하였다. 그 바람에 평소 친일파로 분류되던 자들도 태평양회의 외교운동의 성공 여부를 반신반의하며 지켜볼 정도였다.

중국인들도 한인들의 태평양회의 참가를 후원하였다. 광둥(廣東) 중한협회(中韓協會)에서 기금을 조성한 것이다. 일제는 광둥 지방 중국 관민이 모두 한국독립운동을 성원함으로써 태평양회의에서 일본의 주장을 견제하려는 저의가 있다고 파악하였다. 태평양회의에 참여하는 한인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원조는 물론 임시정부 요인들이 노력한 결과였다. 임시정부는 당시 국무총리대리 겸 외무총장을 겸임하던 신규식의 명의로 중국 각계 요인들에게 글을 보냈다. 태평양회의에 참여하는 중국 대표들에게도 한국의 독립문제를 의안으로 제출해 주기를 바라고, 이것이 당장 중국이 한국을 원조할 가장 시급한 문제라는 점을 피력하였다.

임시정부는 미국에서 활동할 한국대표단원으로서 미국에서 구미위원부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이승만과 서재필·정한경을 각각 단장·부단장·서기로 임명하였다. 이승만과 서재필은 워싱턴에서 미국의 중요인물을 방문하여 동 회의에서 한국문제가 유리하게 토론되도록 운동하였다. 태평양회의에 출석할 미국위원에게는 한국독립 승인 문제를 솔선하여 제출하고, 동시에 한국대표로 하여금 동 회의 석상에서 한국의 사정을 직접 설명할 기회가 있도록 주선하였다. 일반 인사들에게는 한국이 당연히 독립할 이유를 설명하고, 원조할 이유가 있음을 설명하였다. 

3.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의 조선내 작성 

임시정부는 이러한 사실을 조선에도 알려 국내 유력자나 반일세력들이 이에 호응하도록 유도하였다. 1921년 8월 30일 태평양회의에 제출할 「我 대한민국의 요구 서류」가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작성 통과되었다. 그러나 정부가 작성한 이 서류의 실체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 한편 국내에서는 사회지도급 인사들이 연명으로 날인하여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문서를 작성하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문건이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이며, 여기에는 황족대표 1명, 귀족대표 2명을 포함하는 단체대표 101명과 전국 지역대표 271명 등 총 372명이 서명하고 인감을 찍었다.
 
9월 하순에 작성이 완료된 이 문서는 상하이 임시정부에 비밀리에 전달되었다. 임시정부는 이 문서를 다시 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로 파견된 한국대표단에게 발송하였다. 한국대표단은 1922년 1월 2일 태평양회의 사무총장에게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를 보냈다. 정한경은 ‘워싱턴군축회의 한국대표단 서기’의 이름으로 이 문서를 태평양회의 사무총장에게 보내면서, 한국 전국 8도 및 260개 지역 출신의 공식적인 권한을 위임받은 대표들의 서명을 받아 작성된 문서라는 점을 확인해 주었다. 

이 문서의 중요한 내용은 한국이 중국·러시아·일본 사이에 개재한 동양의 중심으로 한국의 문제가 곧 세계의 문제가 되므로 금번 태평양회의 의안도 한국을 중요시 아니 할 수 없다는 점, 한국문제를 최선하게 해결하지 못하면 동양의 평화는 보전할 수 없고 동시에 태평양회의 목적인 세계평화를 성취할 수 없다는 점, 일본의 한국 합병은 본래 한국민족의 의사가 아니었다는 점, 동시에 (상하이에 있는) 한국정부를 완전히 한국정부로 성명하고 열국에게 한국에서 파견하는 위원의 출석권을 요구하며 열국이 일본의 무력정책을 방지하여 세계평화와 한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노력하기를 기원한다는 점 등으로 구성되었다. 

4. 문건의 소개  

조선에서 제작한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 

今年 十一月 十一日에 華盛頓에셔 開하는 太平洋會議는 正義人道에 基하야 世界平和를 擁護하고 民族共存을 計劃하랴 함이다. 我韓國人民은 此를 熱誠으로 歡迎하는 同時에 我等은 世界列國이 我韓國 政府委員의 出席을 容認하기를 懇望하노라.
 
므릇 韓國은 四千二百餘年에 一貫한 獨立自由의 國으로 相當한 文化生活을 作하얏고 一回도 異民族의 統治를 受한 事가 업엇나니 此는 我等의 歷史가 證明하는 바다. 或 異民族이 我韓國을 侵犯한 時가 잇스나 我韓人은 武力이나 外交로 此를 다 斥退하고 말앗스니 彼 漢 · 隋 · 唐의 等을 擊却하야 國威를 宣揚한 것과 彼 元 · 明 · 淸 等과 角逐하야 國權을 保全한 것이 文化의 實例이다. 이러케 歷代의 異民族이 我韓國을 侵犯한 者 多하나 彼等 異民族은 모다 失敗에 歸하얏고 我韓國은 繼續하야 獨立自由를 確保하얏나니 此는 我韓人의 民族性이 獨立的이고 自主的이어서 決코 異民族의 制馭를 受치 아니하는 證據로다.
 
我韓國이 近代의 失政으로 國力이 衰弱한 中에 日本이 軍國主義로 起하야 平和를 攪亂하고 侵略을 肆行하게 되어 韓國에 着手하야 韓國을 合倂함이라. 日本이 韓國을 合倂한 以來에 그 韓國에 行하는 政治가 甚히 惡하나 外으로 粉飾을 事하며 內으로 壓迫을 加하야 我韓人 二千萬은 生命의 危險을 當하얏나니 精神으로나 物質로나 모든 方面에 다 前無의 慘狀을 遭한지라. 그 一二의 實例를 擧하면, (一)韓人의 敎育機關이 乏少하야 就學兒童이 百分의 二에 未滿하고 何等의 高等敎育機關이 업스며, (二)東洋拓植會社가 韓國의 沃土 三分의 一을 占하야 日本農民을 移植함으로 農業本位인 韓人이 만히 生計가 剝奪되야 流離失所하며 其 外 工商 等 온갖 殖産에 다 日本人 本位를 取하야 我韓人의 生活資料는 喪하얏고, (三)韓人의 生命과 身體와 自由와 人權과 文化와 道德이 만히 破壞를 當하며 世界로서 輸入되는 宗敎와 學術과 藝術, 其 外 모든 文明이 만히 沮碍를 當하야 韓人은 永久히 落伍者로 人類共同의 生存權을 失케 되는 危險에 入하얏도다.
 
太平洋岸에 一 重要國家인 韓國이 이러케 日本의 蹂躪을 當함은 그 韓人의 危險일뿐 안이라 實 노 世界의 一大 缺陷이니 곳 韓國은 世界의 平和에 不少한 影響을 가진 所以이다. 東洋의 平和는 흔히 韓國으로 左右되나니, 近代의 日淸 · 日露戰役이 다 韓國으로 因하야 생겻고 同時에 淸 · 露가 衰沈하고 日本이 專橫함도 韓國問題에서 決定된 事實이라. 本來에 韓國은 東洋의 要衝에 잇서 中 · 露 · 日의 三國間에 介在하얏나니 韓國은 實노 東洋의 中心이라. 現今 及 將來에 世界의 問題는 東洋을 中心으로 하게 되나니 이 東洋의 中心인 韓國의 問題가 곳 世界의 問題로 되는지라. 今番 太平洋會議의 議案도 또한 韓國을 重要視 안이 할 슈 업나니, 곳 韓國問題를 最善하게 解決하지 못하면 東洋의 平和는 保全할 슈 업고 同時에 太平洋會議의 目的인 世界平和도 成就할 슈 업는지라. 韓國을 韓國人의 韓國으로 하야 韓國人의 安全을 保하고 何等 異民族이 韓國을 蹂躪치 못하게 되고야 비로소 東洋 各 關係列國의 猜疑爭鬪가 絶하야 東洋의 平和, 世界의 平和가 잇슬이로다.
 
以基에 韓人의 民族的 本能的 韓人이 日本人의 統治 下에서 生存하지 못할 것과 韓國이 世界에 對한 關係를 槪苦한지라. 最終에 吾人은 日本의 韓國合倂을 否認하노니, 日本이 韓國을 合倂함은 本來에 韓國民衆의 意思가 아닌 同時에 日本과 合倂을 約한 代理 帝는 實노 光武皇帝의 代理뿐이오 韓國의 主權者가 안이라. 곳 光武皇帝는 그 太子에게 禪位하지 안이 하얏고 오직 代理를 命(當時 詔勅을 原文參照) 하얏나니 그런즉 代理 帝는 國家의 主權者가 안이라. 本來 國家의 主權은 國家를 組織한 民衆에게 잇는 同時에 이 主權代表者인 君主는 光武皇帝이엇고 代理 帝는 안이엇나니, 主權代表者 안인 代理 帝와 合倂을 約한 것은 韓國이 絶對 否認하는바라. 前에도 韓人은 日本의 韓國合倂을 否認하는 同時에 在上海 韓國政府를 完全한 韓國의 政府로 聲明하고 因하야 列國에 向하야 我韓國에서 派遣하는 委員의 出席權을 要求하고, 同時에 列國이 日本의 武力政策을 防止하야 世界의 平和와 韓國의 獨立自由를 爲하야 努力하기를 祈願하노라.
 
建國紀元四千二百五十四年(1921년) 九月 日
韓國人民 等 
國民公會 代表 李商在 (印) / 梁起鐸(印)) 
大同團 代表 李世浩 (印) / 張爀 (印)
靑年外交團 代表 朴永鎭 (印) / 李秉灝 (印)
自由黨 代表 金翰 (印) / 姜泰東 (印)
國民大會 代表 李載興 (印) / 李瓘 (印)
愛國婦人會 代表 崔淑子 (印) / 申慈觀 (印)
愛國團 代表 全弼淳 (印) / 洪鍾起 (印)
忠誠團 代表 李忠植 (印) / 朴致勳 (印)
光復團 代表 鄭泰復 (印) / 尹炳日 (印)
國民會 代表 李良 (印) / 洪鍾祐 (印)
檀君敎 代表 鄭薰謨 (印) / 安必中 (印)
基督敎 代表 李商在 (印) / 尹致昊 (印) 
佛敎 代表 洪莆龍 (印) / 朴漢永 (印)
太極敎 代表 尹忠夏 (印) / 成耆德 (印
天道敎 代表 鄭廣朝 (印) / 吳尙俊 (印)
太乙敎 代表 李榮魯 (印) / 蔡奉黙 (印)
侍天敎 代表 金溟局 (印) / 金永杰 (印)
大倧敎 代表 姜虞 (印) 
皇族 代表 李堈 (印) 
貴族 代表 金允植 (印) / 閔泳奎 (印) 
朝鮮佛敎會 代表 李能和 (印) / 金泰欽 (印)
佛敎振興會 代表 金弘祚 (印) / 申羽均 (印)
儒敎大同會 代表 成岐運 (印) / 劉秉澈 (印)
儒敎振興會 代表 李舜夏 (印) / 金榮漢 (印)
大同斯文會 代表 魚允迪 (印) / 李光昱 (印)
大成興學會 代表 閔京鎬 (印) / 趙重觀 (印)
勞動大會 代表 文鐸 (印) / 盧秉熙 (印)
靑年會聯合會 代表 張德秀 (印) / 金思國 (印)
中央基督靑年會 代表 李秉祚 (印) / 洪秉璇 (印)
佛敎靑年會 代表 金尙昊 (印) / 都鎭鎬 (印)
天道敎靑年會 代表 鄭道俊 (印) / 朴思稷 (印)
大倧敎靑年會 代表 朴一秉 (印) / 柳連秀 (印)
學生大會 代表 全一 (印) / 金演義 (印)
朝鮮勞動共濟會 代表 朴珥圭 (印) / 柳鎭熙 (印)
朝鮮敎育會 代表 兪鎭泰 (印) / 朴一秉 (印)
苦學生갈돕會 代表 李載敎 (印) / 崔鉉 (印)
商務硏究會 代表 李光熙 (印) / 魏洪奭 (印)
半島苦學會 代表 張世淡 (印) / 金始奎 (印)
女子敎育會 代表 金美理史 (印) / 白玉福 (印)
苦學生救濟會 代表 金鏞應 (印) / 金達鉉 (印)
朝鮮敎育學會 代表 尹益善 (印) / 朴勝國 (印)
貧民住宅救濟會 代表 金周容 (印)
維民會 代表 朴泳孝 (印) / 李馥承 (印)
靑邱儒學會 代表 洪鎭裕 (印) / 沈渲澤 (印)
啓明俱樂部 代表 金炳魯 (印) / 高元勳 (印)
朝鮮經濟會 代表 權秉龍 (印) / 崔鎭 (印) 
全國辯護士 代表 許憲 (印) / 李升雨 (印) 
全國商業會 代表 裵東爀 (印) / 朱源榮 (印)
産業大會 代表 朴泳孝 (印) / 柳秉龍 (印)
全國醫生 代表 羅英煥 (印) / 李喜豊 (印)
全國醫師會 代表 吳兢善 (印) / 高仁煥 (印)
全國韓人鐵道從業員 代表 崔寅國 (印) / 金溶 (印)
京畿道 代表 洪淳馨 (印) / 金晩秀 (印) / 金宗圭 (印)
京城府 代表 金潤冕 (印) 
高陽郡 代表 崔永年 (印)
楊州郡 代表 李承九 (印)
廣州郡 代表 李明朮 (印)
楊平郡 代表 趙東洵 (印)
驪州郡 代表 趙寧奎 (印)
利川郡 代表 朴遇良 (印)
水原郡 代表 白性基 (印)
始興郡 代表 趙重觀 (印)
龍仁郡 代表 丁奎東 (印)
仁川府 代表 具昌祖 (印)
江華群 代表 權容燮 (印)
金浦郡 代表 李性集 (印)
連川郡 代表 金命煥 (印)
開成郡 代表 金基永 (印)
長端郡 代表 趙德熙 (印)
坡州郡 代表 沈爀之 (印)
加平郡 代表 李元燮 (印)
振威郡 代表 金元鎭 (印)
安城郡 代表 崔鎔 (印)
抱川郡 代表 李鍾善 (印)
富川郡 代表 金永振 (印)
忠淸南道 代表 徐亘淳 (印) / 李敎榮 (印) / 金哲洙 (印)
公州郡 代表 權沆 (印)
靑洋郡 代表 李奎應 (印)
論山郡 代表 尹斗炳 (印)
舒川郡 代表 羅東淳 (印)
洪城郡 代表 金福漢 (印)
禮山郡 代表 安孝式 (印)
扶餘郡 代表 金宅基 (印)
天安郡 代表 金駿 (印)
大田郡 代表 宋龍在 (印)
瑞山郡 代表 李基祥 (印)
唐津郡 代表 李鐸 (印)
牙山郡 代表 李敏商 (印)
燕岐郡 代表 姜龜周 (印)
保寧郡 代表 金在洛 (印)
忠淸北道 代表 權甫應 (印) / 金思億 (印) / 李基東 (印)
忠州郡 代表 洪河植 (印)
淸州郡 代表 閔泳宰 (印)
槐山郡 代表 金東鉉 (印)
沃川郡 代表 吳相奎 (印)
永同郡 代表 金希洙 (印)
陰城郡 代表 李悳鎬 (印)
堤川郡 代表 兪鎭弼 (印)
報恩郡 代表 宋在珏 (印)
丹陽郡 代表 李南夏 (印)
鎭川郡 代表 李相稷 (印)
全羅北道 代表 李鎬林 (印) / 金洪斗 (印) 李圭南 (印)
全州郡 代表 金昌凞 (印)
茂朱郡 代表 邊永學 (印)
益山郡 代表 李謙泰 (印)
群山府 代表 邊基德 (印)
金堤郡 代表 郭東朝 (印)
扶安郡 代表 金敬中 (印)
任實郡 代表 李昌夏 (印)
淳昌郡 代表 權永禧 (印)
長水郡 代表 金弘善 (印)
井邑郡 代表 宋千俊 (印)
高敞郡 代表 姜大湜 (印)
錦山郡 代表 金龍德 (印)
鎭安郡 代表 金稷 (印)
南原郡 代表 李周容 (印)
沃溝郡 代表 李完植 (印)
全羅南道 代表 金星圭 (印) / 李起璇 (印) / 劉鎭世 (印)
光州郡 代表 朴源東 (印)
濟州郡 代表 洪鍾時 (印) 
長興郡 代表 金黃 (印) 
靈岩郡 代表 閔雨植 (印)
靈光郡 代表 曺喜暻 (印)
康津郡 代表 李載良 (印)
光陽郡 代表 許衡 (印)
木浦府 代表 玄基琫 (印)
務安郡 代表 丁斗會 (印)
羅州郡 代表 鄭在民 (印)
和順郡 代表 朴賢景 (印)
谷城郡 代表 金奎澤 (印)
潭陽郡 代表 鄭容駿 (印)
麗水郡 代表 金漢永 (印)
咸平郡 代表 徐相基 (印)
高興郡 代表 金相千 (印)
寶城郡 代表 金永稷 (印)
海南郡 代表 閔泳旭 (印)
長城郡 代表 李乙卿 (印)
求禮郡 代表 朴勝源 (印)
莞島郡 代表 金章植 (印)
珍島郡 代表 白永貴 (印)
順天郡 代表 朴勝林 (印)
慶尙北道 代表 韓冀東 (印) / 柳時潤 (印) / 趙男倬 (印)
大邱府 代表 徐相日 (印)
安東郡 代表 權鎭河 (印)
尙州郡 代表 金熙秀 (印)
善山郡 代表 金載珽 (印)
金泉郡 代表 李權 (印)
聞慶郡 代表 黃義弼 (印)
達城郡 代表 崔二潤 (印)
慶山郡 代表 李完 (印)
永川郡 代表 金在淡 (印)
慶州郡 代表 崔浚 (印)
迎日郡 代表 吳泰圭 (印)
盈德郡 代表 朴正潤 (印)
英陽郡 代表 金守一 (印)
靑松郡 代表 沈泳澤 (印)
義城郡 代表 李鴻 (印)
軍威郡 代表 河相天 (印)
漆谷郡 代表 李鍾洛 (印)
醴川郡 代表 南震英 (印)
榮州郡 代表 李敎海 (印)
奉化郡 代表 金逸 (印)
星州郡 代表 裵相淵 (印)
高靈郡 代表 李相鳳 (印)
淸道郡 代表 崔泰旭 (印)
蔚島郡 代表 李鍾河 (印)
慶尙南道 代表 朴海敦 (印) / 姜渭秀 (印) / 成炳震 (印)
固城郡 代表 金顯錫 (印)
河東郡 代表 李思雨 (印)
晉州郡 代表 河鍾洛 (印)
泗川郡 代表 鄭在浣 (印)
山淸郡 代表 王仁植 (印)
南海郡 代表 成樂鎔 (印)
馬山府 代表 李圭承 (印)
昌原郡 代表 鄭基憲 (印)
咸安郡 代表 權泰鍊 (印)
宜寧郡 代表 李泰世 (印)
昌寧郡 代表 成學永 (印)
陜川郡 代表 尹中洙 (印)
居昌郡 代表 卞永周 (印)
東萊郡 代表 張佑錫 (印)
釜山郡 代表 李圭直 (印)
金海郡 代表 裵仁煥 (印)
梁山郡 代表 尹顯泰 (印)
統營郡 代表 金淇正 (印)
蔚山郡 代表 金弘祚 (印)
密陽郡 代表 孫英燉 (印)
咸陽郡 代表 鄭淳賢 (印)
江原道 代表 朴基東 (印) / 李鍾漢 (印) / 嚴達煥 (印)
江陵郡 代表 崔在麟 (印)
襄陽郡 代表 金益濟 (印)
杆城郡 代表 李大蓮 (印)
麟蹄郡 代表 李復奎 (印)
平康郡 代表 金學植 (印)
鐵原郡 代表 崔升 (印)
春川郡 代表 南相鶴 (印)
寧越郡 代表 金錦潭 (印)
平昌郡 代表 曺斗煥 (印)
華川郡 代表 洪在冀 (印)
金和郡 代表 金基玉 (印)
旌善郡 代表 高濟東 (印)
淮陽郡 代表 宋淳憲 (印)
楊口郡 代表 安植 (印)
伊川郡 代表 李基斗 (印)
原州郡 代表 徐丙聞 (印)
三陟郡 代表 趙會曇 (印)
蔚珍郡 代表 張仁煥 (印)
橫城郡 代表 鄭謙時 (印)
洪川郡 代表 尹逸士 (印)
通川郡 代表 金義三 (印)
黃海道 代表 李範承 (印) / 金鐸 (印) / 李鳳夏 (印)
延白郡 代表 孔炳憲 (印)
金川郡 代表 李鎭成 (印)
海州郡 代表 辛承禧 (印)
平山郡 代表 金東元 (印)
長閏郡 代表 吳宗錫 (印)
松禾郡 代表 金元燮 (印)
安岳郡 代表 朴容晟 (印)
殷栗郡 代表 李膺五 (印)
載寧郡 代表 鄭纘裕 (印)
瑞興郡 代表 朴益守 (印)
鳳山郡 代表 李達元 (印)
遂安郡 代表 韓用鎭 (印)
谷山郡 代表 崔錄杰印)
信川郡 代表 朴燦彬 (印)
黃州郡 代表 張時華 (印)
新溪郡 代表 李莆 (印)
甕津군 代表 金浣 (印)
咸鏡南道 代表 韓泳鎬 (印) / 姜賢秀 (印) / 金鐸 (印)
原山府 代表 南甲元 (印)
文川郡 代表 權翊相 (印)
德源郡 代表 安正協 (印)
咸興郡 代表 金昇煥 (印)
洪原郡 代表 李鳳洙 (印)
北靑郡 代表 姜玧熙 (印)
新興郡 代表 柳秉龍 (印)
安邊郡 代表 崔達斌 (印)
永興郡 代表 朴漢榮 (印)
定平郡 代表 尹和樂 (印)
利原郡 代表 姜永璣 (印)
端川郡 代表 金道立 (印)
甲山郡 代表 金俊鉅  (印)
三水郡 代表 徐珉燦 (印)
長津郡 代表 鄭僕 (印)
豊山郡 代表 李□ (印)
高原郡 代表 張世煥 (印)
咸鏡北道 代表 金基德 (印) / 張文伯 (印) / 金秉律 (印)
淸津郡 代表 張樂勳 (印)
富寧郡 代表 南正夏 (印)
慶興郡 代表 金龍學 (印)
明川郡 代表 金桂淡 (印)
會寧郡 代表 陳鴻振 (印)
鍾城郡 代表 李赫 (印)
鏡城郡 代表 石亨根 (印)
城津郡 代表 許埰 (印)
吉州郡 代表 申泰岳 (印)
慶源郡 代表 蔡祥奎 (印)
穏城郡 代表 朴瀅錫 (印)
茂山郡 代表 洪彰 (印)
平安南道 代表 鄭世胤 (印) / 韓英烈 (印) / 朴根秀 (印)
平壤府 代表 李東初 (印)
大同郡 代表 李敎植 (印)
龍岡郡 代表 裵冕夏 (印)
中和郡 代表 柳鎭植 (印)
江東郡 代表 張雲景 (印)
成川郡 代表 鄭昌述 (印)
順川郡 代表 金鍾灦 (印)
价川郡 代表 金練熙 (印)
陽德郡 代表 金基演 (印)
孟山郡 代表 洪觀 (印)
平康郡 代表 金鍾國 (印)
江西郡 代表 金應輔 (印)
安州郡 代表 朴基俊 (印)
寧遠郡 代表 洪泰彝 (印)
鎭南浦府 代表 李孝健 (印)
德川郡 代表 李在原 (印)
平安北道 代表 宋濟元 (印) / 金應祥 (印) / 許璡 (印)
新義州府 代表 朴利淳 (印)
博川郡 代表 林鶴九 (印)
定州郡 代表 林鍾羔 (印)
宣川郡 代表 魯孝郁 (印)
義州郡 代表 金柄文 (印)
寧邊郡 代表 金永洙 (印)
朔州郡 代表 崔錫淳 (印)
碧潼郡 代表 金興麟 (印)
渭原郡 代表 宋士濂 (印)
慈城郡 代表 李安濟 (印)
熙川郡 代表 金舜鳳 (印)
雲山郡 代表 宋濟民 (印)
泰川郡 代表 裵東麟 (印)
龜城郡 代表 朴昌麟 (印)
鐵山郡 代表 張起學 (印)
龍川郡 代表 白一元 (印)
昌城郡 代表 金明贊 (印)
楚山郡 代表 李祥有 (印)
江界郡 代表 金義泰 (印)
厚昌郡 代表 李昶 (印)


5. 372명 명단에서 발견되는 문제점과 내용서지학적 고찰  

고정휴는 전술한 논문에서 이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를 박영효(朴泳孝, 1861~1939)와 이상재(李商在, 1850~1927)가 주도적으로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박영효라는 인물을 탐색하여 보면, 그것은 아니다.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는 잘 알려져 있다. 문건의 사본을 검토하여 보면, 자필하고 인장을 찍은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소속과 인명(人名)을 쓰고 도장을 찍고 있다. 이러한 문서는 기명된 인원들이 직접 날인한 것으로 볼 수가 없다. 물론 인영(印影)을 살펴 보면 한 사람이 판 것으로 보이는 인장도 상당수 보인다. 이 문건이 조작된 가짜라는 말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한자리에 모일 수 없을 때 이렇게 문서를 만드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엉뚱한 사람이 포함되기도 한다. 또한 전국적인 규모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문건 작성 주도자가 잘 아는 엉뚱한 사람을 포함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 명단에 올랐다고 하여 모두 독립운동가일 수는 없다. 명단에 있는 인물의 1921년 이후의 행적을 살펴보아야 한다. 
   
고정휴는 전술한 논문에서 인용한 문건 - “『斎藤實文書』 제9권 民族運動 I, 서울: 고려서림, 1990, 629~632쪽”에 의하면, 일제는 아래와 같이 이 문건을 분석하고 있음을 소개하고 있는데2), 일제의 이 분석은 비교적 정확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문서 제목: 華府會議[워싱턴회의]에 대한 조선인의 독립청원운동의 진상. 
발송 일자: 대정 11년(1922) 3월 2일(高警 第703號). 
발송처: 外務大臣 拓殖局長官 警保局長 內閣書記官長. 

1월 3일 華府에 있는 우리 파견원으로부터 이곳에 거류하고 있는 조선인이 華府會議에 독립청원을 제출했다는 전보 보고를 받았다(2월 9일 및 2월 12일). 
그 자세한 보고를 보니, 華府 朝鮮人協會는 1월 1일부로 「韓國人民致書太平洋會議」라는 제목의 청원서를 華府會議 事務局에 제출했다. 그 청원서에는 조선에 거주하는 367명의 이름이 서명자로 기재되어 있다. 현재 동 파견인이 입수하여 보낸 그 청원서의 사진판 인쇄물을 보니, 그 모두에 영문으로 청원의 취지를 설명한 다음 청원 대표자의 이름과 대표하는 단체명 또는 道·府·郡·島명을 들고 한글과 한문으로 다시 청원의 취지를 기재하고 청원대표자 서명 아래에 印影을 했다.

조사해보니 서명자의 필적은 두세 명에 의해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京城에 거주하고 있는 각종 단체의 대표자들의 서명이 기재되어 있는데, 그 중 14, 15명의 印影과 실제 사용하는 인감을 대조해보니, 모두 상이하여 한 가지라도 유사한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즉, 서명을 한 사람들 중에서 이러한 종류의 운동을 기획하거나 실행할 만한, 다시 말해 배일사상을 다분히 가지고 있는 서너 명의 인물들을 내사해보니 그와 같은 음모를 기획할 수 있는 어떠한 행적도 찾을 수가 없었고, 더군다나 청원대표자의 이름이 각 계급의 인물을 대체로 망라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연서자 명단에는 당연히 그와 같은 운동에 연서를 할 만한 반일인사의 이름이 없다. 한편으로 가지고 있는 사상이나 시종일관 취해왔던 행동으로 인해 충분히 이러한 운동에 가담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수년 전 사망한 사람의 이름까지 망라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본 건이 위조된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따라서 본 건은 이른바 상해임시정부가 대정 9년에 연통제라는 지방관 관제를 정하고 공채 모집을 하거나 인두세 부과 규정을 만들 때, 조선의 유력한 반일자, 부호 등을 조사한 행적으로서 이를 기본으로 상해에서 대표적인 인물을 선발하여 인장을 위조하여 제작하였거나 아니면 조선 내에서 두세 집단이 임시정부를 통해 위조한 것으로 판단된다. 

파견원으로부터 그 청원서는 모두 위조된 것이라고 신문방면에 선전한다는 취지로 보고하고 있지만 만일을 대비하여 이쪽에서 내사한 개요를 전보로 보낸다.” 

이 문건에 들어가 있는 372명 가운데는 독립운동가도 상당수 있지만, 이상스럽게도 그 당시의 말도 안 되는 골수 친일파들이 여러 명 들어가 있다. 당시의 그들 여건을 간략히 보아도 아래와 같은 인물들이다.

- 윤치호(尹致昊) - 1911년 9월 아버지 윤웅렬이 사망하자 12월 남작 작위를 습작. 
- 민영규(閔泳奎) - 1910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음. 
- 이능화(李能和) - 1920년 12월 조선불교회 상무이사, 1921년 11월 조선총독부 학무국 편수관. 1922년 11월 조선총독부 교과서 조사위원, 12월 조선사편찬위원회 위원. 
- 김홍조(金弘祚) - 불교진흥회 대표, 불교진흥회는 1914년 불교 진흥을 설립 목적으로 내걸고 친일 성향의 승려와 재가신도가 중심이 되어 결성된 단체. 
- 성기운(成岐運) - 1910년 10월 남작 작위. 1911년 1월 은사공채 2만5000원, 2월 작기본서봉수식(爵記本書捧受式)에 참석해 정식으로 조선 귀족 작위증을 받음. 1921년 4월 친일단체 조선유교대동회(朝鮮儒敎大同會) 회장. 
- 어윤적(魚允迪) -1910년 10월 조선총독 자문기구인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 1916년 1월 중추원이 주관한 조선반도사 편찬 사업의 조사주임. 1919년 12월 대동사문회(大東斯文會) 발기인, 1920년 12월 조선총독부 임시교과서조사위원회 위원, 1921년 4월 중추원 참의. 
- 박영효(朴泳孝) - 1909년 친일단체인 신공봉경회 총재에 선임. 강제병합 직후 후작 작위. 1932년에는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칙선의원에 임명. 이 문건에 박영효는 복수로 등장하며, 또한 그가 회장으로 있는 단체(조선경제회)의 임원이 대표로 들어간 것도 있다. 이 때문에 이 문건 작성자를 박영효로 보는 시각도 있다. 
- 권응룡(權秉龍) - 그가 속한 조선경제회는 1919년 12월 박영효(朴泳孝)·최진(崔鎭)·박해달(朴海達)·장두현(張斗鉉) 등이 조직한 친일단체, 회장은 박영효, 부회장은 최진. 
- 홍종시(洪鍾時) - 홍종시는 1919년에 제주면장으로 취임한 제주의 대표적인 친일파 관리.3) 이 명단 가운데 제주군(濟州郡) 대표로 홍종시가 들어가 있다는 것은 특히 의문점으로 말도 안 되는 현상. 
  특히, 이 문건이 만들어진 1921년 9월에는 제주군이 아예 없었다. 제주는 1915년에 제주도제(濟州島制)를 실시하여 제주목 또는 제주군이라는 단위가 없어 진다. 다시말하면 1920년대에 행정구역상에 제주군은 없었고, 제주면이 있었는데 이러한 점을 이 문건 작성의 주체가 몰랐던 것 같다.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 명단 부분, 1921년 [사진-이양재 제공]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 명단 부분, 1921년 [사진-이양재 제공]

6. 맺음말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는 아주 중요한 문건이다. 그러나 이 문건에는 골수 친일파들도 포함시켰다. 더군다나 1921년 9월에 청원서가 작성될 무렵에는 대동단, 청년외교단, 국민대회, 애국부인회, 애국단, 혈성단, 광복단, 국민회 등 거의 모든 비밀단체들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그 활동이 중지되었거나 조직 자체가 해체되었다. 즉 이 명단에 반일성향의 인물들을 조사-포함하여 제작하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문건을 박영효나 그 주면 인물이 만들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전혀 없다. 다만 박영효를 잘 아는 자가 그를 내세워 발각되었을 경우 그를 난처하게 하거나 일제의 수사를 기만하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문건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사용하면 필히 발각될 것을 예상하고, 국내에서 제작한 후에 임시정부에 전달한 고도(高度)의 선전용 기획 문건으로 판단된다. 즉, 누군가가 고도의 술책으로 일제를 농락한 문건이다. (2026.03.30.) 


주(註) 

1) 高珽休,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1921)의 진위 논란과 서명인 분석”, 『한국근현대사연구』 2011년 가을호 제58집 pp.64~114. 

2) 당시 경기도 경찰부장 치바 사토루(千葉了)는 워싱턴회의를 앞두고 구미위원부와 미주한인사회의 배일선전활동을 감시·견제하기 위하여 조선총독부로부터 워싱턴에 파견되었다. 치바 사토루가 남긴 『조선독립운동비화(朝鮮獨立運動秘話)』, 帝國地方行政學會, 1925, 180쪽; 朝鮮總督府警務局., 『조선치안상황(朝鮮治安狀況)(大正 11年, 國外篇), 264~265쪽에도 같은 내용이 있는 것을 보아, 이것은 치바 사토루의 보고에 의한 것이다.

3) 이양재, 「제주의 친일파 “연농 홍종시의 실체”」,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147), 통일뉴스, 2026.02.18.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5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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