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암 나철 100주기를 맞아 그의 발자취를 따라 벌교 생가에서 시작한 기획취재가 서울과 도쿄, 화룡 등을 거쳐 중국 밀산에서 일단락됐다. 정작 홍암이 100년전 순명 조천한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는 발도 디뎌보지 못한 채.오는 9월 15일은 음력 팔월 보름 한가위, 홍암 나철이 조천한 지 딱 100년이 되는 날이다. 남북관계가 원활하다면 대종교는 물론 홍암
서원(誓願), 자기 마음속에 맹세하여 소원을 세운다는 뜻이다. 사람은 누구나 작은 소망 몇 개쯤이야 지니고 있겠지만 큰 뜻을 품은 이들의 서원은 역사 속에 살아 흐른다.‘국망도존’(國亡道存, 나라는 망해도 정신은 살아있다)의 기치 아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 홍암 나철이 ‘한오리 목숨을 끊음’에 부쳐 내건 대종교와 한배님, 천하를 위한다는
홍암 나철의 순명 조천(殉命 朝天)은 30만 대종교 교우는 물론 일제의 무단통치에 시달리던 2천만 조선 민중에게 큰 울림을 남겼다.홍암의 두 달이 넘는 구월산→경성→화룡 장례여정은 ‘올림픽 성화 봉송’을 방불케했다. 홍암 등 대종교 3종사 묘역이 있는 중국 화룡시 청호촌 주민들이 아직도 “울 할아버지가 말하는 게 라철 선생이랑 고래함(유골
망국과 맞물려 갓 출범한 대종교가 일제 무단통치의 등쌀에 베겨내지 못하고 1914년 5월 13일 총본사를 옮겨간 곳은 만주 백두산 북록(北麓)이다.1909년 음력 정월 대보름 단군교를 중광한 홍암 나철은 1910년 7월 30일 대종교로 개칭하고 이듬해 평양을 거쳐 두만강을 건너 백두산까지 순례하고 일찌감치 백두산 북록 청파호(청호촌)를 점찍어 두었다.홍암
홍암 나철 100주기 기획기사를 연재하면서 “그렇게 훌륭한 인물이 왜 거의 안 알려졌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곤 한다. “대종교 때문”이라는 답 아닌 답을 내놓으면 다들 “글쎄 대종교는 처음 들어보는데 뭔가 이상한 종교 같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베드로, 야고보, 마태, 도마, 유다 등 예수의 열두 제자 이름을 들어보거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만 홍암 나철
권중현을 사격하였으나 맞히지 못했고... “당일은 아침부터 각자 예정한 장소에 이르러 길바닥에 머무르며 그 통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전 10시경 참정대신(參政大臣) 박제순은 그 기다리고 있던 광화문 앞에 왔으므로 오기호는 인솔하는 바의 장사(壯士)를 독촉하여 “하라, 하라”고 재촉했지만 장사 등이 우물쭈물 주저하던
“폐하께서는 전쟁에서 이기었지만 공훈을 이룬 것을 경계하여 반드시 동아세아의 황인종을 생각하고 우리 한국을 독립시켜 서로 공존한다면 우리 한국만 행복할 뿐 아니라 귀국도 다행할 것이며, 귀국만 다행할 뿐 아니라 천하의 다행이 될 것입니다.”(상일황소 중)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직전인 1905년 6월, 일본으로 밀항한 홍암 나철 일행은 일본 황궁 앞에서 3일간
‘홍암 나철 선생 선양회’ 양현수 회장과 박형제 부회장의 안내로 홍암 나철의 생가를 찾은 6월 17일, 극성스런 올 여름 더위가 벌써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홍암 나철 100주기 기획취재의 첫 출발점은 아무래도 그가 태어난 생가가 마땅할 터.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 마을 입구 왼켠에는 ‘민족독립 지도자 홍암 나철 선생 유적비’와 ‘독립운동 선도
“만약에 뒤집어서 홍암 나철과 대종교라는 집단이 없었다면 과연 한글운동이 일어났을까? 과연 민족주의 역사운동이 일어났을까? 우리 민족 고유한 정체성의 다양한 분출이 과연 가능했겠나? 불가능한 것 아닌가?”홍암 나철 100주기를 맞아 가진 인터뷰에서 김동환(60) 국학연구소 연구위원은 “우리 국가정체성을 잉태시킨 장본인이 바로 홍암 나철이고, 홍암 나철 자체
“열네해동안 네 얼굴을 못 보고 오날 천고영별은 네 마암에 매친 한이 잇슬듯 하고 내눈에 항상 걸일듯 하나 이 길은 곳 영생하는 한울길이니 부대 애회를 두지 말고 아비를 생각커든 대종교 큰 도를 정성으로 밋고 아비를 만나랴거든 공부를 통하야 한울길로 오라 임종에 두어자 유탁 잇지 말라. 친부 자필”스스로 ‘한오리 목숨을 끊음’에 앞서 딸에게 보내는 유서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