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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지만 몸통이 중요하다”<홍암 나철 100주기 ②>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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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8.04  12: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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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암 나철 100주기 연재에 부쳐

홍암 나철과 대종교, 항일무장투쟁 외에 우리 사회에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과 민족종교지만 우리가 결코 지나칠 수 없는 큰 인물과 중요한 종교다.

국조 단군과 국시 홍익인간, 국기 단기, 국전 개천절을 재정립한 홍암 나철과 대종교는 우리의 미래를 가리키는 나침판과도 같다. 서일, 김좌진의 청산리대첩을 비롯한 항일무장세력의 본거지로 10만의 순교자를 낸 것은 물론 주시경, 이극로, 신채호, 박은식 등 국어와 국사 운동의 출발도 홍암 나철과 대종교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과정에서 국망도존(國亡道存, 나라는 망해도 정신은 살아있다) 기치 아래 외교, 테러, 교육, 종교, 무장투쟁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싸웠고, 마침내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내놓았다.

1916년 추석인 음력 8월 대보름, 홍암 나철이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교한 지 100주기, 독립운동의 아버지이자 국학의 스승, 민족종교의 중흥자인 그의 발자취를 따라 벌교에서 서울, 도쿄를 거쳐 화룡, 영안, 밀산 등을 순례했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군국주의화, 미국의 노골적 패권 재구축이 맞부딪치고 있는 격변의 시기에 홍암 나철의 삶과 죽음을 재조명할 이유는 충분하다. 더군다나 서구식 사고방식과 생활문화에 완전히 빠져있는 우리의 현실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구월산 삼성사에서 이 순례를 마무리할 수 있길 바란다. 아울러 이번 기획취재에 도움을 주신 국내외의 많은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필자 주

<연재 기사>

“아비를 만나랴거든 공부를 통하야 한울길로 오라”
<홍암 나철 100주기 ①> 도제사언문을 찾아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지만 몸통이 중요하다”
<홍암 나철 100주기 ②> [인터뷰]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제일 위대한, 제일 억울하게 묻혀 있는 인물”
<홍암 나철 100주기 ③> 기념관 준공 서두르는 벌교 생가

일본 황궁 앞에서 단식투쟁 벌인 조선 선비
<홍암 나철 100주기 ④> 일사와 도동기를 찾아서


“700년간 닫힌 신교의 교문이 다시 열리어”
<홍암 나철 100주기 ⑤> 을사5적 처단투쟁과 단군교 중광

“내가 신의가 없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자”
<홍암나철 100주기⑥> [인터뷰] 최윤수 대종교 삼일원 원장

"천하에 독립한 제일 큰 산은 오직 한 백두산이시니"
<홍암나철 100주기⑦> 만주로 망명한 대종교 총본사

홍암의 후예들, 청산리서 승전고 울리다
<홍암나철 100주기⑧> 당벽진과 액하감옥의 비극

“후대인들이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홍암 나철 100주기⑨> [인터뷰] 맹고군 중국 밀산시 전 부시장

10만의 순교로 되살아난 민족의 영웅
<홍암 나철 100주기⑩>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

 

 

   
▲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과 홍암 나철 100주기 기념 인터뷰를 7월 19일 북한산 기슭 한 카페에서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만약에 뒤집어서 홍암 나철과 대종교라는 집단이 없었다면 과연 한글운동이 일어났을까? 과연 민족주의 역사운동이 일어났을까? 우리 민족 고유한 정체성의 다양한 분출이 과연 가능했겠나? 불가능한 것 아닌가?”

홍암 나철 100주기를 맞아 가진 인터뷰에서 김동환(60) 국학연구소 연구위원은 “우리 국가정체성을 잉태시킨 장본인이 바로 홍암 나철이고, 홍암 나철 자체가 우리 근대사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라며 이같이 반문했다.

100년 세월이 지난 뒤 홍암 나철(1863~1916)의 발자취를 좇는 일은 만주 허허벌판에서 ‘여기가 대종교 총본사가 있던 자리’라는 식의 밑도 끝도 없는, 아니 무엇보다도 어떤 기준점을 마련하기 힘든 일이었다.

김동환 연구위원을 만남으로써 비로소 홍암 나철의 삶과 사상의 맥락이 드러나고 본질에 조금이나마 더 근접할 수 있는 통로와 기준을 얻게 됐다. 그만큼 그는 홍암 나철과 대종교에 대한 탐구와 열정이 남달랐다. 대학시절 대종교 학생회 활동부터 치면 연륜 또한 적지 않다.

그는 홍암 나철을 ‘독립운동의 대부’이자 ‘근대 국학의 스승’, ‘전통종교의 중흥자’로 위치지웠고, 그의 사상을 중도주의(重道主義)와 호생주의(互生主義), 수행주의(修行主義)로 요약했다.

또한 홍암 나철의 자결에 대해서도 ‘사회적 타살’이자 ‘육신제’(肉身祭)이며, ‘순명 조천’(殉命 朝天)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했고, 구체적 내용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우리가 막연하게 민족주의자로 알고 있는 홍암 나철에 대해 그는 1909년 대종교 중광을 기점으로 세계주의자로 바뀌었다고 바로잡아 주었고, 우리 전래의 제천의식의 중요성을 일깨우는가 하면, 우리 전통의 군교일치’(軍敎一致)와 수전병행(修戰竝行)의 가치도 설명했다.

그는 “홍암 나철이 너무 평가절하됐고, 그 이유의 대표적인 게 역시 홍암이라는 인물이 대종교를 중광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며 종교적인 이유를 첫 번째로 꼽고 “또 하나는 해방 이후에 반민족적인 세력이나 그런 풍조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외면당했다”고 짚었다.

“<중광가>(重光歌) 같은 경우 박사 논문 몇 편이 나올 수 있는 우리 역사.문화.사상이 다 포함돼 있”지만 “홍암이 남겨놓은 경전이나 유서를 포함한 글 자체가 체계적으로 연구된 것이 거의 전무한 상태”라는 것.

그는 “홍암을 비롯한 관련인물들, 김교헌, 윤세복, 서일, 주시경 등등 수많은 굵직한 인물들에 대한 실질적인 평가가 이 시대에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리영희 교수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좋은 책을 썼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몸통”이라며 “우익은 친일매판 혹은 친미 경도주의에 빠진 반민족적 집단이고, 좌익은 몰민족적 진보집단”이라고 비판하고 “우리는 일제 강점기 때 저항 속에서 몸통을 만들려고 몸부림쳐 왔지만 오히려 해방 이후에 몸통 자체가 다 죽어버리지 않았나”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하나가 될 수 있는 ‘단군 구국론’과 같은 그런 정신, 그런 사상운동이 역사의 위기 때마다 등장해서 해결하려고 노력해 왔고, 해결해 왔다”며 “역사적 경험으로 비춰본다면 통일도 그런 요소들이 크게 작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제언했다.

또한 “동북아시대에 우리가 스스로 주인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모양이 있느냐?”면서 특유의 ‘고슴도치론’을 전개했다. ‘너희가 우리를 잡아먹으면 너희도 죽는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홍암 나철이 보여줬던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 즉 ‘나라는 비록 망했지만 정신은 가히 존재한다’는 정신, 우리의 정신, 우리의 역사의식이 중요하다고 설파했다.

그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돈다 “그래서 가끔 생각해 본다. 이 시대에 홍암 나철, 백포 서일 같은 사람, 신규식, 안중근이 있다면 어떻게 할까?”

다음은 지난 7월 19일 홍암 나철이 조직한 자신회(自新會)가 을사오적 처단투쟁을 벌였던 현장 등을 답사한 뒤 북한산 자락 한 카페에서 진행한 인터뷰 내용이다.

 

대종교 중광, 민족주의자에서 세계주의자로

   
▲ 김동환 연구위원은 홍암의 삶과 사상을 자료 하나 보지 않고 줄줄이 뀄다. [사진 - 한민섭]

□ 통일뉴스 : 홍암 나철 선생 조천 100주기를 맞는 소감은?

■ 김동환 연구위원 : 마음이 좀 무겁다. 지금 여러 상황이 그분이 대종교를 중광한 뜻에서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선 상당히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또 한편으로 뒤집어 생각하면 앞으로 그분이 남겨놓은 유업 같은 것을 우리 민족의 통일, 민족화합, 더 나아가 동북아 정세에 대입해 의미를 살릴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한다.

□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홍암 나철 대종사와 대종교에 관심을 갖게 됐나?

■ 내가 어려서 당시 대종교선도사였던 신철호 선생님으로부터 대종교를 배운 것이 본격적인 인연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대종교청년대학생회 활동과 더불어 많은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대종교 청년회와 대학생회가 활동을 같이 했다. 70년대 말에 12개 정도의 대학교 구성원들이 참여하였다. 특히 대학 단위로 구성되었던 곳이 고대 단촌글방과 연세대 경당으로, 나름대로의 여러 활동을 활기차게 했다.

당시에는 대종교에 관심을 갖고 본격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거기서 우연히 신철호 선생을 만났다. 그분이 사실상 나의 종교적 스승이다.

공부를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의미를 알게 됐다. 우리 국가정체성을 잉태시킨 장본인이 바로 홍암 나철이고, 홍암 나철 자체가 우리 근대사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라고 생각한다.

□ 지금 몸담고 있는 국학연구소와 대종교는 어떤 연관성이 있나?

■ 국학연구소는 근본적으로 대종교와 연관이 없다. 87년 국학연구소가 출범할 때 발기하고 시작했던 소장학자들이 ‘우리 근대사에 특화된 연구를 한번 해보자’고 했다.

그런데 우리 근대사에서 민족 정체성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민족 자생종교 가운데 천도교와 증산교는 학자들의 연구가 굉장히 많았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천도교, 증산교 관련 발표논문이 몇 백편씩 됐다.

그러나 그 당시까지만 해도 대종교 관련 논문이 6편 정도 밖에 없었다. 대종교가 우리 근대사에 남긴 자취를 본다면 너무 미흡한 거였다. 그래서 소장학자들끼리 ‘우리가 대종교를 좀더 집중해서 연구하자’고 해서 대종교 연구를 좀더 많이하는 연구단체로서의 관행이 잡힌 거다.

□ 국학연구소 기관지 『알소리』, 『국학연구』에 대종교 관련 글들이 많이 실린 것을 보았다. 그렇지만 홍암 나철이 아직 우리 사회에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는데, 왜 저평가됐다고 보나?

■ 남긴 자취에 비해 너무 저평가 된 인물이 우리 근대사에서 홍암 나철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예관 신규식 같은 분은 홍암 나철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추도만장에서, ‘조선조 5백년 간 둘도 없는 선비요, 대종교 4천년 이후 제일의 종사’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또 장도빈 선생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8현을 꼽을 때 홍암 나철을 그 중 한명으로 꼽았을 정도다.

이런 걸 생각해보면, 홍암 나철이 너무 평가절하됐고, 그 이유의 대표적인 게 역시 홍암이라는 인물이 대종교를 중광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종교적인 이유다. 또 하나는 해방 이후에 반민족적인 세력이나 그런 풍조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외면당했다 생각할 수 있다.

□ 홍암 나철은 ‘독립운동의 아버지’ 등으로 불리는데 뭐라고 호칭해야 하나?

■ 글에서도 한번 밝혔지만, 무엇보다 우리 ‘독립운동의 대부’다. 그 이유는 홍암 나철에 의해 근대 단군구국론이 고개를 들었고, 그 집단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의 총본산이 형성되어 총체적 저항의 에너지를 발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당대 독립운동에 관여했던 대부분의 인물들이 홍암 나철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특히 1916년 그의 죽음에 의해서 사실상 본격적인 항일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이다.

그리고 홍암 나철을 ‘근대 국학의 스승’으로 볼 수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 국학의 근본적 뿌리랄 수 있는 문.사.철이, 우리 모습의 문.사.철로 등장하는 게 홍암 나철에 의해서라고 볼 수 있다.

우리 국어운동 자체가 사실상 홍암 나철의 대종교 중광에 의해서 본격화된다. 주시경, 김두봉, 이극로, 최현배 등의 대부분의 한글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들이 홍암 나철의 절대적 영향 속에 있었다.

우리 국사도 마찬가지다. 대종교 중광 이전의 국사라는 것은 철저한 중국 유교중심의 역사관인데, 유교 중심의 역사관을 뒤집고 또 당시대 일제의 침략 속에서 일제 식민주의 사관에 정면으로 도전해서 우리 모습의 역사, 우리가 주인 된 역사를 기록할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홍암 나철이다. 그의 제자였던 김교헌, 또 그 영향 속에 나타난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 등의 인물들이 홍암 나철에 젖줄을 대고 있다.

마지막으로 철학적인 면에서 보면, 사실상 조선의 국시였던 유교철학과 주변부의 불교철학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유교나 불교 이전의 우리 철학, 현묘지도의 철학을 되살려 놓은 장본인이 바로 홍암 나철이다.

홍암 나철은 전래되어온 경전을 재반포해서 삼일(三一) 철학을 20세기에 처음으로 체계화시켜서 제창했다. 우리의 가치관, 우리의 철학을 우리 스스로의 모양으로서 돌려놓은 인물이 바로 홍암 나철이기 때문에, 그가 없었다면 우리가 주인이 되는 문.사.철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 외에도 하나의 문화적인 현상을 보더라도 우리의 수행, 민속, 제전 이런 것도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전래되어온 모습으로서 되살려서 그것을 볼 수 있게끔 만들어준 인물이 역시 홍암 나철이다. 그래서 홍암 나철은 우리 문.사.철을 중심으로 한 국학의 진정한 스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대종교 중광 이전과 이후 홍암 나철이 달라진 것이 있다면?

■ 홍암 나철이라는 인물을 대종교를 중광한 1909년을 기준으로 전과 후로 나눈다면, 1909년 이전에는 사상적으로 유교주의자이고, 이념적으로 민족주의자 혹은 국수주의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이 유교적 질서에서 학문을 영위하고 벼슬을 했고, 민족주의 우국주의 차원에서 일본을 왕래하면서 나름대로 민간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09년 중광 이후는 유교주의에서 전래 신교주의(神敎主義), 현묘지도(玄妙之道)를 이야기하는 신교주의자로 완전히 탈바꿈하고 민족주의, 국수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세계주의자로 변신한다. 그분의 글 속에도 살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중광 이전의 관료주의 모습에서 중광 이후의 모습은 철저하게 수행주의의 모습이다. 1909년 대종교를 중광해서 1916년 돌아가실 때까지 8년 동안을 수행으로 일관했다. 그래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수행을 통해서 생을 마감했다.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건, 홍암 나철이 1909년 이후에 민족주의자로 변신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중광 이전 우국운동 할 때가 민족주의자고 1909년 대종교 중광 이후에는 세계주의자로 변신한다. 그가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가치가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가 남긴 유서 <순명3조>에서도 나타난다. ‘온 천하의 많은 동포’의 죄를 대신 받아 ‘천하를 위하여 죽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김윤식의 제문이나 절친한 친구 오기호의 글, 윤주찬의 글에서도 확인된다.

‘독립운동의 아버지’, 나라는 망했지만 정신은 가히 존재한다

□ 항일, 국학, 종교적 관점에서 순서대로 묻겠다. 먼저, 항일운동적 관점에서 홍암 나철과 대종교의 기여는 무엇인가?

■ 독립운동에서 한 가장 중요한 역할은 홍암 나철이 독립운동의 정신적인 구심을 만들어준 것으로 본다. 대종교가 독립운동의 총본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홍암 나철이 만들어 준 거다.

홍암 나철은 1914년에 백두산 기슭인 중국 화룡현 청파호에 총본사를 건설할 때에도 상해를 중심으로 서도본사, 조선반도를 중심으로 남도본사, 북간도를 중심으로 동도본사, 연해주지역에 북도본사를 설치했다. 대종교의 교구를 이렇게 설정한 것도 대종교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총체적 저항의 구조적 토대를 만들기 위한 게 아니었겠나.

또 하나는 홍암 나철은 대종교 중광을 통해서 ‘단군구국론’을 재확인시켰다. 우리 민족의 역사적 경험으로 볼 때, 항상 위기 때마다 고개를 들었던 단군구국론이 또다시 홍암 나철에 의해서 고개를 들었다.

고려시대 몽고의 침략 때도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에서 단군사화를 통해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고양시켰고, 공민왕도 단군을 명분으로 자신의 국가적인 가치를 고양시키려 노력했다. 또 조선이 혁명으로 일어날 때 조선 건국의 중요한 요소가 역시 단군이다.

그런 것처럼 일제 강점기 때 일제에 정신적으로 총제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구심을 마련해준 것도 역시 대종교를 통한 단군이다. 1945년 해방될 때까지 끝까지 친일이라는 멍에를 뒤집어쓰지 않고 저항했던 유일한 종교가 대종교였던 것도 이를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홍암 나철이 대종교를 일으킬 때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치가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이다. 평상시에 늘 ‘나라는 비록 망했지만 정신은 가히 존재한다’는 정신으로, 우리 조국은 언제든지 독립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 같다.

홍암 나철의 대종교 중광, 그리고 스스로의 자결이 더욱더 항일운동의 토대를 공고하게 만들어준 바탕이다.

□ 홍암 나철의 자결 이후에도 백포 서일, 무원 김교헌, 단애 윤세복 등이 대종교의 맥을 어어가는데, 홍암 나철이 이후에 미친 영향은?

■ 홍암이 1916년에 스스로 자결했지만 냉철하게 보면 그 이후에 사실 대종교단을 중심으로 한 체계적인 틀은 3종사, 즉 무원 김교헌과 단애 윤세복, 그리고 백포 서일 세 사람이 중심이 돼서 힘을 발휘한 거다.

김교헌, 윤세복, 서일 모두 홍암 나철에게 친히 가르침을 받아서 사실상 스스로 제자가 된 사람들이다. 그 분들은 홍암이 남겨놓은 유지를 자기 평생의 유훈으로 삼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거다.

그걸 단적으로 확인시켜준 인물이 단애 윤세복이다. 그가 만주국 시절인 1930년대 초반, 지하에서 몰래 활동하던 것을 표면화시켜서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내건 일성이 홍암 나철의 ‘국수망이도가존’이었다. 이런 걸 보면 그분들의 마음 속에 홍암이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이러한 점은 백포 서일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그 역시 자결을 앞둔 절체절명의 순간에, 스승 나철의 유서 중 한 구절을 읊었다.

   
▲ 대종교도가 주축이 된 북로군정서 사진. 앞에 다리를 꼬고 앉은 이가 김좌진 장군이다. [사진출처 - 대종교]

□ 대종교 무장투쟁의 하이라이트는 1920년 청산리전투로 볼 수 있나?

■ 그렇다. 왜냐하면 청산리독립전쟁이 끝난 다음에 대한독립군단이 조직되고 자유시참변을 겪은 다음에 완전히 다 독립군들이 풍비박산 난다.

그리고 1931년도에는 정식으로 만주괴뢰국이 성립돼서 체계적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때부터 사실 지하활동으로 들어간 거다.

□ 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 하면 일반적으로 김좌진, 홍범도 장군을 떠올리는데, 대종교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설명해달라.

■ 청산리독립전쟁의 중심부대가 사실 북로군정서인데, 북로군정서는 대종교인들이 중심이 돼서 1911년에 조직된 중광단의 후신이다. 중광단 명칭은 대종교 중광에서 따온 이름이다. 대종교 정신을 거듭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중광단을 조직한 것이다.

중광단은 후일 대한정의부로 바뀌었다가 그게 대한군정서가 됐는데 서로군정서와 구별하기 위해 북로군정서로 한 거다. 그 북로군정서의 최고지도자인 총재가 대종교의 종사로서 추앙받는 백포 서일이고, 구성원의 핵심 모두가 대종교인이다. 그리고 거기 부하들의 대부분도 대종교인들이다. 더구나 군자금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대종교인들의 성금이 상당히 많았다는 기록도 나온다.

우리가 넓은 의미로서 청산리독립전쟁은 약 10여개의 전투를 모두 합해서 청산리전투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중 북로군정서가 단독으로 수행한 전투가 가장 큰 전투였던 백운평전투를 위시한 3개의 전투다. 나머지 7개 전투는 연합부대, 홍범도 부대나 최진동 부대와 연합해서 이루어진 전투라 할 수 있다.

백포 서일은 북로군정서 내에 대종교 동도본사를 같이 병설했다. 그러니까 대종교 동도본사와 북로군정서가 같은 공간에 있었다. 백포 서일은 구태여 이야기한다면 ‘군교일치’(軍敎一致)를 지향한 거다.

그는 스스로 병영 안에 종교적 수도실을 마련해서 끝없이 수행하고, 연구하고 이런 걸 게을리 하지 않았다. 거기에 백포 서일의 수전병행(修戰竝行)의 가치가 영근 것 아니겠나. 수행하고 더불어 함께 싸울 수 있었던 배경이 거기 있었다.

청산리독립전쟁에 주요한 주축부대였던 북로군정서가 대종교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정신적 무장집단이었다는 것이 일제에 비해 객관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싸울 수 있었던, 승리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봉오동 전투는 대종교와는 직접적으로 연관은 없다. 물론 홍범도도 대종교의 교도로 나온다. 박명진의 <대종교 독립운동사>나 현규환의 <한국유이민사>를 보면 홍범도가 이상설과 더불어 북도본사 핵심 교인으로 나온다.

그러나 봉오동전투의 주축부대인 홍범대 부대의 구성원들이 대종교도라는 기록은 없다. 북로군정서와는 좀 다르다.

□ 청산리전투 이후 대규모 전투는 없었나?

■ 청산리 전투 이후에는 대규모로 전투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 당시에는 대규모로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못 됐다.

□ 대종교가 10만명의 순교를 냈다는 것은 어느 시기를 특정하는 것인가?

■ 내 생각에는, 청산리독립전쟁 전후부터, 특히 경신대참변 때 많이 당한 것 같고 그 이후에도 단애 윤세복 시대까지도 계속 당했다.

아마 대종교 선열들이 10만명이 희생했다는 것은 바로 대종교의 교당이 없어지고 대종교 교인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총살당하고 한 것 일체를 포함시켜서 그런 게 아닌가 생각된다. 1919년 이후부터 그런 게 많이 나타난 것 같다.

□ ‘10만 순교’라는 게 통상적인 추정으로는 잘 안 그려진다.

■ 대종교 선배들 여러 사람이 그렇게 10만의 순교로 기록해 놓았다. 만주지역에서 직간접적으로 죽어간 사람들이 그렇고, 그 사람들은 대종교와 연관된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 나름대로 자기들끼리 통계를 냈고, 해방 이후에 그런 게 아니라 그때도 10만 순교로 기록한 것 같다. 단애 윤세복 시대 때도 동경성 전투니 싸운 전투가 있다. 그런 크고 작은 과정 속에서 나타난 것을 나름대로 그 시대에 통계를 낸 것 같다.

홍암 나철 생존 시기인 1916년 때에 30만 신도가 있었다. 어디에서 몇 명, 어디에서 몇 명 그런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는 게 없다.

‘국학의 스승’, 한국 근대의 정체성 그 자체

□ 국학적 관점에서 홍암 나철의 기여는? 우리가 아는 국어학자나 국사학자가 대종교에 젖줄을 대고 있다고 하는데 일반인들은 의아할 수도 있다. ‘그럼 다 대종교 신도였어? 정말 대종교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의아심도 있을 것 같다.

■ 대종교와 국학 관련해서 우선 국어를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한글’이라는 명칭을 자리매김 시킨 장본인 주시경이다. 주시경은 자기가 원래 배재학당을 졸업하면서 예수교 세례를 받았는데, 왜 예수교를 버리고 대종교로 개종하느냐는 이유를 댄다.

전덕기 목사와의 대화에서 종교도 정신적 침략의 일환으로 보고 ‘오늘 이후로 대종교로 개종하겠다’고 한 뒤에 본격적인 한글운동을 전개한다.

그래서 그의 수제자였던 김두봉의 많은 지령 속에서 이극로, 최현배, 이윤재, 정열모, 신명균, 권덕규 이런 분들이 한글운동을 했고, 이분들이 다 대종교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김두봉은 홍암 나철의 핵심 제자이기도 했다.

이같은 과정 속에서 한글 연구가 체계적으로 되다 보니까 후일 구성되는 조선어학회의 중심멤버들이 주시경의 제자들이면서 사실상 어떻게 보면 홍암 나철의 제자라고도 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다음으로, 국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대종교의 교단에서 한국사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홍암 나철의 제자였던 무원 김교헌이다. 무원 김교헌은 성균관 대사성과 규장각 부제학을 지내고 문헌비고 편집위원도 지내는, 당시로 본다면 최고 수준의 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분이 홍암 나철을 만나면서 유교 중심의 역사에서 우리 중심의 역사, 단군을 기점으로 한 우리 고유한 역사체계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독립운동가 백순은 김교헌을 한국 역사학의 종장으로 친다. 역사학의 우두머리라는 것이다. 상해 독립신문 사장을 했던 김승학은 김교헌을 대한민국 역사학의 진정한 스승으로 본다.

이런 김교헌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인물이 박은식이다. 신채호도 1908년 <독사신론>을 쓰면서 나름대로 의미를 가졌던 역사관이 대종교 즉, 단군을 만나면서 그의 역사학의 본질, 정신가치랄 수 있는 ‘낭가 정신’의 핵심을 발견하게 된다. 대표적인 게 1910년에 쓴 <동국고대선교고>라는 논문에서 어렴풋이 볼 수 있다.

특히 신채호도 단애 윤세복을 만나면서 사실상 우리 민족주의 역사학의 중요한 바탕이 되는 <조선사> 집필의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다. 신채호의 역사정신을 볼 수 있는 가치관이 드러나는 것이 사담체 소설 <꿈하늘>이다. 이런 걸 보면 극명하게 ‘아, 이 사람의 역사정신이 이렇게 해서 쓰여졌구나’라는 걸 볼 수 있다.

그런 영향 속에서 나타나는 정인보, 안재홍 등은 나름대로 자기 역사관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대종교, 홍암 나철, 무원 김교헌 등의 이런 역할이 우리 일제강점기 때 민족주의 역사학 형성에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우리가 알 수 있다.

   
▲ 서울 계동 소재 대종교의 '개천절 행사 발상지' 표지석에서 포즈를 취한 김동환 연구위원.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국사, 국어가 중요한데, 국교, 국시, 국전, 국기 등에 대해서도 설명해달라.

■ 국사 국어 외에 국교(國敎) 의식도 중요하다. 대종교가 중광되면서 당시 상해에서 만들어진 임시정부의 지도자들 속에서도 대종교를 ‘정서적 국교’로 받아들인 분들이 상당히 많았다.

나는 이것을 정서적 국교로 표현했지만 이승만이나 안창호, 이동휘 등 대종교에 입교를 직접 안했고, 심지어 기독교 정서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분들 나름대로 대종교를 국교적 정서로서 받아들이고, 개천절이나 어천절 행사를 국경일 이상으로 의미있게 참여하면서 그 정서를 나눴다고 볼 수 있다.

북간도에서도 대표적인 명동학교를 이끌었던 김약연 목사 같은 분들도 역시 단군을 교회에 걸어놓고 예배를 보고, 또 명동학교 교가에도 대종교의 용어인 ‘한배검’을 기꺼이 사용했다. 당시에는 사실상 기독교의 여러 지도자들 중에서도 대종교를 국교로서 받아들이는 그런 정서가 크게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임시정부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대종교를 거리낌 없이 기꺼이 참여하고 받아들인 이유는 ‘아, 이것은 우리 전래로 내려오는 우리 한민족, 배달민족의 국교와 같은 존재다’라고 인식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국시(國是)는 한 국가 집단이 지향해 가는 최고의 지향가치를 국시라고 한다. 조선조가 유교를 국시로 한 집단이라면 과연 일제강점기 때 임시정부나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층에서 생각했던 국시라는 건 뭐였겠나? 그것은 아무래도 홍익인간(弘益人間)이 가장 가깝지 않았겠나 생각한다.

해방 이후에도 교육적인 구호로서 축소돼서 해석이 되지만, 지금도 남북을 통틀어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틀어서 볼 때 우리 배달민족이 궁극적으로 지향해 가야 할 정신적 가치는 역시 홍익인간이 아니겠나. 삼국유사에도 건국이념으로 분명히 등장한다. 그런 홍익인간이라는 국시 관념도 체계적으로 정착시킨 집단이 대종교다.

국시뿐만 아니라 국기(國紀), 나라의 기원을 단기(檀紀)로서 자리매김 시킨 것도 대종교다. 물론, 대종교 중광 이전에도 20세기 초에 <황성신문> 등에서 단기를 쓰는 게 간헐적으로 있지만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보편화된 계기가 역시 대종교 중광을 통해서다.

대종교 중광을 통해서 우리 민족의 나이를 명명하는 단기 연호가 정식으로 정착되고 국기 의식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또 하나 본다면 나라 제전이라고 할 수 있는 국전(國典)이다. 우리 배달민족의 최고의 국가제전이 뭔가? 홍암 나철도 스스로 밝혔듯이 고구려 때 동맹이나 부여의 영고, 예의 무천, 고려의 팔관 이런 것을 옹글게 계승해서 우리 민족의 제천행사의 본질로서 이 시대에 부활시켜놓은 것이 개천절이다. 개천절은 해방 이후에도 명실공히 국가제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국전도 대종교에 의해서, 홍암 나철에 의해서 자리매김됐다.

이처럼 우리 국어, 국사, 국교, 국기, 국전, 국시 이런 우리 근대 정체성의 모든 부분이 홍암 나철이라는 인물에 의해 등장하는 대종교를 통해서 정착화 됐다는 걸 보면, 한마디로 홍암 나철과 대종교는 한국 근대의 정체성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다.

‘민족종교의 중흥자’, 700년 닫혀온 교문을 다시 연다

□ 일반 종교는 신을 내세우거나 깨달은 자가 스스로 교주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대종교는 고대 전래종교인데다 단군을 내세우는데, 단군을 우리 역사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된다고 보나?

■ 조금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게 대종교에서 사실 단군은 교조다. 개창교조가 단군이고 중광교조가 홍암 나철이다. 대종교에서 신앙하는 것은 단군을 통한 하느님이다. 단군은 궁극적인 신앙대상은 아니다.

그러면 대종교에서 단군이 뭐냐? 민족역사로 본다면 우리 민족시조관으로서도 생각할 수 있고, 종교로 보면 교조이면서 시조다. 그러니까 단군도 그 시대에 제천을 올렸다. 그리고 대종교 중심 경전인 <삼일신고> 등에 단군이라는 이야기는 하나도 안 나온다. 신에 대한 이야기다. 신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다.

□ 삼신(三神)을 설명하면서 환인, 환웅, 단군이 나오지 않나?

■ 환인, 환웅, 환검 삼신일체설이 있는데, 삼신일체설에서 환검이 바로 단군이라고 하는 것은 ‘이신화인’(以神化人) 개념, 즉 신으로서 인간으로 변했다고 이야기 하는데, 변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 권능을 계승받았다는 걸로 해석된다.

그래서 단군이라는 것은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과 같은 호칭이다. 그러니까 <규원사화> 같은 데도 1대 단군부터 47대 단군까지 쭉 나온다. 그리고 부여시대 때도 단군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단군 자체가 곧 신앙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교조로서 단군이 우리 전래 신교신앙, 하느님신앙을 처음으로 개창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삼신일체설에서 환검을 치화주(治化主)의 자리에 놓는 것은 그 권능을 옹글게 가장 먼저 계승한 인물로서 단군을 이해하는 종교학적 해석으로 본다.

□ 종교적 관점에서 홍암과 대종교 중광의 기여는 무엇인가?

■ 홍암 나철은 대종교 중광의 종교적 의미를 어떻게 풀었냐면, ‘700년 닫혀온 교문을 다시 연다’고 이야기했다. 700년 닫힌 게 뭐냐? 몽고의 침략으로 폐쇄된 팔관을 재건한다는 거다. 그래서 대종교 중광으로 보는 거다.

그러면 ‘팔관’이라는 건 뭐냐? 팔관이라는 건 고구려 동맹이나 신라 제천행사 처럼 우리민족 고유의 제천행사다. 홍암 나철은 몽고 침략으로써 팔관이 폐쇄된 것을, 조선조를 흘러오면서 700년 동안 닫혀진 것을 1909년에 다시 부활시킨다 해서 대종교 중광이라는 용어를 쓴 거다. 하느님 신앙의 부활이다. 종교적 의미를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기록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 나오는 ‘현묘지도’, 왈 ‘풍류도’라고 하는 그것의 부활이 사실상 대종교 중광이다.

□ 흔히 유불선을 아우른다고 하는데, 우리 전통 종교가 선에 포함되는 것인지? 아니면 선과 별도로 있는 것인지?

■ 종교학적으로 조금 복잡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유불선이 합쳐진 거냐? 아니면. 그 이전에 제1의적인 의미로써 신교 가치에 이미 유불선의 가치가 포함돼 있었던 거냐?

나는 유불선이 합쳐서 신교가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신교 가치 속에 유불선적 요소가 담겨 있었다고 본다. 제1의적 가치로 해석할 수 있다. <삼일신고>(三一神誥)라는 교리 속에 이미 유교, 불교, 선교적인 요소가 다 드러나 있다.

<삼일신고> 진리훈(眞理訓)에 나오는 삼법수행(三法修行)의 지감(止感), 조식(調息), 금촉(禁觸)은 지감이 불교적인 명심견성(明心見性)과 연관이 되고 조식이 양기연성(養氣煉性)이라는 도교적, 선교적인 것과 연관되고 금촉이 수신솔성(修身率性)하는 유교적 가치와 연관된다. 우리 단군신앙, 신교적 가치 속에는 유불선의 가치가 이미 내포돼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종교적인 해석으로서 더 바른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본다.

□ 홍암의 사상을 어떻게 요약할 수 있나?

■ 저는 홍암사상의 본질은 하느님신앙의 중광을 통한, 신교 사상의 중광을 통한 중창(重創)시대의 예고에 있다고 보고 싶다.

홍암이 1916년 스스로 자결 할 때 남긴 유서 <중광가> 가운데도 나온다. “행봉(幸逢)한 문명시대 천신교(天神敎)를 중창”하여, “세계의 모든 종교가 하나될 것”이라는 예견을 한다.

이것은 다른 민족이나 외국인을 달리 보지 말고, 다른 종교를 달리 보지 말라는 뜻이다. 홍암이 지향하던 진정한 홍익인간의 가치, 진정한 상생적 인간의 가치, 진정한 개방적 인간의 가치가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철학적으로는 홍암의 사상을 중도주의, 호생주의, 수행주의로 표현했다.

중도주의(重道主義)라는 것은 홍암 나철이 하느님의 도를 굉장히 중시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종교 5대 종지 가운데 가장 먼저 있는 게 경봉천신(敬奉天神)이다. 공경으로 하느님을 받들라.

하느님을 받드는 최고의 방법은 팔관, 제천이다. 개천절 선의식 같은 제천이야말로 하느님과 통하는 최고의 장치다. 그걸 홍암은 굉장히 소중히 봤다. 자신이 대종교를 1909년에 중광한 것을 팔관을 부활시키는 걸로 본다. 더 길게 나가면 고구려의 동맹을, 부여의 영고를, 그리고 예의 무천을 부활시킨 것이다.

우리 고유의 하늘과 인간이 하나되는 천제를 복원시키는 걸 대종교 중광의 명분으로 삼았다는 것, 이것이 중도주의의 본질이다.

호생주의(互生主義)는 <한서지리지>에도 나오지만 동이족 자체가 호생 가치를 좋아한다. 사람을 서로 어울려 살리는 접화군생(接化群生)의 본질이 호생이다.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 나오는 접화군생이란 서로 만나 더불어 사는 가치, 요새 이야기하는 상생적 가치의 철학적 장치가 접화군생 호생주의다.

마지막으로 수행주의(修行主義)다. 수행이라는 건 인간이 육신의 탈을 쓰고 인간으로 태어나서 거짓의 탈을 벗고 진정한 하느님의 본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다.

홍암 나철은 수행주의를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상당히 정성되고 경건하게 만들었다. 대종교 5대 종지 가운데 두 번째가 ‘성수영성’(誠修靈性)이다. 정성으로 성품을 닦으라는 것으로, 수행의 본질이다.

그래서 나는 도를 중시하는 중도주의, 접화군생의 가치를 소중히 하는 호생주의,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으로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살아가는 가치 수행주의, 이렇게 나누어 생각해 봤다.

‘순명 조천’,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수행의 극치

   
▲ 지난 5월 국학연구소가 주최한 '홍암 나철 선생 서거 100주기 추모 학술회의'에서 발표하고 있는 김동환 연구위원.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1916년 홍암 나철 자결의 의미는? 종교 지도자의 자결은 이례적이고 폐기절식의 방식도 상상하기 어렵다.

■ 홍암의 자결 의미를 당시 시대적 상황, 종교적 상황 등을 놓고 볼 때 세 가지로 바라봤다.

첫 번째는 도저히 뒤집혀진 사회 속에서 살아서 돌파구를 찾을 수 없는 절대적 절망 속에서 선택의 하나로 자결을 택했다. 그래서 나는 ‘사회적 타살’로 생각해 봤다.

당시 일제강점기 때인 1916년 상황은 우리민족 사회와 특히 대종교는 완전히 절망 상황이다. 이미 1915년에 종교통제안을 통해서 대종교는 모든 활동이 정지되고 속박됐다. 교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고 모든 서류를 빼앗기고 교주가 움직이는 것마저도 다 박탈당했다.

그래서 식민지의 철저한 절망적 압제가 만들어낸 하나의 죽음의 형태가 홍암 나철의 자결이다. 그래서 나는 일제의 기형적 강점, 세계 식민지 역사에서 찾을 수 없는 직접적 지배에 의한 절대적인 압제, 그런 절망적인 시대상황이 만들어놓은 사회적 타살로 본다.

두 번째 최남선의 표현처럼 홍암 나철의 죽음은 ‘육신제’(肉身祭)다. 당시 모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우리민족의 정기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사실상 홍암 나철의 자결이다.

대종교 원로였던 이현익은 홍암 나철의 순교로 인해 우리 독립운동이 일대 혁명적 변화가 왔다는 진단을 한다. 최남선은 지리멸렬했던 독립운동 전선이 홍암 나철의 죽음을 계기로 해서 일대 전기를 맞는다고 해서 육신제와 같다고 표현했다.

마지막으로, 대종교의 종교적 의미로서 인간완성을 위한 진정한 수행주의의 극치를 보여준 ‘순명 조천’이다. 대종교에서는 순명 조천(殉命 朝天)이라고 표현한다. 조천이라는 건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 아니겠나.

홍암 나철은 사실 대종교를 중광하고서 돌아가실 때까지 오로지 수행을 최고로 했다. 내가 깜짝 놀란 게 자신과 절친한 친구였던 소운 황병옥이라는 인물한테 마지막 써준 유서의 내용도 수행에 관한 것이다.

   
▲ 홍암 나철이 친구인 소운 황병욱에게 남긴 친필 유서 원본. 이규행 전 문화일보 회장이 작고하기 전 김동환 연구위원에게 넘겨줬다. [사진제공 - 김동환]

근증(謹贈) 소운형장(小雲兄丈) 도감(道鑒) 신훈왈(新訓曰) 자성구자항재이뇌(自性求子降在爾腦) 신지본야(信之本也) 진리훈왈(眞理訓曰) 지감조식금촉(止感調息禁觸) 성지원야(誠之原也) 앙재(昻哉) 전수(專修)

홍암 나철 유서 중 하나다. ‘(<삼일신고>의) 신훈에서 말하기를 우리 본성이 이미 뇌 속에 내려와 있다는 이것이 믿음의 근본이다. 진리훈에서 말하기를 지감, 조식, 금촉은 정성의 근원이다. 오로지 이것을 닦으라’. 이것이 수행의 본질이고 전부라는 것이다. 이게 어떻게 보면 대종교의 핵심을 짚은 거다. 돌아가실 때까지 수행을 강조했다.

홍암 나철은 마지막 목숨을 끊는 방법도 대종교 삼법수행의 하나인 조식 중 조식의 최고 극치인 폐기, 숨을 스스로 멈춤으로써 목숨을 끊었다. 이건 상당히 대단한 거다.

나는 홍암 나철의 자결을 대종교적으로 수행의 완성이랄 수 있는 순명 조천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목숨을 목적 있게 바치는데,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그런 수행의 극치를 마지막까지 보여주려고 노력했다고 볼 수 있다.

사회적 타살로서의 육신제로서의 순명조천으로서의 홍암 나철의 자결의 의미를 살펴볼 수 있다.

□ 홍암 100주기가 사회적으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홍암 나철 관련해 현 단계 연구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홍암이 남겨놓은 경전이나 유서를 포함한 글 자체가 체계적으로 연구된 것이 거의 전무한 상태다. 그리고 홍암 나철이 대종교를 중광해서 우리 근대사에 끼친 영향이 지대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분석하고 체계적으로 엮는 학계의 노력도 거의 전무한 상태다.

우리가 끄적여 놓은 것은 피상적으로 엮어놓은 거다. <중광가>(重光歌) 같은 경우 박사 논문 몇 편이 나올 수 있는 우리 역사.문화.사상이 다 포함돼 있다. 그런 연구가 전무한 상태다.

나는 또한 홍암 나철이 19세기, 20세기 초에 우리 근대 민족자생종교의 여타 지도자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준 것도 새롭게 해석돼야 한다고 생각하다. 동학을 일으킨 최제우나 증산교를 일으킨 강일순, 또 홍암 나철이 돌아가신 1916년에 원불교를 일으킨 박중빈 등은 자신이 창교주로서 화려하게 등장했다.

그러나 홍암은 자기가 기꺼이 역사의 그 무거운 짐을 지겠다, 역사의 징검다리, 가교로서 끝나겠다는 거다. 그래서 홍암은 개인적으로 단군교에 입교해 영계를 받은 교인으로서 대종교를 중광한 거다. 화려한 창교주로서가 아니라 기꺼이 우리 민족의 정신사에, 종교사에 한 징검다리로서 몸을 낮췄다.

대종교 중광으로 근대사에 얼마나 많은 변화가 오나. 국어운동, 역사운동, 문화운동 더 나아가서 항일운동에 전면적인 변화가 온 거다. 우리민족이 어떻게 보면 환골탈태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 아닌가.

만약에 뒤집어서 홍암 나철과 대종교라는 집단이 없었다면 과연 한글운동이 일어났을까? 과연 민족주의 역사운동이 일어났을까? 우리 민족 고유한 정체성의 다양한 분출이 과연 가능했겠나? 불가능한 것 아닌가?

나는 그게 동학에서 불가능하다고 본다. 증산교에서는 더 불가능하고 원불교 하고도 상관이 없는 거다. 홍암 나철이 없었다면 과연 우리가 지금 어지러운 사회 속에서 최소한의 민족적 양심이랄지 민족적 주인의식을 갖고 살 건덕지가 있었겠나, 이런 걸 우리가 되짚어볼 수가 있다.

홍암 100주기, 가장 중요한 것은 몸통이다

   
▲ 대종교가 되살린 국전 개천절은 세계적 문화유산이다. 사진은 2003년 평양 단군릉에서 남북해외 대표단이 개천절 민족공동행사를 진행하는 모습이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홍암 나철 100주기에 되짚어본, 우리가 부여받고 있는 현 단계 실천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홍암을 비롯한 관련인물들, 김교헌, 윤세복, 서일, 주시경 등등 수많은 굵직한 인물들에 대한 실질적인 평가가 이 시대에 이뤄져야 한다.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그들이 대종교에 관여했기 때문에 안 이뤄지는 것 아니냐.

주시경 같은 분도 예수교 신자로 남아있었으면 지금 난리가 났을 것이다. 대종교로 개종하다 보니까 완전히 만신창이가 돼서 그냥 덮여있다. 조선어학회 사건도 함흥 영생여보고 정태진 교사만 부각되고 조선어학회의 본질인 대종교와 이극로 등은 철저하게 묻혀 있는 것 아니냐.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사실적인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역사적 서훈 작업이 다시한번 이뤄져야 한다. 독립운동 서훈에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 대통령표창 이렇게 6단계가 있는데 이상한 사람들은 1등급을 받는데, 홍암 나철이나 백포 서일, 무원 김교헌, 단애 윤세복은 3등급을 받고 있다. 객관적인 평가, 역사적인 무게의 평가가 새롭게 이뤄져야 한다.

그들이 몸담아서 희생했던 집단, 대종교에 대한 민족적인 보상이 하나도 없다. 해방 후에 그들을 위해서 과연 조국이 무엇을 할당했나? 어떻게 본다면 그들이 뿌려놓은 씨자본에 의해서 오늘이 있는 건데 그들에 대해서 우리가 주식 배당은 정당하게 못할망정, 최소한 인사치례 정도는 해야 되는 게 아닌가.

세 번째는 조직적인 선양활동이다. 인물들의 기념사업이나 선양사업이 국가적 차원이나 사회각계에서 일어나야겠다.

또 하나는 학계에서도 능동적으로 눈을 돌려서 연구하고 대중화시킬 수 있는 게 필요하다. 학문도 경제논리에 얽매이다 보니까 돈 안 되면 연구를 안 하고, 연구해 봐야 괜히 이상하게 보일까 몸을 사린다. 진정한 역사의 무게를 생각한다면 학자적인 눈으로서 그런 걸 능동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 대종교를 비롯한 민족진영의 현주소와 과제는?

■ 우리는 1930년대부터 특히 해방 이후 이념 갈등으로 치달아 왔다. 내가 누차 강조하는 것은 리영희 교수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좋은 책을 썼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몸통이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 때 저항 속에서 몸통을 만들려고 몸부림쳐 왔지만 오히려 해방 이후에 몸통 자체가 다 죽어버리지 않았나.

우익은 친일매판 혹은 친미 경도주의에 빠진 반민족적 집단이고, 좌익은 몰민족적 진보집단이다. 부르조아 혁명이든, 프로레타리아 혁명이든 민족이 끼어들 수 없는 구조를 1930년대부터 잉태해 왔고, 그것이 해방 이후 지금까지도 쭉 왔다.

대표적으로 대비되는 게 일본이다. 일본은 1920,30년대부터 좌우가 극렬하게 대립했지만 아직도 일본이 저렇게 굳건한 것은 일본이라는 국가적 상징주의가 굉장히 강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몸통이 있기 때문에 좌우의 날개가 퍼덕거리더라도 그 속에서 녹아나는 거다.

앞으로 남북통일 문제도 마찬가지다. 통일문제 역시 가치관이 어떻게 보면 몸통이다. 그러면 남이고 북이고 공동으로 수용하고 긍정할 수 있는 가치가 뭔가? 민주주의나 공산주의는 삶의 수단이지 삶의 본질은 아니지 않나.

‘우리가 어떻게 하면 남과 더불어 잘 사느냐’ 이걸 고민하는 것 아니겠나. 그거는 역시 민족이면 민족, 구성원이면 구성원 집단의 가치관 공유가 선행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통일도 마찬가지다. 글로벌 사회에서 재외동포를 포함해 8천만 동포들을 엮는 것도 중요하다.

남북통일을 통한 8천만 한민족 시대를 세계화 시대에 능동적으로 소화시키려면 그런 가치관이 중요한 건데, 그걸 만들지 못하고 지금까지 오다 보니까 이 모양, 이 꼴이 되는 거다. 민족이라는 것도 다 껍데기고 한쪽은 반민족, 한쪽은 몰민족 이렇게...(한숨)

□ 최근 재야사학 중심으로 고대사 등 새로운 역사관 정립 바람이 불고 있는데.

■ 우선 전제할 것은 좋은 현상이다. 그러나 문제는 흔한 한자성어로 과유불급이다. 지나치면 못 미침만 못하다.

역사연구는 철저하게 재구(再構), 이 시대를 기준으로 해서 거슬러 올라가면서 쌓아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자칫 고대사를 연역적으로 ‘6천년 전에 뭐가 있었다’, ‘5천년 전에 뭐가 있었다’ 대전제를 해놓고 맞추려다 보면, 역사를 복원하는데 잘못하면 걸림돌이 된다.

가령 지금 학계 내에서는 삼국시대 초기도 역사시대로서 인정하기 힘든 상황인데, 고구려, 백제. 신라 초기가 지금 역사 기술 방법으로 보면 역사가 아니다. 그런데 지금 고조선을 무조건 주장한다고 되겠나. 그 이상의 홍산문명을 주장한다고 되겠나.

초기 삼국시대부터 해서 재구해 올라가서 부여를 재구해 놓고 그리고 고조선으로 올라가는 이런 역사를 연구하는 방법을 좀더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접근할 때 역사연구, 고대사 복원의 지름길이 아니겠나.

아무튼 분명한 것은 그런 방법으로 해서 우리 고대사는 반드시 재구해서 복원돼야 된다는데 적극적으로 공감한다.

‘단군 구국론’, 우리가 고슴도치가 되면 된다

   
▲ 김동환 연구위원은 홍암 나철이 살았던 100년전 망국의 시기와 현재가 다르지 않다며, '고슴도치론'을 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남북이 판이하게 다른 사회구조 사상체계를 가지고 있다. 홍암 나철 100주기에 홍암 나철과 대종교 운동이 남북 통일에 던지는 시사점이 있다면?

■ 해방 이후를 놓고 보면 사실 대종교 지도자들이 남북으로 갈렸다. 북쪽에 김두봉을 비롯한 핵심멤버들이 많이 넘어갔고 또 남쪽에는 윤세복 총전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자리잡았다.

당시 윤세복을 비롯해서 남쪽에서는 아마 금방 통일될 것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런데 통일은커녕 남쪽에서는 미군정의 변대적인 정치에 의해서 우리 민족적인 성향의 종교, 혹은 가치, 사상이 태동할 수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차단된다. 미군정과 같은 데서는 대종교가 능동적으로 체계화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될 수 없다.

그런 변태적인 정치성향을 맞닥뜨리고 조금 있다 6.25가 터지면서 사실상 완전히 풍비박산되는 것 아니냐. 어떻게 보면 대종교는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중도우익적인 입장이 강했다. 6.25가 터지면서 남쪽에서는 이상하게 공산주의 성향으로도 몰릴 수가 있었고, 북쪽에서는 수정주의 이런 걸로 몰려서 공멸하는 게 돼 버렸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하나가 될 수 있는 ‘단군 구국론’과 같은 그런 정신, 그런 사상운동이 역사의 위기 때마다 등장해서 해결하려고 노력해 왔고, 해결해 왔다. 역사적 경험으로 비춰본다면 통일도 그런 요소들이 크게 작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 생각해 본다.

□ 다행히 남북이 단군릉에서 개천절 공동행사도 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남북관계도 냉각됐고, 남쪽 민족단체들도 매우 미약한 것이 현실이다.

■ 민족단체들이 대부분 속되게 표현하면 생계형 민족주의 운동을 하고 있다. 진정한 열정을 갖고 자기의 기득권 생각을 안 하는 것, 나는 그런 걸 보지 못했다.

생계형으로 자기 이해관계 속에서 하다가 이해관계가 틀어지면 서로 욕하고 금방 돌아서고. 과연 바로 주변 사람에게도 무슨 공감을 얻겠나.

그리고 민족단체 분들이 ‘과연 민족이란 게 뭐냐’, 치열한 고민이나 공부를 안 해 본 사람들이다. 막연하게 입으로만 민족을 떠드는 사람들 아니겠나. 오히려 그런 민족은 자칫 사이비로 몰릴 수 있는 전형적인 양태일 수 있다.

□ 최근에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 재확립, 중국의 부상과 동북공정, 일본의 신군국주의화 등이 추진되고 있다. 홍암 100주기에 주변강국들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민족의 진로를 어떻게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 정치적인 문제나 지정학적인 문제가 공교롭게도 홍암이 대종교를 일으키던 19세기말 20세기 초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지금세계의 중심이 동북아로 이미 옮겨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물동량이 가장 교차되는 곳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전제한다면, 동북아가 세계의 물동량을 넘어 세계의 이해관계가 가장 치열하게 교차되는 곳으로, 지금이 동북아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동북아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적인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정치, 경제, 사회 모든 걸 포괄할 수 있는 문화적 정체성을 어떻게 유지하느냐의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동북아시대에 우리가 스스로 주인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모양이 있느냐? 없다고 본다. 중국이나 미국, 일본도 아마 그렇게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북아시대에 어떤 갑작스런 변수가 생길 때 우리의 생존권이랄지 정체성 유지가 과연 보장이 되겠나? 불가능하다고 본다.

우리가 미국이나 일본이나 중국, 북으로는 러시아에 비해서 사실상 무력으로서 그들을 무찌를 수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호랑이들이 득실거리는 공간 속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길은 뭐겠나?

정치학자들이 잘 비유하는 것처럼 우리가 고슴도치가 되면 된다. 호랑이는 고슴도치를 잡아먹지 못한다. 호랑이가 고슴도치를 잡아먹으면 가시 때문에 호랑이가 죽는다.

호랑이들이 득실거리는 동북아의 치열한 공간 속에서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뭐냐? 우리가 고슴도치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고슴도치가 되는 길이 뭐냐? ‘너희가 우리를 잡아먹으면 너희도 죽는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그러면 우리를 잡아먹으면 죽는 이유는 뭐냐? 그게 뭐냐면, 바로 우리의 정신이다. 일제강점기 때 보여주었던 역사의식.

□ 미국도 이라크에서 절감하고 있는 것 같다.

■ 그렇다. 그게 중요한 거다.

그러나 우리 지도층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는 항상 노예될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이다. 사회지도층에 있는 자가 ‘천황폐하 만세’ 부르고 난리를 부린다. 이것이 우리 사회다. 대통령으로부터 국회의원, 장관 할 것 없이 의식이 뭐가 있느냐. 구한말 때도 똑 같았다. 임금이 변변치 않았고, 당시 내각은 다 눈치만 봤고. 이런 걸 보여준 거다.

우리가 동북아시대의 고슴도치가 되면 된다. 너희가 잡아먹으면 죽는다. 또다시 국망도존(國亡道存)이다. 사상적 무장, 정신적 무장이다. 정신만 투철하면 결코 나라가 안 망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또다시 변수가 와서 우리가 열악한 상황에 놓일 때 끝까지 정말 이를 악물고 갈 수 있는 집단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만 보여준다면 끝난다고 생각한다.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외부에서 봤을 때 ‘저 집단은 함부로 먹을 수 없는 거로구나’를 보여줄 정도가 되려면 뭔가 다른 걸 보여줘야 하는데, 지금 우리는 그건 걸 못 보여주고 있다. 그건 걸 보여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 지금 우리의 미래는 낙관이냐 비관이냐다. 그런데 나는 이 상황에서는 비관이라고 생각한다. 비관이 뻔히 보이는데 비관으로 그냥 갈 수는 없지 않나. 그러니까 어떤 조건을 부여해, 조건을 통해서 낙관으로 돌려야 한다.

그 조건이 뭐냐? 그게 바로 이 시대에 홍암의 고민을 우리가 다시 해야 한다. 홍암 나철이 구한말 국망의 위기 속에서 고민한 것을 우리가 또다시 고민해야 한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기 하루 전까지 우리나라가 망한다고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됐겠나? 상층부 몇 명 아니었겠나.

□ 최근 상황을 굉장한 위기로 진단하는 것 같다. 그 징표를 든다면?

■ 이미 지도층이 정신적으로 붕괴돼 가는 걸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보면 구한말 시대보다 더 심각하다고 본다.

지금은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가 어떤 행각을 하는지 모르고 있지 않나. 지도층의 도덕적 불감증 만이 아니라 정체성의 불감증을 그대로 노정시키고 있지 않나. 지도층이 내가 주인인지 아닌지를 모르고 있는 거다.

자기가 돌아갈 곳을 망각한 집단이 어떻게 행세하겠나. 그 사람들은 자기가 돌아갈 공간을 고민하면서 가는 게 아니라 여차하게 되면 딴 곳으로 피하면 된다. 우리 사회 지도층이 다 그렇지 않나. 이중국적에다 자제들 유학 보내고.

분명한 건 내가 주인인지 아닌지 그걸 모르는 사회는 지탱할 수 없는 사회가 된다. 정체성을 잃어버렸단 자체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왜? 기준이 없어 졌으니까 뭐가 똥이고 된장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감각 자체가 없어진 거다.

누가 정의고 누가 불의인지 이게 구별이 안 된다.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구별이 안 된다. 피아가 구별이 안 되면 어떻게 되나. 변화가 올 때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그런 국가, 민족사회를 지탱하고 구별해줄 수 있는 최소의 계기 자체가 이미 없어져 버렸다.

자기 아랫사람들한테 관용하고 자기보다 윗사람한테 떳떳하게 고개드는 그게 사실상 주인이 되는 사회인데, 지금은 어떻나? 자기 아래 있는 사람은 개돼지로 보는 것 아니냐. 그리고 자기 윗 사람한테는 완전히 하느님으로 대접하는 것 아니냐. 이게 우리 사회의 모습이니까 무너질 수밖에 없는 거다.

□ 국학연구소와 김 연구위원의 연구 계획이나 방향은?

■ 지금 우리는 국사를 한국사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국학을 영어로 번역할 때 ‘korean studies’라고 한다. 나름대로의 몇천년의 역사적 뿌리를 갖고 정신적인 어떤 가치를 향유하며 살아왔다는 집단치고 이렇게 부르는 나라는 없다.

일본은 japanoloy. 중국은 cinology로 부른다. logy를 붙인다는 것은 남들과 구별되는 진정한 고유한 가치학문이 있다는 것이다. 원래 우리 국학은 korealogy를 붙여야 되는 것 아니냐. 그런데 학계에서는 koreanlogy를 붙이면 국수주의적인 발상으로 본다.

우리 국학을 국학이라고 못 부르는 이게 뭐냐. 나를 나라고 못 부르는 것과 똑 같은 거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어학회는 상당히 불행한 용어다. 조선어학회 이전에는 주시경은 국문연구소라고 처음 시작했다. 우리 나라 글이니까 국문, 국어다. 그런데 일본이 지배하면서 국어는 일본어가 되고 우리말은 조선어로 타자화 된다.

국학연구소 입장에서는 국학연구를 통해서 ‘나를 나라고 부르는 학문풍토’를 위해서 노력한다. 그러니까 주인을 주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그런 시각을 찾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게 국학연구소의 길이다.

마지막으로, 나를 내가 대접 못하는데 누가 나를 대접해 주겠나.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와서 가장 보고 싶은 것이 뭐겠나? 서양인들이 일본에 가서 가장 많은 호기심을 갖는 게 일본 신도, 신사다. 일본 각지역 마다 있는 신사를 토대로 해서 만들어진 마쯔리, 축제다.

우리가 5천년을 내려왔다고 떠들어대면서 뭘 내세우겠나? 개천절 같은 걸 문화적으로 포장해서 조직적으로 하면 외국인들이 그걸 보러 수없이 올 것이다. 그래서 이런 몸부림이 어떻게 보면 발악 수준에서까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끔 생각해 본다. 이 시대에 홍암 나철, 백포 서일 같은 사람, 신규식, 안중근이 있다면 어떻게 할까?

(추가,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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