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17.2.24 금 11:49
홈 > 특집연재 > 테마기획 | 홍암 나철 100주기
홍암의 후예들, 청산리서 승전고 울리다<홍암나철 100주기⑧> 당벽진과 액하감옥의 비극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승인 2016.09.01  15:03:29
페이스북 트위터

홍암 나철 100주기 연재에 부쳐

홍암 나철과 대종교, 항일무장투쟁 외에 우리 사회에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과 민족종교지만 우리가 결코 지나칠 수 없는 큰 인물과 중요한 종교다.

국조 단군과 국시 홍익인간, 국기 단기, 국전 개천절을 재정립한 홍암 나철과 대종교는 우리의 미래를 가리키는 나침판과도 같다. 서일, 김좌진의 청산리대첩을 비롯한 항일무장세력의 본거지로 10만의 순교자를 낸 것은 물론 주시경, 이극로, 신채호, 박은식 등 국어와 국사 운동의 출발도 홍암 나철과 대종교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과정에서 국망도존(國亡道存, 나라는 망해도 정신은 살아있다) 기치 아래 외교, 테러, 교육, 종교, 무장투쟁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싸웠고, 마침내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내놓았다.

1916년 추석인 음력 8월 대보름, 홍암 나철이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교한 지 100주기, 독립운동의 아버지이자 국학의 스승, 민족종교의 중흥자인 그의 발자취를 따라 벌교에서 서울, 도쿄를 거쳐 화룡, 영안, 밀산 등을 순례했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군국주의화, 미국의 노골적 패권 재구축이 맞부딪치고 있는 격변의 시기에 홍암 나철의 삶과 죽음을 재조명할 이유는 충분하다. 더군다나 서구식 사고방식과 생활문화에 완전히 빠져있는 우리의 현실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구월산 삼성사에서 이 순례를 마무리할 수 있길 바란다. 아울러 이번 기획취재에 도움을 주신 국내외의 많은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필자 주

<연재 기사>

“아비를 만나랴거든 공부를 통하야 한울길로 오라”
<홍암 나철 100주기 ①> 도제사언문을 찾아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지만 몸통이 중요하다”
<홍암 나철 100주기 ②> [인터뷰]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제일 위대한, 제일 억울하게 묻혀 있는 인물”
<홍암 나철 100주기 ③> 기념관 준공 서두르는 벌교 생가

일본 황궁 앞에서 단식투쟁 벌인 조선 선비
<홍암 나철 100주기 ④> 일사와 도동기를 찾아서


“700년간 닫힌 신교의 교문이 다시 열리어”
<홍암 나철 100주기 ⑤> 을사5적 처단투쟁과 단군교 중광

“내가 신의가 없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자”
<홍암나철 100주기⑥> [인터뷰] 최윤수 대종교 삼일원 원장

"천하에 독립한 제일 큰 산은 오직 한 백두산이시니"
<홍암나철 100주기⑦> 만주로 망명한 대종교 총본사

 

홍암 나철의 순명 조천(殉命 朝天)은 30만 대종교 교우는 물론 일제의 무단통치에 시달리던 2천만 조선 민중에게 큰 울림을 남겼다.

홍암의 두 달이 넘는 구월산→경성→화룡 장례여정은 ‘올림픽 성화 봉송’을 방불케했다. 홍암 등 대종교 3종사 묘역이 있는 중국 화룡시 청호촌 주민들이 아직도 “울 할아버지가 말하는 게 라철 선생이랑 고래함(유골함) 모실 때... 올림픽 횃불 들듯 인계해서 모셨다고 하더라”고 구전될 정도로 인상적인 장례였다.

유언에 따라 장례예식은 매우 검소하게 진행됐지만 당시 유교의 매장문화와 달리 화장(火葬)을 했고, 그의 유해가 이르는 곳마다 추도객이 줄을 이었다. 항일 민족전선에 ‘통일된 정신적 지주, 구심점’이 생긴 셈이다.

그러나 54세를 일기로 1916년 음력 8월 15일 스스로 숨을 거둔 홍암 나철의 순교는 일제시기 전체로 보면 초반부에 해당된다. 1919년 3.1만세운동과 1920년 청산리전투 이전인 것이다.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은 <통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홍암이 1916년에 스스로 자결했지만 냉철하게 보면 그 이후에 사실 대종교단을 중심으로 한 체계적인 틀은 3종사, 즉 무원 김교헌과 단애 윤세복, 그리고 백포 서일 세 사람이 중심이 돼서 힘을 발휘한 거다”며 “그 분들은 홍암이 남겨놓은 유지를 자기 평생의 유훈으로 삼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거다”라고 평가했다.

홍암의 후예들, 청산리전투 승전보를 올리다

   
▲ 일제 전반기 항일무장투쟁의 꽃 청산리대첩은 대종교 군사책임자인 백포 서일 북로군정서 총재가 지휘했다. 사진은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사진 - 조천현]

항일독립운동에서 1919년 3.1만세운동은 중요한 분수령이 된다. 그 직후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무장투쟁이 본격화된 것이다. 그런데 1919년 3.1(기미)독립선언의 효시가 된 1918년 대한(무오)독립선언을 바로 대종교가 주도했다.

대종교 측은 “4375년 무오(서기 1918) 봄에 기미 독립선언의 전주곡으로 서일, 김동삼, 김좌진, 유동설, 여준, 정신 등 39인의 동서(同署)로 독립선언을 발포”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학계는 통상 11월에 발표된 것으로 보고 있다. 앞서 1917년에는 윤세복, 박은식, 신채호, 조성환, 홍명희, 조소앙 등 대종교 핵심인물 14명 명의로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한 바 있다.

무오독립선언 서명자에는 홍암의 뒤를 이어 대종교 2세 도사교가 된 무원 김교헌이 첫 번째로 자리잡았고, 이후 3세 도사교가 된 단애 윤세복도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5천년 조정의 광휘(光輝)를 현양(顯揚)할 것이며”,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등의 내용은 대종교의 역사의식과 무장투쟁관을 그대로 담은 것이다.

3.1만세운동의 결실로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수립 당시 의정원 29명 중에서 대종교 원로가 21명이었고, 의장에 선출된 이동녕과 정부조직에 임명된 13명 중에서 11명이 대종교 원로였다는 점만 보더라도 당시 대종교의 영향력을 알 수 있다.

   
▲ '봉오골 반일전적지' 표식비. 뒷쪽 흰색이 새로 세워진 기념비다. 봉오골은 봉오저수지가 들어서 대부분 물에 잠겼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홍암 대종사의 순교가 피워낸 꽃 중의 꽃은 역시 청산리전투다. 청산리전투의 주력부대인 북로군정서 총재 백포 서일(白圃 徐一, 1881.2.26~1921.8.27)은 1911년 대종교의 중광을 뜻하는 중광단(重光團)으로 출발해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부를 거쳐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를 지휘했다.

백포 서일은 신흥무관학교 출신 김좌진, 조성환, 이장녕, 량림, 박찬익 등을 초빙, 사령부를 맡도록 배치했고 홍범도 연합부대 등과 힘을 합쳐 10여 회의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끌어 청산리대첩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계하에 북로군정서를 설립하고 철형이 총재가 되어 화룡현경(境) 밀림지대에서 양사연병(養士練兵)하는데 간부와 장교는 물론이오 사졸군속까지 대종교우로써 조직되었고 군비량향(軍備 糧餉)을 일반교우가 부담하였다”는 대종교 측 기록이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이다.

<북로군정서 조직과 책임자>

총재 : 서일 부총재 : 현천묵
총사령관 : 김좌진 참모장 : 이장녕
사단장 : 김규식 여단장 : 최해 연대장 : 정훈 연성대장 : 이범석
경리 : 계화 길림분서(分署)고문 : 윤복영 군기감독 : 양현
사관연성소장 : 김좌진 교관 : 이장녕 이범석 김규식 김홍국 최상운

(자료출처 - 대종교중광60년사)

   
▲ 백포 서일 북로군정서 총재. 변변한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다. [사진출처 - 대종교]

그러나 흔히 김좌진, 홍범도 장군은 널리 알려졌지만 이들이 대종교인들이며, 그 최고지도자가 백포 서일이라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최근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숨은 주역이자 최진동 장군의 동생인 최운산 장군을 재조명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편, 리광인 중국 절강 월수외국어대 교수는 「백포 서일 총재 평전」에서 북로군정서는 상해 임시정부가 승인하는 ‘유일한 지방행정, 군사기관’을 자처하고 간도국민민회 등의 통합주장에 대해 ‘국내 진공계획은 시기상조’라며 응하지 않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실제로 청산리전투 당시 어랑촌전투에서 홍범도 연합부대가 때맞춰 나타나 지원하지 않았다면 큰 화를 면치 못했을 것이라는 평가다.

백포 서일은 북로군정서 총재이자 청산리대첩의 주역으로서 주로 군사분야 업적이 부각돼 있지만 대종교 경전 중 보전인 「회삼경」「진리도설」「구변도설」「삼문일답」은 물론 「삼일신고 도해강의」「신리주해」「종지강연」「신사기 절안고정」 등 숱한 종교저술을 남겼다.

백포는 병영 내에 수도실을 마련해 수행과 저술활동을 멈추지 않는 수전병행(修戰竝行)의 모범을 보였고, 청산리전투 이후 밀산 당벽진에서 논밭을 일구면서 군사를 키우는 둔병양병(屯兵養兵)의 모범도 세웠다.

밀산 서일 기념비, “일본군의 ‘천하무적’ 신화를 깨뜨리고...”

   
▲ 지난 6월 24일 맹고군 전 밀산시 부시장(왼족)과 채명군 전 밀산시 국장의 안내로 밀산시내에서 당벽진 가는 길 대로변 가까운 곳에 자리잡은 ‘서일 총재 항일투쟁 유적지’ 기념비를 둘러보았다. 아직 진입로 공사 등을 남겨두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우리가 토론한 게 순직지 기념비와 항일투쟁 유적지비, 어느 것이 더 큰가? 순직지 기념비가 큰 것이 아니라 항일투쟁 유적지비가 크다, 서일이 여기 지구에 와서 항일투쟁을 했다. 그 지구를 당벽진을 대표해서 여기다 세웠다.”

중국 흑룡강성 밀산시 부시장을 지낸 맹고군 선생과 밀산시 국장을 지낸 채명군 선생은 6월 24일 밀산시내에서 흥개호로 가는 당벽진 대로변 우측에 세워진 ‘서일 총재 항일투쟁 유적지’ 비석을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산동성에서 가져온 통돌로 만든 비석은 성인 키보다도 높고, 뒷면에 한자와 한글로 나란히 내용을 새기느라 가로 길이는 두 배로 늘었다. “1920년 10월, 서일은 연변지구에서 항일련합부대를 지휘하여 저명한 청산리대첩을 펼쳐 일본침략군 수천명을 섬멸함으로서 일본군의 “천하무적” 신화를 깨뜨리고 동북 항일투쟁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남겼다”는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맹고군 전 부시장은 “몇 십년 지나고 나면, 이렇게 아니 해놓으면 다 없어진다”며 “공사가 끝나지 않았다. 진입로 닦고 주차장 만들고 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일 총재 항일투쟁 유적지’ 비문 (전문)>

   
▲ 밀산시인민정부 명의로 세워진 ‘서일 총재 항일투쟁 유적지’ 기념비 뒷면.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서일, 도호는 백포이며 1881년 2월 26일 조선에서 출생, 1911년 3월 중국 길림 왕청
덕원리로 망명하였다. 서일은 항일 “무장투쟁론”을 주장한 대표적인물이며 중광단,
대한정의단,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단의 주요한 지도자이다.
1920년 10월, 서일은 연변지구에서 항일련합부대를 지휘하여 저명한 청산리대첩을
펼쳐 일본침략군 수천명을 섬멸함으로서 일본군의 “천하무적” 신화를 깨뜨리고 동북
항일투쟁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남겼다. 동년 12월, 서일은 북로군정서를 거느리고
전략적전이를 하여 밀산 평양진에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총재를 담임하였는바
총병력은 3500여명에 달했다.
1921년 6월, “자유시사변” 후 서일은 당벽진에 주둔하여 “둔병제”를 실시하면서
항일무장투쟁을 견지하였다. 8월 17일 밤, 부대는 비적들의 불의습격을 받아 침중한
손실을 보았다. 극도의 심신타격을 받은 서일은 8월 26일 당벽진 뒤산에서 순직하였다.
향년 41세였다.

밀산시인민정부
2015년 8월 15일

맹 전 부시장 등이 밀산시인민정부의 승인을 받아 공식적으로 건립한 백포 서일 기념비는 외지 동포들의 재정적 후원으로 지난해 완공됐지만 아직 진입로나 주차장 등 주변 정비사업을 위한 추가 재정 확보가 절실한 상황이다.

맹 전 부시장 등 이 지역의 뜻있는 조선족들은 백포 서일의 기념비 뿐만 아니라 홍범도 부대가 3년간 머물렀던 십리와에 2009년 ‘십리와 항일투쟁 유적지 기념비’를 건립했고, 1909년 최초로 조선인 항일기지를 꾸렸던 한흥동 마을에도 밀산시로부터 기념비 건립 승인을 받아둔 상태다. 역시 건립 기금 확보가 남은 숙제다.

   
▲ 맹고군 전 부시장이 대종교 총본사가 있었던 당벽진 중촌마을에서 집필 중인 자료를 꺼내들어 고증하고 있다. 왼켠이 자연도랑이 있던 자리로, 흥개호로 흘러들어가는 이 곳 물을 막아 농사를 지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집단농장이 소유해 묵은 땅으로 방치돼 있는 당벽진 중촌 대종교 총본사 옛터에서. [사진 - 조천현]

“이곳이 옛날에 당벽진 중촌 마을이 있던 곳이다. 중촌 마을로 강이 흘렀다. 총본사가 1920년 11월에 먼저 오고, 이 분(김교헌)은 21년 연말에 오고...”

밀산 당벽진은 대종교 총본사가 두 차례 자리한 곳으로, 청산리 대승 직후인 1920년 12월 피난하듯 이곳으로 들어와 1922년 4월 영안현 남관으로 옮길 때까지, 그리고 역시 대종교에 대한 탄압이 거셀 때인 1928년 1월 16일부터 1935년 6월 영안현 동경성으로 옮겨갈 때까지가 그 기간이다.

“책 쓰느라 연구를 많이 했다. 2007년에 리창섭 영감이라고 하얼빈에서 직접 모셔왔다. 14살에 여기를 떠나 다 안다. 학교 마당에서 운동회도 했다하고 자연도랑이 있다고 했다.”

맹 전 부시장은 『밀산 조선족 인물』을 집필 중이며, 그 중 제 1부는 ‘한국독립운동시기 인물’로 서일, 이상설, 안창호, 이승희, 윤세복, 홍범도, 권상익 7인을 다루고 있다.

“윤세복이 있을 때 여기서 밀산지구 조선족들 운동회를 했는데, 어떤 촌에서 3일 동안 걸어서 쌀을 메고, 걸어서 여기 왔다. 태극기를 걸고 노래를 부르고, 신기했다는 거다. 흥개호 제일 동쪽에서 사람들이 조직해서 쌀을 메고 왔다.”

식량을 싸들고 사흘을 걸어서 이곳까지 왔다는 총본사 옛터는 지금 집단농장에 소속된 농토지만 재개발을 기다리는 탓인지 폐허지로 남아있어 쓸쓸함을 더했다.

백포의 최후, “전신에 한 점의 창흔도 없다”

   
▲ 맹고군 전 밀산시 부시장이 백포 서일이 마지막 머물며 둔전제를 실시했던 마을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봄에 풀이 나기 전에 밭갈이를 해놓으면 흙색이 다르다”는 백포 서일이 마지막 머물렀던 마을 터. 토비들의 습격을 받았지만 백포는 현장에 없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저 평범한 논밭일 따름이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봄에 풀이 나기 전에 밭갈이를 해놓으면 흙색이 다르다. 군데 군데 집자리가 있던 곳은 다르다. 풀이 난 다음에는 지금 아무 것도 없다.”

1921년 당시 백포가 농사와 군사훈련을 병행하는 둔병제(屯兵制)를 실시하며 머물렀던 마을은 1940년대 일제의 집단부락 정책으로 모두 논으로 변해있고, 백포가 숨을 거뒀다는 마을과는 떨어져 있는 뒷동산만 무심히 푸르렀다. 지금은 거대한 민물호수인 흥개호 관광단지의 배후 풍경일 뿐이다.

맹 전 부시장은 “토비들이 습격하는 그때 서일 장군은 이 마을에 없고 이 주위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포교사업을 하고 있었다”며 “지금은 인공수풀이지만 이 산 자연수풀 안에 들어가서 순직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원래 조선 사람은 묘지가 저 뒤 산에 었다. 거기에 안장했다”고 먼 곳을 가리켰다.

아울러 “여기서 멀지 않은 한흥동 조선족 촌이 유명하다. 3개 촌이 있고, 저 위에 올라가면 권씨네 자연마을이 있다. 이런 마을들을 다니면서 포교활동을 했다”고 덧붙였다.

   
▲ 밀산 당벽진은 중국과 러시아 국경이 맞닿은 지리적 요충지이자 동양 최대의 민물호수인 흥개호가 있어 논농사와 어로가 가능한 물산이 풍부한 도시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러시아와 연결된 밀산시 세관. 주로 러시아 보따리 장사들이 밀산시내에서 물건을 구입해 가는 곳이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1920년 청산리전투에서 승전보를 올린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13개의 독립군 부대는 일제의 압도적 무력을 피해 러시아 국경지대이자 물산이 풍부한 밀산으로 모여들었고, 3,000여 병력은 한국독립군단으로 통합하고 백포 서일을 총재로 추대했다.

그러나 이듬해 많은 독립군 부대원들이 러시아로 들어갔다가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을 겪고 좌절하게 되며, 일부 부대원들은 다시 밀산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러시아로 가지 않고 밀산 당벽진에 머물고 있던 백포는 뜻밖의 비극적 사건에 휘말렸다.

중국 조선족 리광인과 김송죽은 『백포 서일장군』(민족출판사, 2015.6.)에서 반일독립군이 밀산 대지주 송곰보를 약탈했고 앙심을 품은 송곰보가 청보산 토비를 끌어들여 1921년 8월 26일 밤중에 당벽진을 들이쳐 대살육전을 벌였다고 기록했다.

   
▲ 백포 서일이 순교한 당벽진 마을 뒷동산.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백포 서일의 유해가 잠들었던 조선인들의 묘가 있던 산. 마을과는 한참 떨어져 있다. 백포 서일의 유해는 1927년 4월 3일 화룡현 청파호로 이장돼 마침내 대종교 3종사 묘역이 완성된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자유시사변과 당벽진 토비 습격으로 큰 타격을 받은 백포는 1921년 8월 27일 오전 밀산현 당벽진 마을 뒷산의 산림 속에서 스승인 홍암 나철의 유서 한구절을 읆조리면서 조천했다는 것이다.

“귀신이 수파람(휘파람)하고 도깨비 뛰노니 한울.땅의 정기빛이 어두우며 뱀이 먹고 돼지가 뛰어가니 사람겨레의 피.고기가 즐벅 하도다. 날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뇨.”

대종교 측은 “조천 익일의 강우(降雨)에도 착의에 젖은 흔적이 없었고 시와(屍臥) 6일간에 잡충(雜虫)의 범함도 없었으니 과연 종사는 천종(天縱)의 철인(哲人)으로 신우(神佑)의 대총(大寵)을 입어 반진(返眞) 조천한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백포의 시신은 며칠 후에야 뒷동산에서 발견된 것이다.

당시 <독립신문>(1921.12.6)은 “몸가진 개체 자아에서 겨레를 수호하는 호국영령으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삼일신고 최고의 수련법인 조식법으로 조천을 하신 것이다”라고 전했다. 홍암 나철과 같이 폐기 절식(閉氣 絶息)으로 순교했다는 것이다.

일제의 기록에는 “서일이 외출한 채 돌아오지 않은 결과 음력 9월 9일(외출한지 12일째)에 쾌상봉 벽리라는 산골에서 사체를 발견하였다. 사체를 검사해보니 전신에 한 점의 창흔도 없다”고 돼 있다. 물론 “미루어 보건대 음독자실을 시도한 것 같다”라든지“오히려 죽어 명예를 후세에 전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겨 자살한 것이라는 별보가 있다”는 부정적 의견도 덧붙였다.(「元大韓軍政署 總裁 徐一의 死亡에 관한 건 (1921. 11. 27)」)

백포 서일의 죽음을 두고 아직도 토비 습격시 피살, 음독 자살, 스스로 숨을 멈춘 폐기 절식 등 여러 설이 있다. 그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이 없고 며칠 후에야 발견됐기 때문일 것이다.

김교헌.윤세복의 대륙사관과 교세 확장

   
▲ 대종교 2세 도사교 무원 김교헌. [사진출처 - 대종교]

홍암 나철의 유언에 따라 2세 도사교가 된 무원 김교헌(茂園 金敎獻, 1868.7.5~1923.11.18)과 무원의 뒤를 이은 3세 도사교 단애 윤세복(1881~1960.2.13)은 모두 유학자이자 교육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사학자였다.

규장각 부제학을 지내고 종이품 가선계(嘉善階)의 작위(爵位)까지 오른 김교헌은 대종교 경전 중 보감인 『신단실기』『신단민사』『배달족 역사』 등을 저술해 대종교 대륙사관의 정수를 정립했다. 민족주의 사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이유다.

친형인 윤세용 선생과 고향땅 밀양을 등지고 중국 봉천성 환인현에 자리잡은 윤세복은 사재를 기울여 1911년 동창학교를 설립 운영했고, 이극로, 신채호, 박은식 등이 교사로 활약했다.

특히 신채호는 1912년 윤세복이 회장을 맡아 광복회가 출범할 때 부회장을 맡았고, 1914년 윤세복의 초청으로 환인현에 와서 유적답사와 역사연구에 전념해 동창학교 국사 교재로 『조선사』를 집필하는 등 대종교의 대륙사관을 본격 체화할 수 있었다.

김교헌은 1917년 총본사를 화룡현 삼도구로 옮기고 제1회 교의회를 소집, 홍범을 개정하고 직제와 종문규약 개정하는 등 교단 정비에 나섰고 생애 마지막 2년간인 1922~1923년 사이에만 48개 시교당을 신설하는 등 활발한 선도포교사업을 펼쳤다. 대종교 경전과 교적 간행사업도 이때 체계적으로 진행됐다.

1922년 반포된 계명(誡命)에는 “종교와 정치는 구분이 현수(懸殊)하니 대교를 신봉하는 인(人)은 정계상(政界上) 경동(輕動)이나 망담(妄談)함이 불가함”, “사회주의와 과격한 언동은 대종문의 주창 선전할 바가 아닌즉 절물(切勿) 침(侵)양하고 오교(吾敎) 규례는 보통집회와 형이하니 오해 망동함을 부득함”이라고 명시됐다.

정치와 선을 긋는 것은 일제와의 관계를 고려한 대외적 제스처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많지만 공산주의 계열과는 실제로 불화를 겪기도 했다.

1923년 대종교 3세 도사교가 된 윤세복은 이듬해 3월 영안현 남관에서 제2회 교의회를 소집해 홍범규제를 개정하고 종리연구실을 신설하며 교정 개정을 단행했다.

1925년 3월 독립운동단체들이 연대해 신민부를 출범시키고 9월 한국귀일당이 설립될 때 영안 동경성(발해 상경 용천부 옛터)에 자리잡은 대종교 총본사는 산파 역할을 했다. 한국귀일당은 같은해 5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영안에 설치되자 이에 대한 대응으로 조직된 것이다.

김종성 호서대 특임교수는 「단애 윤세복에 대한 연구」에서 “당시 한국귀일당은 윤세복을 정점으로 김좌진, 정신, 유현 등이 주도하였으며, 우리는 모두 일민족으로서, 단군을 모신다는 대종교적 민족주의를 뚜렷이 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1925년 일제는 중국과 미쓰야협정(三矢協定)을 체결하고 대종교를 불법단체로 규정한데 이어 1926년 포교금지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중러 국경지역인 밀산으로 총본사를 이전하고 다시 합법화를 추구해 1933년부터 시교당들을 신설하는 등 본격 포교에 나선다.

1935년 6월에는 다시 동경성으로 총본사를 옮기고 백산 안희제와 발해농장을 개척하는 등 활기를 띠어 「대종교 중광 60년사」는 1937년 6월말 현재 총본사 직할로 인가된 만주지역 시교당이 52개에 달한다고 기록했다. 시교당은 100명 이상의 교우가 있어야 총본사 직할로 설치가 인가된다.

이 시기 교적 간행사업과 대종학원 설립 등 교육사업들도 활발해지지만 1932년 이미 만주국을 세운 일제와 ‘타협’했다는 비판적 평가도 있다. 또 일각에서는 당시 상황에서 합법운동은 ‘근본적 착오’이고 밀정이 잠입해 동향을 정탐하는 등 1942년 임오교변을 불러왔다는 자성도 있다.(양세환, 「임오교변」)

단군으로부터 시작되는 우리 고대사를 처음으로 끌어안은 대종교는 김교헌, 신채호, 박은식 등이 정립한 대륙사관에 따라 고구려뿐만 아니라 고구려 이전의 부여와 고구려 이후의 발해를 우리 역사에서 중요하게 자리매김했다.

이들은 우리 겨레를 ‘부여족’으로 호칭했고, 통일신라 시대를 발해(대진국)와의 남북조 시대로 파악했다.

   
▲ 대종교는 발해의 수도 상경 용천부(동경성)에 총본사를 두고 적극 포교에 나섰다. 사진은 동경성의 옛우물.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동경성 옛터엔 주춧돌 자리들만 남아 지난날의 영화를 증언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대종교의 대륙사관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총본사를 발해 수도 중의 한 곳인 상경 용천부(동경성)에 둔 것이다. 대종교는 동경성 옛터에 단군 영정을 모시는 천진전(天眞殿) 건립을 추진하다 임오교변이 터져 중단되기도 했다.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건립해 독립운동을 지원한 것으로 유명한 백산 안희제의 발해농장과 발해학교도 바로 이곳에서 운영됐다. 안희제는 총본사 전강(典講)을 맡은 대종교 핵심인물이다.

오랫동안 중국에서 취재해 온 조천현 티브이조선 대표와 함께 6월 23일 해질녘에 발해의 수도 중에 하나인 상경 용천부, 즉 동경성 옛터을 찾았다. ‘발해국 상경 용천부 유지’는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이 흑룡강성 인민정부와 함께 ‘국가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한 국가급 유적지임을 밝히고 있다.

우물자리는 물론 성벽 일부도 잘 보존돼 있고, 무엇보다 옛 궁터의 주춧돌 자리가 그대로 남아있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이곳에서 대종교인들은 조국의 독립과 융성을 기원했으리라.

   
▲ ‘발해상경유지 박물관’은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임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그러나 8월 23일 백두산역사평화기행단과 함께 찾아간 ‘발해상경유지 박물관’은 발해 상경인 동경성에서 발굴된 유적들을 전시하면서 발해를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책봉받은 지방민족정권”으로 규정하고 ‘당대(唐代)문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특색있는 발해문화’를 형성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더구나 박물관 내부는 사진촬영도 금지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사실상 일단락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임오교변과 임오십현, 그리고 조선어학회 사건

1942년(임오년) 단애가 국내에 있어 조선어학회 이극로에게 보낸 편지를 빌미로 일제는 임오교변을 일으켜 대종교지도자 21명을 체포했고, 국내에서는 조선어학회사건이 발생했다.

임오교변의 국내판이랄 수 있는 조선어학회사건은 기독교에서 대종교로 개종한 주시경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조선어학회의 간부들이 일제의 의해 대거 검거된 사건으로, 백산 안희제의 고향 후배이자 대종교 중심인물이었던 이극로를 비롯해 김두봉, 최현배, 정인보, 안호상 등 대종교인들이 많이 연루됐다.

이현익은 『대종교인과 독립운동연원』에서 “한글어학회 사건이 곧 대교 교변이요, 대교 임오교변이 곧 독립운동실기가 되는 것이다”라며 “전국 지사는 대종교에 귀의한 것이며 진정한 독립운동자는 무조건 대종교를 신봉하였다”고 적었다. 조선어학회가 대종교의 비밀스런 업무를 수행하고 주고받는 연락장소로 사용되었다는 것.

임오교변으로 단애 윤세복과 백산 안희제 등 대종교 지도자들은 치안유지법 위반 죄목으로 목단강 경무처와 액하감옥에 분산 구금돼 혹독한 취조를 받았고, 당시 고문으로 열 명이 순교해 임오십현(壬午十賢)으로 불리게 됐다.

성재 이시영은 “뜻이 살아야 산 것이니, 몸의 존부(存否)는 오히려 제이(第二)에 속하는 바다. 이 열 분은 살았다. 누구든지 이 열 분의 눈에 산 사람 아닌 것 같이 보이지 말라”고 「임오십현순교실록」 서문에 썼다.

   
▲ 임오교변 당시 대종교 지도자들이 갇혔던 액하감옥. 이곳에서 혹독한 고문으로 10명이 순교했다. 중공목단강시위원회와 목당강시인민정부가 '철령하감옥' 표지판을 부착해 놓았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다른 기관에서 사용하다 지금은 방치돼 있는 액하감옥 중앙 건물.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지난 6월 25일 조천현 대표와 목단강 시내에 위치한 액하감옥을 찾아 나섰지만 이곳에 거주하는 한족(漢族)들은 감옥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잘 몰랐다. 2015년 7월에 중공목단강시위원회와 목단강시인민정부가 부착해 놓은 ‘철령하감옥’이라는 작은 안내판이 반가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中共)은 1932년에 일본군이 건립한 이곳에 ‘중공지하당원’과 ‘항련전사’(항일연군전사)와 ‘애국지사’들이 갇혔다면서 ‘일제가 목단강에서 실시한 잔혹통치의 역사 증거’라고 제시하고 있을 뿐 조선인 항일전사들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다.

쇠철조망이 둘러쳐진 붉은 벽돌의 담벼락과 망루는 세월의 무게만을 덧씌운 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본 건물은 이미 다른 용도로 쓰이다가 버려진 채 잡초가 자라고 있었다. 독립운동 선열들에 대한 우리의 퇴색한 관심처럼.

<임오십현 순교표>

   
▲ 대종교총본사, 『임오십현 순교실록』, 2013. [자료사진 - 통일뉴스]

<임오칠우 수형표>

   
▲ 대종교총본사, 『임오십현 순교실록』, 2013.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서울 홍제동 대종교 총본사 천궁 오른쪽에 모셔진 임오십현 영정.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단암 이용태는 「구금고황」에서 당시 영안현 구류소 상황의 일단을 기록으로 남겼다.

우리 행중(行中)에 장로 이신 아현 대형(권준)은 당년 72세로서 체력이 건왕하고 기백이 강의하여 취조 중 불굴은 일반이 예측하던 바 몇날 동안 취조 끝에 감시노가 취조자의 지시에 의하여 혹독한 벌을 특시(特施)하되 대형을 감방 공간에 기착(氣着)으로 정립케 하고 백묵으로써 양족(兩足) 밖에 그어 가로대 “일 주간을 꼭 이대로 서서 지내야 한다. 만일 요동을 하던지 함부로 좌와(坐 臥)하면 곧 타살하리라”하고 왜노 두놈이 번갈아 감시하더니 약 2주야(週 夜)부터는 다리가 자연 떨리고 발이 조금 옮기게 되매 곤봉으로 난타하여 유혈이 임리(淋漓)하고 골절 맞는 소리가 감방의 공기를 밤낮 긴장하게 하다. 그러나 대형은 간혹“이놈들이 참으로 사람을 죽이려 한다”는 말씀 뿐이었다. 그렇게 5주야가 되자 정말 기력이 시진(澌盡)하여 자연 혼도하는지라 두놈이 번갈아 밤새도록 난타하는데 대형은 정신을 차려 자진(自盡)을 꾀하되 그 두골을 목책에 타쇄코자 하더니 체번(遞番)한 다른 놈이 특무과에 고급(告急)하여 의사를 보내 진단하고 해벌(解罰) 구명되었다.(대종교중광60년사)

백산 안희제는 70여 회의 혹독한 고문으로 목단강 영제의원으로 보석됐지만 1943년 8월 3일 59세로 순교했고, 홍암 나철의 아들 정련(62)과 정문(54)도 함께 순교했다.

“국체 변혁을 목적으로 한 단체지도자인 임무에 종사”한 죄목으로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단애 윤세복은 1945년 8월 12일 광복을 앞두고 출옥했다.

   
▲ 대종교 3세 도사교 단애 윤세복(앞줄 가운데 노인) 등이 해방을 맞아 환국해 기념사진을 남겼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윤세복은 1945년 9월 17일 동경성에 다시 총본사 간판을 달고 본격적인 교무를 재개했고, 1946년 2월 36년만에 환국해 서울 영락정, 지금의 중구 저동에 총본사를 정하고 본격적인 포교시대를 열었다.

만주에서의 활동과 도사교 취임, 임오교변, 해방, 환국 등 숱한 역정을 헤쳐온 단애 윤세복은 홍익대 설립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지만 한반도에 드리운 분단과 냉전의 흐름에 꺾였고, 1960년 2월 13일 대종교 총본사 대일각에서 운명했다. 향년 80세였다.

일각에서는 대종교 교주인 도사교를 총전교로 바꾸고 선거로 뽑도록 바꾸었지만 결국 1,3대 총전교를 윤세복이 맡아 단애의 장기집권이 대종교의 족쇄가 됐다는 부정적 평가도 제기하고 있다.

3세 도사교 단애 윤세복을 끝으로 1대 윤세복부터 총전교의 시대로 접어들어 지금은 20대 총전교 홍수철 대형이 역사적인 대종교의 맥을 잇고 있다.

 

“선조들에 국혼과 민족애 정신 활동에 감동되여”
<미니 인터뷰> 윤세용.윤세복 기록하는 손자 윤태수

   
▲ 지난 7월 14일 윤세용 선생의 손자 윤태수 씨가 백부 윤필한을 모셔가기 위해 북한 정부에서 파견나온 인사들과 촬영한 사진(왼쪽)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윤세복과 함께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벌인 친형 윤세용의 손자인 윤태수(69) 씨는 하얼빈시에서 살고 있지만 선조들의 독립운동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애쓰고 있다.

“선조들에 국혼과 민족애 정신 활동에 감동되여 후손들에 교육가치가 될가 생각되여 서적편들에서 적혀 있는 사적들을 모아 적으놓으니 후세들이 참조하여 보아 주기를 바란다”는 것.

지난 7월 14일 윤승길 단군평화통일협의회 사무총장의 소개로 단통협 사무실에서 만난 윤태수 씨는 할아버지 윤세용과 작은 할아버지 윤세복의 사진은 물론 이들의 족보와 행적을 낱낱이 기록한 자료들을 꺼내놓았다.

이극로가 『40년 고투』에서 “윤세용은 1910년 이후 만주지역의 대한독립단 대한통의부 등 주요 무장 독립운동에서 활발히 항일운동을 전개한 인물”이라고 평가한 대목도 그는 자필로 옮겨놓았다.

윤세복의 “이 몸이 옥사한 뒤 유해를 출송거든/ 원컨대 동지들아 그 당시 화장하야/ 목단강 흐르는 물에 남은 재를 던져주.// 또 만일 출옥되면 갈 곳이 어디메뇨/ 아 백두산 기슭에 한 줌 흙이 되었다가 천진전(天眞殿) 신 건축할 제 기와 받침 하오리”라는 옥중시도 챙겨두었다.

특히 윤세복의 3남 윤필한(흥선, 1896.11.5~1962.2.23) 백부와 함께 기거하기도 한 그는 ‘조선 중앙 정부에서 해방후에 파견하여 윤필한 선생을 찾아온 분들이다’라는 설명이 붙은 사진을 간직하고 있었다.

윤세복은 무송병원 의사였고 독립운동으로 고초를 겪은 아들 윤필한이 마약을 끊지 못하자 사실상 ‘버린 자식’ 취급을 해 국내로 불러들이지 않았고, 북한 정부에서는 윤필한을 ‘모시러’ 왔지만 윤필한이 응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목란현 동흥진 조선족자치향인 승리향에서 태어나 자주성가한 윤태수 씨는 하얼빈에서 두 개의 공장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대순진리교에 입교하고 2002년 모든 사업을 정리했다.

이른바 ‘도’를 찾아 헤매던 중 대종교를 만났다. “작은 할아버지 사진도 있고 눈이 번떡 떠졌다. 야, 이거 정말 작은 할아버지다. 우리 조상 믿는데 맞구나”. 그는 대종교 교인이 돼 혼자 집에서 향을 피우고 절을 한다고 했다.

자녀들이 한국에 나와 있어 가끔 한국에 들린다는 그는 “이번에 나와서 칠순잔치를 했다”며 “선대들이 대종교를 몇 대째 믿어왔다고 한다”고 집안 내력을 자랑했다.

[관련기사]

김치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트위터 뒤로가기 위로가기
댓글
아이디 비밀번호
(현재 0 byte/최대 500byte)
댓글보기(0)
통일뉴스 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후원하기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당주동 3-2번지 삼덕빌딩 6층 | Tel 02-6272-0182 | 등록번호 : 서울아00126
발행·편집인 : 이계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계환
Copyright © 2000 - 2015 Tongilnews. All rights reserved. mail to tongil@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