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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인들이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홍암 나철 100주기⑨> 맹고군 중국 밀산시 전 부시장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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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9.05  18: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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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암 나철 100주기 연재에 부쳐

홍암 나철과 대종교, 항일무장투쟁 외에 우리 사회에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과 민족종교지만 우리가 결코 지나칠 수 없는 큰 인물과 중요한 종교다.

국조 단군과 국시 홍익인간, 국기 단기, 국전 개천절을 재정립한 홍암 나철과 대종교는 우리의 미래를 가리키는 나침판과도 같다. 서일, 김좌진의 청산리대첩을 비롯한 항일무장세력의 본거지로 10만의 순교자를 낸 것은 물론 주시경, 이극로, 신채호, 박은식 등 국어와 국사 운동의 출발도 홍암 나철과 대종교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과정에서 국망도존(國亡道存, 나라는 망해도 정신은 살아있다) 기치 아래 외교, 테러, 교육, 종교, 무장투쟁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싸웠고, 마침내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내놓았다.

1916년 추석인 음력 8월 대보름, 홍암 나철이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교한 지 100주기, 독립운동의 아버지이자 국학의 스승, 민족종교의 중흥자인 그의 발자취를 따라 벌교에서 서울, 도쿄를 거쳐 화룡, 영안, 밀산 등을 순례했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군국주의화, 미국의 노골적 패권 재구축이 맞부딪치고 있는 격변의 시기에 홍암 나철의 삶과 죽음을 재조명할 이유는 충분하다. 더군다나 서구식 사고방식과 생활문화에 완전히 빠져있는 우리의 현실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구월산 삼성사에서 이 순례를 마무리할 수 있길 바란다. 아울러 이번 기획취재에 도움을 주신 국내외의 많은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필자 주

<연재 기사>

“아비를 만나랴거든 공부를 통하야 한울길로 오라”
<홍암 나철 100주기 ①> 도제사언문을 찾아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지만 몸통이 중요하다”
<홍암 나철 100주기 ②> [인터뷰]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제일 위대한, 제일 억울하게 묻혀 있는 인물”
<홍암 나철 100주기 ③> 기념관 준공 서두르는 벌교 생가

일본 황궁 앞에서 단식투쟁 벌인 조선 선비
<홍암 나철 100주기 ④> 일사와 도동기를 찾아서


“700년간 닫힌 신교의 교문이 다시 열리어”
<홍암 나철 100주기 ⑤> 을사5적 처단투쟁과 단군교 중광

“내가 신의가 없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자”
<홍암나철 100주기⑥> [인터뷰] 최윤수 대종교 삼일원 원장

"천하에 독립한 제일 큰 산은 오직 한 백두산이시니"
<홍암나철 100주기⑦> 만주로 망명한 대종교 총본사

홍암의 후예들, 청산리서 승전고 울리다
<홍암나철 100주기⑧> 당벽진과 액하감옥의 비극

 

   
▲ 지난 6월 24일 대종교 총본사가 있었고, 백포 서일이 순국한 밀산을 맹고군 전 밀산시 부시장(왼족)과 채명군 전 밀산시 민족종교사무국 국장의 안내로 둘러봤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서원(誓願), 자기 마음속에 맹세하여 소원을 세운다는 뜻이다. 사람은 누구나 작은 소망 몇 개쯤이야 지니고 있겠지만 큰 뜻을 품은 이들의 서원은 역사 속에 살아 흐른다.

‘국망도존’(國亡道存, 나라는 망해도 정신은 살아있다)의 기치 아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 홍암 나철이 ‘한오리 목숨을 끊음’에 부쳐 내건 대종교와 한배님, 천하를 위한다는 서원은 홍암의 후예들인 백포 서일, 무원 김교헌, 단애 윤세복으로 이어져 무장독립투쟁과 대종교의 포교로 꽃피어났다.

홍암 나철 100주기 중국 취재는 만주 허허벌판에 “저기가 총본사가 있던 자리”라며 논밭을 눈속에 담아가는 것이 고작. 그 막막함의 절정이 될 중국 동단, 러시아 접경지대인 밀산에서 ‘현대판 홍암의 후예들’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지난 6월 24일 낮, 생전 처음 찾아간 낯선 밀산시 시내에서 반갑게 맞아주는 한무리의 조선족 동포들이 있었다. 맹고군(64) 전 밀산시 부시장과 채명군(56) 전 밀산시 민족종교사무국 국장 등이 이들이다.

2006년 『밀산 조선족 100년사』를 펴낸 저력을 가진 이들은 독립운동의 중요한 기지였던 밀산에 3개의 기념비를 세우자는 서원을 세웠다. 이상설 안창호 등이 주도한 1909년 최초의 독립운동기지로 개척된 한흥동과 1910년 개척된 십리와, 그리고 밀산에서 순국한 백포 서일 북로군정서 총재의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 그것이다.

이들은 밀산시 인민정부의 공식 승인을 얻어 2009년 ‘십리와 항일투쟁 유적지 기념비’를 세웠고, 지난해 8월 ‘서일 총재 항일투쟁 유적지’ 기념비를 건립했다. 서일 기념비는 주변정비 작업이 남아있고, 한흥동 기념비는 아직 숙제로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밀산 조선족 100년사』와 『흥개호 강반에 피어난 진달래』를 출판했고, 항일시기부터 개혁개방 이후까지 50명의 조선족 인물을 망라한 『밀산시 조선족 인물』과 17개 조선족 마을의 역사를 70만자에 담은 『밀산시 조선족 촌사』가 곧 출간될 예정이다. 이들의 각고의 노력 없이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맹 전 부시장은 “우리 선배들이 북녘 땅에 와서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서 자기 피와 땀을 심지어 자기 목숨을 바쳤다. 이게 우리 민족으로 말하면 고귀한 역사 유물이고 재부 아니냐”라며 “후대인들이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어떻게 옛날에 우리 선조, 선배들이 남겨놓은 유산을 보존하겠느냐”며 노심초사하는 ‘현대판 홍암의 후예들’의 안내를 받으며 ‘서일 총재 항일투쟁 유적지’ 기념비와 당벽진 대종교 총본사 터, 백포 서일이 순교한 동산 등을 둘러볼 수 있었던 것은 지금 돌이켜 보아도 정말 꿈만 같은 일이었다.

이들의 진심어린 환대에 당초 일정을 바꿔 밀산에서 하루를 더 머물며 계획에 없던 인터뷰를 청했다. 맹고군 전 부시장은 자료 하나 없이도 연도와 수치, 사례들를 줄줄 외우며 밀산의 역사를 펼쳤다. 진정한 현지사학자와의 드문 인터뷰인 셈이다.

“1934년도 4월 23일 밀산 항일유격대가 제일 처음 설 때 43명에서 41명이 조선사람이다.” 맹 전 부시장이 자신감 있게 120년 밀산 조선족의 역사를 내세울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의 서원 대로 백포 서일 기념비 후속 정비작업이 완료되고 한흥동 터에 기념비가 세워질 날이 멀지 않을 것이다. 최근 사드 문제로 한.중 간 갈등이 불거지고 있지만 ‘항일투쟁의 공통성’이라는 역사적 자산이 이런 문제를 거뜬히 뛰어넘을 수 있다면 말이다.

6월 25일 오전 10시 밀산시 한 호텔에서 가진 맹고군 전 밀산시 부시장과의 인터뷰에는 채명군 전 밀산시 민족종교사무국 국장이 배석했다. 채 전 국장은 맹 전 부시장을 ‘맹장님’이라 호칭하며 깊은 신뢰와 존경을 표했다.

가급적 맹 전 부시장의 말투를 그대로 전하되 일부 이해하기 쉽게 다듬기도 했다. 그의 안내를 따라 밀산의 조선족 역사와 그들의 서원에 귀기울여 보자.

“기회를 잡고 조건이 허락될 때 빨리해야 한다”

   
▲ 맹고군 전 부시장은 발로 뛰는 현지 역사가로 밀산의 독립운동사를 기록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통일뉴스: 밀산시에 사는 조선족은 얼마나 되고 상황은 어떤가?

■ 맹고군 전 부시장 : 옛날에 우리 밀산에 조선인이 3만여 명 살았는데 지금은 한 5,6천 명 있다.

농촌에 가보면 우리 마음이 서늘하다. 어째 그런가. 집을 한 채도 아니 짓는다. 새로 지은 집이 없다. 그리고 백분의 98,99 농호들이 농사를 아니 짓는다. 아이들을 못 본다. 결혼하는 게 없고 아이들이 없다. 촌에 가면 맨 60이상 넘은 노인들 밖에 없다. 지금 촌에 가면 다 그렇다.

지금 조선족이 신문 아니 보고, 책 아니 본다. 이런 정도 환경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옛날에 우리 선조, 선배들이 남겨놓은 유산을 보존하겠느냐. 우리도 정말 애로가 많다. 예를 들어 우리 둘이 밀산 떠나면 글쎄, 우리 후대들 (중에) 할 사람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도 시기 문제인데, 한 2,3년 어간에 좀 해놓으면 조금이라도 보존할 수 있다. 옛날에는 못했다. 10년동안 문화대혁명 해서 다 두드려 마술(부술) 때니까 그런 것 못 하지. 그 다음에 한국과의 정치관계 문제 상에서 옛날에는 거래가 없으니까 이런 것 못했다.

10년 어간에 한국과 관계도 좋고 거래가 많고 이러니까 정책이 허용돼 가지고 하는 거다. 정책이라는 게 오늘은 이렇게 해도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기회를 잡고 조건이 허락될 때 빨리해야 한다. 우리 제일 근심한 게 그거다. 우리가 책을 쓴 것도 우리 둘이 직장에 있을 때 한 거다.

□ 조선족들의 단체가 있나?

■ 밀산에는 우리 조선족민족향이 하나 있고, 17개 조선족 마을이 있다. 그리고 조선족문화관이 있고 조선족학교가 소학교, 중학교, 고급중학교가 있다.

조선족끼리 만나서 활동도 하고 연구도 하는 밀산시조선족직공활동실이 있다. 우리 중국의 조선족 마을은 어느 촌이나 기본상 다 로인협회가 있다. 그리고 시적(市的)으로 로인협회총회가 있고, 총회에서 아래 각 마을의 로인협회를 인솔한다.

□ 부시장 퇴직한지 얼마나 됐나? 공직에서 놓여났으니까 예전에 비해 시간이 있겠다.

■ 3년이다. 시간은 있는데 직무가 없으면 내 하고 싶은 일을 못 한다. 만약에 직무가 있으면 내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데 직무가 없으면 못한다. 하기 바쁘다. 다른 사람 통과를 해야 하니까.

중국 정황이 한국 정황하고 다르다. 한국에서는 사회단체나 조직이 있어서 일하는데 우리 중국에서는 아니 그렇다. 중국에서는 사회단체에서 하는 게 아니라 정부에서 했다. 그러니까 정부 관직이 있어야 어떤 일을 할 수 있지 관직이 없으면 못한다.

□ 어제 가 본 한흥동 마을이 조선인이 최초로 이주한 곳인가? 1898년인가?

■ 1889년이다. 제일 처음 조선호 3호가 88년에 왔다가 89년부터 농사지었다. 우리 기록에 의하면 3호의 농호가 여기 와서 88년에 당벽진을 돌고서 돌아갔다. 그 다음해 89년에 3호가 왔다.

□ 밀산시 조선족 인구가 얼마나 됐나? 지금은 밀산시 인구가 어떻게 되나?

■ 밀산에서 제일 많을 때 3만 1천 명 정도였다, 그게 문화대혁명 전인 1964년도다.

지금 밀산 전체 인구가 43만 정도 계산하는데, 호적 가진 (조선족) 인구가 2만 6천 명 될 거다, 젊은 사람 다 나가고 밖에 있으니까 실제인구는 1만 명도 안 된다. 노인들도 호적은 여기 있지만 자식 따라서 나가 있다.

□ 밀산을 소개해 달라.

■ 밀산이라는 것이 청(淸) 정부 때는 황족들의 사냥터다, 여기는 무인지경이라 사람 못 들어왔다. 대개 1870년 그때 여기를 개방해서 저기 산동, 하남에서 이주민들이 들어왔다. 그런데 많지 않았다.

밀산이란 이름은 경내에 봉밀산(蜂蜜山)이라는 산이 있다. 벌봉, 꿀밀. 벌들이 많아 산에서 꿀들이 흘렀다고 해서 꿀많은 산, 봉밀산이다. 그 이름 따서 밀산이 됐다.

옛날 밀산부가 약 1886년 때쯤 섰다. 1889년 조선사람들 첫 호가 들어왔다. 우리 한국 독립운동 기지가 1910년에 섰는데 20년 후다. 우리 조선족들이 여기 와서 20년동안 거주하고 있었다.

“밀산에 기지가 두 개다” 

   
▲ 인구 43만의 밀산시는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 러시아풍이 느껴지기도 한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대종교 총본사가 자리잡았던 당벽진은 동양 최대의 민물호수인 흥개호가 있어 관광단지로 개발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독립운동 기지가 왜 여기에 서게 됐나?

■ 우리 조사를 거치면, 1905년 좌우에 을사조약 계기에 의병봉기가 일어났다. 의병투쟁 했는데, 중국사람들 뭐라 하냐면 ‘조선 손바닥만한 땅에서 무장투쟁 못 한다’. 하다가도 포위해서 진압하니까. 그래서 홍범도랑 넓은 북만주에 와서 무장역량을 양성하고 무장투쟁 견지하면 좋다는 이론이 나왔다.

우리 자료를 보니까 1908년에 양기탁 등이 중국 청도에서 회의를 열고 무장투쟁 방향을 연구했다. 거기서 결의가 나온 게 중국에서 땅을 사고 농가를 받아들여서 무장투쟁 기지를 세워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토론한 게 어드매다 세우면 좋은가. 그분들이 중국 지도를 펼치고 봤겠지. 보니까 제일 좋은 곳이 어드매냐, 밀산이다. 밀산이 왜 좋은가? 물산이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하고, 그 다음에 연변지구하고 가깝고.

조선이 접경해 있으면 일본놈들이 들어와 진압하는데 거리가 멀고, 그 다음에 전략상에서 공격하기 쉽고 후퇴하기도 쉽고. 만약 일이 생기면 러시아에 넘어갈 수 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지도를 놓고 토론한 게 밀산이 좋겠다.

밀산에 기지가 두 개다. 하나는 한흥동, 하나는 십리와다. 한흥동으로는 1909년에, 십리와는 1910년에 세웠다. 한흥동은 리상설이 주도해서, 십리와는 안창호 주도로 세운 거다.

이 안창호와 리상설 선생이 정치 관점이 다르다. 하나는 우리 중국말로 하면 개혁파고 하나는 보황파다. 하나는 황제에 의거해서 해야 한다, 하나는 황제를 뒤엎고 민주정부가 일어나서 해야 한다. 그래서 밀산에 두 개를 세웠다.

안창호 관점을 존중하던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장관은 십리와 기념비를 세운 데는 적극적이지만 한흥동 기념비 세우는 데는 적극적이 아니더라. 그분들은 리상설 반대파란 말이다.(웃음)

□ 밀산에 언제쯤 대종교가 들어오게 되나?

■ 1910년 그때 제일 먼저 들어온 게 한 씨 성을 가진 분이다. 러시아에서 들어왔는데 그분이 대종교 교인이다. 당벽진에 와서 학교를 세웠다. 대동학원은 윤세복이 와서 했지만 그 전에 벌써 학교가 있었다.

대종교가 총본사가 1921년에 들어오고, 22년 가을에 윤세복이 왔다. 어째 그런가 하면, 내 보니까, 청산리전쟁 하고 봉오동 전쟁이 끝이 나고 일본한테 진압당하고 (중국 군벌)정부의 압력을 받아서 거기 있지 못했다. 대종교도 경신대토벌(1920년) 영향을 받아 바쁘니까* 여기 들어왔다.
(*북한식 ‘바쁘다’는 표현은 ‘힘에 부치거나 참기가 어렵다’, ‘매우 딱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 이곳 밀산 시기 대종교에서 백포 서일과 단애 윤세복이 제일 중요한 인물인가?

■ 그런 것이 아니라, 백포 서일 장군은 청산리전쟁, 봉오동전쟁 끝나고 대한독립군단을 세운 다음에 여기 와서 둔병제를 실시하면서 기지를 건설했다.

그분은 내 인상에는 대종교 때문에 온 게 아니라 무장투쟁 때문에 밀산에 와 가지고 싸움할 필요 없으니까 그 기회를 벌어서, 그분이 포교활동을 했다. 둔병제(屯兵制)라는 게 농사지은 거다. 농사지으면서 무장투쟁 준비 한 거다.

□ 러시아에서 ‘자유시 참변’을 당하고 나서 다시 비적들의 습격을 받아 백포 서일은 자결했다는데, 서일 사망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 나는 그건 (말) 못 하겠다. 나도 후생들이 써놓은 자료들 보고서 옮기지, 나도 거기에 대해서 이렇다저렇다 말하기 바쁘다. 전문가들 앞에서 내가 무슨...

□ 비적들 습격 때 백포 서일은 현장에 없어서 화를 모면했다고 하는데.

■ 현장에 없었다.

□ 마을 뒷산에 모신 뒤 1927년에 윤세복 선생이 화룡촌에 이장시킨 건가?

■ 거기 보면 의문들이 많은데, 서일 장군이 자결한 다음에 윤세복이 장례에 참가를 못했다. 서일 장군 장례에 임오십현(1942년 임오교변 당시 옥사한 10명) 중 한 분인 권상익이 참가했다. 권상익 아들이 이야기한 것을 들었다.

아들이 밀산 동포촌에 살았다. 한번 그 집에 가 술을 먹으며 이야기하니까 “우리 아버지 서일 장군 장례식에 참가했다”고 하더라. 윤세복은 그때 아마 영안에 있었는가 여기 못 왔다.

“후대인들이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 밀산시 인민정부 명의로 세워진 서일 총재 항일투쟁 유적지 기념비.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서일 총재 항일투쟁 유적지 기념비 뒷면. 백포 서일의 공적이 한자와 한글로 나란히 새겨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서일 총재 항일투쟁 유적지’ 기념비 설립 경과와 의미에 대해 설명해 달라.

■ 2006년에 『밀산 조선족 100년사』를 써 출간한 다음에 ‘우리 민족의 역사를 발굴하고 보존하고 계승하기 위해서 응당 서일 장군 기념비를 하나 세워야겠다’ 이러한 의견이 나왔다.

그래서 우리 정부에 신상했다. 2008년에 ‘서일 순환(사망)지 기념비 세워 달라’ 신상해서 정부에서 비준했다. 밀산시 인민정부가 동의했는데, 무슨 조건으로 동의했느냐면 기념비를 세우는 건 동의하는데 자금은 민간에서 모금해서 해라.

그래서 모금을 위해서 한국에 서너 번 갔다. 아는 사람 소개를 통해서 모 재단 사람들이 여기 오고 매년 한 번씩 요청받아 우리가 갔다. 그런데 3년 동안 미뤄서 자금 해결 못했다. 그분들도 애로가 많더라.

그러다가 밀산에서 태어나고 사업하다가 북경에 간 기업가 채광호라는 분이 밀산에 왔다. 그분이 듣고 나서서 해결하겠다고 그래서 제주도 사업가 정인오, 박재철이랑 같이 20만원을 기부했다. 작년에 20만원 가지고 세웠다.

작년 8월 2일 제막식은 했지만 절반 공정만 끝났다, 주위 녹화와 콘크리트 길, 주차장, 한 20만원 있어야 한다. 지금 북경에서 준비 중이다. 올해는 완공해야 한다.

□ ‘십리와 항일투쟁 유적지’ 기념비도 세운 것으로 안다. 한흥동 기념비도 추진하고 있고.

■ 한국의 이태복 전 장관이 우리 밀산에서 간 분들을 만나서 이야기 듣고 “친구들 조직해서 모금하겠다” 그래서 중국돈 5만원했다. 여섯 분이 한국돈 천만원을 모금했다. 그 돈만큼 저 비석을 세웠는데, 지금 보니까 너무 작게 했다.

세운 다음에 이태복 장관이 여섯 분 모시고 와서 제막식에 참여했다. 그 다음에 서일 장군 기념비를 세웠다.

지금 또 하나 어제 가 본 한흥동 기념비도 정부에서 동의를 했다. 문건이 나왔다. 허가 다 맡았다. 그런데 올해 저거 좀 해야겠는데 역시 자금 문제다. 정 아니 되면, 내 생각에 삿돌이나 하나 세워놓고 글이나 몇 개 쓰자. 그런데 그렇게 하면 좀 남루하고 역사에 책임 못 지지 않나. 그래서 손 못 대고 있다. 의의가 있는 일이다.

□ 세 군데에 비석을 세우는 일을 추진하는 의미와 소신을 밝혀 달라.

■ 우리 선배들이 북녘 땅에 와서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서 자기 피와 땀을 심지어 자기 목숨을 바쳤다. 이게 우리 민족으로 말하면 고귀한 역사 유물이고 재부 아니냐.

그러면 후대인들이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계승하고 발전하자면 정말 조건이 되는 한 이런 기념비 건설도 좀 하고, 앞으로 우리 후대들의 교육과 발전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응당 사업을 촉진하면 좋겠다.

□ 다른 지역도 이곳처럼 정부 승인을 얻은 경우가 많이 있나?

■ 내 보기에는 일이라는 게 사람 하기에 달렸다. 정말 노력해서 쟁취하면 되는 거고 노력 안하면 제대로 되는 게 없다.

중국에서도 옛날에 그런 일이 많았다. 뭣도 모르고 비석 세우고, 뭣도 모르고 광장을 세웠다가 철거한 게 많다.

옛날에 한국 상점을 크게 꾸린 한국인이 안중근 동상을 세우겠다고 했다. 시장이 세우라고 동의한다고 하니 세웠는데 동의한다면 문건을 만들어서 서류에 도장을 찍어야 하는데 없었다. 그런 거 관리하는 부문이 있다. “누구 세우라 했나?”. “시장이 세우라 했다”. “시장이 동의한 재료를 갖다 달라”. 없지. 아니 되지, 철거해갔다. 이게 관리가 엄격하다.

내가 세우자면 세우는 것 아니다. 우리도 이 방면에서 골(머리)을 많이 썼다. 의미에 대해 많이 선전하고.

중국에서 한번 무슨 큰 일이 생겼냐면, 일본 개척단 후손들이 어드매에 와 있었냐면 방정에 왔었다. 그분들이 공장도 꾸리고 상점도 꾸리고 많이 투자했다. 그리고 “개척민들 와서 죽은 사람들 이름을 벽에라도 새기게 해달라”. 정부에서 동의했다. 방정시에서 동의해서 세웠다.

그런데 북경에서 청년들이 몇이 와서 거기다 기름을 막 뿌리고. “이건 일본놈들 죄악적인 사적인데 그거 무슨 기념할 일이 있어서 그러는가”, 사회적으로 반대해 나서는 파가 많았다. 그래 후에 싹 밀어버렸다.

우리도 그렇다. 비석 세울 때에 잘 사색해야 하는 문제가 무엇인가. 서일 선생 그저 순환 기념해서 순환비 세우는 것보다도 서일 장군의 주요한 업적인 항일투쟁을 기념하는 비를 세운 거다. 그래서 우리 토론한 결과 항일투쟁 유적지비로 세웠는데 아무래도 그게 맞다.

그리고 한국과 중국이 공동한 게 뭐냐, 공통점을 찾아야 한다. 공통점이 없으면 아니 된다. 공통점이 항일투쟁 아니냐. 그때 당시 한국은 독립운동이고 중국은 완전한 항일이고, 공동한 적이 일본이니까 항일투쟁 공통점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다 접수할 수 있다.

“옛날 자료들은 정리 안 해놓고 그대로 무져놨다” 

   
▲ 집필 중인 『밀산시 조선족 인물』 초고를 보면서 대종교 총본사 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이곳이 대종교 총본사도 있었고, 백포 서일, 단애 윤세복 활동지이기도 한데, 관련 자료는 어느 정도 확보됐고, 어떻게 찾을 계획인가?

□ 하나는 한국에서 온 게 많다. 그 다음에 중국 전문가들이다. 중국사람인데 상해외국대학에 박사 연구원으로 한국독립운동에 대해 연구가 많은 분이 있고, 최진동 장군 평전을 쓴 연변대학 민족역사연구소 소장, 요녕대 손개철 교수 이런 분들이 있다. 앞으로 자료를 찾자면 이런 사람들 손을 거쳐야 한다.

또 하나는 옛날에 출생하고 생활했던 분들이다. 다 돌아가고 없다. 예를 들어서 러시아에서 와서 개척하고 한 할머니들, 이야기 잘 한다.

리창섭이라는 분이 흑룡강성 스케이트 교련(체육주임)인데, 14살에 여기를 떠났는데 그런 분들 통해서 당시 정황들 설명들은 적도 있다.

그리고 권상익의 둘째 아들이 권상익이 5월에 죽고 통지를 후에 받아서 액하감옥에 가서 유골을 가져다가, 장마가 져서 원래 당벽진 조선인 묘지에 묻자고 했는데 비가 와 방법이 없으니까 중국사람들 묘지에 묻었다. 당벽진역 아래 중국인 묘지에 묻었는데 묻은 다음에는 다시 파서 움직일 능력이 없어 그렇게 되고 말았다.

그 이야기를 내가 맏아들에게 들었다. 손녀가 내 동창인데 남편이 차를 몰고 다니는데 그곳 어딘가 하는데 어느 곳인지 모른다. 1942년 임오교변 이듬해에 ‘상세 났다’(사망했다).

□ 중국에 더 많은 아직 공개되지 않은 자료들이 있을 거라고 한국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는데.

■ 상해외국어대학 김춘실 교수로부터 자료 얻은 게 많다. 김송죽 그분 도움도 많이 받았다. 그분은 연세가 많아 못 오고 아들이 와 자료랑 제공했다.

그 다음에 우리 밀산 당안국에 자료들도 얻은 게 많다. 옛날 일제 때 발행한 신문들도 있고, 일제가 밀산에서 14년 동안 있었다.

□ 옛날 자료들은 보려면 절차가 까다로운가?

■ 어느 게 어느 건지. 옛날 자료들은 정리를 안 해놓고 그대로 무져놨다. 그런 게 많다. 그 다음에 지방에는 재료도 많지 않다. 옛날에 일제가 떠나면서 정권이 없어지고, 소련 원군이 떠나고, 그 다음에 공산당하고 국민당이 서로 한바탕 싸움하고 그러다 나니 정부기관 자료들이.

중국 사람들이 유명하다. 이런 데 와서 다 자기 집에 끄집어 간다. 자기 집에 끄집어 가는 것이 유명하다. 싹 걷어가고 없다. 그 좋은 기와 집도 싹 뜯어다가 자기 집에다가.(웃음)

□ 개인적으로 좌우명이 있나?

■ 좌우명이 없다. ‘임진하게 일하고 로실한 사람이 되자’. 진실하게 일하고 솔직한 사람이 되자는 거다.

□ 요즘 치중하고 있는 일은?

■ 3년 전에 ‘밀산시 조선족 촌사 편집 판공실’에서 17개 촌의 촌사를 정리하기 시작해 70만자 초고가 다 나왔다. 수정 중이다. 그리고 『밀산시 조선족 인물』을 쓰고 있다. 촌사는 초고가 조선글로 쓰였다. 인물전은 한자로 쓰고.

□ 『밀산시 조선족 인물』을 좀더 자세히 소개해 달라.

■ 역사라는 게 그렇다. 역사라는 게 허다한 역사 사실이 인물을 통해서 소개되는데, 사실도 기록할 뿐만 아니라 인물을 기록하는 게 의미가 크다.

그거 준비하는데 10년이 된다. 재료들 준비하고 한 10년 되는데, 모두 50명이다. 밀산 조선족이 120년 되는 역사인데, 120년 어간에 사회생활한 주요한 인물들 몽땅 다 정리하고 기록했다.

50명이 다 조선인인데, 8명의 한국독립운동시기 활동가들을 기록했다. 리강 한 명은 아직 못 했다. 자료를 구하고 있다. 중국에서 8년간 항일전쟁과 4년간 국내해방전쟁 시기 21명, 건국후 16명, 개혁개방후 5,6명, 총 50명 좌우다. 한두 명 초과될 거다.

밀산 항일유격대, 43명에서 41명이 조선사람 

   
▲ 한흥동 조선인마을에서 기념비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맹고군 전 부시장.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이녘의 땅 말주 벌판에 3개의 기념비를 세우겠다는 서원을 실천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한국전쟁에 참가한 항미원조군 관계자는?

■ 방호산과 김창덕 그 사람들 주요 업적이 항미원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내전쟁에 있다. 그 사람들이 우리 밀산항일유격대 아니냐. 유격대 뿐만 아니라 연안에 가 있었다. 해방전쟁에 참가해서 장춘 해방, 사평, 금주, 심양, 북경 (해방전쟁), 여길 참가했다.

김창덕이란 분은 연안에서 모택동의 경호원을 2년 했다. 그렇게 역사가 있는 사람들이다. 모택동 경호원을 어지간한 사람이 못한다.

조선전쟁은 조금 기록했다. 방호산, 김창덕 부대 두 패로 나누는데 한 700명 정도 된다. 전사자 통계가 없다. 돌아 못 오고 한국에 묻힌 사람이 더 많다. 어떤 사람들은 죽은 다음에도 확인도 못했다. 중국정부에서도 지금까지 도대체 얼마 나가고 얼마 죽고 숫자가 없다.

‘담가대’(후방지원부대)로 나가서 죽은 사람도 많다. 밀산에서 담가대로 1,200명 나갔다. 군대보다 많다. 나갔는데 갔다가 돌아오고 갔다가 돌아오고. 그건 우리 지방에서 보낼 때 기록 있다.

우리 조선족들이 나간 게 370명 정도 된다. 작년에 살아있는 지원군 노전사들이 좌담회를 한번 했는데 지금 밀산에 살아 있는 분이 14명이 있다. 좌담회 끝나고 한분 돌아가 13명 남았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 한국독립운동이 밀산에서 전개됐는데, 이 영향이 참 크다. 중국항일운동 때 이미 항일독립운동 경험도 있고, 중국공산당이 호소하니 대부분 조선사람들이 나서서 뛰어들어 갔다.

밀산에 제1서기가 조선사람이고, 1934년도 4월 23일 밀산 항일유격대가 제일 처음 설 때 43명에서 41명이 조선사람이다.

□ 대종교를 중광한 홍암 나철 100주기인데, 홍암 100주기와 대종교의 독립운동에 대해 한말씀 한다면.

■ 내가 홍암 나철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는데, 서일 장군의 역사를 쓰면서 보니까, 서일 장군도 중국에 들어와서 중광단이라는 걸 먼저 건립했는데 중광단의 의미가 대종교 중광(重光)에서 왔다.

대종교의 정신을 다시 발휘한다는 그런 의미에서 조직했는데 중광단을 세워가지고 활동하니까 대부분 사람들이 접수를 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조직에 참가했나. 중광단이 얼마나 컸나.

내가 보기에는 종교의 기치를 들고 반일투쟁을 하니까 하나는 정신상에서 자극이 있고 하나는 침략자들의 압박과 착취를 받던 사람들이 마음을 이끌어가면서 조직해 나갔다. 두 가지가 합이 맞았다는 거다.

□ 채 국장은 맹 선생을 옆에서 지켜봤는데 어떤 분이라고 평가하나?

■ 채명군 전 국장 : 나의 감상이다. 우리 밀산에서 조선족 영도가 지금 모두 네 분 있다. 그리고 시급 영도 아래 국장급의 민족간부가 있고 또 그 아래 있다.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에 따라서 소수민족 간부가 기본상 다 소속돼 있다.

또 우리 밀산은 다른 민족보다 조선족이 소수민족 주체다. 그러니까 우리 조선족들이 기본적으로 다 있다. 우리 밀산에 있는 조선족 간부들이 ‘맹장님’을 중심으로 해서 단합이 잘된다.

우리가 17개 조선족 마을에 1개의 민족향이 있고 학교가 있고, 조선족 사업 일체 문제에 들어가서는 맹장님과 김 전 시장 이분들이 책임지고, 우리는 호상 간에 상의한다. 우리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주최하고 그래서 일체 처리해 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밀산을 볼 때 역사가 유구한 것도 있지만 우리가 이미 100년사를 써냈고, 『흥개호 강반에 피어난 진달래』라고 밀산 조선족 유명인사들의 작품들을 책으로 묶었다.

그리고 『밀산시 조선족 촌사』를 쓰고 있고, 맹장님이 자체로 쓰고 있는 『밀산 조선족 인물』이 있다. 그리고 2년에 한번씩 소수민족 운동대회와 문예공연 등 다채로운 활동을 조직하고 있다.

서일 기념비와 십리와 기념비가 정부에서 수월하게 허가하는 것 아니다. 그런데 이미 허가 맡았다. 맹장님 같은 핵심 되는 분이 없게 되면 이런 사업도 추진되지 못한다.

예를 들면 영안의 역사가 우리 밀산보다 오히려 더 유구하고 깊다. 왜냐하면 보통 연변으로 해서 영안, 목단강, 이렇게 들어온다. 꼭 경과해야 된다. 그런데 영안에 지금 100년사가 못나왔다. 촌사도 우리가 쓰는 것 보고 쓰는 중에 있다.

어떤 역사적인 일은 큰 중요한 인물 한사람 힘으로서 전환될 수 있다. 만약에 맹장님 없고 누가 크게 그러지 않는다면 십리와, 서일 기념비 다 나오지 않고 그러면 다 죽어버렸을 거다.

(추가, 6일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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