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암 나철 100주기 연재에 부쳐

홍암 나철과 대종교, 항일무장투쟁 외에 우리 사회에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과 민족종교지만 우리가 결코 지나칠 수 없는 큰 인물과 중요한 종교다.

국조 단군과 국시 홍익인간, 국기 단기, 국전 개천절을 재정립한 홍암 나철과 대종교는 우리의 미래를 가리키는 나침판과도 같다. 서일, 김좌진의 청산리대첩을 비롯한 항일무장세력의 본거지로 10만의 순교자를 낸 것은 물론 주시경, 이극로, 신채호, 박은식 등 국어와 국사 운동의 출발도 홍암 나철과 대종교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과정에서 국망도존(國亡道存, 나라는 망해도 정신은 살아있다) 기치 아래 외교, 테러, 교육, 종교, 무장투쟁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싸웠고, 마침내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내놓았다.

1916년 추석인 음력 8월 대보름, 홍암 나철이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교한 지 100주기, 독립운동의 아버지이자 국학의 스승, 민족종교의 중흥자인 그의 발자취를 따라 벌교에서 서울, 도쿄를 거쳐 화룡, 영안, 밀산 등을 순례했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군국주의화, 미국의 노골적 패권 재구축이 맞부딪치고 있는 격변의 시기에 홍암 나철의 삶과 죽음을 재조명할 이유는 충분하다. 더군다나 서구식 사고방식과 생활문화에 완전히 빠져있는 우리의 현실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구월산 삼성사에서 이 순례를 마무리할 수 있길 바란다. 아울러 이번 기획취재에 도움을 주신 국내외의 많은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필자 주

<연재 기사>

“아비를 만나랴거든 공부를 통하야 한울길로 오라”
<홍암 나철 100주기 ①> 도제사언문을 찾아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지만 몸통이 중요하다”
<홍암 나철 100주기 ②> [인터뷰]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제일 위대한, 제일 억울하게 묻혀 있는 인물”
<홍암 나철 100주기 ③> 기념관 준공 서두르는 벌교 생가

일본 황궁 앞에서 단식투쟁 벌인 조선 선비
<홍암 나철 100주기 ④> 일사와 도동기를 찾아서


“700년간 닫힌 신교의 교문이 다시 열리어”
<홍암 나철 100주기 ⑤> 을사5적 처단투쟁과 단군교 중광

“내가 신의가 없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자”
<홍암나철 100주기⑥> [인터뷰] 최윤수 대종교 삼일원 원장

"천하에 독립한 제일 큰 산은 오직 한 백두산이시니"
<홍암나철 100주기⑦> 만주로 망명한 대종교 총본사

홍암의 후예들, 청산리서 승전고 울리다
<홍암나철 100주기⑧> 당벽진과 액하감옥의 비극

“후대인들이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홍암 나철 100주기⑨> [인터뷰] 맹고군 중국 밀산시 전 부시장

10만의 순교로 되살아난 민족의 영웅
<홍암 나철 100주기⑩>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

 

 

▲ 홍암 나철 생가가 있는 전남 보성군 벌교읍 금곡마을 입구. 유적비와 초혼비, 천부경비 등이 한곳에 세워져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홍암 나철 선생 선양회’ 양현수 회장과 박형제 부회장의 안내로 홍암 나철의 생가를 찾은 6월 17일, 극성스런 올 여름 더위가 벌써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홍암 나철 100주기 기획취재의 첫 출발점은 아무래도 그가 태어난 생가가 마땅할 터.

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 마을 입구 왼켠에는 ‘민족독립 지도자 홍암 나철 선생 유적비’와 ‘독립운동 선도자 홍암 나철공 초혼비’, 그리고 천부경 비문 등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바로 뒤쪽 마을 당산나무가 지켜 서 있고, 보성군이 건립한 유적비에 관한 안내판과 ‘홍암 나철 선생 생가’ 길안내 표식도 눈에 들어온다.

▲ 홍암 나철이 태어난 생가 '일지당'.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홍암 나철은 1863년 당시 전라남도 낙안군 남상면 금곡에서 나용집의 세 아들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금성 즉 나주고, 아명은 인영(寅永)인데, 1909년 단군교 중광과 함께 철(喆)로 바꿨다. 따라서 1907년 을사5적 처단투쟁 시 조선왕조실록 등에는 나인영으로 등장한다.

그도 여느 역사적 인물처럼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다고 전해진다. 최근 타계한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철』(북캠프, 2003)에서 어린 나인영이 한 글자를 배우면 열 글자를 아는 천재였고, 9살에 서당 공부를 시작했을 때 서당 선생은 “여보게나! 금곡 마을에 해동공자가 났다네”라고 찬탄했다고 기록했다.

홍암은 10살 때부터 천사 왕석보(川社 王錫輔) 선생에게 한학을 배우다 20살 때 운양 김윤식(雲養 金允植)의 문하생으로 경성정시에 응시한 것을 시작으로 서울생활에 접어들어 29살에 문과 병과에 급제해 기거주(승정원 가주서)로 공직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홍암 나철 연보>

연도[나이]

월.일

행 적

1863

12.2(음)

전남 보성군 금곡부락에서 나용집(羅龍集)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1872[10세]

 

국문을 해독하고 한문을 수학함.

1878[16세]

1.(음)

순창군 향시(鄕試)에 응시함.

1882[20세]

 

운양 김윤식의 문인이 되면서 경성정시(京城庭試)에 응시, 과거수업에 전력 함.

1891[29세]

11.25(음)

문과에 급제하여 기거주(起居住: 승정원 가주서)가 됨.

1893[31세]

3.19(음)

병조사정으로 임명됨.

10.7(음)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임명됨.

10.24(음)

사관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낙향함.

1895[33세]

5.12(음)

징세서장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취임하지 않음.

1898[36세]

1.

김윤식의 유배생활을 돕기 위해 제주도행을 택함.

1900[38세]

12.

부인 송씨 사망.

1905[43세]

6.10

이기․오기호 등과 함께 첫 번째로 일본을 방문하여 각처에 사신을 통한 힐책과 일본궁성 앞에서 3일간 단식농성 함.

12.30(음)

밤에 서대문역 앞에서 두암 백전 노인으로부터 「삼일신고(三一神誥)」 「신사기(神事記)」 전달받음.

1906[44세]

5.12(음)

두 번째로 일본을 방문함.

10.20

세 번째로 일본을 방문함.

1907[45세]

2.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함.

2.13

을사오적 저격을 구체적으로 계획함.

3.25

을사오적 저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함.

4.1

동지들을 살리기 위해 평리원에 자수함.

7.12

10년 유형(流刑)을 언도 받고 지도로 유배됨.

12.7

고종황제의 관심 하에 건강상의 이유로 풀려남.

1908[46세]

11.(음)

네 번째로 일본을 방문함.

11.12

미도 두일백이라는 노인으로부터, 동경 창경관이라는 여관에서 「단군교포명서」 「고본신가집」 「입교절차」 등을 전달받음.

12.9(음)

미도 두일백이라는 노인으로부터, 동경 개평관이라는 여관에서 단군교의 영계(靈戒)를 받음.

1909[47세]

1.15(음)

단군교(대종교)를 중광(重光: 다시 일으킴)하고 「단군교포명서」를 발행함.

1910[48세]

8.5(음)

단군교를 전래의 교명인 대종교로 개칭함.

1911[49세]

1.15(음)

「신리대전(神理大全)」저술․간행함.

1912[50세]

3.3(음)

「삼일신고(三一神誥)」 간행함.

1914[52세]

1.15(음)

김교헌으로 하여금 「신단실기(神檀實記)」를 간행케 함.

 

5.13(음)

대종교총본사를 만주 화룡현 청파호로 이전함.
서울 남도본사 등 동서남북 사도 교구와 외도 교계 설정 발포함.

1915[53세]

1.14(음)

국내 경성의 남도본사로 귀환함.

10.1(양)

조선총독부의 대종교 탄압술책인 종교통제안이 공포됨.

1916[54세]

7.15(음)

부여 시대의 의식인 서치례(序齒禮)와 구서(九誓)를 행함.

8.15(음)

구월산 삼성사에서 고유의 제천의식인 선의식(襢儀式)을 거행하였으며, 유서를 통해 김교헌에게 교통(敎統)을 전수하고 순명(殉命)함.

11.20(음)

유언에 의해, 백두산 기슭인 만주 화룡현 청파호 언덕에 봉장됨.

* 국학연구소 연보 자료를 토대로 보완함.


홍암과 같은 나주 나씨 송도공파 후손인 나정길 대종교 선도사는 “조선 영조 조에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을 때 우리 할아버지 한 분이 호남남부지방 총대장이었고, 그 때 역적으로 몰리면서 그분들(홍암 선조들)은 보성으로 갔고, 우리는 나주에서 상당히 떨어진 촌구석으로 가서 농사나 짓고 살았다”며 “과거 급제는 생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런 내력이 있는 집안 후손이었다”고 말했다.

나라는 비록 망했지만 정신은 살아있다

▲ '일지당'에 마련된 분향소. 왼편에 태극기 뒤로 ‘국수망이 도가존’(國雖亡而 道可存)이 내걸렸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국수망이 도가존’(國雖亡而 道可存).
홍암 나철 생가 ‘일지당’(一之堂)에는 태극기와 나란히 ‘나라는 비록 망했지만 정신은 살아있다’는 한마디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금은 보성군의 주도로 나름대로 면모를 갖춘 상태지만, 생가는 그저 평범한 시골 양반네 기와집이고, 관광객은 커녕 동네 주민들마저 거의 눈에 띠지 않을 정도로 한적한 곳이다.

양현수 회장이 향을 사르고 먼저 절을 올렸다. 홍암이 1863년생이니 기자보다 꼭 100년 전 이 땅에 났고, 1916년 꼭 100년 전에 세상을 떴다. 쉰 넷의 나이에 스스로 숨길을 거둬들인 것이다.

생가에는 딸 나금포에게 주는 유서를 비롯한 홍암의 친필 문서들과 사진이 걸려있고, 일본에 건너가 외교활동을 벌이던 때의 명함 등 관련 자료들도 전시돼 있다.

▲ 생가에 나란히 모셔진 홍암의 맏아들 정련과 둘째아들 정문. 1942년 임오교변으로 중국 목단강 액하감옥에서 순국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옆방에는 1942년 임오교변 당시 희생당한 임오십현에 포함된 첫째 아들 정련(1992~1943)과 둘째 아들 정문(1891~1944)을 나란히 모셨다.

생가를 나서 골목길을 지나자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새롭게 건립되고 있는 기념관이 나타났다. 큰 한옥 건물 세 채로, 윗 칸이 사당이고 아랫 두 칸이 기념관과 교육관이다.

2005년부터 생가 복원과 기념관 건립을 위해 보성시는 국고보조금 14억원을 포함해 총 79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올해 음력 개천절인 11월 2일 완공을 목표로 공사를 서두르고 있다.

‘홍암 나철 선생 선양회’는 11월 2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신축된 기념관에서 ‘홍암 나철 선생 순국 100주년 추모제’를 개최하며, 1부 개천대제, 2부 기념관 개관식, 3부 추모행사 순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양현수 회장은 <통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기념관 건립에 대해 ”아쉬운 점은 이런 역사문화사업을 (보성)군에서 해본 경험이 없어서 자문위원부터 선정이 안 됐다“며 ”전시연출하는 회사에 용역을 줘서 그 사람들의 수준에서 보여주기 식, 한마디로 공룡전시관 같은 눈요기만 되는 전시관이 되지 않나 우려스럽다”고 지적했다.

박형제 부회장은 “그렇잖아도 공사 기한이 촉박한데 올 여름 무더위로 공사 진척도 부진하고 기념관 내부를 채울 내용도 미진하다”며 “겉모양이라도 제대로 갖춰서 행사를 진행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걱정”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 11월 2일 개관식을 가질 기념관 중 윗채에 해당하는 사당 전경.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사당 내부 모습. 위패와 향로 등이 갖줘져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사당에서 내려다 본 전시관과 교육관. 아직 주변부지 정리가 끝나지 않았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기념관 내부는 현재 비어 있다. 개관식까지 관련 자료를 채워넣는 일이 시급한 실정이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실제로 사당과 교육관, 기념관은 건물만 들어선 상태고 주변 부지는 정돈이 필요해 보였다. 또한 사당 내부에는 위패와 향로 등이 갖춰져 있었지만 전시관과 교육관은 아직 텅빈 상태다.

선양회는 매해 중국 화룡시 청호촌에 있는 대종교 3종사(홍암 나철, 무원 김교헌, 백포 서일) 묘역을 찾아 벌초하고 참배해왔으며, 보성군은 화룡시와의 교류를 추진해와 자매결연을 앞두고 있었다.

양현수 회장은 “(중국) 화룡시와 자매결연되면 보성군에서 사업비를 보내서 화룡시에서 도로를 확장해서 주차장까지 만들기로 협의됐는데 사드 때문에 못하고 끝나버렸다”며 “7월 20일에 가기로 했는데 화룡시에서 오지 말라고 했다. 7월 15일경 중국으로부터 자매결연을 취소한다는 통보를 보성군에 보내왔다”고 확인했다.

한.미 당국이 경북 성주에 배치를 추진하고 있는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의 여파가 이런 곳까지 미칠 줄은 보성군이나 선양회 측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스승 운암 김윤식과 황현, 그리고 혁명의 시대

홍암이 남녘 끄트머리의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상경해 과거에 급제하기까지는 스승 운암 김윤식을 빼놓을 수 없다.

일각에서는 홍암이 10살 때부터 당시 호남에서 명망 높은 학자였던 천사 왕석보를 찾아 구례까지 서당을 다녔고, 거기서 매천 황현과 동문수학했다고 적고 있다. 홍암 나철과 항일외교를 함께 했던 해학 이기 역시 왕석보의 지도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왕석보는 생몰 연대가 불분명하고 홍암이 서당을 다닐 때 쯤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는 학계의 연구결과도 있다.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은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자결 순국한 우국지사로 그가 47년간 기록해 남긴 『매천야록』에는 홍암 나철의 을사오적 처단투쟁 상황이나 <일황에게 보내는 상서> 등이 고스란히 실려있다.

홍암이 몰락한 양반의 후손으로 과거에 급제, 출세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운양 김윤식과의 만남이다. 홍암은 김윤식 자택에 기거하며 과거 공부에 전념했고, 29살에 늦깎이로 급제한 것이다.

김윤식은 구한말 어지러운 정치정세 속에서 친러파와 친일파를 오가며 병조판서와 외무대신이라는 중책을 맡았지만 한일합병 이후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는 등 친일 행적도 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홍암의 배경이 돼 줬고, 대종교 신도가 되기도 했다. 김윤식이 귀양을 갔을 때 홍암은 제주도와 지도를 찾아가 직접 시봉하는 의리를 보이기도 했다.

박승길 대구가톨릭대 교수는 ‘홍암 나철 선생 서거 100주기 추모 학술회의’에서 1894년 동학혁명과 홍암의 제주도 방문 시기(1898~1901) 제주도에서 발생한 방성칠의 난과 이재수의 난 등 당시의 사회적, 종교적 변화를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 양현수 선양회 회장과 지난달 26일 서울 광화문 한 커피숍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홍암 나철 선생 선양회’ 양현수(67) 회장은 20여년을 홍암 나철 선생 연구에 천착해오고 있다. 부인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은 새마을 지도자만 해도 대통령 훈장도 받고 상도 받드만, 당신은 20년 동안 미친 짓을 하고 다녀 살림 다 갖다 바치고”라는 핀잔을 받을 정도.

매해 홍암 나철 추모행사를 치르고 중국 화룡시 소재 홍암 묘역을 참배해왔다. 오는 10일 중국 연변대학에서 열리는 항일운동사 학술대회에도 한국측 참가단으로 방문할 예정이다.

6월 벌교 생가 취재 당시 박형제 부회장과 함께 현장을 일일이 안내하며 열성적으로 설명해준 그를 7월 26일 서울 광화문 커피숍에서 다시 만나 간단한 인터뷰를 가졌다.

□ 통일뉴스 : 홍남 나철 100주기를 맞아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 양현수 회장 : 홍암 선생을 알고 깊이 있게 공부하다 보니까, 그동안의 역사의 오류를 느끼는 것 같고, 역사의 아픔을 알게 돼 마음이 안 좋았다.

한 20여년 나철 선생만 찾고 공부했는데, 순국하신 100주기를 맞이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우리 역사의 오류를 느끼고 한탄하는 걸 볼 때, 저 또한 같은 심정이다.

우리 민족지도자들 중에 나철 선생 같은 분이 다시 온다면 우리가 꿈꾸는 민족의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많이 해봤다.

□ ‘홍암 나철 선생 선양회’에서 준비하고 있는 100주기 기념행사는?

■ 음력 10월 3일 개천절인 11월 2일 행사는 크게 나누면, 순수한 우리 고유의 체천행사인 ‘개천대제’를 지내고 홍암 선생의 사당을 개관하는 개관식을 하고, 끝으로 추모행사를 진행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명칭을 ‘홍암 나철 선생 순국 100주년 추모제’로 하고 홍암 선생 고향인 벌교 금곡마을 기념관에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진행한다. 그래서 세상에 다시 홍암 선생이 재탄생하는 날로 삼고자 한다.

□ 홍암 나철 선생 기념관 개관식이 이번에 열린다고 했는데, 기념관에 대해 소개해달라.

■ 기념관은 홍암 선생을 모시는 사당과 교육장, 역사관으로 건립된다. 사당에는 홍암 선생의 두 아들이 같이 모셔지고 사당 아래 쪽에 홍암 선생의 민족혼 교육을 하는 교육장인 홍암관이 있고, 그 옆에는 독립운동사와 더불어 나철 선생 일대기를 볼 수 있는 역사관이 마련돼 있다.

기념관을 공사한지 올해 딱 10년 됐다. 2006년부터 생가를 복원하고, 2012년부터 기념관 공사를 착공해서 올해 완공이 된다. 정부 예산은 14억정도 지원됐고, 나머지는 보성군 군비 부담으로 진행했다. 총액이 애초에 60억을 계상했다가 19억이 더 들어가서 총 79억 정도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자체 차원에서는 큰 부담이다.

가슴 아팠던 것이 전국에서 천진상이 안 모셔진 군이 오직 보성군이다. 우리나라에서 단군을 국가의 구심점으로 삼으신 분이 나철인데, 나철이 태어난 고향에는 천진이 없고 단군 동상이 없다. 우리가 국민 성금을 모금해서라도 국조전을 지을 계획이다.

□ 지금 이 지역에 홍암 나철 후손이나 흔적 남아있는 게 있나?

■ 후손들은 한 분도 안계시고 중국에 손자들 세 분이 살아계신다. 증손자 고손자는 있는데, 증손자는 한 분인가 국내에 계시고, 고손자도 있는데 사는 것이 어려워 할아버지 고향, 선산도 한번 찾아보지 못하는 실정이다.

□ 홍암 나철 아들 둘도 순교하고, 홍암 나철 순교시 삼성사까지 함께 간 시자 중에 조카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안다.

■ 홍암 형님의 아들인 조카 나정수 씨와 사촌동생 나우영 씨가 같이 시종으로 (삼성사에) 갔었고, 옛날에는 나씨 분들이 많이 살았는데 지금은 다 떠나고 없다.

옛날 60,70년대까지는 40여호에 살았는데 지금은 사람사는 집이 열한 집이다. 나는 7대째 이곳에서 살고 있고, 탯자리도 여기다.

□ 보성 지역과 금곡마을에서 홍암 선생의 위상이나 비중은 어떤가?

■ 내가 사회에 알리면서 추모제를 거행하기 전까지만 해도 지역에서 그런 인물이 있었는지조차도 몰랐고, 학생들도 벌교 출신이라는 건 모르고 학교에서 대종교 창시자로만 알고 지낼 정도였다.

□ 선양회는 어떻게 구성돼 있고, 어떻게 활동하고 있나?

■ 외부사람들은 참여를 많이 하는데, 실질적으로 선양회를 이끄는 사람들은 벌교를 중심으로 참여하고 있고, 나이드신 원로들은 고문이나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젊은 사람들이 회비내서 교육하고 운영하고 있다.

85주기부터 시작해 처음에는 한 20명으로 출발했다. 올해가 100주기인데 지금 회원들이 120명 정도 된다. 매월 연구발표도 하고 선양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이라든지 회의도 한다.

▲ 선양회는 매년 중국 화룡시 청호촌 소재 대종교 3종사 묘역을 참배하고 있다. 지난 5월 선양회가 새로 세운 3종사 묘역 안내판과 11월 2일 행사 안내문.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선양회 회원분들이 150여만원씩 개인부담으로 매년 중국 묘소 참배 및 정비 등을 해오고 있다.

홍암 선생 묘소 앞 안내판과 도로표시판도 세웠는데 도로표시판은 도로 확장하면서 철거해버렸다. 올해 5월 25일에는 3종사 안내판을 새로 정비하고 왔다.

화룡시와 자매결연되면 보성군에서 사업비를 보내서 화룡시에서 도로를 확장해서 주차장까지 만들기로 협의됐는데 사드 때문에 못하고 끝나버렸다.

□ 중국 측으로부터 구체적으로 통보를 받았나?

■ 7월 20일에 가기로 했는데 화룡시에서 오지 말라고 했다. 7월 15일경 중국으로부터 자매결연을 취소한다는 통보를 보성군에 보내왔다. 부군수랑 나를 포함해 7명이 가려고 했는데 취소되어 모든 중국 쪽 사업이 어렵게 돼버렸다.

이번에 가면 중국에 사는 손자 세 분을 만나서 인사드리고 100주년 행사 때 유족들을 국내로 불러서 같이 행사를 진행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 보성군에서 유족들을 초청하면 되는 것 아닌가?

■ 보성군에서는 별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 중국에 있는 후손들은 만나 보았나?

■ 이름도 잘 몰랐는데 조선족자치주를 찾아가 손자 나일석씨를 만났다. 홍암의 넷째 아들 정강과 다섯째 정기가 계셨는데, 정강은 아들이 없고 정기는 3형제를 뒀다.

나일석씨는 한족으로 귀화했으면 항일열사 후손으로 당원 자격도 받고 풍요롭게 살 건데, 할아버지의 역사를 더럽힐 생각이 없어서 국내에서도 찾아주는 이도 없고 알아주지도 않지만 죽는 날까지 할아버지 유지 받들려고 조선족으로 살아남아 이렇게 가난하게 산다.

어머니를 모시고 끼니를 연명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간 이야기를 간단한 메모형식으로 써놨더라. 복사하려고 했는데 안 주더라. 어떻게든 입수해서 나철 선생 업적에는 보탬이 안 되지만 후손들이 타국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고 살았는가 하는 것을 알리고 싶다.

▲ 양현수 회장이 홍암의 친필 유서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양현수 회장과 박형제 부회장(왼쪽)이 홍암 나철의 선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생가와 기념관이 있는데, 전시할만한 관련 자료들은 많이 찾았나?

■ 홍암 선생 관련 자료들은 신문기사 내용, <단군교포명서>, <중광가>라든지 일본의 요시찰인물기록 등이 있는데, 소장은 못하고 있다. 역사관과 기념관에 내놓을만한 자료는 별로 없다.

단지 우리들이 수중에 5,6년전에 확보했던 나철 선생의 유품, 그 중에서 친필로 썼던 딸에게 쓴 유언장, 사위라든지 친족에게 보냈던 유언장 원본이 있다.

그분의 활동무대가 서울과 중국 쪽이기 때문에, 고향에서는 홍암 선생 관련 자료를 가지고 있는 분들은 없고, 고향에서는 기억하는 사람이 그리 없다.

아쉬운 점은 이런 역사문화사업을 군에서 해본 경험이 없어서 자문위원부터 선정이 안됐다. 전시연출하는 회사에 용역을 줘서 그 사람들의 수준에서 보여주기 식, 한마디로 공룡전시관 같은 눈요기만 되는 전시관이 되지 않나 우려스럽다.

또한 우리나라 우수한 학자들을 동원해서 모든 자료가 총 망라된 전집이 나왔을 때 그 중에서 핵심 부분만 전시가 되도록 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안 돼 있다. 나의 소망이 홍암 선생 전집을 만드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학자들의 연구 논문들을 모아서 후학들에게 참고가 되도록 만들어내는 것이다. 경제적인 사정 때문에 꿈을 이룰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 홍암 나철 100주기를 맞아 꼭 하고 싶은 말은?

■ 진짜로 마이크를 주면서 외치라고 한다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제일로 위대한 일을 해놓고 제일로 억울하게 묻혀 있는 인물을 찾으라면 홍암 나철이라고 외치고 싶다.

진짜로 만백성이 홍암 선생의 깊은 뜻과 정신을 알아주는 날이 온다면 그게 바로 민족통일의 지름길이다. 그래서 역사인물 중에서 제일로 억울한 분이 나철이라고 생각한다.


(수정, 9일 13:56)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