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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황궁 앞에서 단식투쟁 벌인 조선 선비<홍암 나철 100주기 ④> 일사와 도동기를 찾아서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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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8.11  12: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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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암 나철 100주기 연재에 부쳐

홍암 나철과 대종교, 항일무장투쟁 외에 우리 사회에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과 민족종교지만 우리가 결코 지나칠 수 없는 큰 인물과 중요한 종교다.

국조 단군과 국시 홍익인간, 국기 단기, 국전 개천절을 재정립한 홍암 나철과 대종교는 우리의 미래를 가리키는 나침판과도 같다. 서일, 김좌진의 청산리대첩을 비롯한 항일무장세력의 본거지로 10만의 순교자를 낸 것은 물론 주시경, 이극로, 신채호, 박은식 등 국어와 국사 운동의 출발도 홍암 나철과 대종교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과정에서 국망도존(國亡道存, 나라는 망해도 정신은 살아있다) 기치 아래 외교, 테러, 교육, 종교, 무장투쟁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싸웠고, 마침내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내놓았다.

1916년 추석인 음력 8월 대보름, 홍암 나철이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교한 지 100주기, 독립운동의 아버지이자 국학의 스승, 민족종교의 중흥자인 그의 발자취를 따라 벌교에서 서울, 도쿄를 거쳐 화룡, 영안, 밀산 등을 순례했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군국주의화, 미국의 노골적 패권 재구축이 맞부딪치고 있는 격변의 시기에 홍암 나철의 삶과 죽음을 재조명할 이유는 충분하다. 더군다나 서구식 사고방식과 생활문화에 완전히 빠져있는 우리의 현실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구월산 삼성사에서 이 순례를 마무리할 수 있길 바란다. 아울러 이번 기획취재에 도움을 주신 국내외의 많은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필자 주

<연재 기사>

“아비를 만나랴거든 공부를 통하야 한울길로 오라”
<홍암 나철 100주기 ①> 도제사언문을 찾아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지만 몸통이 중요하다”
<홍암 나철 100주기 ②> [인터뷰]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제일 위대한, 제일 억울하게 묻혀 있는 인물”
<홍암 나철 100주기 ③> 기념관 준공 서두르는 벌교 생가

 

   
▲ 1905년 홍암 나철 일행이 단식농성을 벌였던 일본 황궁 정문 앞을 지난 7월 5일 찾아갔다. 황궁을 둘러싼 해자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다리를 건너야 한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폐하께서는 전쟁에서 이기었지만 공훈을 이룬 것을 경계하여 반드시 동아세아의 황인종을 생각하고 우리 한국을 독립시켜 서로 공존한다면 우리 한국만 행복할 뿐 아니라 귀국도 다행할 것이며, 귀국만 다행할 뿐 아니라 천하의 다행이 될 것입니다.”(상일황소 중)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직전인 1905년 6월, 일본으로 밀항한 홍암 나철 일행은 일본 황궁 앞에서 3일간 단식농성을 벌이며 일본 천황에게 한국의 독립보장 약속을 지킬 것을 촉구했다. 헤이그 밀사 사건보다 2년이나 앞선 민간외교이자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의 원조인 셈이다.

“대종사께서는 무엇보다도 일본으로 하여금 자기들이 스스로 양언(揚言)한 대한제국의 완전독립을 위하여 싸운다는 대러 선전 포고의 구실을 변경하지 못하도록 하여야 대한 독립이 완전 유지되겠다는 생각으로 1905년 6월에 일본으로 건너갔다.”(대종교중광60년사, 9쪽)

   
▲ 도일시기의 홍암 나철(당시는 나인영). [사진출처 - 대종교]
   
▲ 도일시기 동지들. 왼쪽부터 이기, 나철, 홍필주, 오기호. 사진은 홍암 나철 과거 급제 후 관직에 있을 때의 것이다. [사진출처 - 대종교]

황현의 『매천야록』과 박은식의 『한국통사』에는 당시 「일황에게 올리는 글(上日皇疎)」과 「이등박문에게 주는 글(與伊藤博文書)」이 고스란히 남아 있지만 홍암이 친필로 항일외교 과정을 기록한 『일사』(一史)와 『도동기』(度東記)는 1942년 임오교변 당시 일제에 모두 빼앗겨 홍암 순교 100주기인 오늘까지도 행방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일사』와 『도동기』는 임오교변 당시 대종교 총본사가 위치한 중국 영안시 동경성을 급습해 서적 2만 3천여권과 자료 600여점을 압수해갈 때 빼앗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중국 영안시나 흑룡강성의 성도인 하얼빈시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일제가 중요 자료들을 결집시켜 일본으로 빼돌리려다가 갑작스런 항복으로 실행하지 못한 채 대련시에 남겨놓은 자료더미 속에 남아 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일제가 일본으로 가져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일본 황궁 앞에서 단식투쟁 벌인 조선 선비

 

   
▲ 황궁 정문 인근에서 나들이 나온 시민들이 한가로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황궁 천수대에서 바라본 황궁터.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널따란 황궁 앞 공원에는 아이들 손을 잡고 산책 나온 도쿄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한가롭게 거닐며 추억을 사진으로 남기고 있었다. 깊은 해자(垓字)와 거석들로 비스듬하게 축성한 성벽은 감히 접근을 불허하는 듯 한껏 위엄을 뽐내고 있다.

지난 7월 5일 오후, 리찬우 테이쿄대(帝國大) 교수의 안내로 황궁 정문 앞에 섰다. 정문 앞 역시 깊은 해자가 가로놓여 있고 작은 다리를 지나야 정문에 들어설 수 있다.

리찬우 교수는 “정문을 지나도 곧바로 황궁으로 향하게 돼 있지 않고 쉽게 돌파당하지 않도록 통로를 구부러지게 만들고 안에 관문을 또 설치했다”며 “아마 당시 나철 선생은 이 정문 다리 앞까지도 접근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홍암 일행은 당초 러일전쟁의 강화가 다루어진 미국 포츠머스로 가서 외교활동을 펼치기 위해 미국행 비자를 신청했지만 일본 당국이 이를 거부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외교활동을 펼쳤다.

사실 러일전쟁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겉으로는 한국의 독립을 내세웠지만 물밑으로는 러시아와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해 차지하자는 비밀협상을 진행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 사신에게 남북 분단안을 제안한지 400년 뒤, 유사한 일이 되풀이된 것이다.

홍암 일행이 이토 히로부미에게 보낸 글은 더욱 준엄하다. “우리가 듣건대 각하가 특파대사로 한국에 파견된다고 하니 슬프다!... 각하는 겉으로 한국을 유지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내심으로는 한국을 집어삼키려는 꾀를 품고 있습니다.”

정교는 1907년 3월에 펴낸 『대한계년사』(국사편찬위, 1971)에서 ‘나철의 소론이 근엄하고 명쾌하여 각 신문에 게재됨으로써 한국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렸고, 일본 대신들도 찬탄해 마지 않았다’고 적었다.

홍암은 항일외교 활동 중 이토 히로부미가 전권대사로 한국에 파견되고 곧 을사조약이 체결돼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다급해진 그는 일본에서 친분이 있던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전보를 쳤다. “목이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당신은 이 협약에 동의하지 마시오.”

그러나 이토는 결국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 대신들을 협박해 을사늑약을 체결했고, 박제순도 동의하고 말았다. 2년 뒤 홍암의 을사5적 처단투쟁 당시 참정대신 박제순이 척살 대상자로 포함된 것은 물론이다. 어쨌든 홍암은 깊은 좌절감을 안고 급히 고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일제 「요시찰 한국인 거동」, 홍암 방일 행적 낱낱이 기록

   
▲ 홍암 나철의 당뇨병을 치료했던 당대 임상의학의 권위자 아오야마 다네미치(靑山胤通, 1859~1917) 도쿄대 의학부 교수의 흉상이 도쿄대 의대에 세워져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홍암이 입원했던 도쿄대 의대 부속병원.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홍암의 항일외교는 모두 네 차례 진행된 것으로 기록돼 있지만 뚜렷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세 차례다. 1905년 6월 1차 도일, 1906년 5월과 10월 2,3차 도일, 1908년 11월 4차 도일이다. 이중 1906년 5월 2차 도일은 흔적이 잘 안 나타나고 있다.

4차 도일은 을사5적 처단투쟁에 나섰다가 실패하고, 이미 국운이 기운 상황에서 한국인의 생명과 재산 보호 대책을 강구하기 위한 목적이라 앞선 도일과는 성격이 약간 달랐다.

그런데 홍암 일행의 4차 도일은 일제의 「요시찰 한국인 거동」에 상세한 행적이 기록돼 있어 흥미롭다. 대종교를 주제로 서울대 대학원에서 박사를 취득한 일본인 삿사 미츠아키(佐佐充昭) 현 리츠메이칸대 교수가 번역한 이 문건에는 홍암 일행의 동정이 담겨있다.

“나인영 오기호 이건 3명은 (1908년 11월) 16일 오후 4시 30분 23원 50전으로 줄무늬 옷감 두필 반을 사고 10여원으로 서양과자 1상자를 구입하고 이것을 가지고 본향 삼청정 1번지에 살고 있는 송촌웅지진(마츠무라 유노신) 집을 찾아갔다.”

“고시박사는 곧바로 이를 승낙하여 즉시 청산박사와 교섭하여 진찰을 받게 하였더니, 당뇨병이라는 진단결과가 나왔고, 입원치료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다...나인영은 객랍(客臘) 3일 대학병원을 퇴원하여, 본향구 삼천정 1번지 하숙집 개평관에 머물렀다. 이 하숙집의 알선자는 송촌웅지진이고 1개월의 숙박비는 22원이다.”

당뇨병 치료 위해 머물던 개평관은 헐리고

   
▲ 2004년 국학연구소 관계자들이 하룻밤 묵었던 개평관의 후신 태영관. [사진출처 - 대종교]
   
▲ 지난 7월 5일 개평관 자리를 찾았을 때는 태영관마저 사라지고 공사가 한창이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홍암이 도쿄대 의대 부속병원에서 당뇨병을 치료받기 위해 가까운 곳에 잡은 숙소인 ‘개평관’(蓋平館, 가이헤이칸)은 현지 취재를 위해 전화를 걸었을 때 “두 달 전부터 손님을 받고 있지 않다”고 했지만 내심 기대를 갖고 찾아 나섰다.

2004년 10월 삿사 박사의 안내로 당시 국학연구소 이영재 이사장과 김동환, 유영인, 조준희 연구원 등이 개평관을 방문했을 때는 태영관(太榮館, 다이에이칸)으로 간판이 바뀌었지만 하룻 밤을 묵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쿄대 의대 출입구인 적문(赤門, 아카몬)에서 걸어서 5분 이내 거리에 위치한 그곳은 태영관을 철거하고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었다. 홍암이 묵었던 숙소에서의 하룻밤을 보낼 수도 있으리라던 일말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홍암의 당뇨병을 치료했던 도쿄대 의대 부속병원을 둘러보고 당대 임상의학의 권위자 아오야마 다네미치(靑山胤通, 1859~1917) 도쿄대 의학부 교수의 흉상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 정도였다.

홍암이 개평관으로 옮기기 전 묵었던 청광관(淸光館, 세이코칸)은 2004년 답사단에 의해 신일본석유사 빌딩이 들어선 것이 확인됐지만, 지금은 서신교(西新橋)스퀘어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도쿄 개평관과 청광관은 홍암 일행이 머물고 있을 때 백두산 백봉신사(白峯神師) 집단에 속하는 미도 두일백으로부터 「단군교포명서」 등을 전달받고 영계(靈戒)를 받은 대종교의 입장에서는 성지인 곳이기도 하다. 아직 표지석 하나 세워진 것도 없지만.

   
▲ 홍암이 묵었던 숙소 청광관 자리에는 서신교 스퀘어가 들어섰다. 2004년 국학연구소 답사단이 방문했을 때는 신일본석유 건물이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홍암이 항일외교를 벌일 당시 도쿄역으로 이용되던 구 신교(신바시)역. 철로기점 표식과 플랫품이 남아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홍암과 그 일행들이 도쿄에 도착하고 떠날 때마다 이용했던 당시 도쿄역 역할을 했던 구 신교역(新橋驛)에는 기점표식과 철로, 플랫폼이 기념물처럼 전시돼 있다. 리찬우 교수와 플랫폼에 맞닿아 있는 맥주집에서 무알콜 맥주 한잔으로 더위를 식히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홍암 나철은 사대주의자인가?

홍암 나철이 항일외교에 나선 배경은 그의 대부격인 운양 김윤식(雲養 金允植, 1835~1922)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지만, 일각에서는 국제정치의 현실을 모르는 ‘사대주의’라는 비판까지 있다.

운양 김윤식은 친일내각에서 외무대신을 지내고 중추원 의장을 맡는 등 일본 정계와 깊은 관계가 있었고, 그의 일기 속음청사(續陰晴史)에는 홍암의 항일외교 활동이 기록돼 있다.

박환 수원대 교수는 김윤식의 개화사상과 자강 논리가 영향을 미쳤다면서 “나철이 사회진화론에 영향을 받고 있고 국제공법과 한일 양국간의 약장을 일본이 지킬 것이라는 믿음 하에 동양평화론을 수용하였다”고 분석하고 일제의 동양평화론(아시아연대론)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이해했다.

홍암이 외교활동의 일환으로 만난 일본 인사에는 동양평화론자로 알려진 마츠코토(松本雄造)를 비롯해 보수 정객 도먀마 미쓰루(頭山滿),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흑룡회의 두목 우치다 료오헤이(內田良平) 등이 있다. 현실적으로 일제의 한국 병탄을 막는데 큰 도움이 될 수는 없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신운용 외국어대 교수는 “현실적으로 무력대항이 어려운 상황에서 당시 지식인들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외교적 호소 정도였다”며 “그의 외교활동 본질은 형식상이라도 한국독립을 ‘보장한’ 일련의 한일 간의 약정과 천황의 러일전쟁 조칙 등을 지키라는 설득과 경고”라고 해석하고 이후 을사5적 처단투쟁에 나선 점에 주목했다.

홍암은 1916년 구월산 삼성사에서 자결 순교하면서도 일본 총리과 조선 총독에게 유서를 남겼다. 생애 마지막까지 외교활동을 벌인 셈이다.

유서를 통해 일본 총리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에게는 “철이 마땅히 한님-한배의 곁에 모시어 인간의 선악부를 살피고 천하 만대의 공론을 기다리리니 빌건대 각하는 짐작하라”고 했고,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에게는 “각하가 우리 대종인을 학대하려 하는가. 철의 머리는 가히 끊을지언정 삼십(三十)여만 무리의 믿는 마음을 가히 빼앗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항일외교에 주력하던 홍암이 귀국해서 을사 5적 처단투쟁에 떨쳐나서고 이후 전래종교인 단군교를 중광하고 조직적인 항일운동에 나선 일련의 행위는 그가 사대주의나 외교노선에만 머물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표일 것이다.

“칼을 품고 역적을 죽이려던 인영(寅永)이 아니라”

   
▲ 국학연구소가 주최한 '홍암 나철 선생 서거 100주기 추모 학술회의'에서 발표하고 있는 신운용 외국어대 교수. 왼쪽부터 발표자 신운용 교수, 사회자 정길영 국학연구소  이사, 토론자 이숙화 외국어대 교수.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홍암 일행의 선구적인 항일외교 활동은 이후 헤이그 밀사사건 등으로 맥을 이어갔고, 헤이그 밀사의 책임자인 정사 이상설은 이후 1914년 대종교가 교구체계를 갖출 때 북도본사 책임자가 됐다.

뿐만 아니라 홍암의 명분론적 외교활동과 한.중.일 3국 평화공존, 즉 동양평화론은 이후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으로 꽃피어났다.

신운용 교수는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이등박문의 극동평화론」에서 “안중근은『동양평화론』에서 이기와 나인영(나철)의 경우와 같은 논법으로 일제의 기의배신(棄義背信), 즉 천황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고 동양의 평화를 유지겠다고 천명한 조칙과 달리, 이등박문이 한국과 동양을 침략하였음을 지적하고 있다”고 짚었다.

또한 일제의 ‘시정주의’와 ‘아시아주의’의 허구성을 폭로한 사례로 홍암 일행이 도일하여 일본 천황에게 보낸 글을 들면서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에 입각하여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는 논리를 구축하였던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한편, 항일외교 후 순교까지 약 10년 동안 대종교를 중광하고 수행을 쌓아온 홍암의 항일외교에 대한 생각도 깊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본총리와 조선총독에게 준 유서에는 “일․러가 강화할 지음에 일본 내각에 글로 힐난하고 을사조약한 뒤에 한국대신을 죽이려고 함은 다 그 때의 일이라, 당시에 국민된 자가 도의로서 이런 일이 없을 수 없으니”라고 정당성을 재확인하면서도 “이 몸이 다시 지난해에 칼을 품고 역적을 죽이려던 인영(寅永)이 아니라 이에 오늘날 정성을 열어서 원수를 돌이키는 철이 되고 또 이 맘이 다시 옛날에 열을 맛보면서 한나라만 사랑하는 치우친 생각이 아니라 이에 이 날로써 어짊을 같이 하야 온 세상을 구원하는 한 길을 가졌거늘”이라고 밝혔다.

이숙화 외국어대 교수는 지난 5월 ‘홍암 나철 선생 서거 100주기 추모 학술회의’에서 “도일활동 당시와 유서를 쓰던 당시에 인식의 차이가 있다면, 나철은 단군과 신교(神敎)를 통해 역사적 주체의식이 확립되고 민족적 단합을 이룸으로써 정신적으로는 완전히 극일을 했다고 보인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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