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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에 독립한 제일 큰 산은 오직 한 백두산이시니"<홍암나철 100주기⑦> 만주로 망명한 대종교 총본사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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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8.25  22: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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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암 나철 100주기 연재에 부쳐

홍암 나철과 대종교, 항일무장투쟁 외에 우리 사회에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과 민족종교지만 우리가 결코 지나칠 수 없는 큰 인물과 중요한 종교다.

국조 단군과 국시 홍익인간, 국기 단기, 국전 개천절을 재정립한 홍암 나철과 대종교는 우리의 미래를 가리키는 나침판과도 같다. 서일, 김좌진의 청산리대첩을 비롯한 항일무장세력의 본거지로 10만의 순교자를 낸 것은 물론 주시경, 이극로, 신채호, 박은식 등 국어와 국사 운동의 출발도 홍암 나철과 대종교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과정에서 국망도존(國亡道存, 나라는 망해도 정신은 살아있다) 기치 아래 외교, 테러, 교육, 종교, 무장투쟁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싸웠고, 마침내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내놓았다.

1916년 추석인 음력 8월 대보름, 홍암 나철이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교한 지 100주기, 독립운동의 아버지이자 국학의 스승, 민족종교의 중흥자인 그의 발자취를 따라 벌교에서 서울, 도쿄를 거쳐 화룡, 영안, 밀산 등을 순례했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군국주의화, 미국의 노골적 패권 재구축이 맞부딪치고 있는 격변의 시기에 홍암 나철의 삶과 죽음을 재조명할 이유는 충분하다.

구월산 삼성사에서 이 순례를 마무리할 수 있길 바란다. 아울러 이번 기획취재에 도움을 주신 국내외의 많은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필자 주

<연재 기사>

“아비를 만나랴거든 공부를 통하야 한울길로 오라”
<홍암 나철 100주기 ①> 도제사언문을 찾아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지만 몸통이 중요하다”
<홍암 나철 100주기 ②> [인터뷰]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제일 위대한, 제일 억울하게 묻혀 있는 인물”
<홍암 나철 100주기 ③> 기념관 준공 서두르는 벌교 생가

일본 황궁 앞에서 단식투쟁 벌인 조선 선비
<홍암 나철 100주기 ④> 일사와 도동기를 찾아서


“700년간 닫힌 신교의 교문이 다시 열리어”
<홍암 나철 100주기 ⑤> 을사5적 처단투쟁과 단군교 중광

“내가 신의가 없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자”
<홍암나철 100주기⑥> [인터뷰] 최윤수 대종교 삼일원 원장

"천하에 독립한 제일 큰 산은 오직 한 백두산이시니"
<홍암나철 100주기⑦> 만주로 망명한 대종교 총본사

홍암의 후예들, 청산리서 승전고 울리다
<홍암나철 100주기⑧> 당벽진과 액하감옥의 비극

“후대인들이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홍암 나철 100주기⑨> [인터뷰] 맹고군 중국 밀산시 전 부시장

10만의 순교로 되살아난 민족의 영웅
<홍암 나철 100주기⑩>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

 

   
▲ 홍암 나철과 대종교는 태백산(백두산)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8월 21일 백두산 북파로 올라 마주한 천지.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망국과 맞물려 갓 출범한 대종교가 일제 무단통치의 등쌀에 베겨내지 못하고 1914년 5월 13일 총본사를 옮겨간 곳은 만주 백두산 북록(北麓)이다.

1909년 음력 정월 대보름 단군교를 중광한 홍암 나철은 1910년 7월 30일 대종교로 개칭하고 이듬해 평양을 거쳐 두만강을 건너 백두산까지 순례하고 일찌감치 백두산 북록 청파호(청호촌)를 점찍어 두었다.

홍암 나철은 당시 “천하에 독립한 제일 큰 산은 오직 한 백두산이시니 이 산은 곧 우리 천조(天祖)산이시며 천산이시며 상산(上山)이시며 제석산이시며 삼신산이시오 이 산신령은 곧 한울을 열으신 큰 신령 임검이시라”라고 백두산을 예찬했다.

“화장해서 고래를 가져다가 여기다 모셨다”

   
▲ 청호촌에서 3종사 묘역 방향으로 바라볼 때 공장 굴뚝 인근에 대종교가 설립한 청일학교와 총본사 고경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최삼룡 문학평론가(왼쪽)가 이경선 청호촌 서기(오른쪽) 등 청호촌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조선족 문학평론가 최삼룡(78) 선생과 오랫동안 중국에서 취재해온 조천현 티브이조선 대표와 함께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용성진 청호촌을 찾은 6월 22일은 비가 내렸다. 연길시에서 택시로 100위안(한화 약 1만 6천원)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화룡에서 10년간 교편을 잡은 적이 있는 최삼룡 선생은 청호촌 이경선 서기(촌장)와도 금방 말문을 텄다. 최 선생의 아들과 이 서기의 사위가 연변대 박사과정을 함께한 막역지우였던 것.

이경선 서기는 “역사연구소 강룡원 선생이 사망됐는데, 서일이라는 분을 찾아서 여기를 많이 다녔다”며 “서일의 묘지를 찾았다”고 회고했다. 대종교 3종사인 홍암 나철과 백포 서일, 무원 김교헌의 묘가 청호촌에서 바라보이는 청호종산에 모셔져 있다.

이경선 서기와 마을 주민들은 대종교 3종사 묘비가 새롭게 발견된 일, 단군 초상을 모신 집이 있었던 일 등을 회고했지만 정확한 연도와 구체적 사실까지는 잘 모르고 있었다.

강룡원 선생과 한 직장에 근무하기도 했던 최삼룡 문학평론가는 “강룡원 선생이 초기에 고생 많았다. 반성문 숱하게 썼다”며 “문화대혁명 전에는 ‘종교’ 한 마디면 무조건 반동이다. 항일이고 뭐고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경선 서기도 “화룡 공안들이 여기 와서는 누구 왔나 암암리에 조사하고, 누구를 데려왔다면 그 사람 조사하고”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따라서 3종사묘역은 한동안 완전히 잊혀지다시피 했고, 지금은 비석과 묘비가 재단장됐지만 역시 구체적 사실들을 제대로 알고 있는 마을 주민은 없는 형편이다. 그나마 3종사묘역에 묻힌 유골함(고래함)을 민가에서 보관하다 이장했다는 증언은 주목된다.

“화장해서 고래(유골)를 가져다가 여기다 모셨다.”

“밀산도 가보니까 없지. (백포 서일의) 고래라도 찾겠다고 다녔는데 못 찾았다.”

“석문철이라고, 고래함이야 그 집에서 허근천이라고 이분이 여기에 있으면서 단군상을 모셨다. 초상화. 고래는 그런데 통해서 거기다 보관했다가. 딴 데다 어디 보관할 데 없으니 여기와 보관했다가 묻고...어디서 사망됐는지 그 고래를 여기 갖다고 보관했다가 저기다(3종사묘역에) 묻어.”

“나도 모르는데 우리 형님이 이런 걸 잘 아시는데, 울 할아버지가 말하는 게 라철 선생이랑 고래함 모실 때 한국 아들(사람들) 마차에다 하룻밤 싣고 와서 거기다 모셨다는 거다. 올림픽 횃불 들듯 인계해서 모셨다고 하더라.”

“청명날에 우리 갔다. 강룡권 선생이 편지 써서. 비석은 없고, 어간에 금이 갔더구만. 노인들 데리고 갔는데 그걸 두드려보니까 고래가 있다. 개인들이 비석 뽑아 집돌로 썼다. 맞추니 맞지. 와서 물로 씻고 먹으로 쓰고 하니까.”

“청파호라는 그런 게 적힌 게 있었다. 시 통전부에서 가져가 보라고 해서 찾은 거다. 그 거이 와서 서일의 묘지를 찾았다.”

“처음에는 비석문에다가 다 썼는디, 이전 사람들이 이런 걸 모르니까 비석인 줄 모르고 더러는 없어졌다.”

대략 종합해보면 문화대혁명 이전까지 이 마을에는 단군 천진(초상화)를 모신 가정이 있었고, 흩어진 비석들을 발견해 삼종사묘역을 재정비했지만 무원 김교헌 묘비는 찾지 못했다. 그리고 분명치 않지만 백포 서일로 추정되는 유골함(고래함)을 작고한 석문철 씨 집에 모셨다가 안장한 것으로 보인다.

‘올림픽 성화 봉송’ 방불케 한 홍암 장례식

   
▲ 홍암 나철 대종사 묘. 묘비에는 한자로 ‘대종교 대종사 홍암 라선생 신해지장’(大倧敎大宗師弘巖羅先生神骸之藏)이라 적혀있다. 한국 선양회가 사진과 안내문 등을 부착해뒀지만 최근 중국 당국에서 모두 철거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홍암 나철의 경우는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교한 뒤 ‘올림픽 성화 봉송’을 방불케 하는 과정을 거쳐 공개리에 안장했다. 1916년 음력 8월 15일(이하 음력 기준) 순교한 홍암 유해는 24일 서울 남대문역에 도착해 25일 남도본사에서 영결식을 치른 뒤 9월 17일 남대문역에서 백두산으로 향했다. 22일 청진에 도착했고, 25일 용정촌에서 추모예식을 거행했다. 10월 6일 청호에 도착, 총본사 수도실에 모셔졌으며, 11월 19일 총본사 추모예식을 치른 뒤 11월 20일 봉장식(奉藏式)을 거행했다.

2대 도사교(교주)인 무원 김교헌은 1923년 11월 18일 영안 총본사 수도실에서 56세를 일기로 서거했고 “종사의 장례는 유촉(遺囑)에 의하여 영안현 황기둔에서 화장식을 거행한 후 홍암신형의 유해 봉장지인 화룡현 청파호에 유해를 봉장하고”라는 기록에서 보듯 역시 곧바로 안장된 것으로 보인다.

대종교 항일무장투쟁 책임자인 백포 서일 종사는 1921년 9월 8일 밀산에서 서거해 그곳에서 장례식을 거행하고 묻혔다가 1927년 4월 3일 청파호에 이장, 안장됐다. “개천 4380년(1923년) 계해 정월 15일에...밀산현 대흥동에 있는 백포종사 묘소에 원, 방, 각의 목책을 건립하고 또한 제전(祭田)을 구입하여 향사비(享祀費) 에 충당케 하다”(대종교중광60년사)라는 기록도 있다.

   
▲ 원분옥 할머니가 유골함을 집에 모셨던 일을 증언하고 있다. 왼쪽은 원 할머니 아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스물 다섯살에 이 마을에 시집와서 살고 있다는 원분옥(85) 할머니는 “이 기(이 곳이) 석문철이 집”이라며 “저 우에 어드메에 모셨다가 또 떨겨 와서 여기를 가져다가 뒀다가 저기 갖다 모셨다”고 지금은 작고한 석문철 집에 유골함을 모셨다고 증언했다.

또한 “따로 따로 있는 것, 비석이 있더만. 비석이. 그래 그 비석이 번져져서 땅에 묻히고 어데 가고 그래 그 세 곳을 파서 한 군데다 모셨지”라며 “우리가 (산에)가서 열고 뼈를 봤지”라고 말했다. 아마도 비석을 발견해 묘역을 재정비할 때의 일로 추정된다.

2011~2012년 사이 현지조사를 진행한 임찬경 당시 국학연구소 연구원은 「대종교 성지 청파호 연구」를 통해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된 문화대혁명의 회오리 속에서 누구도 대종교를 거론할 수 없는 등의 시대적 상황에 묻혀 삼종사묘역조차도 무성한 수풀에 덮이고 말았다”고 기록했다.

특히 “구술에 의하면, 1989년 초 연변역사연구소(소장 강용권)에서 보낸 서신을 화룡현 통전부에서 받아 청호촌이 소속된 용성향으로 내려 보냈는데, 그 내용은 청호촌에 삼종사의 무덤이 있다는데 찾을 수 있겠는지를 문의하는 것이었다고 한다”며 이를 계기로 3종사 비석과 묘비를 재확인했다고 적었다.

“삼종사 무덤 근처에서 1개 그리고 근처 개인들의 묘지에서 제단으로 사용하던 비석 1개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 비석의 문구를 확인하니, 하나는 홍암 나철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백포 서일의 것이었다고 한다... 비석 기단의 아래를 들추니 그 밑에 화장하여 넣은 것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김교헌의 비석은...끝내 찾지 못하여, 연변주정부에서 새로 제작하여 보내와 세운 것이라고 한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뻗어나간 대종교

   
▲ 홍암 나철과 백포 서일, 무원 김교헌, 이른바 '대종교 3종사'의 묘역. 화룡시인민정부가 1991년 9월 1일 ‘화룡시 문화유물 보호단위’로 공포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3종사 묘역에서 바라본 대종교 총본사터. 나무에 가려 굴뚝이 잘 보이지 않는다. 같은 방향으로 백두산이 자리잡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홍암 나철은 1914년 왜 만주 화룡 청파호(청호촌)로 대종교 총본사를 옮기고 자신의 묘를 이곳에 쓰도록 했을까?

박영석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대종교 총본사를 청파호로 옮긴 이유에 대해 △일제의 탄압을 피하고, △항일운동의 거점을 구축하며, △포교 영역을 확대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했다.

임찬경 인하대 교수는 “백두산과 불과 100㎞ 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지역이고, 동포들이 많은 연길, 용정과 가까우면서도 접근이 상대적으로 어려운 지역”이라며 “용정에 일제의 간도총영사관이 있었고 두도구(頭道溝)에 분소가 있는데, 화룡지역까지는 (일제가) 안 들어갔다”고 지리적 이점을 설명했다.

홍암과 대종교 교우들의 백두산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야 두말할 나위 없었을 것이고, 홍암에게 도를 전수해준 백봉신사 집단의 본거지가 백두산이라는 점도 염두에 둘만한 사안이다.

「삼일신고」와 「대종교포명서」 등을 전해준 백봉신사 집단은 백두산에서 우리 전통 천신교를 단군교로 중광했음을 발포했고, 포명서에서 “우형(愚兄) 등 13인이 태백산(지금 백두산) 대숭전에서 본교 대종사 백봉신형을 배알하고”라고 밝혀 백두산에 대숭전이 있었고, “태백산 대숭전 동무 고경각에서 13인이 같이 서명함”이라고 명시해 고경각이 있었음을 확인했다. 고경각은 대종교 도사교(교주)가 집무하는 곳이다.

   
▲ 백두산 소천지(은환호). 문화대혁명 시기 많은 종교시설들이 철거됐지만 지금도 도교시설이 자리잡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모든 종교시설이 철거된 가운데 백두산 소천지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약왕전.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한 전통수련 관계자는 백봉신사 집단이 백두산 소천지 일대를 근거지로 했을 것이란 추정을 전해줬다.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백두산 너머 첫 마을인 내도산에 자리잡은 ‘천불교’가 대종교라는 일부 전문가의 해석도 있다. ‘왜놈들에게 천벌을 내리고 조선민족에게는 복을 내려달라고 백두산천기에 빌면서 그것을 신앙으로 하는’ 천불교 신도들은 소천지에 ‘덩덕궁’이라는 99칸 절간을 지어놓고 1년에 두 번씩 찾아가 기도드렸다고 한다.

실제로 오랫동안 이 지역을 취재해온 조천현 대표는 “문화대혁명 시기 소천지 일대에 세워진 많은 종교시설들이 헐리는 것을 직접 보았다는 사람을 만나 증언을 들었다”고 확인했다. 소천지에는 많은 종교시설이 헐렸지만 지금도 도교시설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대종교가 처음으로 화룡 일대로 진출한 1910년 11월 무렵, 총본사에서 파견한 박창익(난파 박찬익의 이명) 시교사가 안중근 의사의 큰아버지인 안태진이 기부한 청호마을 가옥에 시교당을 마련해 포교에 나서고 있었던 상황도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홍암 나철은 1911년 “7월 21일 고적 및 영적 답사차로 서울을 출발하여 강화.평양을 거쳐 천산 북록 청파호에 이르”(대종교중광60년사)렀고, 1912년 음력 10월 3일 개천절에는 청파호 시교당에 천여 명이 모여 개천대경절일을 지낼 정도로 자리를 잡아갔다.

조창용은 『백농실기』에서 “(10월) 3일 바람 불고 춥다. 이 날은 개천대경절일이다. 일직부터 시교당 안에 머물렀다. 천궁은 건축되고 수리되어 그 모습이 새로워졌다. 여러 곳의 교우 형재자매를 합하여 7백여 명이 모였다. 먼 곳으로부터 3백여 명이 와 있다....첫째 천진전, 둘째, 천궁, 셋째 수도실, 넷째 경배실, 다섯째 자매경배실, 여섯째 학도창가실, 일곱째 전강실, 여덟째 전무사무실, 아홉째 외교교접실 등이다. 교궁이 아주 넓고 확 트였다...그 날의 광경 중 기뻐하며 박수친 것을 헤아릴 수 없다. 그 자리에서 즉시 봉교한 사람이 백여 명이다. 밤에는 화등 천여 개를 높이 걸고 학생들의 노래 부름과 예원들 서로의 놀이와 오락에 밤을 새우다“라고 일기 형식으로 적었다.

실제로 1909년 음력 1월 15일 단군교가 중광한 뒤 총본사가 서울 북부 재동에서 원동, 중니동, 자문동, 상마동으로 한 해에만 네 차례나 옮겨다닐 정도로 상황은 열악했지만 이듬해인 1910년 6월 29일 교우실태 조사 결과 서울 2,748명, 지방 18,791명, 계 21,539명으로 파악됐다.

그러나 “일제는 탄압의 방법으로 박멸을 기도하여 소위 사내총독 암살의혹을 일으켜 수백명의 중진급 교도들을 불법 체포하여 악랄하게 고문, 악형을 가하고 심지어 사형 또 불구 폐인까지 만드는” 정도였고, “‘종교인은 자유가 없다’하고 교주이하 중요간부의 사생활과 출입 거조(擧措)를 물샐 틈 없이 감시하고 또 헌병․경찰을 미행시켜 자유를 속박하는가 하면 교우들의 가두검색이 혹심하고 특히 쟁송이 있을 시는 종교인은 불문곡직하고 패소처분하는 학대를 자행”했다.

따라서 1914년 5월 13일 마침내 총본사를 화룡 청호촌으로 옮기고 백두산을 중심으로 4도교구를 설치했다. “대종사께서 교의 본거를 백두산록으로 옮겨 포교운동이 자못 활발하여서 지금까지 동북만주 일에 흩어져 있던 독립전선이 흡연히 이리로 귀일되어 종교는 그 정신적 지주와 구심점이”됐다는 것이다.(대종교중광60년사)

<1914년 설치한 대종교 교구>

교구

소재지

책임자

관할지역

총본사

화룡

홍암 나철

총괄

동도교구

왕청

백포 서일

동만 일대와 노령.연해주

서도교구

상해

신규식 이동영

남만부터 산해관까지

북도교구

소학령

이상설

북만주 일대

남도교구

경성

강우(호석)

한반도 전역

외도교구

 

 

중국 일본 구미

* 자료 - 『대종교중광60년사』를 근거로 재작성.

백두산과 발해 수도, 그리고 부여주족론

   
▲ 청호촌에 있던 대종교 총본사가 옮겨간 발해의 수도였던 영안시 소재 '상경 용천부'(동경성). 대종교의 '대륙사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만주에서 급격히 교세를 불려가는 대종교를 일제가 가만히 두고 볼 리 없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8월 16일 총독부령 제83호 「포교규칙」을 공포하고 그해 10월 1일 「조선총독부 고시 제 253호」를 발포해 대종교를 불법종교로 규정했다.

이에 홍암 나철은 1916년 음력 8월 대보름 많은 유서를 남긴 채 30만 교도들에게 호소하며 스스로 숨을 멈췄다. 홍암은 유언장 「유계장사칠조」(遺誡葬事七條)를 통해서도 “반도의 땅에 지금 이 몸을 묻을 곳이 없다”고 밝혔고, “타고 남은 유해를 거두어 싸서 반드시 조상(祖上)의 아래 즉 총본사 가까운 곳에 묻을 것”이라고 유언을 남겼다.

홍암을 비롯한 3종사 묘역은 서남쪽 아래 총본사터와 더 멀리는 백두산을 바라보도록 봉분의 방향이 자리잡았다.

또한 화룡 청파호에 멀지 않은 곳에 고려성으로 불리웠던 곳은 발해의 ‘중경 현덕부’가 있었던 곳으로 나중에 일제의 발굴조사로 드러났고, 이후 대종교 총본사는 영안의 발해 ‘상경 용천부’(동경성)터로 옮겨간다. 대종교의 대륙사관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후 북만주 독립운동단체들이 1925년 1월 목릉현에서 통합을 논의한 회의는 부여족통일회의(扶餘族統一會議)로 명명됐고, 그 결과 신민부가 탄생했다.

임찬경 교수는 “당시 대종교 역사관에 의하면 우리 민족을 단군에서 부여로 계승되고 고구려, 발해, 여진으로 계승됐고, 이같은 역사체계가 대륙사관”이라며 단재 신채호가 1908년 「독사신론」에서 부여주족론(夫餘主族論)을 폈다고 강조했다. 배달겨레의 주류가 부여족이라는 인식이다.

청일학교, 독립군 사관 양성 기지

   
▲ 청호촌에 있는 500년 이상 됐다는 비슬나무. 최근년에 벼락을 맞았지만 살아남았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2000년에 '화룡시 룡성진 청호기독교활동점'이 들어서서 포교활동을 벌이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지금도 조선족 가구만 거주하는 청호촌은 1937년 일제가 집단부락을 건설하면서 산재호(散在戶)들을 집단호로 이주시키고 바둑판 같은 정사각형 마을을 만들어 외부는 흙벽과 해자로 철저히 차단하고 네 방면으로 문을 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흙벽이 사라졌고, 해자 바깥 쪽으로도 집들이 들어서 있다. 마을 주민들이 500년 이상된 것으로 알고 있는 ‘비슬나무’는 최근년에 벼락을 맞기도 했지만 여전히 든든히 마을을 지키고 있다.

   
▲  청호촌의 역사를 정리한 31쪽 분량의 「청호촌 촌사」(이경식, 1999) 표지.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그러나 이곳 역시 기독교의 바람은 피할 수 없는 듯 2000년에 ‘화룡시 용성진 청호기독교활동점’이 들어었고 여전도사는 마을 할머니들을 이곳에 불러모아 함께 점심을 나누고 있었다.

이경선 청호촌 서기는 청호촌의 역사를 정리한 31쪽 분량의 「청호촌 촌사」(이경식, 1999)를 자신의 집으로 안내해 보여줬다.

이 자료에는 함북 길주에서 현주일 일가가 1895년 처음으로 청파호에 이주 정착했고 “1910년에는 현대 교육 체계를 갖춘 청일학교(淸一學校)가 건립 되었다. 이 학교는 형식상에서 단군교를 교수하는 학교인 것 같았으나 실질은 종교를 방패로 내세우고 독립군 사관을 양성하는 기지였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또한 “이 학교 건립에 라철(羅喆) 선생의 역할이 컸었다고 한다...청일 학교 교장에는 라중식(羅仲植)(1910-1912), 교무에는 라철(羅喆), 서일(徐一 ), 계화(桂和), 박찬익(朴贊翊), 백순(白純), 박상환(朴尙煥), 김원시(金元時), 남세구(南世柩), 현천묵(玄天黙) 씨 였다(이 자료는 광산 김씨 김성수씨가 제공 하였음)”는 기록도 보인다. (朴尙煥은 朴祥煥의 오기-필자 주)

사드 여파로 한국 선양회가 세운 안내판 철거돼

   
▲ 3종사 묘역 입구.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3종사 묘역 입구에 한국 선양회에서 세운 안내판들. 사드 여파로 중국 당국에 의해 모두 철거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청일학교 자리는 청호촌에서 큰 도로 건너편 삼종사묘역 방향으로 바라볼 때 공장 굴뚝이 보이는 곳으로, 대종교 총본사 고경각도 바로 이곳에 함께 자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3종사묘역으로 가는 길은 질척거렸지만 입구에서 ‘대한민국 (사)나철선생(항일지사) 선양사업회’가 세운 안내판이 반겨주었고, 오는 11월 2일 벌교 기념관에서 열릴 ‘홍암나철선생100주년기념관 준공식 및 개천대제 추모문화행사’ 안내판도 눈에 띄었다.

‘화룡시 문화유물 보호단위’가 건립한 ‘반일지사무덤’ 표지석은 화룡시인민정부가 1991년 9월 1일 공포했음을 밝히고 있으며, 이들의 공적을 뒷면에 간략히 새겼다.

“반일지사 라철 서일 김교헌은 20세기 전반기에 동북지구에서 한때 화룡시 청파호를 기지로 반일계몽운동과 반일교육활동을 진행하였다. 그들은 민중의 반일의식을 높이고 인민의 반일사상각오를 높이기 위하여 많은 일들을 하였으며 반일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전개함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놀았다. 서일이 령도한 《북로군정서》소속의 반일무장부대와 《국민회》소속의 반일무장부대가 1920년 10월 화룡지구에서 협공작전을 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청산리전투》는 일본침략군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반일운동이 깊이 있게 전개되도록 힘있게 추동하였다”

‘대종교 대종사 홍암 라선생 신해지장’(大倧敎大宗師弘巖羅先生神骸之藏)이라 한자로 적힌 비석 앞에서 3종사에 재배를 올리고 공장 굴뚝 방향으로 옛 총본사터를 더듬었다. 저 멀리 어딘가에 백두산 자락이 보일 것만 같아 두리번거렸지만 흐린 안개만 시야를 가릴 뿐이었다.

그러나 지난 8월 9일 3종사묘역을 다녀온 양현수 선양사업회 회장은 “지난 5월 25일 우리가 세운 안내판을 중국에서 싹 치워버렸고 영사문제가 생기면 골치 아프다고 ‘참배하지 말라’고 했다”며 “사드 문제가 한중관계의 큰 걸림돌이라고 말하더라”고 전했다.

앞서, 보성군은 중국 화룡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사업비를 보내서 화룡시에서 3종사묘역으로 가는 도로를 확장하고 주차장까지 만들기로 협의됐지만 사드 문제로 보성군 부군수와 양현수 회장 등의 방중이 무산돼 7월 20일로 예정됐던 자매결연은 취소됐다.

만주의 겨울 돌위에서의 72일간 단식 기도

1909년 대종교를 중광한 뒤 1914년 화룡 청파호로 총본사를 옮기고 1916년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교하기까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홍암 나철의 종교적 수행이다.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은 “1909년 대종교를 중광해서 1916년 돌아가실 때까지 8년 동안을 수행으로 일관했다. 그래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수행을 통해서 생을 마감했다”며 “중광 이전의 관료주의 모습에서 중광 이후의 모습은 철저하게 수행주의의 모습”이라고 규정했다.

   
▲ 1916년 음력 8월 초 닷새, 경성역을 출발해 구월산 삼성산으로 향하던 홍암은 사리원역에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손에 단주를 쥐고 있다. [사진출처 - 대종교]

조준희 국학인물연구소 소장은 “유서 중에 중광가에 보면 여러 정황상 수련을 암시하는 내용들이 많이 있다”며 “남은 사진 3장 모두 단주를 쥐고 있는 모습인데 삼일신고독법에 나오는 수련법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짚었다.

「삼일신고」에 부기된 ‘삼일신고독법’에는 “모든 사특한 생각을 끊고, 삼백 예순 여섯 알의 박달나무 단주를 쥐고 한 마음으로 읽되, 원문 삼백 예순 여섯 자로 된 진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단주에 맞춰 일관할지니라”라고 명기돼 ‘단주’가 중요한 수행도구임을 알 수 있다.

신철호 전 대종교 삼일원장은 홍암 나철이 무송(撫松)의 산에서 “만주의 그 추운 겨울 눈 내리는 아래 돌위에 앉으시어 72일 간을 단식 기도”했다는 백강(白崗) 조경한(趙擎韓)의 증언을 『한국중흥종교 교조론: 홍암 나철 대종사』에 기록했다.

홍암의 72일 단식 기도는 예수의 광야에서의 40일 금식 기도에 비교하더라도 엄청난 고행이 아닐 수 없다. “도리어 홍암 선생은 불그레하신 얼굴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고 있어서 마치 신령님이 눈 내리는 산에 내려와 앉아 계신 듯 하였다. 이 엄청난 광경이 소문으로 퍼지자 수십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한국사람과 중국사람들이 몰려와서 그 앞에 죽 엎드려 백두산신령님이 내려오셨다고 절을 해대면서...”

또한 괴질로 죽어가는 단촌마을에서 ‘以身代命’ 네 글자를 집 문기둥마다 써붙여 하룻밤에 41명의 환자를 고친 이적(異蹟)은 홍암 자신이 중광가에서 확인하기도 했다.

물론, 대종교의 지감, 조식, 금촉 삼법수련과 홍암 나철의 수행, 이적 등에 대해서는 더 깊은 연구와 사실관계 확인이 필요한 대목이다.

(추가, 26일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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