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대첩의 총지휘자 백포 서일, 100년 전 잠들다

최윤수 대종교 전 삼일원장과 24일 안양 소재 한 찻집에서 백포 서일 100주기를 돌아보는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최윤수 대종교 전 삼일원장과 24일 안양 소재 한 찻집에서 백포 서일 100주기를 돌아보는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항일무장투쟁의 영웅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으로부터 100년이 지나 반쪽짜리 고국에 안장됐다. 아직 분단의 장벽은 굳건하고 고향 평양은 지척이지만 머나먼 땅으로 남아있다.

김좌진 장군의 명성에 비해 홍범도 장군은 유해 봉환이 이루어지고서야 건국훈장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청산리대첩의 총지휘자는 아직도 건국훈장 3등급에 해당하는 독립장을 받은 채 이국에 묻혀 있다. 서거 100주기를 맞은 백포 서일(白圃 徐一, 1881.2.6~1921.8.27(양력 9.28))이 바로 그다.

백포 100주기를 맞아 24일 오후 경기도 안양 소재 한 찻집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최윤수 대종교 전 삼일원장은 “일찍 돌아가셔서 살아계신, 계속 활동하신 분들의 빛에 가려졌고, 그분들이 서일 종사님에 대해서 그 공적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야 되는데 그렇지 않아서 이렇게 서일 종사님이 잊혀졌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독립운동가의 100주기에 대종교(大倧敎), 종사(倧師), 삼일원장(三一院長) 등 낯선 단어들이 등장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만주의 독립운동 지형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을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눈다면 전반기는 민족주의 세력이 후반기는 공산주의 세력이 주도했다고 대별해도 큰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 전반기 민족주의 항일무장투쟁의 주력부대가 바로 대종교의 군사조직인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이고 꽃봉오리가 청산리전투이다.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민족주의 독립운동세력은 단군민족주의를 주창한 대종교를 일종의 국교(國敎)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

[자료사진 - 통일뉴스]
백포 서일(왼쪽)은 사진이 남아 있지 않아 초상화가 대신하고 있다. 백포의 스승 홍암 나철(오른쪽)은 1916년 8월 조천하기 전 사진을 남겼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1909년 홍암 나철이 중광(重光)한 대종교의 무장조직인 북로군정서는 총재 서일, 부총재 현천묵, 총사령관 김좌진, 참모장 이장녕, 사단장 김규식으로 이어지는 지휘체제를 갖췄고, 청산리전투에는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도 가세했다. 청산리전투는 김좌진, 홍범도 장군이 그 주역이고 그 총지휘자가 바로 백포 서일이며 그 배후는 바로 대종교였던 것이다.

더구나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대패한 일본군이 보복학살에 나선 경신참변을 겪으며 중소 국경지대인 중국 밀산에 결집한 10여개의 항일무장대오 3,500여명은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고, 총재로 백포 서일을 추대했다. 당시 부총재가 홍범도, 참모부장이 김좌진이었다.

대종교에서 종리원과 선도원, 수도원을 총괄하는 삼일원장을 맡았던 최윤수 원장은 “청산리대첩이 우리 민족에게는 아주 큰 위로랄까 희망을 불어넣은 거다”라며 “일본군과 싸워서 큰 승리”를 거둔 점을 평가했다.

일본군의 “천하무적” 신화를 깨뜨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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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암의 미소를 닮은 최윤수 전 삼일원장은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인터뷰를 이어갔다. [사진 - 송정미]

백포가 생을 스스로 마감했던 중국 밀산에는 조선족 동포들이 밀산시인민정부 명의로 건립한 ‘서일 총재 항일투쟁 유적지’ 기념비가 서있다. 기념비에는 “1920년 10월, 서일은 연변지구에서 항일련합부대를 지휘하여 저명한 청산리대첩을 펼쳐 일본침략군 수천명을 섬멸함으로서 일본군의 “천하무적” 신화를 깨뜨리고 동북 항일투쟁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남겼다”고 새겨져 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이래 청나라와 러시아까지 제압했던 일본 황군의 천하무적 신화를 1920년 만주에서 처음으로 깨뜨린 이가 바로 백포다. 대종교 교인들로 북로군정서를 설립하고 러시아 내전에 사용됐던 체코군의 신식무기를 대거 입수하는 한편, 김좌진 등을 영입해 맹훈련을 거듭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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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에 우뚝 선 '청산리 항일대첩 기념비'. [자료사진 - 통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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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산시인민정부가 건립한 '서일총재 항일투쟁 유적지' 기념비. [자료사진 - 통일뉴스]

만주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과 천수평, 완구루, 어랑촌 등지에서 10여 차례에의 전투 끝에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했고, 독립군도 100여 명의 전사자를 낸 ‘청산리 대첩’은 백포 서일과 대종교, 북로군정서를 빼놓고는 논할 수 없다.

최 원장은 “한 가지 특기할 게 그 당시 대종교 인물들이 다 공화주의였다”며 “「삼일신고」 경전 자체가 남녀와 인종의 차별이 없다”고 짚었다. 당시만 해도 대종교와 연대한 유교계열의 공교도(孔敎徒) 내부에는 보황주의(保皇主義)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과 대비되는 대목으로 이후 남북이 모두 ‘민주공화국’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홍익인간 이념을 실천하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신 분”

그러나 최윤수 전 원장은 백포 서일 ‘종사’에 대해 “한 마디로 하면, 진리탐구를 하셨고 굉장히 정성스럽게 홍익인간 이념을 실천하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신 분이라고 생각한다”고 무장투쟁 보다는 ‘진리탐구’와 ‘홍익인간 실천’에 진력한 수행자로서의 면모에 비중을 뒀다.

최 원장은 “이 분이 회삼경(回三經)도 쓰고 여러 경전을 썼는데, 그런 경전을 쓴 사람은 오직 홍암 나철 대종사와 백포 서일 종사 밖에 없다”며 “조천(朝天)하실 때도 폐식(閉息) 절명하셨기 때문에 여러 가지 징후를 보면 성품에 굉장히 많이 통하셨다고 볼 수 있다”고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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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 경전』에 포함된 백포 서일이 저술한 「회삼경」. 대종교 3대 교주 단애 윤세복이 머리말을 썼고 여러 도표를 동원해 삼일사상을 해설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회삼경」 (일부)

한얼님은 한울의 임자시니, 덕은 넓고 슬기는 밝고 힘은 억세시어, 모습 없이 만드시고 말씀 없이 기르시며 함이 없이 다스리시니라.

크시도다 한얼님의 도여!
하나이자 셋이니 주체로는 더없는 위에 사무치며, 쓰임으로는 더없는 끝에까지 다하시니라.
(중략)

오직 사람은 만물 중에서 신령스럽고 빼어나서 위로는 한얼님에 합하고, 아래로는 뭇 별들에 응하므로 그 도가 한울과 땅과 더불어 셋이 되니라.

총명하고 슬기로움은 한얼님과 사람이 다름없으되, 사람에게는 세 가지 가달됨이 있는지라, 그러므로 혹시 미혹하며 느끼고 움직임은 사람과 만물의 차이가 없으되, 사람은 세참함이 옹근지라 그러므로 능히 깨닫느니라.

뭇 사람도 깨달으면 밝은이요 밝은이가 돌이키면 한얼님이니,
그 비롯은 하나로서 같지 않음이 없고, 그 마지막엔 온갖 다름이 하나로 돌아가느니라.
(하략) 

실제로 백포는 대종교 2대 교주인 무원 김교헌 선생으로부터 교통을 전수받을 것을 권유받았으나 독립운동에 매진하기 위해 사양했지만, 「회삼경」 「삼일신고강의」「구변도설」 「진리도설」「오대종지강연」「삼문일답」등을 저술했다.

최 원장은 백포가 무장단체의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경전을 집필할 정도의 수행자였음을 강조하면서 수전병행(修戰竝行) 사상을 짚었다. “자기가 대종교 총책임자로서 운영은 못하지만 대신에 자기 내부 수행은 충실하게 하면서 우선 급박한 독립운동을 해야겠다는 것이 수전병행”이라는 것.

1911년 독립운동을 위해 가족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만주 왕청현 덕원리로 터전을 옮긴 백포는 곧바로 중광단을 조직했고, 그해 7월 홍암 나철이 화룡현 청파호에 도착하자 그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홍암의 당호 일지당(一之堂)에 맞춰 자신의 당호를 삼혜당(三兮堂)으로 삼았다.

최 원장은 “진리 탐구와 교편 생활을 오래하셨고 중광단에서도 정신적인 지도에 치중하셨다”며 “홍암 대종사에 대한 존경이 아주 커서 삼혜당이 됐고, 「삼문일답」서문에 보면 홍암을 일의자(一意子) 선생으로 표시하고 자기는 삼사생(三思生) 학생이라고 썼다”고 말했다.

백포의 대종교 입교는 공식기록상으로는 1912년 10월에 참교(參敎)로 봉교한 것으로 나와 있지만 이미 1911년 대종교의 중광(重光)을 의미하는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했고, 홍암 나철을 만나 큰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을 통해서 모든 우주는 하나이다”

[사진 - 송정미]
최윤수 전 삼일원장은 백포 서일의 항일무장투쟁 못지 않게 경전 저술 등 '수행'에 주목을 돌렸다. [사진 - 송정미]

이후 1921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약 10년 간에 걸친 백포의 수행과 ‘진리 탐구’는 남다른 면모를 보였다.

최 원장은 “1914년에 대종교 총본사가 청파호로 이전하고 도 본사를 나누는데 왕청현 소재 동도본사가 서일에게 맡겨졌고, 서일 종사가 구심점이 돼 수 만명의 교우들이 확보돼 그 공적이 인정돼서 1916년 4월 1일 상교(尙敎)로 승질됐다가 다시 이례적으로 4월 13일에 사교(司敎)로 승질됐다”고 짚었다.

백포가 1919년에 연길현 국자가에서 대종교도를 중심으로 자유공단(自由公團)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할 때쯤에는 그 단원이 무려 1만 5천명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그의 감화력과 영향력이 남달랐음을 보여준다.

더구나 「회삼경」 등 백포의 저술이 당시부터 ‘경전’에 포함된 점도 이례적이다. 백포가 대종교 동도본사를 이끌던 시절인 1918년 1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책합부(四冊合附)』가 발간됐고, 대종교의 기본경전인「삼일신고」를 비롯해 「신사기」와 홍암 나철이 저술한 「신리대전」, 그리고「회삼경」이 합본됐다.

최 원장은 “회삼경을 직접적으로 경전으로 공포는 안 했지만 회삼경을 인쇄했다는 말이 교보에 나온다”며 1923년 대종교 교보에 「회삼경」 한글번역본을 인쇄한다는 기록을 제시하고 “같은 해 상해에서 발간된 『사부합편』에 회삼경이 포함됐다”고 말했다.

최 원장은 「회삼경」을 “하느님을 통해서 모든 우주는 하나이다. 그 하느님은 조화, 교화, 치화 삼으로 작용을 한다. 그 삼일(三一) 원리가 모든 만물의 원리로 돼서 만물은 삼으로 해석이 된다. 사람은 사람이 받은 삼을 모아서 수행을 해서 하나로 귀일을 해야 된다”고 축약했다.

백포의 「회삼경」은 「삼일신고」‘진리훈’ 중 “하나로부터 셋이 됨이여, 참과 가달이 나누어지도다. 셋이 모여 하나가 되니 헤맴과 깨침 길이 갈리네”라는 구절을 유불선을 아우르며 전개해 체계화한 글이다. 특히 삼일사상을 여러 도표로 정리한 점이 특징이다.

최 원장은 “한학자이자 불교, 도교에도 조예가 깊었던 서일 종사가 1911년 홍암 대종사를 만나고 나서 완전히 대종교 교리에 대해 확신을 가진 것 같다”고 말했다.「회삼경」을 1917년에 완성했으니 짧은 기간에 경전 저술의 경지에까지 도달한 셈이다.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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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포 서일이 스스로 폐기 절식한 곳으로 알려진 밀산 당벽진 야산. [자료사진 - 통일뉴스]

백포의 생애 마지막은 씁쓸한 우리 현대사의 한 토막이자 대종교의 몰락과 맥이 닿아있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대패한 일본은 엄청난 무력으로 독립군 대토벌에 나섰고 이를 피해 밀산에 집결한 독립군대오는 대한독립군단으로 재편한 뒤 주력이 소련 국경을 넘었지만 ‘자유시 참변’을 겪으며 극심한 타격을 받았고, 밀산에 남아서 둔전제(屯田制)를 모색하고 있던 백포 마저 토비의 습격으로 부하들을 잃고 자결한다.

백포는 홍암의 유서 중 한 구절인 “굿것이 수파람하고 도깨비 뛰노니 하늘·땅 정기빛이 어두우며 배암이 먹고 도야지 뛰어 가니 사람·겨레의 피·고기가 번지르하도다.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오”를 읊조리며 1921년 8월 27일(양력 9월 28일) 스승 홍암이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숨을 끊는 폐기 절식으로 조천한 뒤 며칠 후에야 주검이 발견됐다.

최 원장은 “당시 백포 아버님이 오셔서 확인했는데 아무 외상이 없이 죽었다고 해서 폐기 절식이다”며 “폐기 절식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실제로 예관 신규식 대종교 도형(道兄)은 25일간 절식(絶食) 끝에 절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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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 3종사가 잠들어 있는 중국 화룡현 청파호 소재 3종사 묘역. 왼쪽부터 백포 서일, 홍암 나철, 무원 김교헌이 안장돼 있고, 남쪽 멀리 백두산이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원은 한 발표글에서 “서일은 41세의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것은 자신의 죽음으로 대종교의 한 단계 도약을 도모하고 흩어진 독립진영에 대한 재기의 강성을 심어주고자하는 수전병행의 가치를 최후까지 보여준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최 원장은 “백포 서일 종사님에 대해서 서훈을 높이려고 여러 차례 보훈처에 편지를 썼는데 새로운 공적이 발굴돼서 추가돼야 서훈이 올라간다는 답신만 받아서 아직 진행 중에 있다”며 사견임을 전제로 “묘역은 관리만 잘 되면 그냥 그 자리에 계셔도 된다고 본다”고 말했다.

백포 서일은 홍암 나철과 무원 김교헌과 나란히 백두산이 보이는 중국 화룡현 청파호 인근 야산 ‘대종교 삼종사 묘역’에 잠들어 있다. 청파호에 안장하라는 삼종사의 유훈이 지켜지고 있는 셈이다.

성통공완을 지향하는 “내부적으로 돌아보는 수행”

물리학도인 최윤수 전 삼일원장은 성품을 깨우치는 수행을 강조했다. [사진 - 송정미]
물리학도인 최윤수 전 삼일원장은 성품을 깨우치는 수행을 강조했다. [사진 - 송정미]

최윤수 대종교 전 삼일원장은 백포 서일 100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묻자 “현대사회가 과학적인, 외면적인 이치를 궁구해서 성품을 많이 깨우치고 있는데, 그게 반절이고 나머지 반절은 내부 수행을 해서 성품을 더 깨우칠 수 있는 면이 있는데 그것은 안 하고 있다. 그걸 더 알려야 된다”고 수행과 포교에 방점을 찍었지만 정작 ‘수전병행’ 정신에 대해서는 “당장 통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워낙 힘이 약하니까 생각을 못하고 있다”고 현실을 토로했다.

과거 고 안호상 총전교가 1995년 개천절에 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고 방북하는 등 남북교류의 물꼬를 트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고, 고 이영재 총전교가 2002년 방북해 평양 단군릉에서 개최된 개천절 민족공동행사에서 제천의식인 선의식을 거행하기도 했지만 대종교의 사회참여는 사실상 맥이 끊긴 상태다.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와 포항공대에서 석박사를 받은 뒤 관련 연구기관에서 일해온 전형적인 이학도인 최윤수 전 삼일원장은 “학문이 고도로 발달하고 과학도 발달해서 AI 시대, 모든 게 자동화된 미증유의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며 “내부적으로 돌아보는 수행”을 강조했다. 홍암 대종사와 백포 종사가 근접했을 대종교가 지향하는 성통공완(性通功完)한 자가 되자는 것이다.

홍암을 닮은 듯한 최윤수 전 삼일원장이 차분히 수행의 필요성을 들려주니 원불교 소태산 대종사의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법어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서일 발자취(연보)

1881년 (1세)
2월 26일,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금희동에서 출생. 본명은 서기학(徐夔学)이고 초명은 서정학(徐正学), 호는 백포(白圃), 당호(堂号)는 삼혜당(三兮堂), 본관은 이천(利川)이다.

소년시절
어린 시절에 고향의 서당 김노규 스승의 문하에서 여러 해 한학(漢學)을 배우며 지식과 민족적 의식을 키우다가 경성함일사범학교 전신인 "유지의숙"에 입학했다. 유지의숙은 함경북도 근대화운동의 선구자 이운협 선생이 창설한 의숙으로 몇 해 후에 경성함일사범학교로 개칭되었다.

1902년 (22세)
1902년에 경성함일사범학교의 전신인 유지의숙을 졸업하고 이해 봄부터 1911년 봄까지 10년간 고향에서 계몽운동가 교육사업에 종사하다.

1910년 (30세)
1910년 8월 22일 일본은 이완용 따위들과 조선강점의 조약—"한일 합방" 조약을 맺고 8월 29일에 반포하니 허수아비 뿐이던 나라는 완전히 망하고 말았다. 분노한 서일은 고향에서의 근 10년 계몽교육을 접고 행동으로 반일독립운동에 나서기로 결의한다.

1911년 (31세)
1911년 봄에 서일은 반일독립을 결의하고 일가족들인 부친 서재운, 부인 채씨, 맏딸 서××(출가후 병고로 이름조차 알 수 없음, 당시 10세), 둘째딸 서죽청(6세), 아들 서윤제(4세) 등 다섯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두만강이북 왕청현 덕원리에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왕청현 덕원리는 천교령 부근에 발원지를 둔 가야하와 십리평, 소왕청쪽에서 흘러 나오는 대왕청하와 합수되는 부근 동북쪽 산기슭, 지금의 왕청역에서 북으로 약 7-8리 되는 곳에 자리잡은아담한 조선이주민 마을이다. 관련 자료연구에 따르면 덕원리는 19세기 말에 이르러 개척됨을 보인다.

1911년 이해 3월, 서일은 재기를 도모하는 반일의병들과 훗날의 대종교인들이며 동지들인 현천묵, 계화, 백순(白純) 등과 손잡고 항일독립단체인 중광단(重光團, 중광이란 대종교의 중광을 환호하고 단군을 숭상하며 민족의 혼이 의연히 살아 있다는 뜻)을 조직하고 그 본영을 덕원리에 두었다. 서일이 중광단 단장으로 추대되었다.

1909년 음력 정월 15일에 애국자이며 독립운동가인 나철 선생이 동지들과 더불어 서울에서 전래 단군신앙인 단군교를 부활시키고 이듬해 7월 30일에 교명을 대종교(大倧敎)로 바꾸었다. 그리곤 활동지역을 두만강 너머로 넓히고자 1911년 7월에 화룡현 청파호에 이르렀다. 왕청현 덕원리에서 이 소식에 접한 서일은 화룡현 청파호에 가서 나철 선생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서일은 스승의 당호 일지당(一之堂)에 따라 자기의 당호를 삼혜당(三兮堂)으로 하였다.

1912년(32세)
1912년 음력 8월, 서일은 수명의 동지와 협의하여 청파호에 동원당을 조직하였다. 나철 선생의 지도를 받은 것으로 보이며, 동원당은 독립운동을 완수하기 위한 체계적 활동을 결정하고 이를 지도하기 위한 비밀조직으로 추정된다. 이해 10월에 서일은 대종교에 정식 입교하며 대종교 포교활동을 맹렬히 벌였다.

1913년(33세)
대종교에 입교한 후 서일은 1913년 10월에 대종교의 영계 및 참교(参教)로 받고 시교사로 임명되었다. 그 후부터 서일은 방향을 돌려 교리를 찬술하는 저술사업에 정력을 쏟았다. 서일은 짧은 기간에 한국 근대 철학의 중요한 토대가 되는 『삼일신고도해강연』, 『회삼경』, 『구변도설』, 『진리도설』, 『오대종지강연』, 『삼문일답』 등을 저술하였다.

서일은 왕청현 덕원리에 이주한 후 중광단을 조직하고, 나철을 만나면서 대종교 포교에 전력하는 한편, 여러 사람들과 힘을 합쳐 1913년 4월 1일에 덕원리에 명동학교를 정식으로 설립하였다. 시초의 학생 수는 32명이고 교원은 2명이며 학제는 5년이었다. 교장은 서일이고 서일도 직접 교수에 나섰다.

1914년 (34세)
1914년 5월 13일, 대종교총본사는 서울에서 대종교 동도본사 1사가 자리잡은 화룡현 청파호로 이전하였다. 나철 선생은 대종교총본사를 화룡현 청파호에 두고 총본사 산하에 동도본사(왕청현), 서도본사(상해), 북도본사(노령 소학령), 남도본사(조선 경성) 등 4개도본사를 설치하고 아울러 각 교구 책임자에, 서일(동도본사), 신규식·이동녕(서도본사), 이상설(북도본사), 강우(남도본사)등을 임명하였다.

1914년 11월, 용정 간도일본총영사관의 명령을 받은 두도(頭道)구 영사 분관에서는 화룡현 지사를 핍박하여 대종교를 즉각 해산하라고 경고했다. 후일 두도구 영사 분관의 일경들이 청파호에 들이닥쳐 대종교 중심인물들을 체포하자, 대종교총본사는 동도본사 제 2사가 자리 잡은 왕청현 십리평 쪽으로 옮겨 갔다.

1915년(35세)
대종교총본사의 화룡현 청파호 이전과 대종교의 비약적 발전은 일제의 경계심을 한층 고조시켰다. 일제는 1915년 10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고 대종교를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했다. 나철 선생은 당국을 찾아 여러 차례 교섭을 벌렸으나 아무런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1916년(36세)
나철 선생은 대종교 정상 활동을 이어 갈 수 없었다. 그는 1916년 음력 8월 백연(白淵) 김두봉(金抖奉)을 비롯한 수행자 6명과 함께 단군신앙의 성지인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 들어가 본격적인 수행을 시작하였다.

이해 음력 8월 15일 자시(子时)정각에 나철 선생은 수행자들과 함께 제천의식을 행하였다. 그리고 수행인원들에게 "앞으로 며칠 간 방문을 열지 말라"고 말하고는 3일 동안의 수도에 들어갔다. 그 뒤 인기척이 없어 제자들이 16일 새벽에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나철 선생은 순명삼조(殉命三條) 등 유서를 남기고 조식(调息)의 의 방법인 폐기법(闭气法)으로 운명하였다.

서일은 스승의 순국 정신을 마음에 아로 새기었다. 그만큼 나철 선생의 순국이 서일한테는 너무도 타격이 컸고 너무도 느끼는 바가 컸다. 스승의 죽음은, 서일이 무장항쟁의 의지를 굳게 다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17년 (37세)
1917년 경에 이르러 명동학교에 중학부를 설치하였다. 학교 학생들은 모두가 대종교 들이거나 그 자제들이었다. 그리고 이 학교를 졸업한 대부분의 학생들이 후일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에 입소하여 본격적인 독립군 훈련을 받았다.

1918년(38세)
음력 1918년 11월, 민족자결이라는 가치가 국제정세 속에서 고무되자, 이에 힘을 얻은 대종교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39명의 명의로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국내 기미독립선언서(3.1독립선언서)의 전주곡이라 할 수 있는 이 선언은, 무장혈전주의를 내세운 것으로, 후일 만주 무장항일운동의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서일은 이 선언을 적극 지원하면서 많은 동지들을 참여시켰다.

1919년 (39세)
1919년 3월 1일,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에서 전민족적인 반일운동이 폭발하였다. 3월 13일, 용정에서도 "3.13" 반일운동이 폭발하고 독립 만세소리가 화룡현과 연길현, 왕청현, 훈춘현 각지에서 맹렬히 터져 올랐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남만 등 지구를 제외한 연변지구에서 1919년 3월 13일부터 5월 1일까지 도합 30여 개 곳에서 반일집회와 시위가 53차 열리고 8만여 명의 조선인들이 동원되였다. 왕청현에서는 서일의 지도하에 덕원리 중학부의 중학생들을 중심으로 각지 사립학교 학생들과 많은 대종교인들이 만세운동에 떨쳐 나섰는데, 덕원리 중학부의 중학생들은 일제히 칼을 차고 보무당당히 나섰다.

이 무렵 나철 선생의 유언으로 제 2세 교주로 등극한 무원 김교헌이, 서일에게 대종교 교통을 넘기려고 하였다. 서일은 제 2세 교주의 간곡한 권유를 5년간 보류키로 하고 무장투쟁준비에 심신을 쏟아 부었다. 서일은 시위나 만세운동 등의 소극적 저항으로서는 조국광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해 1919년 4월에 서일은 중광단의 토대 위에서 대종교 교인들을 핵으로 하고 반일의병들과 공교회(孔教会) 회원들을 더 규합하여 대한정의단을 발족하고 단장으로 취임하였다. 서일은 정의단 내에 순수 우리 글 신문 일민보(一民报)와 신국보(新国报)를 발간하고 무장항쟁을 고취하면서 결사대원을 모집하였는데, 응모하여 등록한 결사대원이 1,037명에 이르렀다.

서일은 이해 8월에 대한정의단 산하에 순 무장조직인 대한군정회를 조직하고 신민회 출신들로서 남만주의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인 김좌진, 조성환, 이장녕, 양림, 박성태 등을 초빙하여 군정회를 맡아 보도록 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대한정의단은 덕원리와 그 일대를 떠나 본영을 왕청현 서대파구 십리평에 두고, 연변 각지에 5개 분단, 70여 지단을 설치하였으며, 단지결사대(断指決死隊) 1,000여명을 두었다.

1919년 4월에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서일은 이 임시정부의 지도를 받기로 하고 1919년 12월 국무원 제 205호 정신에 따라 중광단으로부터 발족된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를 통합하여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로 개편하였다. 대한군정부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령에 의해 그 명칭을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즉각 개칭하고, 서간도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대비하여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서일은 북로군정서 총재로 추대되는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임시정부 최고 군사책임자인 군무총장(軍務總長)이라는 대우를 받게 되었다.

북로군정서는 중앙조직 체계를 총재부와 사령부로 나누었다. 총재부가 주로 대한정의단의 중심인물들로 구성되었다면, 사령부는 주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로 구성되었다. 사령부는 총재부의 절대적 지도를 받았으며 총재부와 사령부의 거의 모든 인물들이 대종교 교도들이었다.

북로군정서는 왕청현 십리평 마을 뒤 잣덕의 펑퍼짐한 산기슭 밭 가운데 자리잡았다. 본부와 병영은 5~6헥타르에 달하는 산허리를 평지로 만들어 건설했는데, 나무를 찍어 만든 중국식 6칸집 5개와 5칸집 2개 등으로 이루어졌다. 본부와 조금 떨어진 남쪽의 광활한 평지에 사방 100미터 좌우의 연병장 두 개도 건설되었다.

1920년(40세)
북로군정서 산하 사관연성소는1920년 3월 1일에 정식으로 개학하였다. 사관연성소 예비훈련반은 북로군정서 본부와 약 300미터 떨어진 남쪽의 조금 경사진 잣덕 평지에 교사 6채를 만들어 자리 잡고, 사관연성소 본부는 동북쪽 계곡을 따라 약 15리 쯤 되는 곳에 자리 잡았다.

사관연성소 소장은 신흥무관학교 출신 김좌진이 맡았다. 그외 박녕희가 학도단장을, 이장녕, 이범석, 김규식, 양림, 김홍국, 최상운 등이 교관을 맡았다. 사관생은 300여명이었으며, 주로 대종교 산하의 청년들과 덕원리 명동중학교의 학생들로 이루어졌다. 나이는 보통 20~40살 사이였다.

한편 서일은 병력 확대, 무기 장만, 정예군사 양성이란 세 가지 과업을 목표로 삼았다. 우선 군정서 산하에 모금대 8개대를 두고 전력을 다하여, 1920년 초에 이르러 20여만 원의 군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서일은 재무를 맡은 계화와 함께 전문 병력 확대와 무기구입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0년 6월, 총재 서일은 직접 계화와 함께 무장경비대를 이끌고 무기운반대 200여명을 무장보호하면서, 러시아 연해주에서 많은 무기를 많이 운반하여 왔다.

1920년7월과 9월 사이에도 수차 러시아 연해주를 드나들며 무기를 많이 사들여 사관생들 전부가 무장을 지니게 되었다. 북로군정서는 처음 병력 500여명에, 보총 500자루, 권총 40자루, 기관총 3정으로 나타났으나, 일제 측의 자료에 의하면 1920년 8월 현재로, 북로군정서의 병력은 독립군 약 1,600여명, 군총 1,300자루, 기관총 7정이라고 밝혔다.

1920년 8월 일본군은 정식으로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확정하고 9월에는 출병대기중인 각 부대에 전투태세에 들어갈 것을 명령하였다. 중국 지방당국은 일본의 압력에 연길 주둔 중국 육군의 맹부덕(孟富德)을 본지 토벌장관으로 내세웠다. 육군 제1 보병단장(步兵團長) 맹부덕은 토벌을 앞두고1920년 9월 5일에 산하의 중국군 160여명을 십리평 잣덕에 보내 북로군정서 부총재 현천묵, 사령관 김좌진 등을 만나 독립군부대들이 일본군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빨리 퇴각할 것을 간청하였다.

1920년 9월 7일 마지막으로 러시아 연해주 무기구입에서 돌아 온 서일은 바로 부총재 현천묵과 수하 사령관 김좌진 등의 보고를 받고 전략적 변화를 도모하였다. 그리고 9월 9일 오전 10시에 십리평 잣덕의 본부에서 산하 사관연성소 제1회 사관생졸업식을 앞당겨 거행하고 298명을 졸업시켰다.

서일은 북로군정서 지도부와 함께 전문회의를 가지고 북로군정서 부대를 동부와 서부 2개 전선으로 나누기로 결정하였다. 서부전선에 소속된 1,000여명 주력부대는 선발대와 본대로 나누어 총과 탄약 등 군수품을 4대의 소수레에 싣고 9월 17일부터 십리평 잣덕 본부를 떠나 화룡현 삼도구 백두산 삼림으로 이동하기로 하고, 서일은 동부전선에 속하여 직접 북로군정서 기관과 가속 그리고 후방부대를 이끌고 동으로 움직이며 기회를 보아 새 근거지 창설에 전력하기로 하였다.

1920년 9월 17일과 18일에 김좌진은 서일의 명령을 받고 북로군정서 부대를 이끌고 서부전선 서쪽으로 진군하여 10월 12일과 13일에 화룡현 삼도구 일대로 이동하였다.

10월 21일 아침 8시경에 북로군정서 주력부대는 청산리 백운평 직소에서 나남주둔 제19사단 73연대 야스가와(安川)소좌가 인솔한 야마다(山田)연대의 전위부대를 매복 습격하였다. 적들은 별반 반격도 못하고 약 200명이 전사했했다. 야마다연대의 주력부대도 기관총, 산포 등 중무기를 앞세우고 발악적으로 달려들다가 역시 200~300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하고 말았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은 청산리전역 첫 전투에서 혁혁한 승리를 얻었다. 이것을 백운평 전투라고 한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의 6일 간에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 부대와 홍범도가 이끄는 연합부대는 선후로 백운평 부근 전투, 천수동 전투, 왈리구(曰日沟)전투, 어랑촌 전투, 고동하 전투 등 대소 10여차의 전투를 치러 일제침략군 1,000여명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것이 서부전선의 전투였다. 동부전선은 일본군이 획분한 토벌지대로서 훈춘 동북부와 왕청‧동녕의 서쪽지역을 가리킨다. 일본군은 이 지구에 나남주둔 제19사단 제 38여단의 주력과 시베리아 파견군 제11, 13, 14사단의 부분 병력 도합 1만여 명을 풀었다. 우리 반일무장부대의 병력은 서일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유수(留守)부대와 최진동이 이끄는 군무도독부 부대, 신민단, 의군부 등 800여명이었다. 이들 동부전선의 독립군들은 서일 등의 지휘 하에서 10월 23일의 왕청현 십리평 전투를 서막으로 왕청현 나자구, 노무주하(老母猪河), 장가점, 하마탕, 훈춘현의 삼도구, 우두산(牛头山), 소수분하(小水芬河), 팔가자 등 수차의 전투를 치르며 많은 적들을 소탕하였다.

1920년 10월을 계기로 이 지역 독립군 단체들은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으로 나뉘어 청산리전투 등을 치르며, 이른바 대토벌에 나선 일본군을 대패시킨 후 여러 갈래로 무사히 밀산현으로 이동하였다. 서일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과 신민단, 도독부, 의군부, 혈성단, 야단, 대한정의군정사 등 9개 독립군 부대 3,500여명이 밀산현 당벽진에 모여 겨레 항일운동사상 전례가 없는 대단결을 이루었다. 독립군사상 처음으로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서일을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로 받들었다. 서일이 명실공히 대한민국 독립군의 총수가 된 것이다.

1921년(41세)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1월에 국경을 넘어 노령 자유시로 이동했다. 당시 서일은 보다 큰 승전과 장래를 위해 일부 소부대를 거느리고 이 장정에 오르지 않고 당벽진에 남아 후방기지 건설을 도모하였다. 독립군부대의 둔병제(屯兵制)를 실시하려는 것이 후방기지 건설의 주요한 내용이었다.

1921년 6월 28일 노령 자유시로 간 대한독립군단은 뜻하지 않게 러시아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서로의 무력충돌에서 많은 독립군 사람들이 쓰러지고 체포되었다. 러시아령 자유시사변으로 하여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독립군단은 치명적 타격을 입고 풍비박산이 났다.

그러던 1921년 8월 26일, 마적들이 서일이 머무르는 마을을 야습하여 살인방화하고 약탈하며 무법천지로 돌아간다. 서일장군의 부하 열두 의사(义士)가 이에 대항하여 분전하다가 중과부적이 되어 마침내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밀산에서 둔병제를 통한 독립군 후방기지를 건설하고저 서일과 함께 남았던 마지막 한 부분의 병력들이 모두 전사한 것이다.

서일의 절망감은 컸다. 러시아 자유시사변, 밀산 당벽진의 참화는 대한민국 독립군 총수로서의 서일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서일로서는 이 모든 것이 자기의 밀어 버릴 수 없는 책임으로 느껴진 것이다. 서일은 그해 1921년 8월 27일 오전, 밀산현 당벽진 마을 뒷산의 산림 속에서 곧게 앉은 모습으로 자결 순국했다. 서일은 그의 스승인 나철 선생이 순교 당시 남긴 다음의 유서 한 구절을 읊조리면서 순국했다.

굿것이 수파람하고 도깨비 뛰노니
하늘, 땅의 정기 빛이 어두우며
배암이 먹고 도야지 뛰어 가니
사람, 겨레의 피고기가 번지르하도다.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오.

정부에는 서일의 우국 항일의 뜻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하였던 김좌진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또한 부하의 부하였던 이범석이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서훈한 것에 비해 격에 맞지 않는 대우라 아니할 수 없다. 더욱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이며, 대한민국 독립군의 총수에 대한 예우가 너무도 초라한 것이다.

(자료제공 - 국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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