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정원 발전위 민간위원으로서 'KAL858기 사건 조사 소위원회'에서 활동한 박용일 변호사.
[사진 - 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지난 10월 24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국정원 발전위)는 ‘종합보고서’를 발표하고 사실상 3년간의 활동을 마무리했다. 당시 눈길을 끈 것은 단연 KAL858기 사건 조사결과 최종 발표와 김대중납치 사건 조사결과 발표였다. [관련기사 보기] [관련기사 보기]

1987년 11월 29일 115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태운채 사라진 KAL858기에 ‘친한 친구’가 탑승했다가 희생된 특별한 개인적 연고와 이 사건에 대한 정치적 관심 때문에 'KAL858기 사건 조사 소위원회' 위원을 자임했다는 국정원 발전위 민간위원 박용일 변호사를 만나 보았다.

김승규 원장 비협조적, “양지회가 압력 넣었다”

박용일 변호사는 “우리가 (국정원 발전위에) 들어갈 때는 국정원에서 자료도 충분히 내고 조사한 것도 충분히 내놓겠다고 해서 그걸 믿고 들어갔는데 실제 조사과정에서는 그런 면이 많이 부족해서 조사하는데 애로사항이 많았다”며 “근본적으로는 중요한 서류들은 다 파기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있다 하더라도 원활하게 제공이 안 돼서 많은 갈등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보안성 검토’를 구실로 “한두 달 심지어는 3,4개월도 더 걸렸던 것 같다. 그중 상당 부분은 안 된다고 제공이 거부된 경우도 있었다”는 것이다. 국정원측은 비밀취급인가 2급 자격증을 제공키로 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보고서들도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없어 충분한 자료검토조차 어려웠다.

더구나 “처음에는 국정원에서 ‘고문’이라는 말을 쓰는 것도 거부하더니 ‘가혹행위’는 얼마 안 된다고 말했는데, 자기들에게 불리한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방해를 한다고 할까, 제대로 조사를 못하게 했다”며 “고문 여부가 쟁점이 된 사건이 많은데 수사관들 이름을 조서에서 다 지우고 넘겨준다”고 한계를 토로했다.

박 변호사는 특히 국정원 측이 고영구 원장 시절에 비해 김승규 원장 시절에 조사에 비협조적이었다며 “그 뒤에는 '양지회'라는 전직 (국적원)임원들 모임이 상당히 압력을 좀 넣었다”는 사실도 폭로했다.

또한 ‘김대중 납치 사건’ 조사과정에서 “(국정원 2국) 거기서는 얼마나 발목을 잡는지 세상 없어도 발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청와대도 이럴까 저럴까 계속 부심했다”며 일본과의 외교문제 때문에 난항을 겪었음을 내비치고, 그 와중에 민간위원 측 간사인 안병욱 교수가 며칠간 출근을 하지 않을 정도로 갈등을 빚었다고 전했다.

“김현희 남편이 자폭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 10월 26일 '국정원 진실위(발전위) 3년간 활동결과에 대한 설명회'에서 민간위원 측 간사를 맡은 안병욱 교수와 나란히 자리한 박용일 변호사. [사진 - 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KAL858기 사건 조사과정에서 ‘KAL858기 동체 추정 물체’ 정보와 관련 “(미얀마 출장)2,3일 전인가 우연히 그 전년도에 국정원에서 KAL기 동체가 있는 것 같다는 소문을 듣고 조사한 서류가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며 “나는 내일 모레 출장가는데 국정원에서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고 당시 통일뉴스의 단독보도가 사실이었음을 확인했다. [관련기사 보기]

조사 결과는 물론 KAL858기 동체가 아닌 것으로 판명났지만 박 변호사로서는 "완전히 우리를 조롱하고 있구나"라는 불신감이 강하게 일었고 “숨기려고 하는 것이 비협조적인 정도가 아니라 비토하는 상황이라고 봤다”고 할 정도의 일대 사건이었다.

특히 KAL858기 사건 의혹 해결의 열쇠를 쥔 김현희와의 면담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정원 측이 국정원 발전위 민간위원들에게 김현희의 주소조차 알려주지 않아 “우리가 밖에서 탐지하려 온 사람들이냐, 비밀탐지하러 왔냐. 왜 그걸 다 공개 못하냐”고 따졌지만 결국 역부족이었다고 말했다.

박 변호사는 “김현희가 결사적으로 못하겠다는 거는 남편이 제일 앞에 나서서 그러고... 남편은 두 번 세 번 죽이는 거다. 그러니까 자폭하겠다는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며 국정원 국장급의 면담 설득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극단적 반대로 면담이 무산됐다고 전하고, 실제로 경주 소재 김현희 집앞까지 찾아가 기다렸던 사실도 공개했다.

미국 측에서도 “KAL기 폭발시뮬레이션을 했는데 비밀이라고 (자료협조를)안 해줬다”며 “비행기 결함 그런 것 때문에 그러는지 안 내놓더라”고 불만을 표했다.

“KAL885기 사건 95% 질문들 해결, 의혹 풀렸다고 평가”

▲ KAL858기 사건에 대해 "95%정도는 질문이 해결됐다"고 자평한 박용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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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변호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KAL858기 사건 조사결과에 대해 “우리 위원들도... 아무리 악랄한 안기부지만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다는, 우리는 최소한의 양심을 믿는 사람들이니까, 그걸 뭐 안기부에서 완전히 기획해가지고 했다든가 그걸 알면서도 방조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는 전제를 깔고 있었다”고 전제하고 “핵심적인 부분들이 김현희, 김승일이가 북한 공작원이고 폭파했느냐, 동체가 공중폭파된 거냐가 주된 문제인데, 그동안 우리는 자평하기에 95%정도는 소위 350여 가지, 160여 가지 질문들이 해결이 됐다, 의혹이 풀렸다고 평가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KAL858기 동체로 추정되는 물체가 미얀마 인근의 해변에 매몰돼 있다고 '90%'이상 확신했다가 낭패를 당한 바 있는 전례에 비추어 아직까지 박 변호사의 자평은 신중히 살펴볼 여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KAL858기 사건이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서 조사중인 상황에 대해서는 “김현희를 불러서 조사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 같고, (국정)원에 자료가 상당히 많았다... 지금 그런 것을 더 조사한다 하더라도 특별한 상황이 나오기가 힘들다”며 “유가족들에게는 상당히 죄송하게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적어도 진실화해위에서 더 철저히 조사해서 성과 내기는 상당히 어렵지 않느냐 생각된다”고 전망했다.

"국정원이 제일 큰 수혜자, 민간위원들은 좀 착잡하다"

박 변호사는 “조사가 정말 자신있다고 하려면 원서류들을 다 공개하는 백서형식의 설명이 나와야 한다. 그걸 우리 위원들은 계속 촉구하고 있다”며 “나중에 이 보고서 내는 것도 힘든 작업이어서 백서 이야기는 쏙 들어가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국정원 발전위를 마무리한 소감에 대해서는 “앞으로 우리 위원회 평가를 어떻게 할지 모르지만 국정원 자체로서는 이번 활동으로 자기들이 제일 큰 수혜자다... 이번 이걸로 많은 걸 털었다는 것으로 성과를 자평하고 있다”면서도 “우리 민간위원들은 좀 착잡하다”고 말했다.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조사한 것들이 우선 양적으로 너무 적게 조사해서 제대로 못했지 않느냐는 생각도 들고, 질적으로도 시간을 많이, 예컨대 7대 사건에 대해서도 많이 투여했지만 만족스럽다고 하기에는 미흡하지 않았나 생각된다”는 것이다.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지만 좀 ‘교육’을 시킨다는 의미에서 매번 원칙적인 것을 강조하고 특히나 불법적인 것, 절차적으로 부당한 것은 법적인 면에서 강하게 잘못된 것을 지적한 역할을 한 셈이다”고 자평한 박 변호사는 특유의 소탈하고 솔직한 태도로 인터뷰에 응했다.

다음은 9일 오후 4시부터 서울 구의동 박용일 변호사 사무실에서 나눈 인터뷰 내용이다.

▲ 9일 오후 4시부터 서울 구의동 박용일 변호사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 통일뉴스 : 지난 10월 24일 종합보고서 발표를 끝으로 사실상 ‘국정원 발전위’의 활동이 마무리된 것으로 안다. 심경이나 소회는?

■ 박용일 : 심정이 좀 착잡하다. 그동안에 3년이란 게 짧지 않은 기간인데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조사한 것들이 우선 양적으로 너무 적게 조사해서 제대로 못했지 않느냐는 생각도 들고 질적으로도 시간을 많이, 예컨대 7대 사건에 대해서도 많이 투여했지만 만족스럽다고 하기에는 미흡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처음에는 2,3년 내에 끝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시간이 너무 짧고 조사할 사건이 많고 6개 분야 밖에 안 돼 못한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다.

□ 국정원에 들어가기 전에 기대했던 것과 막상 일을 하며 부딪혔을 때의 차이점은?

■ 내가 들어갈 때는 굉장히 특별한 사명감을 가지고 들어가고, 특히 국정원 자체 위원회고 국정원 스스로가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보면 시민단체 대표 자격으로 가서 일종의 국정원 조사의 보증인 같은 측면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들어갈 때는 국정원에서 자료도 충분히 내고 조사한 것도 충분히 내놓겠다고 해서 그걸 믿고 들어갔는데 실제 조사과정에서는 그런 면이 많이 부족해서 조사하는데 애로사항이 많았다.

근본적으로는 중요한 서류들은 다 파기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고 그래서 정말 생각보다 자료들이 좀 적었다고 생각이 들고, 있다 하더라도 원활하게 제공이 안 돼서 많은 갈등이 있었다. 문서들이 체계적으로 관리가 잘 안 돼 있는 것 같더라.

□ KAL858기 사건 관련 자료의 보관상태는 어떠했나?

■ 다른 사건에 비해 최근 사건이고, 그래도 상당히 많이 남아 있는 편이고, 국정원에서 적어도 KAL858기 사건은 자신한다고 할까? 밖의 의혹과는 달리 실체가 있는 거라고 해서 그런지 자료가 있다고 평가된다.

문제는 검찰에서 재판기록을 우리가 송부받는데 상당히 어려움이 많았다. 서류문제는 그래도 수사기록이나 안에 보고라든가 전문들이 비교적 많이 있어서 도움이 됐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기체 잔해 그런 것이 이미 보도됐듯이 그 중요한 기체 부분이 폐기되고 없어진 사례도 있어서, 이게 참 그 당시 안기부에서 그런 면에서 소홀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쪽 이야기로는 국과수(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5년 보관한 뒤 중요 안 해 안 찾아왔다고 설명했는데 납득하기 좀 어렵다.

□ 검찰 측으로부터 KAL858기 사건 관련 재판자료를 송부받는데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을 설명해달라.

■ 주로 과정이다. 검찰도 상당히 관료적이랄까 그래서, 7개 사건 거의 다 재판을 거친 사건들이어서 다른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우선 분량이 너무 많다, 물리적으로 복사가 어렵다. 말하자면 의도적으로 꼭 비협조적이랄 수는 없지만 자기들 재판에 관련된 안기부나 검찰이나 당시 중요한 시국사건에 대한 것은 같은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재조사에 대한 거부감이 밑바닥에 깔려 있지 않은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공소장이나 판결문 중 밖에서 의혹이 많이 제기된 문제를 법원에서 인정받았으니까 검찰이나 법원에 대한 불신이 많다는 것을 (검찰이)의식을 잘 못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 자료 접근에는 어려움이 없었나?

■ 7대 사건과 6개 분야 조사할 때가 어프로치(접근법)가 조금 달랐다. 우선 KAL기 사건을 위시 7대 사건의 경우에는 주로 어떤 자료가 있느냐, 자료목록을 빨리 보내달라. 그래서 목록에 나와 있는 서류들을 보면서 그 중에서 이런 이런 자료들을 빨리 달라는 절차다.

그런데 우선 처음에 갈 때는 원만한 자료 확보가 중요하니까 그걸 강조했더니, 태스크포스(실무팀)가 꾸려져서 그 일들을 하는데 이건 우리 위원회 조사관들과는 다른 (국정원)인원들인데 여기가 열심히 한다고는 하지만 손발처럼 잘 안 움직여지고 계속 서류 제공이 늦어지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민간 조사관과 위원들에게 넘겨지면 외부로 유출될 우려가 있어서 그걸 상당히 제한해야겠다는 것이더라. 이른바 ‘보안성 검토’라고 한다.

비밀취급인가 2급을 준다고 해놓고는 주지 않고, 1차적인 자료에 굳이 접근하려면 할 수 있지만 목록부터 받아내야 하는데 쉽지 않았던 것 하고, 그 후에 계속 자료를 요청해도 시일이 걸리더라.

□ 보안성 검토에 소요된 시간은?

■ 대중 없다. 한두 달 심지어는 3,4개월도 더 걸렸던 것 같다. 그중 상당 부분은 안 된다고 제공이 거부된 경우도 있었다.

수사기록 중에 KAL기 사건 외에 고문 여부가 쟁점이 된 사건이 많은데 수사관들 이름을 조서에서 다 지우고 넘겨준다. 비밀이라고 하는데, 그 사람들을 조사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숨기는 것이다. 담당수사관은 누군지도 모르고 한 명도 조사도 못했고 그냥 말하자면 두루뭉술 넘어갔다고 할까.

처음에는 국정원에서 ‘고문’이라는 말을 쓰는 것도 거부하더니 ‘가혹행위’는 얼마 안 된다고 말했는데 자기들에게 불리한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방해를 한다고 할까, 제대로 조사를 못하게 한 것이다.

특히 조사관들, 위원들도 그렇지만 사건조사에서 한 사건에 한 명씩 팀이 짜지는데 한 문건이나 한 가지 자료를 놓고 그 해석이 전혀 상반되고 재판이나 검찰에서 조사한 내용에 대해서도 해석을 상당히 달리함으로써 대립각을 세우는 경우가 많았고 위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다.

나는 거기서 국정원 국장들이 주로 위원으로 들어오는데,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지만 좀 ‘교육’을 시킨다는 의미에서 매번 원칙적인 것을 강조하고 특히나 불법적인 것, 절차적으로 부당한 것은 법적인 면에서 강하게 잘못된 것을 지적한 역할을 한 셈이다.

□ 국정원측과의 갈등 강도는 어느 정도였나?

■ 시기에 따라서 좀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처음 위원회 설립하고 그때는 고영구 원장하고 기조실장 김만복 현 원장이 주도를 해서 위원회를 설립했기 때문에, (국정원이)간청을 해서 시민단체 대표성을 가지고 들어갔기 때문에, 말하자면 원장하고 기조실장 이런 분들이 강하게 이야기하는 것들이 밑에 직원들에게 어느 정도 상대적으로 많이 반영됐다고 보여진다.

그 후에 김승규 원장이 와가지고는 그런 것이 많이 퇴색되고 (국정)원측 내부에서도 아무래도 계속 ‘우리가 너무 민간위원들 쪽에 끌려가는 건 아니냐’는 비판적 소리가 나왔던 것 같고, 그 뒤에는 양지회라는 전직 임원들 모임이 상당히 압력을 좀 넣어서 심지어 위원이나 조사관들에게 ‘뭐하는 거냐’, ‘국정원은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가야 하는데 이걸 털어놓으라는데 말이 되느냐’ 이런 얘기다.

□ 민간위원들 사이에서 뛰쳐나가자는 의견도 나왔나?

■ 그래서 김현희 면담만 하더라도 꼭 성사를 시켜야하는데 안 되는 거다. 나중에는 ‘너희가 면담을 주선한다고 하고 기조실장이 약속했으면 돼야지, 안 되면 우리가 직접 하겠다. 주소를 알으켜달라’. 주소를 못 알려주겠다는 거다. 이유가 뭐냐했더니 개인 신상에 관한 거고, 법을 들먹이면서 ‘이건 공개하면 안 된다’. ‘그럼 우리 민간위원의 정체성이 뭐냐’, ‘바깥사람이냐 (국정)원 안에 들어와서 일하고 있는데 바깥사람처럼 따돌리면 일 못하는 것 아니냐’ 굉장히 그런 걸로 많이 부딪쳤다.

□ 자료를 가지고 나가자는 의견도 있었을 법 한데.

■ 그래서 철저하다. 다른 기관과 달라 정보기관이니까 문서보안은 아주 철저하다. 심지어는 매 회의 때마다 회의자료들이 나오는데, 주로 조사관이 보고하는 것인데, 문서 일련번호를 매겨 밖에 못 가져가게 한다. 철저히 우리로 말하면 봉쇄당하는 것이고, 두꺼운 것 가지고 가서 연구해야 하는데 회의장에서만 보고 캐비닛에 넣어놓고 볼려면 한두 시간전에 가서 보는 불편함이 있었다.

특히나 언론에 발표할 무렵에 미리 새어나갈까 봐 굉장히 조심하고, 우리 민간인 사이에서도 언론에 보도가 나가면 민간위원 자체 내에서도 의심을 받기도 하고, 공개한다고 해서 별 것도 아니지만 시빗거리가 된 사례도 있다.

특히 오충일 위원장이 가능하면 적극적으로 조사내용을 알려서 국민들에게 보고해야할 의무가 있다는 적극적 의견을 펴고 나도 적극 동조했는데, 아무래도 옛 사건이자 국정원에게는 중요한, 민감한 사건이니까 비공식적으로는 안 되는 원칙을 확고히 세웠고, 우리는 비교적 충실히 따라간 셈이다.

제일 문제는 국회에 가면 한나라당은 설립 때부터 반대했으니까. ‘왜 설립하느냐’, ‘왜 민간위원에 진보적인 사람만 다 있느냐’, 시비를 걸면서 결국은 예산으로 막는데 우리는 상당히 예산을 타이트하게 할 수밖에 없고, 1년씩 연장하는데 2년쯤 지나고 나니까 원측에서도 슬슬 그만둔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김만복 원장은 기조실장일 당시 원측 간사 입장일 때하고 원장되니까 아무래도 위원회를 보는 입장이 달라서 그랬는지 그렇게 위원회 활동에 대해서 관심도 못 갖는 것 같고, 중요한 이슈도 많이 생겨 위원회는 잘 굴러가려니 하고 조금 덜 비중있게 대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한 가지 고마운 것은 안광복 실장이 비교적 위원회 활동을 이해하고 잘 추스려간 점이 나중에 활동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 어떻게 KAL858기 사건 조사 소위원회에 참여했나?

■ 나는 자임했다. 우선 이 사건이 87년 소위 대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소 생각하고 있었고, 사건 자체가 뭐랄까 남북문제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고, 2003년 이때부터 가족 뿐만 아니라 천주교 쪽에서 문제를 제기하면서 의혹이 많아졌고 언론, 특히 TV에서 다뤄왔기 때문에 조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생각했다.

7개 사건을 선정할 때 처음부터 7개를 할 엄두를 못 냈다. 우여곡절 끝에 7개가 선정됐는데 3,4개 시작했으면 KAL이 안 들어갔을 수도 있다. 어떤 사건을 먼저 할 것인가가 중요한데, 일부 위원들, 민간위원들 중에서는 조사해서 오히려 안기부 면피해주는 결과만 되지 않느냐는 입장도 있고. 나는 사건 비중이 크고 최근래 80년 후반에 6월항쟁 얼마 후에 생긴 사건이니까 조사해보자 해서 참여하게 됐다.

□ KAL858기 사건 조사 소위원회는 어떻게 구성되었나?

■ 나와 이창호 위원, 국정원 5국장 등 위원 3명에 조사관으로 신동진과 국정원 측 윤 조사관 등으로 구성됐다.

신동진 조사관이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 사무국장으로 있다가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우리 위원회에 조사관으로 들어왔데 들어올 때 좀 걱정들을 했다. 한 사건을 맡으려고 오는 것을 조사관으로 선발해도 되겠느냐, 아주 특별한 경우였다.

그러나 많은 위원들이 KAL기 사건을 꼭 조사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 조사해야 하니까. 그러면 적어도 신동진 조사관이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정보를 갖고 있으니까 긍정적으로 보자고해서 선발하고 그런 것도 계기가 돼서 7개 사건 중의 하나로 들어갔다.

□ 이번에 발표한 KAL858기 사건 조사의 최종 결론에 흔쾌히 동의하나?

■ 결론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과거사 조사의 가장 중요한 것은 가능하면 중요한 의혹들을 밝혀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중용한 참고인이나 문서들을 충분히 보고 객관적으로 잘 조사하고 발표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제일 문제 되는 게 김현희 면담만 하더라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절차나 형식도 중요한데 제일 중요한 부분이 면담과 동체 발굴인데 두 가지 다 실패한 셈이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는 좀 발표가 썩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 충분히 의혹들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결론을 내린 것은 무리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 의혹을 중심으로 밝혀내는 게, 소위 7대 사건에 대한 조사에서는 다 그런 식으로 조사를 해나갔는데, 처음에 KAL 사건에 대해서 350여 가지 의혹이 많이 나왔다. 원론적으로 이야기하면 100% 다 밝혀져야만 의혹이 없다 할 수 있는데, 실제 현실에서는 그렇게 될 수 없고 중요한 의혹들을 분류해서 큰틀에서 조사하고 거기에 부수되는 의문들은 그걸로 해결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보고서에 자세히 나왔지만 160여 가지 질문으로 정리하고 그것을 7개 범주로 만들어서 그것 중심으로 조사를 해나갔다. 그 중에 핵심적인 부분들이 김현희, 김승일이가 북한 공작원이고 폭파했느냐, 동체가 공중폭파된 거냐가 주된 문제인데, 그동안 저희는 자평하기에 95%정도는 소위 350여 가지, 160여 가지 질문들이 해결이 됐다, 의혹이 풀렸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볼 때는 그 많은 의혹들이 상당한 수가 처음에 안기부가 너무 빨리, 철저하게 조사 못하고 허술하게 발표한 것하고, 김현희 진술서와 소위 고백록이라고 하는 책을 주로 검토하고, 일본 작가나 몇 권 관련 책들을 대조해가며 소위 의혹을 제시하는 부분들이 큰틀에서는 그렇게 의심은 좀 갈 수 있지만 큰틀에서는 다 밝혀지지 않아도 될 항목들이 많았기 때문에. 큰틀에서 조사해서 나름대로 밝혔다.

□ 김현희와 김승일이 북한 공작원이고 이들이 KAL858기를 폭파했다는 결론은 물증이 부족한 것 아닌가?

■ 내가 볼 때는 개인적인 생각은 적절치 않은 것 같고, 김현희 진술의 신빙성에 관한 문제인데 그동안 사건 당시부터 조사한 많은 것들, 김현희가 재판과정에서 얘기한 것들이라든가 그후 책을 써내고 간증한 자료들을 보고, 우리가 제일 중요한 그것 때문에 (김현희를) 지금까지 살려놓고 있는 건데, 신빙성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하느냐. 그동안 행적이라든가 말, 이런 것을 평가할 수 밖에 없다.

그동안 의심스런 점으로 평양에서 모스크바를 거쳐 아부다비까지 가는 행적, 소위 우리가 직접 조사할 수 없으니까 그 점이 의심스러웠는데 우선 비행기 행로중 이루크츠크 중간기착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고, 제일 중요한 것은 모스크바에서 부다페스트 들어가는데 최씨 두 사람 동행하고, 한송삼 북한 대사관 1등 서기관인데, 말하자면 두 최씨와 한씨하고 김현희 김승일이 같이 행동한 것들이 제3국 정보기관을 통해서 밝혀졌고,

특히 헝가리 쪽에서 상당히 북한측에 항의한 전문 같은 것도 나온다. ‘왜 우리 나라 경유해서 국제적으로 테러범을 이런 식으로 하느냐’ 항의서한도 확인이 됐기 때문에, 여권이 북한 공무여권을 갖고 들어왔다는 것이 서류상 확인이 돼버리니까. 일단 거기에서는 그걸 소지를 거짓으로 하지 않는다면, 좌우지간 한송삼이 존재하고 공무여권 사용, 한송삼의 차로 비엔나로 들어왔다는 걸 보면 제3국 정보기관들이 이미 행적들을 대강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북한쪽 공작원일 가능성이 많다는 측면하고.

폭파는 김승일이 자결한 문제라든가, 그동안 우리 정보기관이 파악하고 있던 북한 간첩들의 행동하고 같은 거라고 해서 유력하게 했고, 아무리 김현희의 진술에 의혹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버지 문제, 쿠바에 근무했다는 것은 드러났고, 그 후에는 상대적으로 근래 것(앙골라 무역대표부 수산대표)은 숨기기 위해 거짓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일부 중요하게 의심받고 있는 아버지 문제, 주소문제 이런 것들은 이해할 수 있다 할까, 의혹점이 100% 해소 안 된다고 하더라도, 김현희 면담을 통해 확인해야하지만, 북한 공작원이고 진술의 신빙성이 상당히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 조사결과 발표에 보면 '약주병' 폭약이 없었다든지 하는 새로운 사실도 나와 공중폭파 여부 자체에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 폭파문제는 약주병이 없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고 문서로 확인한 약주병은 없었다. 검색원이 약주병이 없다고 진술한 것은 사실인 것 같은데, 현장에서 또 바그다드 공항의 다른 사람들은 약주병이 있었다는 것과 심지어는 병이 덜거덕거렸다는 조사내용도 나오고, 비닐백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문제가 있는데 비닐 백은 있었던 것 같고, 라디오 외에 김승일이 평소 마시던 병하고 약주병이 있었다고 진술하고 있는데, 어느 쪽일지 모르는 것이다.

그런 여러 가지 정황을 봐서 비행기가 폭파됐느냐 안 됐느냐 보는 건데 잔해가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이 나와있고 심지어 구명보트가 나와 있는데 국과수 감정은 폭파된 잔해라고 추측할 수 있다고 봐야된다.

여담이지만 (국정원에)처음 가서 ‘5국의 기록이랑 기체 뭐 있다고 하는데 내놔라’, 제일 먼저 내놓는 게 구명보트였다. 자세히는 아니고 펴보고 했는데 KAL에서 나온 것은 확실하다고 하니까 이것은 전혀 거짓말로 안기부가 비행기에서 갔다놨을 수도 없는 거고, 눈으로 실제 비행기에서 나온 중요한 부분을 보니까 느낌이 다르다고 할까. 말로 의혹을 가지고 있는 것과 달리 거기서 나온 것이라는 생각이 든 계기가 된다고 할까...

□ 중간조사 결과 발표시 동체로 추정되는 물체가 수몰돼 있다고 했다가 결국 아닌 것으로 판명된 해프닝이 있었는데 자세한 경과를 들려달라.

■ 우리가 어차피 현장을 한번 가자, 예산도 없어 해외출장도 못 갔는데 제일 가까운 데, 내가 미얀마, 다른 사건으로 일본하고 태국, 이게 작년 4월 초순이다. (미얀마 출장)2,3일 전인가 우연히 그 전년도에 국정원에서 KAL기 동체가 있는 것 같다는 소문을 듣고 조사한 서류가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신동진 조사관이 다른 것을 조사하다가 얼핏 튀어나온 것인가 보다.

나는 내일 모레 출장가는데 국정원에서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불만 많은데 ‘완전히 우리를 조롱하고 있구나’, 김현희 면담과 동체수색이 가장 중요한데 그전에 조사해놓은 것도 안 보여주고 있고, ‘300여 가지 너희가 답 가지고 있을테니까 항목별 의심에 답을 해다오’ 몇 달동안 촉구했다. ‘그동안 조사 많이 했으니 답을 해봐라’. 몇 달 만에 겨우 내놓은 답이 시민대책위에 대한 답변이나 진배없다. ‘더 이상 답을 낼 수 없기 때문에 이것 밖에 못 낸다’. 그런 무성의에다 조사한 것도 숨기고 있다는 것 때문에 대판 싸웠다. ‘이런 식으로 하려면 집어치워라’.

그 문서 카피(복사본)도 안 주니까, ‘소문이 뭐냐? 뭘 봤다는 거냐?’ 대강 메모만 조금 해가지고 갔다. 갔더니 (국정원) 현지 파견관이 있다. 안내하러 나왔는데 ‘이거 상당히 확실한데 본부에 보고해도 반응이 없다. 예산만 많이 들고 돈이 없다고’. 그래서 ‘당장 현지에 가서 조사했다는 현지인들을 보자’. 파견관이 자주 가는 한인식당인데 식당의 주인이 자기가 데리고 있는 종업원과 아는 사람이 이 문제에 깊이 관여하고 있더라.

정식으로 회의를 했다. 지도를 어디서 구했는지 섬부근 지도도 상세하게 펼쳐놓고 벌써 작년에 와서 조사해 갔는데 본부에서 반응이 없는데, 이건 필히 조사를 해야 한다. 눈이 번쩍 뜨이고 귀가 확 열려서, 교포니까 말도 잘 통하고. 종업원이 현지에 가봤고 어부들 만났다는 사람이 영어를 좀 해 직접 물어보니까 어부가 KAL기 동체를 봤다는 취지로 얘기하고 작년에 다 얘기를 해줬다고.

얘기가 상당히 디테일(세밀)했다. 당장 가보고 싶은데 미얀마 수색작업했던 사람들 면담하러 갔으니까 현장 갈 시간이 안 됐다.

면담을 3,4명 했는데 당시 항공국 과장이라는 사람하고, 거기가 주로 육군이 관장했는데 육군 대령 출신하고, 그 지역 안다만 연해를 관장하는 지역 사령관인 셈인 사람, 이렇게 3명을 따로따로 면담을 했는데, 당시 자기들로서는 최대한 성의를 가지고 조사를 했다. 우리 정부하고 뒷거래 의혹 있다고 하는데 그런 거는 부인하는 것 같고. 그 사람들 얘기로는 차후에도 조사문제에서 그 당시 해군이나 공군에는 자료가 있을지 모르니까 협조를 적극해주겠다는 자세를 보이고 그렇더라.

주로 3사람 면담하고 돌아왔는데, 와서 보고하니까 ‘조사를 해보자’. 이창호 위원이 시간이 좀 많으니까 총대 메고 6, 10월 두 차례에 걸쳐서 갔다.

처음에도 그렇고 두 번째도 그렇고 소나(SONA) 장비를 가지고 갔다. 처음 가서 확인한 결과 거의 뭐 90%이상 맞다. 좌우간 소나 장비로 탐색해온 것이 완전히 KAL기 동체와 비슷한 걸로 현지에 같이 갔던 전문가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이창호 위원도 그렇게 믿고 그 부근이 바다도 낮고 비행기 떨어지기도 딱 입지조건이 되는, 무엇보다도 어부 두 사람이 추락하는 것을 봤다고 했다.

내가 갔을 때도 주민과 지역사령관이 이야기하고 상당히 신빙성 있는 이야기였으니까, 소나장비로 바퀴와 비슷하고 동체와 비슷하고 아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니까 확실하다고 믿었는데 막판에 날씨 나빠져 돌아왔다고, 두 번째 갔는데 아니라고 판명돼서 발칵 뒤집혔다. 나도 체면이 말이 아니었고 이창호 위원은 아주 돌아오지 않으려고 했다.

핵심은 국정원에서는 그 사람들 이야기를 신빈성 있게 안 믿은 것 같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기려고 하는 것이 비협조적인 정도가 아니라 비토하는 상황이라고 봐서 더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는데 아니라고 판명나는 바람에 두 조사위원은 물론이고 민간위원들이 소리를 잠시라도 낮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전에 보고서에 나온 얘기지만 이미 구명보트는 12월 13일 사건 직후에 나왔고, 그후에 1990년 초반에 동체 조각들이 많이 나왔었다. 특히 (동체 조각에 새겨진)올림픽 앰블램이 KAL기 동체라는 것을 확정적으로 증명하는 거고, 사소한 의혹들은 소위 항공기 폭파사건에서는 어쨌든 있을 수 있을 법한 사건이고.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항공기 사고의 진상을 캐는 것을 봤는데, 비슷하게 블랙박스 못 찾고 처음에 철저하게 수사 못한 것의 대가를 톡톡히 받고 있는 거다.

□ 중간발표 당시 통일뉴스가 국정원의 미얀마 관련 정보 은폐에 대해 단독 사전보도해서 문제가 되었나?

■ 그렇게 문제는 아니었다. 언론에 대한 의견들은 그때 그때마다 매번 지원하는 파트에서 언론쪽 기사들을 팔로우업 하기 때문에 계속보면서 이야기하고 그런데, 그렇게 심각했다고 그럴까 그렇지는 않고, 언론에서 이의를 제기해줌으로써 위원회 활동의 힘이 될 수도 있으니까.

□ 국정원 발전위가 중간발표에서 밝힌 ‘무지개 공작’의 시점이 12월 2일이니 최소한 사건의 진상이 파악되기 전에 이미 당시 안기부의 공작이 개시된 것 아닌가?

■ 당시 안기부는 단정적으로 북한 공작원 소행이라고 단정해놓고 정말 부서들이 다 모여서 선거에 최대한 이용한다는 방향으로 방침을 세워놓으니까, 거기다가 김현희가 예상보다 빨리 실토를 하고 하니까 얼씨구 좋다하고 공작들을 폈는데, 사실 그 당시로 봐서는 양김이 분열됐지만 그래도 안심을 못할 상황이었고 사생결단할 땐데 그 당시 권력으로서는 북한 소행으로 해가지고 덮어씌우면 결정적으로 유리하니까 총력전을 편 것이다. 그보다 더한 공작들이 지금 문건이 없어서 그렇지 나왔을 수도 있고, 당시 안기부가 주도하리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것이다.

□ 가족들은 조사 결과에 대해 썩 흔쾌하지 않고 기자로서도 진실을 파헤치지 못하는 무력감을 느낀다.

■ 이건 성격 자체가 비행기 폭파였고, 김현희의 소위 실체에 관한 건데 사실 나는 처음부터 관여하게 된 계기 중의 하나가 나의 친한 친구 중의 하나가 있었는데, 사실 정말 친구가 하나 죽은 사건이고, 정치적인 정황이 아주 중요한 거고, 남북문제의 핵심적인 거니까.

그런데 처음부터 의심하기는 사실 어렵다. 우리 위원들도 그걸 안기부에서 조작해서 대부분 중동에서 어렵게 일하다 온 사람들을 죽인다든가, 아니면 완전히 폭파하는 걸 알았으면서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하는 건 아무리 악랄한 안기부지만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다는, 우리는 최소한의 양심을 믿는 사람들이니까, 그걸 뭐 안기부에서 완전히 기획해가지고 했다든가 그걸 알면서도 방조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는 전제를 깔고 있었다. 그래서 몇 사람은 절대로 하면 안 된다 하고 극력반대를 했는데 그래도 워낙 중요하니까 하자고 했는데,

이게 뭐 진상이라는 게 사실은 비행기 폭파라는 것 성격 자체도 그렇고, 김현희가 그동안 할만큼 다 뭐 나와 있으니까. 나도 있는 책 없는 책 다 보고 했지만, 의혹이야 많을 수 있는데 뭐 소소한 민사사건 형사사건에서도 다 별별 소리가 나온데 이런 사건에서야 얼마나 비밀스러운 소위 첩보, 공작, 무슨 저쪽의 공작, 이쪽의 공작, 별별 공작이 다 들어간 사건이니까 그 의혹이 많을 수 밖에 없는데,

그 문제는 김현희가 결사적으로 못하겠다는 거는 남편이 제일 앞에 나서서 그러고, 8억 얼마 다 그때 그래 가지고(김현희 책 인세를 피해가족들에게 기부) 자기네로서는 최대한 노력을 했다고 하는데 이제 와서 다시 정체를 조사하자, 남편은 두 번 세 번 죽이는 거다. 그러니까 자폭하겠다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건데,

결국은 지난번에 카메라, 그냥 이건(녹음) 좋다. 그런데 카메라는 들이대면 그게 방영되면 거의의 사람은 아주 거부감을 많이 느끼니까 그것 때문에 아주 결사적으로 그냥 반대를 하고, 이창호 위원이랑 몇 사람 거기 가서 막 죽치고 했다. 경주는 빤한 바닥이니까 다 안다. 그래서 다 어딘지 다 아는데, 저쪽이 그렇게 거부하니까. 그리고 끝까지 하여튼 우리는 좀 믿었다.

‘우리 발표하고 끝내자’ 하는 이야기가 많았었는데 내가 끝까지 반대했다. ‘이건 안 된다, 김현희 면담없이는 안 된다’고 나하고 신동진이 하고 거기서는 딱 의기투합했는데, 이러면 가족뿐만 아니라 누구한테도 안 되니까 빨리 면담시켜라. 아니면 우리가 면담가자고 몇 번 아주 회의에서 대판나게 싸웠다. 도대체 말이야 뭐 우리가 로보트도 아니고 말이야, 가가지고 문 밀고 들어가겠다.

그러니까 이창호 위원은 '아니, 나는 그렇게 할 수는 없고 나는 보따리 싸가지고 가겠다'. 갈라면 가고 그만두라고, 하여튼 그러나 이 사람들이 계속 뭐... 그래서 5국장도 갔었다. 원장이 뭐 갈 수는 없는 거니까 5국장이 갔으면 제일 높은 사람이 갔다고 봐야된다.

가 가지고 자기 말대로 옛날에 데리고 있던 부하직원이니까 만나면 들어줄 줄 알았는데, 아니 흉내만 내면 되잖느냐, 최소한 면피하려면. ‘모른다 모른다, 아니다 아니다’ 하든지. 절대 안 된다고 하니까 5국장이 와가지고 사정사정을 했다.

‘아니 난 안 된다. 우리 가야되겠다’. 그래서 주소 알으켜달라고 해서 그냥, 뭐 무슨 법이 어떻고 그래서, ‘아니 도대체 내 앞에서 어떻게 법을 얘기하면서 주소를 못 알으켜준다는 얘기가 어디 있냐. 우리가 밖에서 탐지하려 온 사람들이냐, 비밀탐지하러 왔냐. 왜 그걸 다 공개 못하냐’.

그래서 뭐 자기 자체 내에 무슨 법률 자문역이 있는데 안 된다하더라고 그래. ‘그자들 여기 데려오라고 해. 새까만 후배들이 앉아가지고 변호사입네 하고 와가지고 그따위 자문이나 하고 있으면 무슨 일이 국정원이 되느냐’고, 아니 큰틀에서 생각해야지. 그리고 법해석을 그런 식으로 하면 어떡하나. 우리 위원회가 원 소속인데 원 위원인데, 도대체 당신네들하고 같은 자격으로 와 있는건데, 말을 해보라고. 그래도 끝까지 안 했어. 안 되더라고.

거기다가 DJ (납치) 사건 때문에 거기는 2국(이) 외무부와 관계되는, 거기서는 얼마나 발목을 잡는지 세상 없어도 발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청와대도 이럴까 저럴까 계속 부심했지. 거기 안병욱 교수는 가운데 들어가 가지고 난감해가지고 내 옆에 앉았는데 나중에 나한테 ‘뭐 그렇게 좀 상황을 봐가면서 그러지 너무한다’고 말이야.

아니 간사가 말이야 제대로 일을 해야지 청와대에 연락은 하면서 이 중요한 것 다 발표해 놓고 안 한다고 하고 자꾸만 국정원 눈치보고 일본 눈치보면 이게 무슨 위원회 활동이냐고 되게 씹고왔다. 그랬더니 나중에 며칠간 한참 안 나왔다. 내가 심하게 공박했거든. ‘두 간사가 뭐하냐’고 ‘짜고 하냐’고 특히 DJ 사건 발표 때문에 더 그랬다. 아니 자기는 최대한 노력 하는데 섭섭하게 한다고. 아니 섭섭하나 마나 하는 꼬라지가 그렇지, 발표도 못하고 말이야.

□ 국정원 발전위 민간위원직은 언제 끝나나?

■ 해산했다. 지난번 발표로 위원회를 해산했다. 임기가 10월 말까지였고 발표로 마감했다. 1년, 1년 연장해서 3년만에 해산했다.

□ 정부조직에 처음으로 들어가 활동하다 끝나게 돼 시원섭섭할 것 같다.

■ 굉장히 많이 강조했는데 역사적인 일이고, 정보기관이 스스로 민간인들하고 합쳐서 조사한다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고 앞으로 없을 것 같은데, 우리나라만이 갖는 아주 독특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나는 법조계를 대표해서 갔으니까 대부분 재판을 통해서 다뤄진 사건이고, 소위 독재정권 내지 권위주의 정권에서 중정(중앙정보부)이나 안기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비교적 잘 아니까 그런 것들을 좀더 잘 밝힐 수 있다, 아니면 앞으로 나아갈 법치주의 면에서 국정원으로 하여금 촉구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고 들어갔는데, 그 사람들이 알기는 알지만 앞으로 실천을 어떻게 할지 두고 봐야 한다.

본격적으로 붙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향후 건의에서 수사권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이냐, 테러방지법을 자꾸만 제정하자고 하는데 이런 것들을 보고서에 담을 때 원칙하고 상당히 부딪쳤다. 적어도 우리 민간인은 수사권 폐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 입장이고, 지금 테러방지법 같은 것을 제정해서야 되겠느냐는 비판적인 입장에 있었다. (국정)원측은 아직도 그 생각을 못 버리는 것 같다.

앞으로 우리 위원회 평가를 어떻게 할지 모르지만 국정원 자체로서는 이번 활동으로 자기들이 제일 큰 수혜자다. 원장 이하 참여했던 사람들이 상당히 자신있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평가가 다르겠지만, 좌우간 이번 이걸로 많은 걸 털었다는 것으로 성과를 자평하고 있는데 우리 민간위원들은 좀 착잡하다.

□ 진실.화해위원회로 KAL858기 사건이 넘어갔는데 잘 해결될 것으로 보는가?

■ 지금 새로 조사를 더 한다면 김현희 면담, 우리가 강제조사권이 없어 못했는데, 거기서는 제도적으로는 할 수가 있는데 실제 할 수 있느냐는 봐야 될 것이다.

법원에서 동행명령도 안 된다는 식으로, 법원이 말이 안 된다고 본다. 영장주의가 법으로 필요한 기구에 권한이 있어야지 다 법원의 영장 받아야 하나. 지난번 판결처럼 영장이 집행도 안 된다면 강제조사를 할 수 있겠나.

그런 건 절차적인 문제고, 김현희를 불러서 조사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 같고. 원에 자료가 상당히 많았다. 그걸 다 정말 면밀히 검토하고 특히나 전언문들이 많다. 아무래도 사건 직후에 동구권은 조사 못하니까 특히나 김현희, 김승일 행적에 관한 것이라든가 바레인이나 아부다비에서 우리 현지 조사관들이 나가서 조사한 내역도 그렇고.

지금 그런 것을 더 조사한다 하더라도 특별한 상황이 나오기가 힘들다. 지금 유가족들이 뭐를 주된 것으로 해서 신청한 것인지 모르지만 결국은 국가 책임, 공권력에 의한 책임을 묻는 건데 진실화해위에서 국가책임 결론을 끌어내기에는 그렇게 쉽지 않지 않을까 판단이 든다.

어지간하면 유가족들이 우리 조사가 완전히 흡족하지는 않지만 우리도 몇 차례 설명도 하고 해서 받아들였으면 하는 것이 우리 민간위원들 생각이었는데 결국은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을 가진 것인데, 김현희 면담도 못하느냐, 더구나 동체 찾은 것 같이 말만하더니 그러다가 안 되고 하니까 거기에 대한 불신도 상당히 깔려있을 것이고, 유가족들에게는 상당히 죄송하게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적어도 진실화해위에서 더 철저히 조사해서 성과 내기는 상당히 어렵지 않느냐 생각된다.

□ 국정원측 자료들을 백서로 발간하자고 주장한 것으로 안다.

■ 처음에 백서를 만들자고 했다. 그런데 나중에 이 보고서 내는 것도 힘든 작업이어서 백서 이야기는 쏙 들어가버렸는데, 적어도 공개될 수 있는 자료를 가능한 많이 공개해서 백서를 내자. 우리 보고서에 붙어있는 것은 중요한 보완서류들이 얼마 안 된다. 조사가 정말 자신있다고 하려면 원서류들을 다 공개하는 백서형식의 설명이 나와야 한다. 그걸 우리 위원들은 계속 촉구하고 있다. 처음 약속이고 하니까.

지금 예산 타령하는데 국정원에서 그것도 못 내겠나. 그동안 모아놓았던 서류 모아놓았던 것을 공개하자. 그것이 나오면 아무래도 언론이나 이런데서 검토해보고 그걸 단서로 해서 추적할 수 있는 계기가 또 한번 올 수가 있으리라 본다.

지금 단계에서는 백서를 낼 것 같지는 않는데, 중요한 서류를 언론 쪽에서 몇 가지라도 공개하라고 하면 국정원에서 해야되지 않을까. 최대한 우리 조사관련 서류들은 다 국가기록원으로 보내든지 진실화해위로 보내든지 해서 다 활용할 수 있도록 하자. 평가라는 게 보고서만 내가지고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조사했다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 백서 발간이 현재는 쉽지 않다는 뜻인가?

■ 인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병욱 교수(민간위원측 간사)가 우리 위원회를 해산하면 보고서 나오기도 힘드니까 꼭 해야 한다고 굉장히 독촉을 해서 이것을 냈는데, 지금은 직원들이 다 흩어졌다.

지금 한다면 (국정원)안에 감찰팀인가 그런 데서 하는데, 실은 우리는 계속 어떤 형식으로든지 민간위원들은 빠지더라도 자체 내에서 조사하는 상설기구를 작게라도, 이미 방향은 잡아놨으니까 하라고 계속 촉구했는데 전반적으로 과거사 정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계속 가지고 있고, 이 정도만 해도 자기들로서는 최대한 한 거라고 생색을 내니까 계속 후속조치가 안 될 것 같다.

□ 미국이나 일본과 자료요청 하는데 별 문제가 없었나?

■ 위원회 차원에서 자료요청을 안 했다. 그전의 전문이나 그런 것을 보았다.

(미국이)KAL기 폭발시뮬레이션을 했는데 비밀이라고 (자료협조를)안 해줬다. 그건 내 기억으로 정식으로 요청했는데 안 된다고 했다. 비행기 결함 그런 것 때문에 그러는지 안 내놓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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