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규(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 위원, KAL858기 진상규명 모임 카페 공동운영자)


오는 11월 29일은 KAL858기 실종사건 2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사건은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특히 지난 10월 24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KAL858기 사건 조사 최종결과를 발표했지만 'KAL858기 가족회'와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는 즉각 성명서를 발표하고 "피해자 가족들을 우롱하는 처사"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KAL858기 사건 의혹 해결을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온 정연규 씨가 국정원 발전위의 최종결과 보고서에 대해 자세한 반박 내용을 담은 기고글을 보내왔다.
국정원 발전위의 최종결과 발표 이후 첫 본격 반론인 셈이다.

정연규 씨는 "이 기고문은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www.kal858.or.kr) 게시판과 KAL858기 진상규명 모임 다음카페(http://cafe.daum.net/kal858notice)에 올라온 네티즌 의견들을 최대한 반영했다"며 "아무쪼록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의견을 바란다"고 밝혔다.

정연규 씨의 기고문을 3차례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 주


지난 10월 24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과거사위)는 KAL858기 사건을 비롯한 7대 의혹사건과, 5개 분야 조사결과를 <종합보고서> 형식으로 공개하고 조사활동을 끝마쳤다.

국정원 과거사위는 암울했던 군부독재정권하 ‘정권안보’를 위해 국민을 미행, 감시, 도청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헌법상 보장된 최소한의 인간 기본권마저 짓밟으며 각종 공안 사건을 조작한 정보기관의 불행했던 다수의 과거사들을 재조명했다.

국정원 과거사위의 <대국민 여론조사>(2007.1.22)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9명이 7대 의혹 사건 중 김대중 납치 사건(92.5%)과 KAL858기 폭파사건(90%)을 알고 있었고 국정원 과거사위의 중간조사를 포함한 재조사 결과 신뢰도는 ‘신뢰 않는다(51.6%)’는 부정적 평가가 ‘신뢰한다(46.6%)’는 긍정적 평가보다 높았다.

그리고 ‘논란과 의혹 제기된 사건은 조사를 계속해야 한다(64.4%)’는 당위론이 ‘정보기관의 활동위축과 외국정보기관과의 협조 등을 고려해서 자제해야 한다.(33.0%)’는 현실론 보다 우세했다. 즉, 국민 여론은 국정원 과거사위의 재조사 결과에 대해 다소 부정적 평가가 높은 가운데 논란과 의혹이 제기된 사건의 계속 조사를 ‘우세하게’ 요청한 셈이다.

1. ‘졸속’ 결론으로 ‘오도’된 KAL858 사건 종합보고서

2007년 10월 24일 국정원 과거사위가 공개한 ‘KAL 858기 폭파사건 진실규명’ 관련 <종합보고서>는 동 사건의 의혹 사항을 7개 분야로 분류, 총 148개의 의혹들을 선정하여 조사 결과를 정리했다. 이는 2006년 8월 1일 발표했던 <중간보고서>에 비하여 보다 세심하고 구체적인 의혹들의 분류 그리고 전반적인 사실 관계를 조사하고 사건의 실체 진실에 나름대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보여 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합보고서>는 이미 신뢰성을 상실한 <중간보고서>의 연장선에서 △사건의 핵심 의혹들의 상당수 배제 △의혹 사항 중 상당수가 사실관계 파악이 안 되고 △사실관계 파악이 되었더라도 잘못된 결론을 내린 사항이 많고 △의혹 사항들의 객관적 판단보다 조사위원들의 주관적 판단이 많고 △답변 내용들이 국정원 존안자료를 재인용하는 수준이며 △사건 의혹의 당사자인 김현희와의 면담에 실패 한 끝에, 이미 오래전 사망 선고를 받은 제5공화국 군사정부의 수사발표(1989.1.15)와 똑같이 “이번 조사를 통해 ’KAL858기 폭파사건‘의 실체가 북한 공작원에 의해 벌어진 사건임을 확인하였음”이라는 ‘졸속’ 결론을 내려 버렸다.

국정원 과거사위는 미얀마에서 흘러나온 ‘루머’에 따라 Heinze Bok 군도 Taung-Pa-La섬 해저에 KAL858기 동체 잔해로 추정되는 인공 조형물이 매몰돼 있음을 확인했다(2006.8.1)며, 수중음파탐지기로 촬영했다는 애매한 사진들을 공개하며 국민 앞에 자신감을 피력했다. 그러나 결국 KAL기 동체가 아니라 단순한 ‘바위와 산호’로 확인(2006.10.24)한 점은 1987년 11월 29일 KAL기 실종 직후 군사정부가 꾸린 합동조사단이 태국서 흘러나온 ‘루머’에 따라 밀림지대를 수색하며 시간을 허비한 끝에 결국 실종자와 동체 그리고 블랙박스 발굴에 실패한 점과 유사점이 있다. 단지 우연의 반복이었을까?

또 국정원 과거사위는 안기부가 빈, 베오그라드 등 현지 검증 없이 김현희 진술에만 의존한 채 수사발표를 함으로써 각종 의혹을 유발시켰다고 힐난하면서, 정작 자신들 역시 평양-모스크바-부다페스트-빈-베오그라드 등의 김현희 행적을 검증하지 않았다. 냉전이 붕괴되고 러시아, 헝가리, 유고가 수교국인 이상 ‘미수교국’이어서 현지 확인을 못했다는 변명은 성립할 수 없다.

노무현 대통령도 군사분계선을 넘어 제2차 남북 정삼회담을 개최하는 남북관계에 비추어 보건데, 평양 현지조사도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국정원 과거사위는 일본, 태국, 미얀마 등 3개국 출장에 그쳤다.

2. 김현희 북한 기억은 ‘공 테이프’ 인가?

몇 가지 핵심 쟁점들을 살펴보자.

KAL858기 사건의 실체가 ‘북한 공작원’에 의해 벌어진 사건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폭파범’으로 지목된 김현희씨가 북한 출신임이 ‘입증’되어져야 한다. 제5공화국 군사정부의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1988년 1월 15일 <수사발표문>을 통해 김현희의 ‘신원 사항’을 소상히 공표했다.

1987.12.23. 김현희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진술을 최초로 할 당시 자신의 출생지를 ‘평양시 대동강구역 동신동’이라고 진술했으나, ‘동신동’은 ‘대동강구역’이 아닌 ‘동대원구역’에 속해 있다. 안기부는 수사 발표시 ‘동신동’은 ‘동대원구역’으로 정정 발표했다. (국정원 과거사위 종합보고서 Ⅲ, 368쪽)

집 주소는 ‘평양시 문수구역 문수1동 65반’이라고 밝혔으나, 조사결과 1983년 3월 ‘문수구역’은 ‘대동강구역’에 흡수되면서 ‘폐지 됐음’을 확인했다. 김현희 진술에 따르면, 1984.1.1 새로 이사한 문수동을 찾아가고 이후 3차례나 더 집을 방문했음에도 북한의 행정구역명을 정확히 몰랐을까 하는 점은 ‘여전히 의문이 남는 사항’으로 ‘이 틀린 내용이 1990.3 최종 재판 때까지도 계속 유효’했다고 한다. (종합보고서 Ⅲ, 368~370쪽)

뿐더러 김현희는 1988.8.28 평양 시내의 병원 위치를 묻는 질문을 받고, 적십자 병원과 남산진료소가 ‘문수구역’에 있다고 진술하였으나, 적십자병원은 ‘동대원구역’에 있고, 남산진료소는 ‘대동강구역 문수동’에 있음으로 확인됐다. (종합보고서 Ⅲ, 369쪽)

평양에서 유치원, 인민학교, 중등학교 그리고 김일성종합대학과 평양외국어대학에 다녔다는 김현희의 평양 기억들은 ‘제로’ 상태였다.

3. 김현희는 아버지 직업도 몰랐다?

안기부는 수사발표시 김현희의 아버지 김원석(당시 58세)은 '앙골라 주재 북한 무역대표부 수산대표'라고 발표했다. 이 사항에 대해 KAL가족회는 지속적으로 진위 확인을 요청했으나 정부는 끝내 사실 확인을 거부했었다.

그런데 종합보고서에 따르면, ‘앙골라 주재 북한 대사관원 중에 김원석이 없음’을 보고한 1988.1.15 수사 발표 이전 전문 2건과 수사 발표 후 수신된 전문 2건을 확인하였고, 1988. 5 입수한 앙골라 수산 건설사 근무 ‘KIM WON SEOK'은 앙골라 입국 일자가 ’1986.6.15‘로서 ’1986.8‘ 이라고 얘기한 진술과 유사점이 있으나, 직업, 생년월일, 처 이름 등에서 김현희 진술과 차이를 보였으며, 김현희도 아버지가 아니라고 진술했다 함, 즉 KIM WON SEOK은 동명이인(同名異人)으로 확인된 것이다. (종합보고서 Ⅲ, 366쪽)

결국 안기부가 발표한 김현희 아버지의 '앙골라 주재 북한 무역대표부 수산대표'는 사실이 아니었음이 1988년에 이미 확인된 사안이었으나, 정부는 의혹을 제기한 KAL기 실종자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밝히지 않고 지금까지 ‘쉬쉬’했던 셈이다. 폭행과 고문, 자백 강요로 악명 높았던 안기부는 왜 이 같은 오류에 대해 김현희를 추궁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과연 김현희가 밝힌 아버지 김원석(58세), 어머니 임명식(54세) 등의 가족관계도 사실일까? 국정원 과거사위는 '1962년도 DP리스트에는 ‘KIM UON-SOK'이 하바나 주재 북괴 대사관으로 근무하였고, 처는 ’YM MYEN-SIK'으로 기재돼 있다는 전문을 확인했음' (종합보고서 Ⅲ, 364쪽)이라고 하나 그 두 사람의 자녀 중 김현희 존재를 확인했다는 조사는 역시 없다.

게다가 1987.11 출간된 <북한인물록>에 ‘1962.2-1970.2 쿠바 주재 북괴 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한 김원석은 있으나, 1962년 이전의 이력이 김현희 진술과 다르다. 즉 <북한인물록>에는 김원석이 1961.9. 군사정전위원회 위원(대좌), 1962년 인민군 소장이나 김현희 진술의 1961.4 김일성종합대학 영어과 졸업, 외교부 배치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종합보고서 Ⅲ, 365쪽)

4. 김현희의 연령과 북한 학제는 일치하는가?

김현희의 생년월일은 1962.1.27(26세)로 1968.9~1972년.8 평양 하신인민학교 4년을 졸업했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1972.9 부분적 <11년제 의무교육>을 실시한 이후 취학연령을 만 7세에서 1년 하향하여 만 6세로 했다. (국가정보원 홈페이지, 북한정보, 소학교. 통일교육협의회 ‘북한교육’도 같은 내용) 즉, 1966년 11월 채택 된 북한의 <9년제 기술의무교육>에 따르면 김현희는 만 7세가 되는 1969년 9월이 인민학교 입학년도가 된다.

따라서 김현희가 진술한 중학교, 대학교 입학년도 모두 틀린 것이 된다. 대학교 입학은 인민학교 4년과 중학교 5년을 마친 법적 취업연령인 만 17세(‘북한교육제도 어떻게 변해왔나’, 2001.9.5 연합, 중앙일보)가 되는 1979년 9월이 되어야 하나, 김현희는 1977년 9월에 김일성 종합대학 예과에 입학했다고 진술하여 북한 학제와 2년의 차이를 보여 준다.

또한 1962.1.27 생은 만 6세가 되는 1968년 4월이 북한 유치원 입학년도가 될 것이다. 따라서 김현희가 진술한 1966년 귀국 전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내 유치원 그리고 북한에 입국한 1967.4-1968.8 유치원에 다녔다는 진술도 북한 학제와 부합되지 않는다.

국정원 과거사위는 1972년 9월 유치원 높은반 1년, 인민학교 5년과 중학교 6년의 <11년제 의무교육> 방침을 결정, 같은 해 9월부터 유치원 의무교육을 단계적으로 확대 실시하고, 1975년 9월부터 전반적으로 시행된 <11년제 의무교육> 제도를 ‘시간을 거슬러’ 김현희 학력 진술을 비교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종합보고서 Ⅲ, 371쪽 도표)

결국 1988.1.16 조선중앙통신사 성명에 ‘대학 2학년 재학 중인 1980년 2월 선발돼 7년 8개월 동안 특수 훈련을 받았다면, 북한의 학령기준으로 볼 때 28살이 되어야 하는데 26살이라고 한 것은 어떻게 계산 된 것’이냐(종합보고서 Ⅲ, 370쪽 )는 물음은 ‘정당하다’ 할 것이다.

이렇듯 김현희는 자신의 출생지, 집 주소, 평양 시내의 병원 위치, 아버지 직업, 북학의 학제와 상이한 학력 등 북한 기억들이 ‘사사건건’ 틀린 그야말로 ‘공 테이프’ 기억들을 보여 주었다. 대한항공 858기 폭파를 위해 북한 출발 전 낭독했다는 ‘충성맹세문'을 정확히 기억하여 재판 과정에서도 재현했다는 김현희, 그러나 검찰의 신문에 조선노동당 당원증 번호도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 (‘김현희 노동당 당원증 없었다’, 2004.7.4.연합뉴스) 기억력이 좋고 머리가 명석해서 정예공작원으로 차출되었다는 김현희, 어찌 된 일인가?

▲ 좌측, 김현희 자필 충성맹세문을 검토한 ‘북한 귀순자’는 틀림없이 여기 사람이 쓴 것이라 증언했다. 우측, 안기부 수사발표시 제시한 1972년 남북조절위 당시 남측 장기영대표에 꽃다발을 증정한 둥근귀의 화동소녀는 김현희가 아닌 것으로 판명됐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16년간의 의혹과 진실, 김현희 KAL858 폭파 사건” 2003.11.29 SBS 방송 화면]

5. 북한 출신 ‘유일 물증’이라는 ‘빛바랜’ 화동 사진


특별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김현희의 북한 출신 ‘입증’에 있어서 국정원 과거사위는 그 어떤 새로운 증거 제시 없이, 여전히 일본 언론사서 건네받았다는 ‘빛바랜’ 화동사진에만 의존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국정원 과거사위는 안기부가 김현희가 북한 출신임을 내세우기 위한 ‘유일한 물증’으로 화동사진을 제시하다 망신당한 사례를 재연(再演)한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당시 북한의 <9년제 기술의무교육> 학제에 따르면, 김현희가 ‘남북조절위 한국측 장기영 대표에 꽃다발을 증정’했다는 1972년 11월 2일은 ‘중학 1학년’이 아니라 ‘인민학교 4학년’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1988년 1월 5일 안기부 수사 발표시 공개했던 ‘장기영 대표에 꽃다발을 증정했던 화동소녀’가 김현희가 아님이 확인됐고, 다시 일본 공산당 기관지 기자 ‘하기와라 료(萩原 遼)‘가 등장, 1988.3.6 일본 잡지 <그라프 곤니치와>에 게재된 새로운 화동사진을 김현희에 보여주자 “이게 어릴적 내 모습이 맞다”라고 한 화동소녀(日紙사진 “틀림없는 내모습” 1988.3.15 경향신문)는 평양외국어학원의 교원 정희선임이 판명됐다.

국정원 과거사위는 ‘김현희가 왜 두 차례나 자신이 아닌 소녀를 자신이라고 진술했는지에 대해서는 김현희의 진술 외에는 달리 확인할 방법이 없음’(종합보고서 Ⅲ, 363쪽)이라고 결론내리면서, 은둔 생활을 하는 김현희 본인의 확인이나 그 어떤 전문 감정서 없이 2004년 요미우리 신년호에 게재된 사진은 ‘조작’이 아니며, 일본서 전량 확보했다는 하기와라 료의 사진 가운데 귀모양은 커녕 얼굴 윤곽조차 확인 안 되는 화동사진에 “김현희가 있었다”라며 ‘헛되고 헛된’ 주장을 되풀이 했다.

거짓말이 또 다른 거짓말을 만들어 내는 화동사진 ‘말 바꾸기’ 과정은 2006년 8월 3일 본인 기고문 “진실위 발표, 무엇을 신뢰하란 말인가”[관련기사 보기]를 통해 살펴봤고, 2006년 9월 12일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 회원이신 최재수님은 기고문 “사진속 화동 김현희 아니다”[관련기사 보기]에서 국제적인 거짓말쟁이 하기와라 료의 주장을 꼼꼼하고 세심하게 논박하고, 국정원 과거사위가 화동사진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궁색한 처지’를 속 시원하게 면박(面駁)해 주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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