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 특집 연재 순서


① 개괄-잊혀진 통한의 100년
② 기록으로 본 간토대지진과 조선인학살
③ 자료와 증언-일제는 조선인을 어떻게 학살했나
④ 北은 간토대학살을 어떻게 보고 있나
⑤ 강요된 망각과 시무(時務)의 역사연구
⑥ 특별기고-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들어가는 말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전 국사편찬위원장 [통일뉴스 자료사진]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전 국사편찬위원장 [통일뉴스 자료사진]

‘간토(關東) 조선인 대학살’이 있은 지 올해가 100년이다. 가해자인 일본 정부와 군경은 애써 이를 외면하고 있으며, 피해자측에서도 정부나 국회 모두 이에 대한 역사적인 책임을 묻지 않고 있다. 간혹 한일관계의 아픈 상처를 씻어내야 한다고 양념삼아 들먹이고는 있지만, 두 나라 사이에는 이 문제를 정식 의제로 상정하여 이 큰 상처를 풀어보려고 하는 의도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도 역사의식이 있는 한일 양국의 인민들 가운데는 저 비극의 역사를 그냥 방치해 둘 수 없다고 하면서 그 비극의 실상을 밝히고 역사 앞에 사죄해야 한다고 꾸준히 주장해온 이들이 있다. 1963년 재일사학자 강덕상(姜德相)과 금병동(琴秉洞)이 <현대사 자료 6: 간토대진재와 조선인>을 출간, 이 문제에 대한 학문적인 정리에 힘썼다.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을 규명하려는 한국측 시민운동과 관련해서는 김종수가 언급한 것이 있다. 일본의 시민단체도 간토지역에서 자행된 조선인 학살을 잊어서는 안된다면서 추도행사를 계속하는 이도 있다. 일본 시민단체들도 관심을 갖고 추모행사를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일조협회는 1973년 9월 1일, 도쿄 요코아미쵸 공원에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를 세우고 50년 동안 추도식을 열고 있으며, 니시자키 마사오 봉선화 이사는 1982년 이래 학살 장소인 아라카와 강변에 자리잡고 진상규명과 추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비극의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일본 시민과 단체들에 대해 감사의 말을 먼저 전하지 않을 수 없다. 

간토조선인학살은 그것을 치유하지 않는 한 언제나 간헐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아픈 상처다. 그 비극이 일어난 지 100년을 맞아서도 일본은 이 상처를 아물게 할 조치를 선제적으로 취하지 않는다. 동양에서 가장 일찍이 근대국가로 발돋음했다는 일본이 왜 이 야만적인 ‘제노사이드’를 없는 듯이 방치해 왔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이 탈아입구(脫亞入歐)의 호기를 부리며 자기들은 동양의 야만인들과는 다르다고 하면서, 유럽인들이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상대로 야수적인 학살을 자행했던 것과 같이, 이같은 학살행위를 국가 공인 하에 거리낌 없이 자행했던 것일까. 

일본이 간토대학살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보여준 자세는 근대국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야수적이었다.

그 동안 간토대지진 때의 ‘조선인대학살’에 대해서는 당시 일본 정부나 조선총독부가 이를 정직하게 밝힌 바 없다. 그 원인이나 진행과정, 가해자와 희생자들, 특히 당시 일본의 군․경․민(自警團)에 의해 희생된 이들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공식적으로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는 그 사건의 전말과 관여자 및 희생자들의 전모를 파악하고 있을 일본 정부가 제대로 이 사실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923년 9월, ‘간토대진재(關東大震災)를 계기로 ‘조선인대학살’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중국인, '류구인'(琉球人, 오키나와인)에 대한 학살도 있었고, ‘대역(大逆) 사건’이라 하여 무정부주의자(혹은 공산주의자)들을 소탕하려는 계획도 있었다. 박열과 가네코후미코(金子文子)와 관련된 사건도 이 때 일어났다. 여기서는 <간토 조선인 대학살>에 국한해서 언급하겠다.

 

간토대지진 전체 지역 조감도.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한국이민사박물관 기획특별전 재촬영]
간토대지진 전체 지역 조감도.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한국이민사박물관 기획특별전 재촬영]

1. 1923년 ‘간토대지진’과 조선인 대학살

1923년 9월 1일 토요일 11시 58분, 도쿄(東京)를 중심으로 한 간토 일대에 진도 7.9의 대규모의 지진이 발생했다. 진원지는 가나가와(神奈川) 현 앞바다인 사가미(相模) 만에서부터 도쿄 만, 지바(千葉) 현이 있는 보소(房總) 반도까지 간토 지역 남쪽 바다를 아우르는 넓은 지역이었다. 이 지진은 간토 지역의 1부(府), 6현(縣)에 걸쳐 있었으며 이로 인해 99,331명이 사망하였다. 가옥 파괴로는, 128,266 가옥이 전파되었고 126,233 가옥이 반파되었으며, 소실된 가옥 수는 447,128호에 달했다.(피해규모는 여러 형태로 알려져 있어서 그 숫자는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수치에 차이가 있지만 2015년에 번역된 가토 나오키(加藤直樹)의 『구월, 도쿄의 거리에서』-1923년 간토대지진 대량학살의 잔향-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썼다.

“도심은 거의 괴멸상태였다. 지진이 점심 무렵 일어난 탓에 화재 피해는 더 컸다. 무너진 가옥에서 새어 나온 불길이 동시다발적인 화재를 일으키며 강풍을 타고 퍼져 나갔다. 화재는 9월 3일 아침에야 완전히 진압되었다. 도쿄 시의 약 44%가 소실되었고, 요코시마의 경우 80%에 달하는 지역이 소실되었다. 도심의 광범위한 지역이 불타 허허벌판이 된 탓에 다음 날, 구단자카 언덕 위에 서면 도쿄 만이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파괴된 가옥은 약 29만 3천동,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는 10만 오천명을 넘었다. 피해 총액은 당시 국가 예산의 3.4배에 달했다.”    

그 무렵 오산을 졸업하고 일본 유학길에 나섰던 함석헌은 지진 당일 ‘간토대지진’을 경험하고 뒷날 「내가 겪은 관동대지진」(함석헌전집 6, 255-296)이란 긴 글을 남켰다. 당시 그는 정주 오산학교를 마치고 유학차 도쿄 유시마(湯島)에 하숙하면서 간다(神田)에 있는 세이소쿠(正則)학교에 다니다가 그 무렵 하숙집을 혼고구(本鄕區) 사카나마치(肴町)로 옮겼다. 그는 9월 1일 아침, 유시마에 있는 지인 함덕일(咸德一)을 만나러 갔다가 그곳에서 지진을 당하게 되었다. 함석헌은 그 때 직접 경험한 간토대지진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만세 부르고 헤어진 후 못만나고 있던 그[함덕일]를 5년만에 여기서 만나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동안에 정오가 거의 다 됐습니다. 그래 시계를 끄집어내 보며 일어서 가려고 하니 덕일이가 붙잡으며 점심 때가 됐으니 점심을 먹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앉을까 말까 망설이는 순간 갑자기 우르르 하고 진동이 왔습니다. 입에서마다 ‘지진이다!’하고 외침이 나왔습니다.…그래 우리도 첨엔 상당히 강하기 때문에 ‘지진이다’ 하면서도 나가려고는 아니 했습니다. 그러나 웬걸, 조금 있다간 흔들흔들 또 조금 있다간 흔들흔들 점점 심하게 오는데 보통이 아닙니다. 순간 겁이 번개같이 머리들을 스쳤습니다. ‘나가야 한다!’…황급히 층계를 달려내려와 현관을 썩 나서니 지붕에서 떨어지는 기왓장이 비오듯 합니다. 빈 곳으로 달려가려 하니 어찌 심이 흔들리는지 걸음을 옮겨놓을 수가 없습니다. 전신주를 바라보니 노대(태풍) 만난 뱃대처럼 누웠다 일어났다 합니다.…조금 뜸해지는 것을 타서 사방을 바라보니 사람마다 집앞에 서서 두 손을 싹싹 비비며 ‘오 가미사마(神樣), 오 가미사마’ 하고 부르는 것입니다.…조금 있노라니 사람들이 모두 이삿짐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첨에는 무슨 영문인지를 몰랐습니다. 후에 들으니 지진이 심하면 반드시 화재가 난답니다.…후에야 안 일이지만 그때가 바로 정오 직전 모든 집에서 점심 준비를 하고 있던 때이므로 불을 많이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한 지진이 왔기 때문에 모두 집이 무너지고 치어 죽을 생각만 하고, 미처 불을 끌 생각을 못하고 그냥 놓고 달려나갔기 때문에 사방에서 불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지진으로 수도관이 모두 끊어진 데가 많기 때문에 불끌 물을 구할 수가 없어져서 더 심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의 전 시가 다 타버렸습니다.”(함석헌전집6 268-270)

함석헌의 술회는 더 계속된다. 그는 자기 하숙으로 돌아오지 않고 친구와 함께 간다쿠(神田區)가 활활 붙타는 것을 보면서 우에노(上野) 공원으로 가서 거기에 있는 시노바츠노이케(不忍池)라는 넓은 연못을 의지, 불길을 피하면서 수많은 사람과 함께 몇 시간 동안 피난하다가 자기 하숙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밤에 바람이 연못 쪽으로 불어 불길이 연못가의 피난민들을 덮치게 되자, 연못가의 피난민들은 불길을 피하려다 대부분 연못에 빠져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함석헌은 자기 하숙으로 돌아와 생명을 건졌지만 그 뒤 ‘이제 진짜다!’라고 표현한 조선인 사냥, 즉 조선인 학살을 경험하게 되었다.

‘간토대지진’은 45만여의 가옥을 파괴했고 10여만명의 이재민을 냈다. 대지진은 생명과 주거를 잃은 민중들의 이성을 마비시켰고, 이를 수습해야 할 정부는 책임전가를 위한 유설(流說)을 퍼뜨렸다. 책임전가 음모의 일환으로 나온 것이라고 밖에는 해석될 수 없는 유언비어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조선인이 방화하고 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풀고 있다’, ‘조선인이 부녀자를 강간하고 있다’는 등 사회불안을 조성하는 내용이었다. 자연재해에 의한 사회불안을 인위적으로 그 사회의 약자에게 전가시키려는 수작이었다. 이 내용이 조선인과 관련된 것이 많다는 점에서 일본 사회는 이 엄청난 자연재해에 대한 희생양을 찾았던 것이다. 당시 일본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라 할 조선인이 주 타깃이 되고 ‘지나’(중국)인과 류구인, 공산주의자들도 희생 대상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정부는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계엄령을 발포, 도쿄부 전 지역과 가나가와 현으로까지 확대시켰다. 일본 헌법 제 8조에 규정되어 있는 계엄령은 전쟁 또는 사변시에 대외방비를 목적으로 일반 행정권을 정지시키고 군에 의해 국민생활을 통제하도록 한 것이다. 계엄령법 제 1조는 “계엄령은 전시 혹은 사변 시의 병비(兵備)로서 전국 혹은 한 지방을 경계하는 법이다”라고 명시하여 전쟁 또는 사변이 일어났을 때에 발하는 것이다. 그 전에는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 등 모두 전시하에서 선포되었던 것이다. 강효숙은 당시 발포된 계엄령이 전시가 아닌 상황에서 발포되어 계엄법을 따르지 않았고 추밀원 고문의 자문도 받지 않아 절차상의 하자도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엄령이 발포됨으로 계엄령이 아니면 다스리지 못할 위기 상황이 발생했다는 잘못된 신호를 일본 사회에 주고 있었다.

계엄령을 유발한 ‘유언비어’에 대해서는 그 진원지를 두고 내각설, 군벌설, 경시청설, 사회주의자설 등이 있다. 당시 도쿄의 히비야(日比谷)공원이나 궁성 앞에 50만, 우에노(上野)공원및 야스쿠니(靖國) 신사 등에 10여만명 등이 모여 극도의 혼란과 사회불안이 조성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와 내무성 경보국장 고토 후미오(後藤文大), 경시총감 아카이케 미노루(赤池濃) 등이 사실상 치안대책을 총괄하면서 비상수단으로 계엄령 선포를 논의했고 군 당국자에 대해서도 군대의 출병을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가 9월 1일 오후 2시경이었다. 

문제는 전시나 내란에만 선포토록 된 계엄령을 선포할 명분이었다. 당시 내무대신이었던 미즈노 렌타로는 계엄 선포이유를 ‘조선인 내습’이라는 폭동설 때문이라고 밝혔다. 일본 정부는 9월 2일 오후 6시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 무렵이면 일본 정부가 조선인 폭동에 대한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유포하고 있었다.

강덕상은 간토대학살 당시 계엄사령부에 관련된 인사들 중에는 식민지 조선에서 활동한 이들이 많았다고 지적한다. 지진이 일어났을 때 내무장관이었던 미즈노 렌타로는 조선 정무총감으로 있다가 영전해 왔으며, 조선의 내무장관을 역임한 우사미 가쓰오(宇佐美勝夫)는 지진 당시 동경부지사였다. 관동대지진 당시 군사참의관 4명 중 가장 우수한 우쓰노미야 미야타로(宇都宮太郞)는 3.1운동 당시 조선주둔군 사령관으로 7천 수백명을 살해했고, 오바 지로(大庭二郞)는 3천 수백명을 죽인 간도사건 침공군 총사령관이었다. 간토대지진 때 도쿄 주둔의 제1사단장 미시미쓰 나오미(石光眞臣)는 3.1운동 당시 헌병사령관이었고, 간토대지진 때 계엄사령부 참모장인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는 뒤에 조선 총독이 되었다. 

따라서 강덕상은 이 때 계엄령을 발동한 원인으로 “식민지 반란과 사회주의적 항일세력의 출현, 시베리아 출병과 패배, 청산리전투의 대패 등에 따른 위기감”과 관련시켜 설명했다. 강덕상, 「한일관계에서 본 관동대지진」『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33-35, (동북아역사재단, 2013) 

일본에서도 계엄령 선포는 전쟁 또는 사변을 전제로 한 것으로 대외 방어를 위해 행정권을 정지시키고 군이 국민생활을 통활토록 한 것이다. 그래서 일본군의 통활 하에서 이뤄진 조선인 학살은 ‘일본 내에서 발생한 일본 민족과 조선민족 사이에 발생한 민족전쟁’과 다를 바가 없었다. 

눈여겨볼 것은 계엄령이 발포되기 전에 군대가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군 보병여단 제1연대가 9월 1일 밤 10시에 출병했을 때는 계엄령 반포 전이었다. 피난민 구호가 출병목적이었다고 하지만 그들이 치바현 나라시노(習志野)와 이치가와(市川)의 고노다이(国府台)에서 도쿄로 진군한 후 9월 2일 오전 9시경부터는 도쿄 고토(江東)지역 거주 조선인 학살로 그 목적이 변경되어 있었다. 재일조선인은 단지 조선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유 없이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학살당한 것이다.

당시 경시청 자료에서도 ”유언비어가 처음 관내에 유포된 것은 9월 1일 오후 1시경인 것같고, 2일부터 3일에 걸쳐 가장 심했으며, 그 종류도 또한 다종다양하였다”, “조선인 폭동의 비화(蜚話)는 홀연히 사방으로 전파되어 그 유포 범위 또한 대단히 넓었다”. 뒷날 일본 변협이 보고서를 통해 적절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당초 조선인이 방화, 폭탄소지 및 투척, 우물에 독물투입 등의 ‘불령행위’를 했다는 선전은 객관적 사실이 아닌 유언비어“였다. 

조선인이 음해를 가하고 있다는 비화 혹은 유언은 대지진 발생 후 한 시간 정도 후인 1시경부터였는데, 도쿄 지역에서는 이미 유언비어가 퍼져가고 있었고, 경시청도 “조선인 폭동”, “불령행위” 등의 언설이 적어도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점은 당시 자료에 “비화” 혹은 “유언”이라는 말로 기술되어 있다는 것이 당시 경시청조차도 “조선인 폭동”, “불령행위” 등을 객관적 사실로 보지 않았음을 보여줄 뿐아니라 경시청 관내의 각 경찰서가 조선인에 대한 살해 등에 대해 상세히 기록한 자료인 「대정대진화재지초」(大正大震火災誌抄)에도 “조선인 폭동에 대한 유언이 기세 좋게 퍼져”, “조선인 폭거 유언이 퍼져”, “유언비어가 처음으로 관내에 전파되어” 등으로 기재되어 있다는 데서도 확인된다. 

이처럼 자료에 일관되게 '유언'이란 표현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경시청도 이미 조선인의 '폭동' 등이 유언비어임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조선인 폭동의 실체가 의심스러웠지만, 9월 5일 임시진재사무국 경비부에 각계 관리들이 모여 선인(鮮人)문제에 대한 다음과 같은 결정을 했다. “조선인 폭행 또는 폭행하려고 한 사실을 적극 조사해서 긍정적으로 노력할 것. 동시에 아래 사항에 대해서 노력할 것. 1. 풍설(風說)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이를 사실로 할 수 있는 한 긍정할 수 있도록 힘쓸 것. 2. 풍설선전의 근거를 충분히 조사할 것” 등이었다. 이렇게 진재 관리를 맡은 관청이 풍설의 근거 없음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철저히 조사하라고 조심스런 반응을 보였지만, 조선인에 대한 학살은 지진 당일부터 시작되었다. 

일본 사법관청이 ‘불령선인’에 대한 범죄여부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가는 이 해 10월 20일 사법성의 발표에서 보인다. 지진이 있은 지 한참 후에 발표된 것은 아마도 사법적 절차를 밟은 후에 이뤄진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법성은 “금회의 변재(變災)에 즈음하여 조선인에게 불법행위를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널리 알려졌는데, 지금 그 진상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일반 조선인은 대체로 양순하다고 인정되지만, 일부 불량 조선인 무리들이 있어 일정 범죄를 저지르고 그 사실이 유도되기에 이른 결과, 변재로 인한 민심 불안에서 공포와 흥분이 극에 달해 왕왕 무고한 조선인 혹은 내지인을 불령조선인으로 오인하여 자위의 수단으로 위해를 가한 사범이 생겼기 때문에 당국은 이에 대해서도 엄밀히 조사하고 이미 기소된 것이 수십건에 이르고 있다. 요컨대 일부 불량조선인이 범죄를 일으켰기 때문에 오살(誤殺)되었다고 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그들의 조사에서도 조선인들은 양순하지만 ‘일부 불량조선인 무리들’이라고 함으로써 이미 저지른 그들의 조선인 학살을 정당화하고 있다. 사법성 조사에 따른 관동대지진시 조선인 ‘범죄’의 신빙성 분석표에 따르면, 범죄 유형은 유언비어, 방화, 협박, 강간, 강도, 상해, 강도살인, 강간살인, 교량파괴, 절도, 독살예비, 절도, 횡령, 절도횡령, 장물운반 등이었다. 

여러가지 정황에 비춰볼 때, 당시 정부 당국은 근거없이 떠도는 조선인에 대한 악의적인 비난들이 ‘유언비어’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당국은, 의도했는지는 모르지만, 천재지변에서 오는 국민들의 좌절감을 카타르시스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 같다. 조선인을 포함한 중국인 유구인 등이 유언비어의 대상이 되었을 때 그들은 방조하거나 더 부추겼고 조선인 희생자가 나타났을 때 오히려 이를 방치함으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제노사이드가 자행되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정부 당국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있는 군대와 경찰, 그리고 관청의 방조하에 조직 활동한 자경단(自警團)이 있었다.   

 

계엄령 공포와 조선인 학살 명령을 내린 주범으로 꼽히는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왼쪽)과 아카이케 아쓰시 도쿄 경시총감. 3.1운동 당시 각각 조선총독부 정무총감과 경무총감의 지위에 있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한국이민사박물관 기획특별전 재촬영] 
계엄령 공포와 조선인 학살 명령을 내린 주범으로 꼽히는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왼쪽)과 아카이케 아쓰시 도쿄 경시총감. 3.1운동 당시 각각 조선총독부 정무총감과 경무총감의 지위에 있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한국이민사박물관 기획특별전 재촬영] 

2. 조선인 학살의 양상과 규모

일본 정부의 방조하에 생산된 유언비어는, 간토대지진의 혼란을 틈타 조선 사람들이 폭행, 약탈, 방화, 폭탄투척, 집단습격, 부인능욕 및 우물에 독극물을 투입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조선인들이 내습하여 일종의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는 일본 정부에 의해 조직적으로 유포되었고, 일본 언론들 또한 이 근거없는 유언비어를 확인 절차 없이 보도했다. 일본 정부의 고지(告知)와 신문들의 허위 보도에 흥분한 일본 민중은 9월 1일 저녁부터 조선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고 학살이 본격화된 것은 4일 전후해서다. 일본의 군과 경찰은 물론 흥분한 민간인들도 관청의 묵인 하에 자경단을 조직, 조선인들을 학살하였다. 

그러니까 이 학살사건은 관동대지진을 빌미로 일본 정부의 유언비어 방관에 일본 민족이 현혹되어 저지른 일종의 집단학살 제노사이드라고 할 것이다. 

조선인을 학살하는 과정에서 일본인과 혼동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체포된 사람들 중에서 자신은 일본인이라고 항변해도 구출받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경우를 미리 대비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일본정부는 식민지 초기(1913)부터 전국 경찰서나 관청에서 조선인을 쉽게 식별할 수 있도록 「조선인 식별 자료에 관한 건(朝鮮人識別資料に関する件)」이라는 일종의 메뉴얼을 내무성 경보국(警保局)에서 작성한 바 있다. 이 중 언어 부분이 특히 강조되어 있는데 조선인은 “탁음 발음이 곤란하다”든가, 발음할 때 일본어의 ‘라행(ラ行)’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것을 들었다. 

예를 들면 당시 조선인이 일본의 탁음 발음에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자경단원들도 통행인을 검문하면서 ‘15엔 55센’(쥬고엔 고쥬고센)을 연속으로 말해보라고 하고 탁음 발음이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조선인으로 간주, 그 장소에서 살해되곤 했다. 조선인은 탁음이 없기 때문에 ‘쥬고엔 고쮸 고센’으로밖에는 발음이 되지 않았다. 또 ‘라행(ラ行)’을 발음하도록 유도했는데 그들은 한국인이 라(ラ)는 나(ナ), 리(リ)는 이(イ)로 발음한다는 것을 알고 조선인들에게 “라리루레로를 해보라”고 반복적으로 유도하여 발음이 의심스러우면 처단했던 것이다.  

간토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에 대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피살된 조선인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아직도 없는 실정이라고 한다. 일본 당국과 조선총독부가 강력한 언론통제를 시행했기 때문에 실상이 밝혀질 수가 없었다. 때문에 학살 당시의 일제 당국의 발표는 축소지향적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간토 지방에 살고 있는 조선인은 노동자 3천명, 학생 3천명 도합 6천명인데 조사 결과 조선인 피살자는 2명 뿐이라 했고, 일본 정부도 1923년 11월 13일 현재 조선인 피살자 233명, 중상 15명 경상 27명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최근까지 밝혀진 것은 당시의 발표가 얼마나 허구였는가를 보여준다. 최근에 간행된 가토 나오키(加藤直樹)의 『구월, 도쿄의 거리에서』-1923년 간토대지진 대량학살의 잔향-는 공공 기록은 아니지만 민간 기록들에서 밝혀진 학살상을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이 책 앞부분에 제시된 몇 몇 사례들만을 예시코자 한다. 

▶지진이 발생한 9월 1일 저녁, 오이마치 거리에는 이미 일본도나 도비구치, 톱 따위를 든 사람들이 나타나 ‘조선인을 죽여라’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37쪽, 전석필) 

▶ 그리하여 자경단이 통행인을 붙들고 “‘바 비 부 베 보’라고 말해 보라”거나 “‘15엔 50센’이라고 말해 봐”라며 조선인들이 발음하기 어려운 말을 시키고 힐문하는 광경이 각처에서 벌어졌다. (40쪽)    

▶ 요쓰기바시 다리를 건너는데 거기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 셋을 두들겨 패 죽이고 있더라구. 우리는 그걸 곁눈질로 보면서 다리를 건넜어.(41쪽, 조인승)…스무 명에서 서른 명의 사람들이 소총이나 칼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이다.(44쪽)

▶ 도쿄 부 내에만 그 수가 1천개 이상이었던 자경단은, 거리 모퉁이에서 길가는 사람을 붙들어 신분을 조사하고 조선인으로 의심되는 경우 마구 폭행을 저지른 후 맘에 내키는 대로 죽이거나 경찰에 넘기거나 했다.(48쪽) 경찰이 자경단과 함께 조선인을 뒤쫓는 경우마저 있었다고 한다.…경시청 간부들도 수많은 보고가 밀어닥치자 점점 유언비어를 믿게 된다.(51쪽)

▶ 하지만 도쿄로 습격하러 온다던 선(조선)인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뭔가 이상하다 싶더니 10시쯤이 되어서는 그 정보가 허위인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정말 우스꽝스러운 일이었습니다. (50쪽, 쇼리키 마쓰다로 正力松太郞)  

▶ 유언비어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명령을 내린 경시청이었지만, 2일 밤과 다음날인 3일에 이르러서는 조선인 폭동이 과연 실재하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조사를 해 봐도 유언비어를 뒷받침할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어었다.(54쪽)

▶ 가메이도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쯤이었다.…그 안에 섞인 조선인은 모두 끌려내려왔다. 그리고는 즉시 칼과 총검 아래 차례차례 쓰러져갔다. 일본인 피난민 속에서 만세를 외치고 환호하는 소리가 폭풍우처럼 끓어나왔다. “나라의 원수! 조선인은 모두 죽여라!”그들을 첫 제물로 삼아 우리 연대는 그날 저녁부터 밤에 걸쳐 본격적인 조선인 사냥을 시작했다.(56쪽, 엣추야 리이치 越中谷利一)

▶ 아마도 3일 점심때였어. 아라카와 강의 요쓰기바시 하류에 자경단들이 줄에 묶인 조선인 몇명을 끌고 와서 죽였지, 정말 잔인했어. 일본도로 자르거나 죽창이나 쇠막대기로 찌르거나 해서 죽였어. 여자, 그 중에는 배부른 사람도 있었지만 다 죽였어. 내가 본 것만 30명 정도 죽였어.(67-68쪽, 아오키-가명)[이하 268쪽까지는 생략]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자들의 수가 얼마나 되었을까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견해를 밝혔으나 아직도 그 정확한 수자를 알 수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처음에는 2명, 나중에는 813명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일본 사법성이 230명을 발표했으나 그것은 터무니 없는 수자이며 그 무렵 일본 신문들은 40여명으로 추산하고 있었다. 일본인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가 처음에는 724명, 뒤에는 2,613명을 발표한 바 있고, 재일본 관동지방 이재조선동포위문단 조사발표에서도 1,781명이라고 발표한 바가 있었다. 

‘간토대학살’이 일어나자 당시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여기에 가장 깊은 관심을 보였다. 임정은 그 기관지 『독립신문』(1923년 12월 5일)에서 6,661명을 제시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으나 현재 한국사 개설서나 고등학교 교과서 등에서는 6천여명이 희생되었다는 이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장세윤의 「관동대진재시 한인학살에 대한 『독립신문』의 보도와  최근 연구동향」(『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에 밝힌 바 있어서 이를 중심으로 간단히 소개하겠다. 

'관동대학살’ 당시 독립신문사 사장은 김승학. 그의 술회에 의하면 학살 소식을 듣고 그는 나고야(名古屋)에 있던 한세복을 도쿄로 파견, 조선인 학살의 진상을 보고토록 했다. 한세복의 활동은 ‘재일본관동지방 이재조선동포위문반‘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이 해 10월 5일에는 상해거류 한인들이 독립신문 사장 김승학과 윤기섭, 여운형 등 7명을 집행위원으로 선정했다. 그 뒤 『독립신문』에는 조선인학살과 관련된 기사들이 오르는데, 기사의 정확도에는 문제가 있으나 기사화된 사항 중 몇 개를 소개한다. 

▶ 1923.9.19: 천재지변의 화를 조선인에게 전가, 군경(軍警)에 수금된 한인 1만5천명이 조선인 참살(慘殺) 등 항의, 1만 5천 조선인 석방 

▶ 1923,10.13: 군에서 동포 13,000인 별도 수용 후, 기관총으로 사살 조선인 사망자 6,7천인 

▶ 1923.11.10: 우리 동포 수천명이 학살되었는데 그 원인은 일본 당국이 일본인들의 민원을 한인 동포들에게 전가한 데 있다고 파악, 보도함

▶ 1923.12.5: 본사 피학살교일(僑日)동포 특파조사원 제 1신 <1만의 희생자>, 각 지역의 희생자 통계를 적시하고 합계 6,661명이 피살되었다고 보도함

▶ 1923.12.26: “적에게 희생된 동포 횡빈(橫濱)에만 1만 5천”-총계 2만 1천 6백여명/ 독일인 부르크하르트 박사의 증언을 토대로 2만1,600여명 피살로 종합 보도 

12월 26일자 기사에서 “'덕국'(德國, 독일) 뿌 박사가 발표한 바에 의하면, 횡빈(橫濱, 요코하마)에서만 1만 5천의 학살이 잇섯다 한즉 본사 특파원이 조사한 바는 횡빈의 분(分)이 포함되지 아니한 모양이니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보도되는 바를 종합하면 전부 2만여명이라는 가경(可驚)할 다수로 산정되더라”는 기사가 있다. 이는 그동안 연구자들이 놓치고 있던 부분이다. 

부르크하르트(Dr.Otto Bruchardt)는 동양미술 전공자로 1923년 9월 1일부터 8일까지 일본에 체류했는데 이 때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에게 참살당하는 것을 보았고, 이 해 10월 9일자로 [Vossiche Zeitung]지에 'Japanische Blutherrschaft in Korea'(한인에 대한 일본의 대량학살)이라는 글을 썼다. 또 상해의 [독립신문](1923년 12월 26일)은 부르크하르트가 귀국한 후 그를 방문한 한국유학생 고일청(高一淸) 황진남(黃鎭南)에게 “이 참상은 나만 보고 들을 뿐아니라 일본이 발표한 영자보(英字報)에 공보(公報)로 발포한 것이 있고 '서서국'(瑞西國, 스위스) 친구 한 사람은 나보다 더 자세히 보았습니다,”라고 보도했다. 부르크하르트가 독일 신문에 기고한 것을 본 한인 유학생들은 <유덕(留德)고려학우회> 이름으로 10월 12일 ‘한인학살’과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고 한다. 부르크하르트의 목격과 관련된 부분은 그 동안 학계에서 놓친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기서 당시 간행되고 있던 국내 민족지로 출발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관동대진재 시기의 조선인 학살과 관련해서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9월 1일부터 11일까지 학살사건과 관련해서는 게재금지 602건, 18건의 차압조치를 당했다. 당시 언론의 노력에 대해서는 과소평가할 수 없으나 여기서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

간토대학살 때 희생된 조선인들의 숫자가 독립신문에 발표된 6,661명설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근거와 관련, 강덕상의 연구를 참고하는 것이 좋겠다. 

그는 조선인대학살 당시 간토(關東)지방에 약 2만명의 조선인이 살았는데, 간토대진재 때 일본 관헌이 조선인을 강제수용한 숫자는 1만1천여명이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1만 1천명 이외의 9천여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의문을 제시할 수 있다. 그 차이 9천명이 모두 살해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로 보아 6천 6백이란 숫자가 근거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6천여명 설은 소홀하게 생각할 수 없다고 본다. 

또 앞서 언급한 독일인 부르크하르트가 제기한 문제를 좀 더 조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는 제 3자적 위치에 있던 학자로서 근거없이 요코하마(橫濱)에서만 1만 5천여명이 희생되었다고 언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북한에서 1980년대 초반에 2만 3천여명 피살설(『조선전사』 연표, 1983, 478쪽)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 수치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제시하지는 않았으나 아마도 [독립신문]등에 나타난 부르크하르트의 기록을 참고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당시 관동지방에 거류했던 조선인들의 숫자가 적게는 6천여명에서 많게는 2~3만명이었다는 세론이 있었던 만큼, 여러 자료를 이용하여 좀 더 면밀하게 조사가 진행된다면 조선인 학살 상황도 더 정확한 수치에 이를 것으로 본다.

 

지난 28일 열린 간토학살100주기 추도문화제에서 한일 시민들은 일본 정부에 더 이상 국가책임을 회피하지 말고 간토학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들에게 사죄하라고 촉구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지난 28일 열린 간토학살100주기 추도문화제에서 한일 시민들은 일본 정부에 더 이상 국가책임을 회피하지 말고 간토학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들에게 사죄하라고 촉구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나가는 말

‘간토대지진’과 ‘조선인학살’은 1923년 9월 1일부터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간토대지진’으로 불안감을 갖고 방황하던 일본인에게,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는 그들의 허탈감을 카타르시스시켜주는 효과를 가져왔을 지도 모른다. 일본 정부는 군․경과 자경단의 조선인 학살을 방조하고 있었다. 명백한 제노사이드였다. 일본 정부는 풍설을 조장하고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군․경․민이 합심하여 이 범죄를 저지를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주었다. 의도적인 것이라고 밖에는 해석할 수 없다.  

이같은 대학살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어가는 데도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표명이 없다. 그러나 일본변호사연합회가 이 문제를 제기했던 것은 고무적이다. 그들은 2003년 8월 25일자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에게 “국가는 관동대지진 직후에 조선인과 중국인에 대한 학살사건에 관해 군대에 학살된 피해자와 유족, 허위사실의 전달 등 국가의 행위로 자경단에게 학살된 피해자와 유족에 대해 그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또 “지진을 틈타 ‘불온한 조선인’에 의한 방화, 폭탄투척, 우물에 독극물 투입 등의 불법행위와 폭동이 있었다는 잘못된 정보를 내무성이라는 경비당국의 견해로 전달하고 인식시켰다”면서 이런 허위사실과 유언비어의 전달에 대해 “국가는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런 권고를 외면하고 있다. 간토대지진의 발생과정이나 그 피해에 관한 통계는 일본의 중앙방재회의에서 2006년부터 공식보고서를 간행하고 있다. 지금에 와서 남북한 당국이나 인민을 향해 사죄하는 것이 낯부끄러운 일이라면 굳이 한국 인민을 향해서가 아니라도 좋다. 이런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역사 앞에라도 솔직하게 고백하고 사죄받아야 한다.

1923년 9월 간토대진재 때에 조선인 학살 문제와 관련하여 부끄러운 것은 남북한 정부와 국회다. 남북한 정부가 ‘간토조선인대학살’에 대해 그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간토대학살이 자행된 때가 국권이 상실된 때였기 때문이라는 변명이 가능할 듯하지만 이런 제노사이드는 천부적인 인권사상에 의해서도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오히려 남북한 정부가 그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것이다. 

또 1965년 6월 22일에 체결된 ‘한일기본조약’ 제 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임을 확인한다”는 조문에 의거해서라도, 비록 그 조문의 ‘이미 무효’라는 시기를 양국이 달리 해석하고 있지만, 정부는 일본에 대해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에서는 어떤 노력을 했는가. 만시지탄이 없지 않지만, 19대 국회에서 유기홍 의원 등 103인이 2014년 4월에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을 제출한 적이 있다. 그러나 19대 국회는 이 문제를 처리하지 않고 미적거리다가 2016년 5월 29일 19대 국회가 임기만료됨에 따라 이 법안은 자동 폐기되고 말았다. 19대 국회에서는 또 2015년 3월, 이명수 의원 등 11인이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제안되었으나 이 역시 2016년 5월 19대 국회의 임기만료로 폐기되었다. 

20대 국회에 들어와서도 이명수 의원 등 10인이 2016년 9월,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조차도 2020년 5월 임기만료로 자동폐기되고 말았다. 국회가 이렇게 몇 번 시도했지만 법률로써 성사시키지 못한 이 현실, 이게 대한민국 국회의 민낯이다. 

간토대학살 100주년을 맞아 올해도 여야 의원 100명의 이름으로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을 제출했으나 언제 의결될 것인지 부지하세월이다. 간토조선인대학살 100주년을 맞아 정부와 국회가 이 지경이라면 시민단체라도 이 문제에 적극 나서지 않을 수 없다.   

올해 9월이면 ‘간토조선인대학살’이 있은지 꼭 100년이다. 우선 한일 양국민은 그 실체를 알아야 한다. 

‘민족적인 차별로’ 다른 민족을 대량학살한, 문명인으로서는 해서는 안될 야만적인 행위다.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앞서 자행된 이민족 대학살 제노사이드다. 우리는 먼저 그 만행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 실체에 대한 책임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용서와 화해는 책임을 통감한 데서 가능하다. 

이 문제로 한일 양국이 언제까지 적대시해야 하는가. 그렇다고 이런 껄그러운 과거를 도외시한 채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화해와 용서가 이뤄지면 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도 열릴 것이다. 이 또한 양국민의 몫이다. 우리는 이 수치스런 유산을 후세에 물려주어 그들의 짐이 되게 해서는 안된다. 양국은 정부든 민간단체든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정직해져야 한다. 아직도 제 본향을 찾지 못하고 구천을 헤매는 혼령들에게 한일 공동의 이름으로 안식처를 마련해 주는 것도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이 글은 2021년 9월 6일(월) 오후 1시, 국회 의원회관 제1간담회의실에서 개최된 학술회의 -1923년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학술토론회: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과 ‘대역사건’-의 기조발제를 보완한 것이다.

*이 글은 일일이 그 참고문헌의 출처를 밝히지 않고, 다음의 책과 논문들을 주로 참고했음을 밝힌다.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동북아역사재단, 2013)/ 가토 나오키(加藤直樹),『구월, 도쿄의 거리에서』-1923년 간토재지진 대량학살의 잔향-(갈무리, 2015)/ 강효숙, 「1923년 관동지역 조선인학살 관련 향후 연구에 대한 고찰-일변협(日辯協)의 보고서를 중심으로-」 『전북사학 제 47호』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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