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지역에서 발생한 대지진의 와중에 수천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한 대참극이 벌어졌다.

100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학살의 진상은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고 당시 계엄령을 발표해 조선인 학살을 주도한 일본 정부는 진상규명과 사죄, 배상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그날의 기억을 잊지 않고 다지는 일. 간토 대학살 100주기를 맞아 필요한 일이다.

[통일뉴스]는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를 맞아 특집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 특집 ① 개괄-잊혀진 통한의 100년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 특집 ② 기록으로 본 간토대지진과 조선인학살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 특집 ③ 자료와 증언-일제는 조선인을 어떻게 학살했나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 특집 ④ 北은 간토대학살을 어떻게 보고 있나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 특집 ⑤ 강요된 망각과 시무(時務)의 역사연구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 특집 ⑥ 특별기고-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누군가 의도를 갖고 감추려는 100년 전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는 건 어렵고도 힘든 일이다.

더군다나 국가권력이 자신들이 저지른 참혹한 죄상을 덮기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 조직적으로 은폐해온 사건이라면 더욱 그렇다.

100년전 일본 도쿄도와 6개현, 즉 간토지역에 닥친 대지진과 그 와중에 벌어진 전대미문의 조선인 대학살은 그 엄중한 실례이다.

메이지유신의 후예들인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일찌기 겪어보지 못한 자연재해에 직면해 심각한 정치 사회적 위기에 봉착하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열흘 남짓한 기간에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잔혹한 방법으로 식민지 조선에서 건너 온 '노동자'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다.

대지진과 도시 전체를 삼킨 화재속에 관헌의 사주를 받은 자경단은 흡사 피에 굶주린 악귀들인 것 처럼 '조선인 사냥'에 광분했다. 지금까지 널리 알려진 조선인 6천여명 희생설은 그 지옥같은 상황에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사체를 헤집고 다니며 조사한 최소한의 파악일 뿐이다.

그것은 명백히 일본 정부와 군대, 경찰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인 국가 개입에 의한 대학살이었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리히터 규모 7.9의 강진이 발생하면서 수십만채의 가옥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강풍을 타고 무서운 기세로 불길이 번져갔다. 숱한 사람이 깔려 죽고 불타죽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지진 발생 당일 도쿄 궁성앞 광장에 30만 여명의 피난민이 모여드는 등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경제공황의 와중에 1918년 전역을 뒤흔든 쌀폭동으로 흉흉한 민심을 겪은 바 있는 일본 정부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조선은 물론 재일 조선인 사회에서도 사회주의 노선에 입각한 혁명운동이 고양되고 있었고 무력투쟁으로 전환한 세력과 격돌을 경험한 일본 군부는 깊은 좌절감과 함께 '적화 조선인'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지진발생 당일 오후 임시각의를 열어 나온 긴급 대책은 뜻밖에도 '재일 조선인을 적으로 규정'하고 '학살을 법제화'한 계엄령이었다.

당시 일본 법률에 따르면 계엄령은 전시 또는 그에 준하는 사변이 발생한 경우, 그것도 반드시 내란 또는 폭동이 발생할 때만 공포할 수 있었다.

계엄령 공포 요건을 갖추기 위해 '조선인 폭동설'이 고안됐다. 그것은 민족배타주의를 부추기는 또 다른 범죄행위였다.

9월 2일 천황 칙령 401호로 계엄령을 공포하고 3일 내각비상회의에서 계엄사령부를 설치해 4만명에 달하는 군대와 경찰을 간토 일대에 집결시켰다. 

경찰서와 파출소 게시판에 '조선인이 봉기했다', '반항하면 죽여도 좋다'는 게시물이 붙었다. 일본 당국이 직접 계획하고 집행한 일이다.

계엄사령부에는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3.1운동 당시 정무총감, 최고지휘관), 도쿄 경시총감 아카이케 아쓰시(3.1운동 당시 경무총감, 경찰책임자), 도쿄부지사 우사미 가쓰오(조선총독부 내무장관),  군사 참의관 오바 지로(간도 작전 당시 조선주둔군 사령관),  제1사단 사단장 이시미쓰 미오미(3.1운동 당시 헌병사령관), 계엄사령부 참모장 아베 노부유키(시베리아 출병군 참모장) 등이 자리를 틀고 앉아 조선인 학살을 위한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동원돼 동학농민군, 독립의병과 전투를 벌이고 3.1운동을 진압하다 귀환한 재향군인들이 이에 적극 호응했다. 억압된 전쟁체험으로 트라우마를 겪고 있으나 불안정한 사회에 던져진 이들은 3,000여개에 달하는 자경단의 주축이 되어 망설임없이 무기를 들고 '불령선인'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참살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어린 아이들을 줄 세워놓고는 부모들이 보는 앞에서 목을 자르고 그 다음 그 부모들도 찔러 죽였다. 살아남은 조선인들의 팔을 톱으로 켜는 자도 있었다. 그것도 도중에 팽개치고 또 다른 사람을 톱질하는 광경은 보기에도 끔찍했다. 죽은 사람들의 눈을 식칼로 도려내는 것도 보였다...경찰서 구내는 피바다를 이루어 장화를 신지 않으면 걸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조선 사람들의 비통한 울부짖음은 그후 오래동안 나의 귀전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전 혼죠 경찰서 아라이 순사의 증언,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

"자경단원들은 조선사람을 붙잡아 몸을 전주대에 묶어 놓고 눈알을 도려내고 코를 벤 다음 배를 찔러서 죽였으며 기차칸에서 여러명의 조선사람을 순식간에 창문밖으로 내던졌다."(현대사자료6)

'납작한 뒤통수'와 '넓적한 얼굴', '작은 발'을 비롯한 외형상의 특징과 일본인이 아니면 정확히 내기 어려운 '15엔 55전(고엔 고쥬고센)' 발음 등. 조선인을 식별하기 위해 자경단이 사용한 방법은 1913년 내무성 비밀자료 제1542호에 바탕을 둔 것으로, 관헌의 전수없이는 활용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타민족을 적대시한 야만적 '민족배타주의'의 발로이고, 이를 국가가 나서 부추긴 인류사에 기록될 범죄행위이다.

간토대지진 발생 40주년인 지난 1963년 『현대사자료6-관동대지진과 조선인』이라는 기념비적 사료를 발표한 재일사학자 강덕상은 '간토대지진 당시의 학살은 우연히 일어난 조선민족의 비극이 아니라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벌인 일본의 선전포고없는 전쟁이었으며, 계엄령은 조선인에 대한 몰살선언과도 같다'고 말했다.

학살된 조선인 시체 5구. 말뚝에 묶여있다.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학살된 조선인 시체 5구. 말뚝에 묶여있다.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점차 지진이 수습되면서 잔혹한 대규모 학살에 대한 책임 문제가 대두되자 일본 정부는 자경단이 지진 발생 후에 돌연 만들어진 것으로 조작해 책임을 전가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공공연하게 자행된 대규모 학살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할 수는 없었다. 또 책임을 뒤집어 쓰게 된 민간 자경단의 반발도 심했다.

책임을 회피하면서 골치아픈 사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고안된 것이 사실을 모호하게 만드는 '가짜뉴스'였다. 당시 일본 신문을 보아서는 사건의 진상이 무엇인지, 왜 그런 사태가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 관련 연구자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조선인이 방화를 한다거나 샘물에 독을 탄다'는 등의 보도는 뒷날 실체없는 유언비어였다는 것이 확인되지만, 조선인 관련 기사를 일절 게재하지 못하게 한 정부의 통제에 따라 시정 보도는 나오지 않았다. 이미 확산된 거짓소문을 그대로 보존하도록 하려는 일본 정부의 의도는 그렇게 관철됐다.

언론은 정부의 요구대로 통제에 순응했고, 일본 정부는 책임모면을 위해 70%에 가까운 보유자료를 파기하고 철저히 사실을 감춰왔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당시 학살당한 조선인이 몇명이나 되는지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 것이다.

그나마 유일한 사료로 평가되는 것이 1963년 미국이 압수한 자료를 일본 정부에 넘길 당시 히토츠바시(一橋)대학교 강덕상 교수가 관동계엄령 사령부의 수집정보철인 '계엄사령부 정보'에 접근해 이를 토대로 남긴 『현대사자료6-관동대지진과 조선인』 정도이다. 

현재 통용되는 6천여명 희생설은 간토 대학살 당시 중국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사장 김승학이 나고야에 있던 한세복을 도쿄로 파견하여 조선인 학살 진상을 보고하도록 한 뒤 1923년 12월 5일자에 6,661명이라는 숫자를 발표한 것이 중요한 근거이다.

국내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그렇게 적혀있고 일본 도쿄시 요코아미초 공원내 '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자 추도비'에도 6천여명 희생설이 기록되어 있다.

북측은 줄곧 간토대지진 당시 2만3천여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독립신문이 그해 12월 26일자 기사에서 참살당한 전체 조선인이 2만여명에 달한다는 당시 현지 체류 독일인 브르크하르트 박사(Dr. Otto Bruchhardt)의 외지 기고문 전언 기사를 참고한 것으로 추정하지만 분명치는 않다.

당시 간토지방에 살던 조선인이 1만4,100명이라는 인구통계를 바탕으로, 이중 1천명의 학생은 여름방학이었으므로 고향에 있었고 불에 타 사망한 800여명의 조선인을 제외한 나머지 1만 2,300명 중 귀국한 5,700명을 빼면 모두 살해되었다고 해도 6,600명이 된다는 계산을 근거로 하여 조선인학살 피해자는 '0'에서 최대 6,600명이라는 의견도 제시된다. '위안부는 매춘부'라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존 마크 램지어(John Mark Ramseyer) 하버드대학교 교수의 주장이다.

이같은 혼선은 진상규명에 소극적인 걸 넘어 적극적으로 자료를 폐기하고 은폐해 온 일본 정부의 탓이 가장 크다.

모든 걸 자신들의 의도대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무모한 자신감 때문일까. 그때도 그랬고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 정부는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에 대한 진상규명과 사죄, 배상 요구를 진지하게, 정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1923년 9월 1일의 참상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는 일, 기억을 다짐으로 이어 가는 일.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를 맞아 새로운 미래를 일궈나가려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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