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지역에서 발생한 대지진의 와중에 수천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한 대참극이 벌어졌다.

100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학살의 진상은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고 당시 계엄령을 발표해 조선인 학살을 주도한 일본 정부는 진상규명과 사죄, 배상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그날의 기억을 잊지 않고 다지는 일. 간토 대학살 100주기를 맞아 필요한 일이다.

[통일뉴스]는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를 맞아 특집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 특집 ① 개괄-잊혀진 통한의 100년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 특집 ② 기록으로 본 간토대지진과 조선인학살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 특집 ③ 자료와 증언-일제는 조선인을 어떻게 학살했나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 특집 ④ 北은 간토대학살을 어떻게 보고 있나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 특집 ⑤ 강요된 망각과 시무(時務)의 역사연구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 특집 ⑥ 특별기고-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간토대지진 발생과 대규모 피해

간토대지진 진원지인 도쿄, 요코하마 시 전도. 진하게 표현된 부분이 피해지역.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간토대지진 진원지인 도쿄, 요코하마 시 전도. 진하게 표현된 부분이 피해지역.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간토(關東)지방 남부에 대지진이 발생했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간토대지진이다. 그 규모는 M7.9. 진원은 사가미만(相模灣) 서북부(동경139.3도, 북위 35.2도)로 계측되었다. 지진은 오다하라(小田原)․ 네부카와(根府川) 방면이 가장 격렬했지만, 도쿄와 요코하마(橫浜)에서는 지진에 의한 화재가 겹쳐 최대의 피해가 발생했다. 

도쿄는 3일 아침까지 불이 계속되었고 시타마치(下町)에서 야마노테(山ノ手) 일부에 걸친 전 시가지의 3분의 2가 소실되었다. 그 중에서도 혼죠(本所)의 피복 야적장은 불바다가 되어 한꺼번에 3만 8천명이 사망했고 요코하마에서는 벽돌로 만들어진 양관(洋館, 서양식 건물)이 무너져 압사자가 속출했고 전 시가지가 거의 소실 내지는 반파되었지만 4일까지도 고립무원의 지경이었다.

간토대지진 진원지인 됴쿄 일대 [사진-이규수 제공]
간토대지진 진원지인 됴쿄 일대 [사진-이규수 제공]

□ 지진에 의한 피해는 사망자 99,331 명, 부상자 103,733 명, 행방불명 43,746 명, 가옥전파 128,266 호, 가옥반파 126,233 호, 소실가옥 447,128호, 유실가옥 868 호이며 이재민은 약 340만명이다. (『국사대사전(國史大辭典)』 제3권, 요시카와 홍문관(吉川弘文館), 1982년 12월)

□ 도쿄의 피해는 이재민 세대수 325,139호, 이재민 총수 324,254명인데, 그 내역을 보면 사망자 60,420명, 부상자 31,051 명, 행방불명 36,634명, 기타 이재민 1,196,129명으로 총인구의 34%이다. (『계엄령에 관한 연구(戒嚴令ニ關スル硏究)』, 1941년 7월)

□ 강한 지진과 폭풍, 그로인한 화재로 69만여 세대의 주민들이 이재민으로, 사상자는 무려 16만 6,000여 명에 달했다. (『고지엔』, 1991년판)


1923년 9월 1일 전후 상황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식민지 독립운동에서 사회주의 노선에 대한 지지가 급격히 높아졌다. 재일조선인의 운동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노동동맹' 등이 결성돼 재일 조선인들은 동맹기를 흔들며 일본 메이데이 행진에 선두에 나설 정도였다. 재일 조선인이 사회주의운동, 노동운동의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 특히 군부는 이미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1918년 시베리아 출병 과정에서 조선의 동학농민군과 의병을 무력으로 진압하며 조선인과 전투를 벌인 경험으로 인해 '내선일체'에 불응하는 '불령선인'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1923년 9월 1일 간토대지진이 발생하자 즉시 전시계엄령을 공포하고 계엄사령부를 설치했다. 또 지진 피해수습을 위한 '임시진재구호사무국'을 구성하고 그안에 치안담당 총사령부인 경비부를 설치한 일본은 처음부터 조선인에 대한 학살을 계획했다.

□ 계엄사령부와 경비부에는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3.1운동 당시 정무총감, 최고지휘관), 도쿄 경시총감 아카이케 아쓰시(3.1운동 당시 경무총감, 경찰책임자), 도쿄부지사 우사미 가쓰오(조선총독부 내무장관),  군사 참의관 오바 지로(간도 작전 당시 조선주둔군 사령관),  제1사단 사단장 이시미쓰 미오미(3.1운동 당시 헌병사령관), 계엄사령부 참모장 아베 노부유키(시베리아 출병군 참모장) 등이 자리를 틀고 앉아 조선인 학살을 위한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했다. (『시무의 역사학자 강덕상』, 강덕상기록간행위원회, 어문학사, 2021.10)

당시 경찰은 '요시찰 조선인 편입부'(要視察朝鮮人編入簿)를 만들어 등급에 따라 5~3명의 미행을 붙이고는 이들 '불령명부'를 경비부에 제출하는 등 '불령선인' 일소가 매일의 업무일 정도였다.

일각에서 그 시기 사회주의 활동을 한 일본인과 중국인, 오키나와인들의 참변을 조선인학살과 함께 다루려는 흐름이 있으나, 이같은 맥락에서 볼 때 "조선인 학살은 일본 관민 일체의 범죄이고, 민중이 동원되어 직접 학살에 가담한 민족적 범죄이자 국제문제"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재일 사학자 고 강덕상의 일관된 입장이다.

또 간토대지진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에서는 1990년대 이후 발호한 역사수정주의와 넷우익의 대두에 기대어 학살부정론이 세력을 키우고 있지만 당시 조선인 학살이 계엄령 아래 자행되었다는 구체적인 실상은 계속 밝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같은 '학살부정론'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짓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인 범죄는 없었고, 조선인 학살은 있었다

간토대지진 당시 화재를 피해 우에노역 앞으로 몰려드는 피난민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간토대지진 당시 화재를 피해 우에노역 앞으로 몰려드는 피난민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요코야마 야마노테 거류지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요코야마 야마노테 거류지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먼저, 지진 발생 당시 조선인 폭동과 독 살포, 방화 등 유언비어의 실체와 학살의 상관관계부터 살펴보자.

와타나베 노부유키 전 아사히신문 기자는 『관동대지진, 학살부정의 진상』(도출판 삼인, 2023.8)에서 간토대지진과 조선인학살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과 관련해 2008년 내각부 중앙방재회의가 구성한 '재해 교훈 계승회 관한 전문조사회'에서 정리한 보고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1923년 11월 15일 조사 결과를 중심으로 작성되었으며, 12월 제국 의회 개회에 대비해 의회에서 문제삼을 만한 내용에 대한 사법성의 견해를 미리 정리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평가했다.

일본 정부가 '방재에 관한 교훈'을 계승하겠다는 취지로 발행한 것으로서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평가를 다룬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객관적 자료로 평가했다. 이 보고서의 결론은 '유언비어의 내용처럼 조선인의 조직적인 범행으로 특정할 수있는 것은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조선인이 저지른 살상사건은 살인 2건, 상해 3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모두 피의자 미상이고, 살해당한 피해자도 미상이라고 밝히고 있다. 조선인이 범인이라고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 불분명하고 살해당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다. 즉 형사사건에서 조선인의 범행으로 사실관계를 규명할 수 있는 것은 단 한건도 없었다. 또한 소문으로 떠돌던 무장봉기, 방화, 독 살포 등에 대해서는 '일정한 계획아래 맥락있는 비행을 저지른 흔적을 확인하기 어렵다"고 결론내렸다. 제4장 제2절에는 '학살이라는 표현이 타당한 사례가 많았다'는 표현이 나온다. ( 내각부 중앙방재회의 '재해교휸의 계승에 관한 전문조사회 보고서', 『관동대지진, 학살부정의 진상』에서 재인용)

학살의 규모와 당시 보도

조선인 학살의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정리되지 않은 채 혼재돼 있다.

통용되는 6천여명 희생설은 간토 대학살 당시 중국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사장 김승학이 나고야에 있던 한세복을 도쿄로 파견하여 조선인 학살 진상을 보고하도록 한 뒤 1923년 12월 5일자에 6,661명이라는 숫자를 발표한 것을 근거로 삼는다.

북은 2008년 9월 1일자 [노동신문]에 발표한 역사학학회 비망록에서 조선총독부의 자료에 의해 밝혀진 것이라고 하면서 2만 3,000여명 학살설을 주장하고 있다. 출처는 일본 도서 조선총독부 진재관계문서, '현대사자료 6권 345페이지를 들고 있다.

와타나베 기자는 일본 정부가 추정하는 400명보다는 많고 5,100명보다는 적을 것이라고 희생자 규모의 범위를 정리했다.

당시 수도권(간토지역)의 조선인 수는 1만4,100명(야마다 쇼지), 피난민의 수는 7,200명(1924년 포함한 조선총독부 집계), 보호 구속되어 있던 조선인 수는 7,200명(기록물의 중간값)으로 기준을 정한 후 여름방학중인 학생 1,000명과 화재로 사망한 800명을 빼면 살해 가능성이 있는 조선인은 최대 5,100이라고 가정한데 기초한 결론이다. 일본 정부가 당시의 혼란 상황에서 희생자를 모두 파악하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자경단이 남아있던 조선인을 모두 특정해 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당시 조선인 희생에 대해서는 지역별로 산발적인 언론 보도가 여러 건 남아 있다. 일부 기사의 제목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호송중인 선인을 빼앗아 학살/ 지바현 히가시가쓰시카군의 자경단 청년단(가호쿠신문 1923. 10.22) □구마가야 혼정에서는 58명 참살(도쿄 아사히신문 1923.10.17)  □200명의 자경단원이/ 경찰서에 난입 16명 참살/ 군마현 후지오카정 폭행사건(호치신문 1923.10.16) □미국 기선위에서/ 선인 6명을 죽이다(도쿄 아사히신문 1923.10.21)

계엄령 공포와 간토계엄사령부 설치

참모본부내 관동계엄사령부. 후쿠다 대장(왼쪽)과 아베 참모총장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참모본부내 관동계엄사령부. 후쿠다 대장(왼쪽)과 아베 참모총장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일본 정부는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대대적으로 유포하는 한편 이를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전시계엄령'을 공포했다. 주인공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지내면서 3.1운동 참가자들을 학살한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

□ 그의 명령에 따라 내무성 경보국장과 도쿄경시청 총감 등을 통해 조선인 폭동설이 전국에 퍼지게 됐다. 이들은 후나바시 해군무전국을 이용해 조선총독부와 각 지방 행정책임자들에게 허위사실을 담은 전보를 보냈다. (관보 호외 1923년 12월 16일, 중의원 의사속기록 제5호)

전시계엄령은 심의를 거쳐 관보를 통해 발포되어야 하지만 일본 정부는 조선인 폭동설을 먼저 퍼뜨리고 9월 2일과 3일 천황의 칙령으로 도쿄부와 가나가와현까지 포험하는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간토계엄사령부를 발족시켰다.

계엄령은 조선인이 도쿄를 목표로 폭동과 방화, 습격 등의 방식으로 침공하고 있다며 '적', '폭도'로 규정했고, 계엄사령부는 이들에 대한 전투개시를 명령했다. 계엄사령부는 고노에사단과 제1사단을 비롯해 간토지방에 있던 육해군 벙령을 도쿄와 요코하마에 집중배치했다.

9월 8일 계엄지구에 집결한 군대만 3만 5,000여명, 10일에는 5만2,000여명으로 늘어났다. 

□ 일본 정부는 자경단과 청년단을 조직하도록 하여 군대, 경찰과 협동작전을 펼칠 것을 지시했다. 도쿄에 1,595개, 가나가와 현에 603개, 사이다마현에 300개, 지바현에 366개, 이바라기현에 336개, 군마현에 469개, 도치기현에 19개 등 총 3,688개에 달했다. (현대사자료 6권)

일본 정부의 범죄 실상

경비부대 배치 개요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경비부대 배치 개요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조선인 학살은 지진 직후 대혼란 시기에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혼란이 수습되고 사후처리가 활발해지면서 일본정부는 군대와 경찰, 자경단이 협력하면서 '보호'라는 미명아래 조선인을 수용소에 가두고 집단 학살사건을 벌여나갔다. 

9월 5일 이후 치바현(千葉縣) 나라시노(習志野)에 있었던 조선인 수용소 부근에서 일어난 학살사건은 이를 잘 보여 준다.

군대의 개입

착검한 계엄군의 휴식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착검한 계엄군의 휴식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조선인수용소가 나라시노에 설치된 것은 9월 4일 오전 10시, 제1사단 사령부의 기병 제2여단장에게 보낸 다음 명령에 의거했다.

  ◎ 도쿄 부근의 조선인은 나라시노 포로수용소에 수용한다.
  ◎ 각 부대는 그 주변의 조선인을 적당한 시기에 모아 코쿠부타이(國府臺) 병영으로 수송한다.
  ◎ 귀관은 나라시노 위수지 잔류부대를 이끌어 고쿠부타이에서 조선인을 인수하여 막사에 수용, 감시한다.
  ◎ 조선인의 급식은 하루 주식 쌀, 보리 0.2되 이내, 일급 15전 이내로 군인에 준해 취급한다.

기병 제2여단은 기병 13, 14, 15, 16연대로 구성된 계엄군의 실전부대이며 고토(江東)지구를 비롯해 도쿄를 평정한 여단이었다. 이 명령은 계엄군이 연행한 조선인 등을 나라시노에 보낼 것을 지시하는 조치였다.

조선인 연행을 위해 군대와 경찰, 자경단은 어떻게 움직였을까?

□ '적(敵)은 제국 수도의 조선인이다'라는 인식으로 출동한 계엄군의 행동을 기병 및 수송연대의 움직임을 통해 살펴보면, '이 날(2일) 오후 5시경부터 시나가와(品川), 메구로(目黑), 이케지리(池尻), 시부야(澁谷) 방면에서 불령선인이 타마가와(多摩川)를 넘어 습격한다는 정보가 있다. 이에 사단은 기병 및 수송부대로부터 척후병을 보내 수색시킴과 동시에……메구로, 세타가야(世田ケ谷), 마루센(丸千) 방면에 출동시켜 조선인을 진압하고, 조선인 습격에 관한 근본적 조사를 실시해 동 방면의 인심을 수습하였다'(『도쿄진재록․전(東京震災錄․前)』)

경찰의 조선인 학살

계엄령이 발령된 후 경찰의 행동은 계엄사령부의 지시를 받게 된다. 9월 3일 이후 경무부장은 매일 계엄사령부에 출두해 군경협의회에 출석, 지시를 받았다. 경찰의 최대 임무는 간토 일대 주요 철도와 도로, 시내에 검문소를 설치하여 통행인을 검문하는 것. 요령은 다음과 같다.

  ◎ 순사 5명, 감독자 1명을 배치해 군대와 협력해 검문에 종사할 것.
  ◎ 검문은 군대의 원조를 얻어 경찰관이 실시할 것.
  ◎ 검문 시 통행인의 복장, 휴대품에 주의하고 야간에는 모든 통행인에 대해, 주간에는 수상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해 주소, 이름, 출발지, 목적지 등 통행요건을 충분히 취조하고 용의자는 곧바로 검속해 소속 경찰서로 송치할 것.
  ◎ 검문 시 병기나 흉기를 소지한 자는 일시적으로 이를 영치할 것.
                                      
□ 경찰은 군의 보완기관으로서 철벽 봉쇄체제를 펼쳤다. (『도쿄진재록․중(東京震災錄․中)』)

자경단에 의한 조선인 학살

자경단. 군복을 입은 자들이 재향군인. 죽창과 곤봉 등으로 무장하고 있다.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자경단. 군복을 입은 자들이 재향군인. 죽창과 곤봉 등으로 무장하고 있다.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자경단은 군경일치 체제를 보조하는 민간단체였다.

계엄사령부는 경비부대에 '헌병 및 경찰관과 밀접한 연락을 갖고 특히 아직 경찰권이 부활되지 않은 지방에서는 자경단에 대한 원조를 태만해서는 안된다. 또 재향군인회, 청년단을 이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라고 지시했다.

즉 자경단은 재향군인회와 청년단을 모체로 한 실질적인 민간경찰이었다. 자경단에 일반시민이 적극적으로 참가하는데에는 관헌의 지시가 개입되었다.

다음은 9월 2일 사이타마현(埼玉縣) 지방과장이 내무성과 협의한 후 오후 5시경 돌아와 현 내무부장에게 보고하고, 그 정보를 토대로 내무부장이 각 군(郡)사무소에 전화로 통지하고 시(市)․정(町)․촌(村)에 이첩했던 문서이다.

□ "도쿄에서 진재(지진)에 편승해 폭행을 저지르려는 불령선인 다수가 가와구찌(川口) 방면으로부터 혹시 우리 현에 들어올 지 모른다. 또 그 사이 과격 사상을 지닌 무리들이 이에 부화뇌동하여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는 소리도 들리고, 점차 그 위험의 여파가 닥쳐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경찰력만으로는 미약하기 때문에 정․촌 당국자는 재향군인분회, 소방수, 청년단원 등과 일치 협력해 경계에 만전을 기하고, 유사시에는 신속하게 적절한 대응책을 강구하도록 빨리 수배전단을 만들고 이를 정식문서에 의해 단계를 밟아 이첩하도록 할 것" (『간토대진재와 조선인(關東大震災と朝鮮人)』)

이 통첩이 사이타마현의 시․정․촌에 이첩되어 구마가야(熊谷), 혼죠(本庄), 진보바라(神保原)를 위시한 각지에서 자경단원이 중심이 된 대학살사건의 도화선이 된다. 

□ 자경단은 경찰이 정한 곳 외의 도로에 검문소를 설치하고는 모든 통행인에게 '15엔 55전(15円55錢)이라 말해보라', '기미가요(君が代)를 불러라', '도도이츠(ドドイツ-주로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 구어조의 일본속요)를 읊어 보라'고 강제했다. 또 '이 놈은 넓적한 얼굴이다', '홑눈꺼풀이다', '납짝한 뒤통수이다', '장발이다' 등 외견상의 차이를 조선인 식별의 근거로 삼아 거리에서 사형(私刑)을 집행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자경단이 칼이나 죽창을 들고 통행인 누구를 막론하고 조금 다른 말과 행동을 트집잡아 사람을 오인하거나 하여 선량한 시민이 많은 피해를 받았다.'(경시총감 훈시 「自警團ニ就イテ」)

계엄사령부의 적극적 학살 개입

도쿄와 요코하마에서도 계엄사령부는 재향군인회, 청년단, 소방단 뿐만이 아니라 '일반인의 자위능력을 적극적으로 발휘시켜 재해의 방지에 힘쓸 것을 요망함'이라는 지시를 통해 국민 전체의 참가를 널리 촉구했다. 

□ 지시사항은 유인물, 회람, 포스터 형식으로 일반에게 전달되었다. '이것을 붙여 주세요'라는 제목으로 등사된 유인물에는 "오늘 밤 고이시카와(小石川) 소학교를 중심으로 방화, 약탈을 마음대로 자행하려는 불령의 무리가 있으니 각자 경계하기 바란다"'는 무시무시한 경고가 담겨 있었는가 하면, 나중에는 '경찰 조사에 의하면 조선인들이 백묵으로 옆집의 문이나 담벼락에 표시해 놓은 부호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ヤヤ"는 살인, "ヤ"는 폭탄, "∧"는 방화, "∧"는 우물에 독약투여' 등 (『도쿄대진재일기(東京大震災日記)』)이 첨부되기도 했다. 

당시 자경단이 주로 사용한 '15엔 55전' 발음은 앞서 관헌들이 사용하던 조선인 식별법이었다. '조선인 식별자료에 관한 건'이 자경단에 배포되었는데 △얼굴 형태는 일본인과 다르지 않지만 모발은 유연하고 적으며 밑을 향해 자란 것이 많다. 얼굴에 수염이 적어 속칭 '넓적한' 얼굴이 많다. △ ……후두부는 목침을 사용하기 때문에 대개 평평하다. △발은 버선과 신발을 꽉 조여 신기 때문에 작은 편이다. △발음은 탁음인 가(ガ), 기(ギ), 구(グ), 게(ゲ), 고(ゴ)가 가장 힘들다. △발음할 때 라(ラ)행인 라(ラ), 리(リ), 루(ル), 레(レ), 로(ロ)가 잘 판명되지 않는다 등이다.

이 식별법은 1923년 '내무성비(內務省秘) 제1542호', 즉 경보국장이 하달한 통첩이었다. 계엄군은 자경단으로 하여금 군.경의 작전을 보완할 수 있도록 관헌들의 노하우를 전수했던 것이다.

일본 정부의 학살 은폐

관동대지진정보, 진재기록 등 관련 자료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관동대지진정보, 진재기록 등 관련 자료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대지진으로 인한 피해가 어느 정도 수습되고 안정을 되찾게 되면서 일본 정부는 조선인 학살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진상을 은폐하기 위해 눈을 돌렸다.

공공연하게 자행된 조선인 학살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먼저 군대와 경찰을 비롯한 국가기관은 뒤로 빠지고 민간 자경단에 책임을 돌리는 일이 시작됐다.

경비부는 9월 3일 이후 조선인학살이 간토 일대에 급격히 확산되자 치안담당 기관들을 통해 그 책임을 자경단에 전가하도록 지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식보도를 통해 자경단은 조선인학살에 자중할 것을 호소하기도 하면서 앞으로는 군대와 경찰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경고를 하는 등 술책을 벌였다.

그렇지만 자경단은 그 후에도 군대, 경찰과 협력하며 학살을 이어갔고 경비부는 정부 책임을 감추기 위해 또 다른 한편으로 조선인의 범죄행위가 공산주의자들의 조종에 의한 것이라는 왜곡 선전을 강화하기로 하고 언론통제를 본격화했다.

9월 5일 극비문서인 '조선인 문제에 관한 협정'이 대표적 결정이다.

'조선인에 관한 기사는 일체 게재하지 않도록 하며 그와 같은 기사가 실린 출판문에 대해서는 판매배포를 금지한다'는 것인데, 얼핏보면 유언비어 확산을 막기 위한 조치인듯 하지만 실은 이미 알려질대로 알려진 가짜뉴스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대혼란상태에서 발생한 오보를 시정하려는 기사는 보도되지 못하도록 하는 지능적인 언론 통제였다.(와타나베 기자)

그 결과 9월 4일부터 10월 중순까지 신문지면에는 조선인에 의한 범죄와 폭행사건이 사실무근이라는 기사는 실을 수 없고 반대로 조선인이 불안을 야기하는 관급 기사만 게재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 일본정부는 이와 함께 자신들이 조선인을 보호하고 있다는 선전을 펼치면서 생사의 고비를 넘긴 조선인들을 강제연행해 '수용소'에 가두고는 전쟁포로로 다루었다. 그 숫자가 무려 2만 3,715명에 달했다.(현대사자료6권)

간토계엄군사령부의 수집 정보철 '계엄사령부 정보' [통일뉴스 자료사진]
간토계엄군사령부의 수집 정보철 '계엄사령부 정보' [통일뉴스 자료사진]
현대사자료 6- 관통대지진과 조선인 [통일뉴스 자료사진]
현대사자료 6- 관통대지진과 조선인 [통일뉴스 자료사진]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에 대한 연구는 사건발생 40주기인 1963년 강덕상이라는 재일사학자가 친구인 금병동과 함께 편찬해 미스즈쇼보에서 출간한 『현대사자료6-관동대지진과 조선인』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것에 이견이 없다.

제2차세계대전 승전 이후 대일본 점령정책을 실시하기 위해 설치된 연합국총사령부(GHQ)가 압수해 간 일본 공문서를 뒤져 찾아낸 관동대지진 『공문비고』(公文備考)가 포함되어 있는 독보적인 자료집이다.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40주기에 나온 이 자료집은 그 뒤 일본내에서 관련 연구를 촉발시킨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당시 일본정부의 공문서가 추가 공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거의 유일한 자료로 열람되고 있다.

발간 60년이 지났지만 아직 한국어로 번역조차 되지 않은 것은 대단히 아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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