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 특집 연재 순서


① 개괄-잊혀진 통한의 100년
② 기록으로 본 간토대지진과 조선인학살
③ 자료와 증언-일제는 조선인을 어떻게 학살했나
④ 北은 간토대학살을 어떻게 보고 있나
⑤ 강요된 망각과 시무(時務)의 역사연구
⑥ 특별기고-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조선인 학살의 증언

간토계엄지역 내 경비배치도(9월 10일 현재)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간토계엄지역 내 경비배치도(9월 10일 현재)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경비부대 배치 개요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경비부대 배치 개요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자경단원들이 행인을 단속하는 모습을 그린 화첩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자경단원들이 행인을 단속하는 모습을 그린 화첩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계엄군과 경찰이 행인을 검문하는 모습을 그린 화첩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계엄군과 경찰이 행인을 검문하는 모습을 그린 화첩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참모본부 내 간토계엄사령부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참모본부 내 간토계엄사령부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부서지기 직전의 판자에 계엄령을 고지하는 경관.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죽창을 들고 있다(우시고메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부서지기 직전의 판자에 계엄령을 고지하는 경관.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죽창을 들고 있다(우시고메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계엄사령부 앞의 후쿠다 대장(왼쪽)과 아베 참모총장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계엄사령부 앞의 후쿠다 대장(왼쪽)과 아베 참모총장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나는 1923년 7월 7일, 8일경, 오사카(大阪)에서 왔는데 9월 1일 진재를 만났습니다. 그 때 당한 일은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폭동이란 것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1일부터 2일까지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마음속으로 잡힐지 모른다는 공포감 때문에 안심할 수 없었어요. 어딘가에서 잡히면 큰 일이라 생각하고 주먹밥을 먹으며 도망쳤습니다. 

그러다가 3일 아침 조선인 사냥꾼들을 만나고야 말았습니다. 게이세이(京成) 전차의 아라가와(荒川) 제방 부근에서 당했습니다. 거기에서 14~15명이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머리 위로 기관총을 난사해서 도망치려 했는데 발각되어 갑자기 일본도가 날아 들었습니다. 왼손으로 막으려고 했는데 새끼손가락으로부터 손바닥을 관통하고 왼팔까지 잘렸습니다. 

갑자기 의식을 잃었습니다. 산 채로 사체수용소에 집어넣어졌는데 그 때 쇠갈고리가 끼어져 지금도 다리에는 구멍이 두 개씩 뚫려 있습니다. 사체 안에서 나는 신음소리를 동생이 듣게 되어 겨우 살아났지만 몸 여덟 군데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일본적십자 병원에 1년 반, 치료라고 해야 머큐로크롬을 발라 주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입원해 있어서 겨우 살았습니다. 한 방에 16명 있었는데 한 달 사이에 9명이 죽었습니다. 당시 저는 22~3세로 젊고 건강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 남게 되었지만, 그 때는 도망치고 싶어도 일어설 수 조차 없었습니다. 천재(天災)도 천재이지만, 인간이 인간을 죽인 것이었습니다.
-신창범(「나의 체험(私の體驗)」1963년 7월 17일,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에 대한 강연회)

휴식중인 계엄군. 착검상태이다.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휴식중인 계엄군. 착검상태이다.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검문소에서 경비하는 계엄군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검문소에서 경비하는 계엄군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 9월1일부터 15일까지의 2주일동안에 걸쳐 간토지방에서 왜족이 조선인들에게 감행한 학살만행이야말로 인류사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살육만행이었다. 우리 동포 수만명을 도살한 그 처참한 정형에는 요귀, 악마도 눈을 감고 낯을 돌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일제는 두개 부와 여섯개 현에 포치한 군대와 경찰관을 조선인 박멸에로 내몰았다. 장총, 단총, 장검, 단도, 철창, 죽창, 몽둥이, 쇠갈구리 등을 휘둘러대는 이른바 청년단, 자경단의 '조선인을 박멸하라'는 외침은 천지를 진동하였다. 놈들은 벌떼처럼 무리를 지어 촌락, 시가는 말할 것도 없고 산, 들, 강, 초원까지 샅샅이 뒤지면서 조선사람을 찾아내기에 피눈이 되어 날뛰었으며 조선사람을 발견만 하면 그 자리에서 사정없이 도륙했다. 형편이 이러했으니 피와 양심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던 우리 동포들이 어떻게 죽음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살육만행을 현지에서 조사한 한 동포의 증언,([노동신문] 1970.9.12 '일본군국주의의 야수적 죄행을 고발한다(2)')

자경단. 군복을 입은 자는 재향군인. 죽창과 곤봉으로 무장하고 있다(이자부 방면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자경단. 군복을 입은 자는 재향군인. 죽창과 곤봉으로 무장하고 있다(이자부 방면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개를 끌고 죽창과 총으로 무장한 자경단(요코하마시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개를 끌고 죽창과 총으로 무장한 자경단(요코하마시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가구라자카 경찰서에서 압수한 자경단의 무기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가구라자카 경찰서에서 압수한 자경단의 무기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9월 4일 아침 2시경이라고 생각된다. '조선인을 끌어내라', '조선인을 죽여라'라는 따위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나에게는 왜 조선사람을 죽이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조선사람이 나쁜짓을 하였다고 하는데 지진과 그로인한 대화재로 말미암아 목숨을 건지기에 필사적이었던 조선사람들이 나쁜짓을 저지를래야 저지를 수 없다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이윽고 저쪽으로부터 무장단이 피난민들을 한 사람씩 눈여겨보면서 조선사람들을 찾아내고 있었다. 우리들 15명의 조선사람들 거의 전부가 일본말을 몰랐었다. 놈들이 가까이에 오면 조선사람이라는 것이 당장 알려지게 될 것이었다. 무장한 자경단원들은 조선사람인줄만 알면 일본도로 내리쳐 그자리에서 죽여버렸다. 림선일 동포는 자경단이 다가와서 심문을 하자 나의 이름을 부르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통역을 해달라'고 소리쳤다. 그의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경단원의 손에서 일본도가 번쩍이더니 그는 학살되고 말았다. 

림선일 동포의 다름 자리에 있던 동포도 학상당하였다. 이대로 앉아있으면 나도 학살당하리라는 것은 틀림없었다. 나는 옆에 있던 동생과 매부와 함께 철교에서 결사적으로 뛰어내렸다. 뛰어내리고 보니 거기에는 우리와 같은 운명에 처해있던 5~6명의 동포들이 있었다. 우리가 뛰어내린 것을 보았으니 자경단원들이 찾아오리라는 것은 명백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헤엄을 쳐서 강을 건너기로 하였다. 날은 이미 밝아와서 20~30미터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헤엄쳐서 강을 건너는 것이 보였다. 우리도 바야흐로 강을 건너려고 하는데 다리 위에서 총소리가 연이어 들려오더니 강을 건너던 동포들이 탄알에 맞아 강물속에 쓰러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니 건너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총소리는 끊임없이 들려왔다. 나는 가까이에 있는 갈대숲속에 숨으려 하였다. 갈대를 휘어잡고 몸을 강물속에 잠그려  하였으나 만조때가 되어서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이윽고 3명의 자경단원이 배를 타고 우리한테로 다가왔다. 저마다 일본도와 쇠갈구리를 휘두르고 있는 놈들의 몰골은 피에 주린 악마의 모습 그대로였다. 죽음에 맞다들었을 때는 도리어 용기가 나는 법이다. 이때까지의 공포심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적개심이 불타올랐다. 그때 나의 머리에는 '죽을 바에야 한 놈이라도 제끼고 죽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나는 다가오는 놈들의 배를 뒤집어 엎어버렸다. 강물속에서 놈들과의 격투가 벌어졌다. 그런데 놈들의 배가 한 채 또 쫓아와서 편들었기 때문에 나는 놈들에게 붙들려 강기슭에로 끌려가고 말았다. 강물에 흠뻑 젖어 기슭에 올라서자마저 한 놈이 일본도로 나를 내리치려고 했다. 나는 왼손을 내밀어 그놈을 칼을 붙들었다. 그때 내 새끼 손가락이 떨어져 나갔다. 나는 그놈의 칼을 빼았아 놈들을 제끼려고 사정없이 내리쳤다. 내가 그때 의식한 것은 여기까지 뿐이었다. 나는 그후 의식을 잃었다. 

나는 놈들의 일본도에 맞아 중상을 입고 쓰러졌으며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지금도 나의 몸에 남아있는 이 수많은 상처자리는 그때 입은 상처의 흠집이다. 후에 들은 이야기인데 아라까와의 돌뚝에서 학살당한 조선사람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놈들은 우리 동포들을 쇠갈구리로 찍어서 질질 끌고다녔다. 지금 나의 오른 발에 남아있는 흠집은 내가 의식을 잃은 후 놈들이 나를 쇠갈구리로 찍어 경찰서까지 끌고 가면서 남겨놓은 것이다. 이리하여 나는 죽은 사람으로서 도쿄 데라지마 경찰서 시체직치장에 쌓여있게 되었다. 
-한 재일동포의 체험담([노동신문] 1970.9.12 '일본군국주의의 야수적 죄행을 고발한다(2))

△우리 동포들로서 살아남은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그것은 마루바닥밑에 숨어 10여일 동안 굶주림과 추위를 이겨낸 사람들이었으며, 며칠동안 물속에 잠겨 있던 사람들이었으며, 건설장의 나무상자속에 숨어있던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우리 동포들의 주검속에 파묻혀있던 사람들이었으며, 왜놈들의 살인마수에 걸려 상처를 입고 정신을 잃은 채 쓰러진 사람들이었다.(소책자 '학살')

계엄군이 조선인들을 체포한 상황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계엄군이 조선인들을 체포한 상황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계엄군들이 연행한 조선인을 눕혀 놓고 박해하는 모습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계엄군들이 연행한 조선인을 눕혀 놓고 박해하는 모습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경시청이 뿌린 전단지. 쌀 60만석이 온다거나 폭동설은 유언비어라는 글자가 보인다.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경시청이 뿌린 전단지. 쌀 60만석이 온다거나 폭동설은 유언비어라는 글자가 보인다.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자경단원들은 조선사람을 붙잡아 몸을 전주대에 묶어놓고 눈알을 도려내고 코를 벤 다름 배를 찔러 죽였으며 기차칸에서 여러명의 조선사람을 순식간에 창문밖으로 내 던졌다.(현대사자료6)

△ 참살 정형은 도저히 입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일본 군국주의의 잔인성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어린애들도 많았는데 화물차에서 아이들을 먼저 끌어내려 할 줄로 세워 놓고는 부모들이 보는 앞에서 목을 자르고 그 다음엔 그 부모들도 찔러 죽였다. 살아있는 조선사람들의 팔을 톱으로 켜는 놈도 있었다. 그것도 도중에서 팽개치고 또 다른 조선 사람을 톱질하기도 했다. 그 참혹상은 보기에도 끔찍하였다. 시체의 눈을 식칼로 도려내는 것도 보았다. 무도장에 갇혔던 43명의 조선인들도 모두 학살되었다. 경찰서 구내는 피바다가 되어 장화를 신지 않으면 걸을 수 없을 지경이였다. 조선 사람들의 비통한 울부짖음은 그후 오래동안 나의 귀전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전 혼죠(本所) 경찰서 아라이 순사의 증언(일조협회 '사이따마현 내에서의 간또대진재 조선인학살 사건 자료')

학살된 조선인 사체 2구. 삼을 꼬아서 만든 가는 줄로 묶여 있다.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학살된 조선인 사체 2구. 삼을 꼬아서 만든 가는 줄로 묶여 있다.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학살된 조선인 사체 5구. 말둑에 묶여 있다. (에이다이바시 부근)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학살된 조선인 사체 5구. 말둑에 묶여 있다. (에이다이바시 부근)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학살당해 강물에 버려진 조선인 사체들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학살당해 강물에 버려진 조선인 사체들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 석탄재로 메운 빈터가 있었는데 여기에 주검이 널려 있었다. 그 수는 250구나 되어 보였다. 주검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목구멍을 잘려 기관과 식도의 경동맥이 하얗게 보이는 것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참혹한 것은 젊은 여자가 배를 갈려 창자에 6~7개월 정도의 태아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더우기 그 여자의 음부에 참대창이 푹 박혀 있는 것을 본 나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우리 일본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참혹하게 사람들을 죽였단 말인가.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일본인이라는 것을 그처럼 치욕으로 느낀 적은 없었다.
-일본 여성 다나베 사나노스케의 증언(*기까와 사까구마의 목격담 증언)

조선인 학살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조선인 학살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조선인 학살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조선인 학살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조선인 학살(데라시마, 9월 7일 오후 촬영)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조선인 학살(데라시마, 9월 7일 오후 촬영)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조선인 학살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조선인 학살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 "고향에 처자식이 있고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일본에서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능숙하지 않은 일본어로 빌고 있는 조선인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잠깐 보았더니 텐트 밑에는 10명 정도의 사람이 피를 흘리며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내 생각으로는 장작인가 무언가로 심하게 두들겨 맞아서 상처를 입고 거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텐트 안에서는 "빠(パ), 삐(ピ), 뿌(プ), 뻬(ペ), 뽀(ポ)"라던가 무언가를 조사하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혼죠의 오쿠라바시(おくら橋)근처에서 자경단의 린치 장면을 목격했던 시노하라 게이코(篠原京子)의 증언(『민족의 가시나무(民族の棘)』 28쪽)
 
△ 스미타가와(隔田川)에 위치한 시라히게바시(白髭橋)의 양쪽 난간에는 머리띠를 두르고 일본도, 죽창, 엽총 등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피난민을 쏘아보며 "모자벗어!"라고 호령하자, 자경단원 한 명이 "저 놈 수상한데"라며 마흔 다섯이나 여섯 쯤 되어 보이는 남자를 가리켰다. "그래 저 놈 뒷통수는 절벽이야"라고 크게 소리쳤다. "조선놈이 틀림없다"며 왁자지껄 떠들면서 일본도, 죽창, 곤봉을 이 남자에게 휘둘렀다. 남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벌벌 떨고만 있었다. "너, 어디에서 왔어", "……", "이봐, 어디에 가느냔 말야", "……", "이 새끼야, 대답하란 말이야", "너, 조선놈이지", "……", "가기구게고(ガギグゲゴ) 말해봐", "……", "이 자식, 수상해", "조선놈이야", "죽여, 해치워, 죽여버려라", 어느새인가 그 남자는 굵은 새끼줄로 온몸이 묶였다.
-지마사 다카시(和知正孝)의 증언(『민족의 가시나무』 38쪽)

조선인 연행과 체포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조선인 연행과 체포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강물속 학살당한 사체(아즈마다리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강물속 학살당한 사체(아즈마다리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조선인 연행 (스다초 부근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조선인 연행 (스다초 부근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 14일째 되던 날 장교가 오더니 "내일은 모두 치바(千葉)로 가야한다. 거기에 가면  하루 3끼의 식사가 보장되어 있다. 우리들이 말하는 대로 따르면 죽지 않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음 날 주먹밥 두 개를 지급받고 50명씩 나누어 출발했다. 군대가 주위를 둘러싸고 문 밖으로 나갔는데, 조선인이 치바로 보내진다는 소문을 들은 부근의 자경단이 많이 몰려들었다. 지나가는 우리들을 보고 자경단은 "죽여라", "없애버려라"라는 소리를 질렀다. 우리들은 맨발로 카메이도(龜戶)의 정거장까지 줄행랑쳤다.
-테라지마(寺島) 경찰서에서 살아남은 조인승(曺仁承)의 증언 (조선대학교 『간토대진재에서의 조선인 학살의 진상과 실태(關東大震災における朝鮮人虐殺の眞相と實態)』,159쪽)

△ (9월 1일은 지진으로) 집이 위험하다고 해서 아라카와(荒川) 둑으로 가니까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불이 타들어오기에 요쓰기(四ツ木) 다리를 건너서 1일 저녁에는 동포 14명과 함께 있었다. 그곳에 소방단원 4명이 와서 밧줄로 우리들을 염주알 꿰듯이 묶어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 자리를 뜨지만 밧줄을 끊으면 죽이겠다!"라고. 가만히 있으니 밤 8시경 건너편의 아라카와 역(현재 야히로(八広) 역) 방면의 둑이 소란스러웠다. 설마 조선인을 죽이고 있다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다음날 5시경, 소방단원 4명이 다시 와서 데라시마(寺島) 경찰서로 가기 위해 요쓰기 다리를 건넜다. 그곳에서 3명이 끌려와서 일반인들에게 뭇매를 맞고 살해당하는 것을 우리들은 옆 눈으로 보면서 다리를 건넜다. 그때 내 발에도 쇠갈고리가 와서 박혔다. 다리는 시체로 가득했다. 둑에도 장작더미가 쌓여 있듯이 여기저기에 시체가 쌓여 있었다.
-조인승의 증언(『風よ 鳳仙花の歌をはこべ』(바람이여 봉선화의 노래를 들어라))

△내가 있던 나라시노 기병연대가 출동한 것은 9월 2일 정오경이었다. '적은 제국 수도(도쿄)에 있다'고 소리치며 실탄과 총검으로 무장하고 실탄과 총검으로 무장하고 도쿄시에 진입하였다...연대는 첫 행동으로 먼저 열차를 검열하였다...어느 열차도 초만원으로서 기관차에 쌓인 석탄더미위까지 사람이 파리떼처럼 뒤덮여 있었다. 그곳에 섞인 조선인은 모두 끌어내어 즉시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연대는 저녁부터 본격적인 조선인사냥을 개시했다.
-조선인학살에 가담한 일본군인의 증언(日잡지 '일본과 조선', 1963년 9월호) 

강제노동에 동원된 조선인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강제노동에 동원된 조선인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가구라자카 경찰서에 수용된 조선인(9월 14일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가구라자카 경찰서에 수용된 조선인(9월 14일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경찰 지휘 아래 지진피해지 정리에 동원된 조선인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경찰 지휘 아래 지진피해지 정리에 동원된 조선인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 자경단이란 것은 아주 세력이 강했죠. 직접 자기가 한 사람을…… 젊은 사람은 재미로 죽이지 않았을까요. 오오구보(大久保)의 술집 뒤에 S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는 15연대 조교사(調敎師)였죠.……그 사람도 좋아했죠, 죽이는 것을……아직 살아있어요. 75세인가 76세 쯤 되었을 거예요. 그 때는 혈기왕성해서 칼을 휘두르고 싶어서 어찌할 줄 몰랐죠. 누구나 죽이라는 명령을 받아 칼을 휘두르는 것은 싫어했어요.……좋아하지 않으면 죽일 수 없었지요
-14연대 본부서기 아이자와(相澤安)의 증언 (「나라시노 기병연대와 그 주변」)

△ '우리들이 부대로 돌아온 날이 13일인지 14일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9월 15일부터 나라시노의 중국인, 조선인 수용소에서 근무했지요. 심한 상처를 입은 자는 없었어요. 사상이 의심가는 사람은 헌병이 이것저것 묻고 영창에 가두었어요. 거기에 간첩을 집어넣었지요. 스파이예요. 그 중에는 공산당도 있었을 테이니까요……나는 헌병이 끌고 가는 데에는 관계하지 않았지만, 영창 안에 몇 명인가 있는 것을 보았어요. 그 안에는 헌병이 함께 들어가 사상 등에 대해 조사했을 겁니다. 그리고 악질은 죽였다던가 어쨌다던가……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들었을 때, 나는 진짜라고 믿었어요. 군인 전부가 믿었을 거예요. 군인은 단순해서 위로부터의 명령에 곧바로 그렇다고 믿으니까요.……' 
-제15연대에서 근무한 군조(軍曹, 하사관) 츠메오 타케시(爪生武)의 증언(「나라시노 기병연대와 그 주변」)

아오야마 수용소의 조선인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아오야마 수용소의 조선인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오지경찰서에 수용된 조선인(9월 10일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오지경찰서에 수용된 조선인(9월 10일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센주경찰서에 수용된 조선인(9월 10일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센주경찰서에 수용된 조선인(9월 10일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센주경찰서 수용 상황(9월 10일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센주경찰서 수용 상황(9월 10일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 '구호'할 목적으로 데리고 왔지만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킬 것 같다고 하기에 조선인을 끌어내라는 것이었죠……연대가 4개 있었는데, 우리 연대에서도 16명을 영창에 넣었어요.……이상한 것은 모두 연대에 끌고 와서는 조사를 했어요. 그것도 군대에서요. 그래서 의심가는 사람들을……모두 처단하고 말았어요……처형한 곳은 오구보 공민관 뒤의 무덤이었지요. 여기로 끌고 와서 이 자리에서 죽였지요……나는 죽이지 않았어요. 30명 정도였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 연대뿐만이 아니었어요. 다른 모든 연대도 그랬어요.……나는 두 번인가……거의 칼을 내리칠 뻔 했지만 싫어서 그만두었어요. 하루 밤에 3명 정도 죽이지 않았을까요. 영창 안에 있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불려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을 겁니다. 
-14연대 본부 서기 아이자와의 증언(「나라시노 기병연대와 그 주변」)

△ 9월 4일 오전 11시경, 18살쯤 되어보이는 남자와 조선옷 차림을 한 여자 2명이 샘물에 독약을 뿌렸다는 말이 있기에 조사해 보았다. 그에 의하면 그들은 샘터에서 쌀을 씻고 있었는데 독약을 던진 사람들로 오인되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일본헌병대 보고)

△ 9월 4일, 게이힌 전차정류장 부근에서 약병에 넣은 독약을 가지고 있는 조선사람 1명이 나나났다는 말이 있어서 조사해 보았는데,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이 먹기 위해서 가지고 다니는 약병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일본해군성 문서 '공문비고')

경시청 메구로 수용소의 상황(9월 17일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경시청 메구로 수용소의 상황(9월 17일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경시청 메구로 수용소의 상황(9월 13일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경시청 메구로 수용소의 상황(9월 13일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경시청 메구로 수용소의 상황(9월 13일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경시청 메구로 수용소의 상황(9월 13일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경시청 메구로 수용소의 상황(9월 13일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경시청 메구로 수용소의 상황(9월 13일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경시청 메구로 수용소의 상황(9월 13일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경시청 메구로 수용소의 상황(9월 13일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나라시노 포로수용소. 야마나시 계엄사령관과 조선인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나라시노 포로수용소. 야마나시 계엄사령관과 조선인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나라시노에서 도쿄로 철수하는 조선인. 머리에 붕대를 감고있는 사람이 많다.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나라시노에서 도쿄로 철수하는 조선인. 머리에 붕대를 감고있는 사람이 많다.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조선총독부 아오야마(靑山) 수용소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조선총독부 아오야마(靑山) 수용소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조선총독부 아오야마(靑山) 수용소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조선총독부 아오야마(靑山) 수용소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가와사키 다지마마치 수용소의 조선인(10월 4일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가와사키 다지마마치 수용소의 조선인(10월 4일 추정)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 하나의 례를 들기로 하자. 동경 가메도 경찰서에서는 일본의 혁명적 로동자 9명과 조선인을 비롯한 중국인 7백 70여명을 체포하여 수시노 기병 련대에 넘겨주었다. 그들은 수시노 련병장 혹은 아라까와 방수로에서 혁명가를 부르며 참살, 혹은 사살을 당하고 말았다. (강재언, '관동대진재와 재일동포의 대참변'중 [조선신보 1962년 0월 1일])

* 강재언은 이어 "어떠한 표현방법으로써도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야만 무쌍한 이와 같은 대참변은 로씨야에서의 10월혁명 이후 아세아 및 일본에서 급속히 일어난 혁명적 앙양을 꺾기 위하여 <동양의 한 구석에 자리잡은 일본은 식민지 혁명운동의 무대로 된 동양에서의 반동, 반혁명의 지주(支柱)이며 중국, 조선, 대만을 억압하고 쏘베트 로씨야에 대한 동방으로부터의 진격>(이찌가와 '일본공산당 소사')을 획책하는 일본 지배층의 반동정책에 의하여 조작된 결과이다."라고 쓰고 있다.

간토대지진의 참상

간다 스다쪼 부근의 참상(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간다 스다쪼 부근의 참상(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화물기차에 넘치는 피난민(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화물기차에 넘치는 피난민(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불에 휩싸인 경시청(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불에 휩싸인 경시청(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불타버린 간도 진보쪼 부근(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불타버린 간도 진보쪼 부근(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긴자 대로의 대참상(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긴자 대로의 대참상(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우에노 미츠자카야 부근의 참상(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우에노 미츠자카야 부근의 참상(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니혼바시 마루젠 부근의 참상(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니혼바시 마루젠 부근의 참상(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혼조 피복창 화재로 죽은 희생자의 유골(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혼조 피복창 화재로 죽은 희생자의 유골(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혼조 료코쿠 국기관 부근(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혼조 료코쿠 국기관 부근(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히비야 공원 교차로의 참상(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히비야 공원 교차로의 참상(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화재를 피해 우에노역 앞으로 몰려든 피난민(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화재를 피해 우에노역 앞으로 몰려든 피난민(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니혼바시 닌교쪼의 참상(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니혼바시 닌교쪼의 참상(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붕괴된 요코하마역(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붕괴된 요코하마역(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요코하마 시청 잔해(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요코하마 시청 잔해(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난킨마치의 참상(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난킨마치의 참상(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파괴된 혼쪼 거리(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파괴된 혼쪼 거리(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요코하마 역 철로(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요코하마 역 철로(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무너진 그랜드호텔(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무너진 그랜드호텔(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가나가와 현청의 참상(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가나가와 현청의 참상(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요코하마 후로쪼 공원의 균열(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요코하마 후로쪼 공원의 균열(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요코하마 야마시타쪼의 참상(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요코하마 야마시타쪼의 참상(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요코하마 야마시타쪼의 붕괴된 오리엔탈 호텔(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요코하마 야마시타쪼의 붕괴된 오리엔탈 호텔(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요코하마 마나토마치 하안의 대균열(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요코하마 마나토마치 하안의 대균열(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먹을 것을 찾아 방황하는 요코하마의 이재민들(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먹을 것을 찾아 방황하는 요코하마의 이재민들(일본 발행 엽서)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간토대지진 피해지도(붉은색이 피해지역)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간토대지진 피해지도(붉은색이 피해지역)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도쿄 인근 현 지역 지지피해 정황(9월 13일까지 확인)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도쿄 인근 현 지역 지지피해 정황(9월 13일까지 확인) [사진-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제공]

*귀한 사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동농기념사업회 강덕상자료센터 이규수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한 평생 시무(時務)의 역사가로서 갖은 어려움속에서도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공유하며 후대들에게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에 대한 연구 성과를 남긴 고 강덕상 선생님께  깊은 존경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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