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 특집 연재 순서


① 개괄-잊혀진 통한의 100년
② 기록으로 본 간토대지진과 조선인학살
③ 자료와 증언-일제는 조선인을 어떻게 학살했나
④ 北은 간토대학살을 어떻게 보고 있나
⑤ 강요된 망각과 시무(時務)의 역사연구
⑥ 특별기고-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재일 역사학자 고 강덕상 선생 [사진-이규수 제공] 
재일 역사학자 고 강덕상 선생 [사진-이규수 제공]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를 돌아보는 모든 이가 필연적으로 만날 수 밖에 없는 한 인물이 있다.

일본 히토츠바시 대학 교수를 거쳐 시가현립대학 명예교수를 지내면서 일본제국주의와 조선민족이 얽혀든 근대사를 필생의 업으로 삼아 탐구한 강덕상 선생이다.

그중에서도 1963년 강덕상 선생이 친구인 금병동 선생과 함께 펴낸 『현대사자료 (6)-관동대지진과 조선인』(미스즈서방)은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문제를 탐구하려는 이들에게는 대체 불가능한 결정적 자료의 보고이다.

일본이 극구 감추려 했으나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미국에 압수당한 공문서 상당수를 찾아내어 연구자들을 위한 기초자료로 공개했기 때문이다.

강덕상 선생의 제자인 이규수 전북대 연구교수는 "단순한 사료 영인본이 아니라 뚜렷한 관점을 가지고 해제한 독보적 자료집"이라고 설명한다.

2021년 6월 타계 직전 강덕상기록간행위원회가 일본에서 먼저 발행하고 그해 10월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시무의 역사학자 강덕상』(어문학사)에는 강 선생의 육성으로 평소 알고 지내던 일본 국회도서관 사서로부터 미국에서 돌아온 반환문서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GHQ'(General Headquarters,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압수해 간 자료를 접하게 된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2차세계대전 승리 후 미국은 GHQ를 통해 일본의 공문서를 압수해 갔으며, 뒷날 반환된 문서에는 육군 관련 자료는 많이 소각되어 없었지만 해군 자료는 상당히 남아 마이크로 필름으로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걸 열람하다 발견한 것이 관동대지진 『공문비고』(公文備考).

강 선생은 평소 아버지로부터 많이 들었던 '관동'(간토)대지진 자료임을 알아채고 대단한 자료라는 걸 직감했다. 이걸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면서 "이것은 나에게 '시무(時務)의 역사'다, 하나의 자료로 남겨야 한다는 걸 그때 다짐했다"고 술회했다.

일찍이 선배이자 스승인 재일 사학자 박경식 선생이 시무란 '시대의 의무', 즉 '지금 역사가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라는 깊은 뜻을 알려주었지만, 전적으로 동감은 하면서도 선뜻 갈피를 잡지못했던 마음이 그때 바로 섰다. 말 그대로 평생의 연구 주제를 잡은 것이다.

대출이나 복사가 되지 않는 상황이어서 음식점을 하며 가계를 책임지던 부인 문영자 여사까지 불러내 자료 필사에 매달렸다.

친구인 금병동이 간다(神田) 헌 책방에서 수집한 자료를 내놓았다. 두 사람은 2~3년간 관헌문서를 비롯해 간토대지진과 관련된 자료 등을 모아 함께 정리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것이 『현대사자료』. 1963년엔 미스즈서방에서 『현대사자료6-관동대지진과 조선인』이 출간됐다. 

간토대지진 발생 40주년이 되는 해였다.

현대사자료 6- 관통대지진과 조선인 [통일뉴스 자료사진]
현대사자료 6- 관통대지진과 조선인 [통일뉴스 자료사진]

1945년 일본의 패전과 조선의 해방 전까지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문제는 일절 논의된 바 없었다. 그러다 1960년대 박경식과 강덕상 등 재일 조선인 사학자들이 연구를 시작했으나 대중적 역사서는 50주기가 되는 1973년 소설가 요시무라 아키라가 쓴 『관동 대지진』이 최초였다.

그리고 2년이 흐른 1975년 강 선생의 『관동대지진』(공중신서)이 출간됐다.

요시무라는 도무지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간토학살의 원인을 ''대지진에 의한 사회적 혼란, 집단적 정신이상'이라고 분석했고,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국가 범죄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 사회의 일반적 인식은 '미증유의 사태에서 발생한 집단적 정신이상'이라는데 머물러 있다.

강 선생의 결론은 이와 달랐다.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에는 일본 국가권력, 군대와 자경단의 책임이 크다는 것. 조선인 폭동설 등 유언비어는 자연발생적으로 퍼진 것이 아니라 지진 당일부터 논의된 전시계엄령과 계엄사령부에 의해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유포되었으며 조선인 학살을 명령한 주체도 국가권력이었다는 것이다.

이성시 재일한인역사자료관장은 지난 18일 오후 『관동대지진 '학살부정'의 진상』(도서출판 삼인) 저자인 와타나베 노부유키 전 아시히신문 기자 초청 북토크에서 "(간토학살의 원인과 관련해 일본에서는 ) '일본인의 집단적 정신이상설'과 '제물이 된 조선인'이라는 두가지 유력한 가설이 50년 전에 나왔다. 그후로는 아무런 학술적 발전이 없었다. 사고정지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일본 사회의 변화도 별반 없었다"고 말했다.

한국사회에서는 불과 10년전부터 간토학살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생기는 수준이었고 매우 가슴 아프게 받아들이지만 일본에 있는 동포들의 문제이기 때문에 조금은 외부화되는 경향이나 서로 차이가 많은 학살의 기억을 되새기는데 대한 부담스러움 등이 은연중 남아있다.(조경희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부교수)

그래서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 그런 과정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기억의 사회화'가 좀 더 나아가야 하는 상황이다. 100년이 지났지만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시점이 아닐까?(위 조경희 부교수)라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다시 강덕상 선생의 회고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에 거주하던 230만명의 조선인은 불과 반년만에 65만명으로 줄어들만큼 일본 사회는 조선인에게는 살기 어려운 외국이었다. 

"제2의 간토대지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조심하라."

똑같이 당한 대지진의 참혹상 앞에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군경과 자경단에 의해 무차별한 죽임을 당해야 했던 트라우마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역사가 되어 한일관계의 심연에 자리잡고 있다.

일본의 진보적 학자들이 간토대지진 당시 소위 3대학살사건(일본인 사회주의자 학살, 중국인 학살, 조선인학살)을 동열에 놓고, 특히 일본인 사회주의자 학살에 대해서만 연구하는데 대해 강 선생은 단호히 반대한다.

본질에 있어 일본인 사회주의자의 학살은 일본내 계급문제이며, 당시 중국은 중화민국이라는 국가가 조사도 하고 그에 따른 배상과 유해 송환도 진행했지만 조선인 학살은 의도적으로 잊혀졌다는 것.

식민통치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 '불령선인'의 역습에 대한 두려움이 일본내에 집단적으로 공유된 상황에서 조선인 학살은 벌어진 일이며, 7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진 중국인 학살도 사실은 조선인으로 오인한 죽음인 경우가 있었다는 점에서 한데 섞어서 말할 일이 아니라 구별해서 분명히 '조선인학살'을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왜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에 대한 집단적 학살, 제노사이드가 발생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어떨까?

"지진의 위험성으로부터 시작해서 차별, 편견, 유언비어를 내보내고 학살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침략과 저항이 낳은 민족대결의 산물이다. 이것이 내 결론이다."

지난 2013년 6월 20일 서울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교육원에서 열린 간토학습회에서 발표에 나선 강덕상 선생. [자료사진 - 통일뉴스]
지난 2013년 6월 20일 서울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교육원에서 열린 간토학습회에서 발표에 나선 강덕상 선생. [자료사진 - 통일뉴스]

지난 2013년 6월 20일 한국을 방문해 '1923한일재일시민연대'가 주최한 간토학습회에서 강 선생이 강조한 결론이다. 

2013년 발표한 논문 「한일관계에서 본 관동대지진」(『관동대지진과 조선인학살』 동북아역사재단)에서는 "지진에서 어떻게 계엄령이 나왔는가를 생각할 때,...30년에 걸친 전사(前史), 즉 갑오농민군과의 전쟁, 그리고 러일전쟁 후 일본의 강점에 반대해서 전 국토를 피로 물들게 한 7년에 걸친 의병전쟁을 포함한 '적대시' 사상의 형성을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간토학살의 본질인 민족 적대시대결 관계는 1894년 청일전쟁부터 1919년 3.1운동을 거쳐 1923년 간토학살로 나타났으며, 식민지통치기간 내내 이어지다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1894년 청일전쟁은 갑오(동학)농민혁명을 압살하기 위해 출병한 청일 양군의 무력충돌로 발생한 일이다. 갑오농민군에게는 반혁명적 내정간섭과 침략이었다. 갑오농민군과 일본군의 대전쟁, 즉 죽창을 든 농민군을 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이 대살륙한 '제1차 한일전쟁'이라고 풀이했다.

10년이 지난 1904년 벌어진  러일전쟁 역시 1906년부터 1911년사이 국권 회복을 위해 무장투쟁에 나선 의병들이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한 민족 참극이었다.

1910년 조선총독부가 생겼고 총독은 현역 육해군대장이 아니면 될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총독정치는 군사적 대응을 필수적으로 동반하는 헌병통치였다.

비폭력 만세운동이라는 측면이 부각된 1919년 3.1운동은 일본의 쌀 폭동과 중국의 5.4운동과 달리 엄청난 사망자가 나왔다. 일본의 조선지배에는 '적시' 정책과 전쟁상태라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자료가 있다.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 부르는 간도참변이다. 간토학살 3년전 일본군은 만주를 침략해 간도에 거주하며 활발한 독립투쟁을 벌이던 조선인들을 최소 3,469명 이상 무차별 학살했다.

1920년 10월 29일 일본군 수백명이 연길현 세린하 방면에 이르러 조선인 가옥 수백호를 불태우고 주민 다수를 총살했다. 다음 날 오전에는 약 5km 떨어진 청구천 부근에서 조선인 부락 70여 호가 불탔고 500여발의 총탄을 발사하며 마을을 포위 공격했다. 거주 조선인 300여명 중 간신히 달아난 자는 불과 4~5명이었다.

일본군 작전의 특징은 독립군과 일반 주민을 구별하지 않는 것이다. 조선 그 자체가 불령한 적이었던 것이다. 일본이 정한 질서를 따르지 않는 모든 것들은 즉시 처형한다는 것이 그들의 원칙이었다.

"가혹한 지배를 하는 일본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이는 일본이라는 나라의 나약함의 표현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다." 강 선생이 도달한 또 다른 결론이다.

이규수 교수는 『시무의 역사학자 강덕상』 옮긴이의 말에서 강 선생의 요지를 이렇게 정리했다.

'일본의 길모퉁이에는 반드시 조선이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조선사는 일본사의 왜곡을 바로잡는 거울이다'로 축약되는 연구의 시작.

강 선생은 '일본인이 귀를 막고 눈을 감은 역사! 가만히 두고 언급하지 않으려 한 숨겨진 역사!'의 규명이 재일사학의 본령이라고 후학들에게 강조했다.

결론은, "역시 민족을 되찾는다는 것! 이것은 사상이 아니다. 남북으로 나누어지게 한 것은 좌와 우이다. 이것은 사상이다. 그 뒤편에는 공통의 민족체험이 있다. 이것을 회복한다는 것! 이게 가장 중요하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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