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

 

앞선 글에서 밝혔듯, 1990년 11월의 재수색은 목적과 원칙에 문제가 있었고, 11월 16일 성과 없이 끝난다. 수색 종료를 알려온 문서에는 다음 내용도 있다. “주재국[버마] 당국이 최근 TAVOY 인근 해역에서 비행기 파편 일부를 수거, 보관하고 있다고 알려옴에 따라, 11.20(화)” 수색단으로 와 있던 대한항공 안전담당 책임자 “김상광 상무” 등이 물체를 살펴봤다(2016070044, 237쪽). 이는 같은 해 9월 27일 “미얀마 수산청 소속” 어선이 발견한 것이었고, “파편 3점으로 바다의 염분의 영향등으로 많이 부식되어 있었으며, KAL기 잔해임을 식별할 표식등은” 없었다고 한다. 왜 이 소식이 2개월이 지나서야, 하필이면 그때 전해졌는지는 문서상 알 수 없다.

아무튼 대한항공에 따르면 “비행기 파편임에 틀림이 없으며, 발견지점이 KAL858기 추락 추정 지점임을 감안, KAL 파편으로 일단추정”되어 인수받고자 했다. 이들이 KAL기 것으로 확인됐는지는 문서에 나와 있지 않다(혹시 내년에 공개될 자료에는 내용이 있을 수도 있다).

‘처음부터 의심스러운 사건’ 대 ‘김현희라는 물증’

위 수색의 계기가 된 것은, 1990년에 발견된 올림픽 표식이 새겨진 물체가 포함된 잔해다. 이와 관련된 보도가 이번 자료에 첨부되어 있는데, <국민일보>의 경우 “日[일] TV의 고약한 報道[보도]태도”라는 제목의 일본 특파원 글이 실렸다. 이에 따르면, 3월 13일 TV아사히의 “뉴스스테이션”이라는 방송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왔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 있어요. 잔해발견 소식이 전해져도 한국의 수사관이 현지로 달려가지 않았거든요. 우리 특파원은 재빨리 쫓아갔는데 … 처음부터 이 사건은 의심스러운 점이 적잖았다”(41쪽). 특파원은 “「金賢姬[김현희]」라는 살아있는 물증은 제쳐둔채 이런저런 넘겨짚기를 하고 있는 판국이었다”고 적었다.

외무부는 빠르게 대응했다. 이틀 뒤 정형수 일본 주재 공사는 TV아사히의 츠바키 사다요시 보도국장을 방문, “편견과 독단적인 발언을 한데 대해 강한 불쾌감과 함께 엄중 항의하고 정부의 입장을 설명했음”(44쪽). 그러자 보도국장은 “비록 악의는 없었다 하더라도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을 한데 대해 유감을 표시했으며 향후 이런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문제가 되었던 잔해를 실종자 가족들이 확인하러 태국에 갔다. 방문단은 1진과 2진으로 구성되었는데, 2박 3일 일정으로 5월 9일과 11일 각각 도착한다. 정확한 경위는 모르겠으나, 2일차는 하루 종일 “관광”으로 짜인 것이 특이하다(120쪽).

아울러 가족들은 태국으로 떠나기 전에는 한국 대사를 “면담하기를 희망한다” 했지만(126쪽), 정주년 대사에 따르면 실제 도착해서 “면담이나 당관 방문을 요청하여” 오지는 않았다(127쪽). 그리고 11월 수색 당시 “인양작업팀과 동행했던” 가족 2명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귀국희망에 따라” 작업이 진행되던 중 돌아왔다(236쪽).

수색에 “성의를 다해 주십시오”

1988년 ‘대한항공 858기 희생자 유족회’ 탄원서의 첫째 요구 사항은, 수색에 성의를 다해 주라는 내용이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1988년 ‘대한항공 858기 희생자 유족회’ 탄원서의 첫째 요구 사항은, 수색에 성의를 다해 주라는 내용이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어쨌든 가족들은 수색을 꾸준히 요구했었다. 1988년 6월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에는 네 가지 요구가 있었고, 시작은 수색 문제다. “첫째. 김현희의 말대로 폭파된 것이 사실이라면 정부는 KAL858기 잔해및 희생자들의 시신을 찾는일에 성의를 다해 주십시오”(20쪽).

같은 해 10월에 쓰인 호소문은 크게 일곱 항목으로 이루어졌고, 첫 번째 역시 수색 관련 내용이 포함됐다. “정부 고위당국자와 대한항공 사측은 유족들의 동행을 거부한채 사고 예상지역인 태국과 버마지역에 기체수색을 한다는 핑계로 근2주일이 가까워도 돌아오지 않아 유족들은 현지에서 같이 수색할 것을 강요하였으나, 역시 거절당하였으며”(13쪽).

그해 12월 교통부 장관에게 보낸 탄원서도 수색 문제로 시작한다. “1. 정부는 시신과 유품 수색과 유족에대한 특별법 제정보상하라. … 1년이 지자[나]도록 각계 각층으로부터 많은 의문점을 지적하였으나, 그에 대한 진상 규명과 사체와 유품 수색에 대하여 뚜렷한 해답이 없고”(10쪽).

주목되는 점은, 가족들이 수색 문제를 김현희 부분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위의 탄원서로 돌아가보자. "수색에 대하여 뚜렷한 해답이 없고 그 엄청난 비극의 주인공 김현희의 신병 처리문제에만 급급하고 있다함은 우리 유족들은 분노를 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호소문도 마찬가지다. “수색 … 거절당하였으며, 그러하던차 김현희의 자백으로 모든 것이 일시에 해결된 양”(13쪽). 이미 살펴봤지만, 또 다른 탄원서도 비슷하다. “첫째. 김현희의 말대로 폭파된 것이 사실이라면 … 잔해및 희생자들의 시신을 찾는일에 성의를 다해 주십시오”(20쪽).

그러면 이 김현희는 어떻게 되었는가? 1988년 1월 23일 세계국제법협회 한국지부는 발표회를 가졌다. 김찬규 경희대 교수도 발표문에서 지적했지만, 국제협약에 따르면 항공기 폭파범은 무거운 형벌을 받아야 했다. 다만 국내법에 따르면 형사소송법의 ‘기소편의주의’와 국가보안법의 ‘공소보류제도’를 바탕으로 범인은 기소되지 않을 수 있었다.

발표자의 판단은 다음과 같다. “[원문은 한자] 115명의 고귀한 목숨을 앗아가고 세계를 놀라게 한 국제테러리스트에게 이 제도를 적용하는 것이라면 적절한 검찰권의 발동이 될것인지는 의문”(2017060009, 11쪽). 기본적으로 사법 처리를 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얘기다.

‘국제협약’ 대 ‘대공심리전’

이 문제는 일찍부터 사면으로 방향이 정해졌다. 1988년 6월 10일 <동아일보> 기사가 첨부되어 있는데, 정부는 “88서울올림픽이 끝난뒤인 오는 10월 불구속기소, 공개재판에 회부해 정책적 차원에서 사면동의 방법으로 구명(救命)하기로 신병처리방침을 정한것으로” 보도된다(19쪽).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 사면이 정해진 것이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얻은 호주 비밀문서에 따르면, 정부는 수사발표가 있기도 전인 1988년 1월 12일 기준, 사면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었다(박강성주, 『눈 오는 날의 무지개: 김현희-KAL858기 사건과 비밀문서』, 133∼134쪽).

이런 맥락에서 1988년 11월 10일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에서 있었던 김현희 “처벌문제논의를 위한 관계부처회의 결과”가 주목된다. 안기부는 “자백한 북한의 사주 사실 번복 가능성, 범인의 협조자세 유지, 범인의 대공심리전 활용”을 이유로 “가급적 경미한 형량”을 주장했다(2017060009, 29쪽).

이에 비해 외무부 등은 “국제협약상 의무, ICAO등 관련 국제기구의 관심, 유가족의 감정” 등을 근거로 “법에 의한 형량”을 주장한다. 회의에 참석했던 외무부 국제기구조약국장에 따르면, “구속 송치가 국내외적으로 타당,관용을 베푸는 것보다는 법대로 처벌하여 국제테러에 대한 국제협약상 의무를 준수하고 국제 추세에 동참하는 아국의 이미지를 대내외에 부각”할 필요가 있었다.

“당연히 사형이 집행되어져야”

김현희는 바레인에서 붙잡혔다. 그곳 외무부 관리는 개인 의견이라고 전제한 뒤, 김현희 사형은 당연히 집행되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김현희는 바레인에서 붙잡혔다. 그곳 외무부 관리는 개인 의견이라고 전제한 뒤, 김현희 사형은 당연히 집행되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1990년 3월 27일, 김현희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다. 하지만 첨부돼 있는 <조선일보>의 기사 제목이 말해주듯, 사면 또한 확정되어 있었다. “내달중 「자유의 몸」 될듯”(49쪽). 국제협약에 따라 처벌을 주장했던 외무부는 긴장한다.

바레인은 체포된 김현희를 한국에 넘겼던 나라다. 사형이 확정되고 며칠 뒤, 그곳 한국 대사가 전한 말이다. “[바레인] 외무부 정무국장은 사견임을 전제하고 동 사건으로 인한 희생규모 등에 비추어 김현희는 당연히 사형이 집행되어져야 하는것이 아닌가고 반문한적이 있었는바, … 동 견해는 주재국 정부내의 본건 관련 일반적인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는것으로 보이므로, 동 사면 조치배경에 대해 상당히 설득력있는 구체적인 설명자료가필요한 것으로 사료됨”(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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